해변에서 (Am Stra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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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루이제 카슈니츠(Marie Luise Kaschnitz, 1901-1974)의 시

해변에서 (Am Strande)
작가마리 루이제 카슈니츠(Marie Luise Kaschnitz)
초판 발행1947
장르


작품소개

마리 루이제 카슈니츠가 1934년에 쓴 시로 그 이듬해 <무상>(Vergänglichkeit)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창작 시기를 고려해 볼 때, 카슈니츠의 초기 시에 해당하는 이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인 1947년에 출간된 작가의 첫 시집 <시집>에 수록되게 된다. <해변에서>는 각각 4행으로 짜여진 3개의 연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든 연에서 동일한 각운 형식, 즉 교차운(abab)이 되풀이되고 있다. 강약격(Trochäus)으로 이루어진 개별 시행은 5개의 강음을 갖는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해변에서>는 분명하고도 일정한 리듬 구조로 되어 있다고 하겠다. 내용상으로는 사랑과 무상, 이 두 가지를 <해변에서>를 가로지르는 핵심 주제라 할 수 있다. 잇달아 밀려오는 파도에 1인칭 서정적 자아가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는 상대방이 해변의 모래 위에 그린 그림, 더 나아가 그의 발자국이 계속해서 지워진다. 이처럼 사랑과 무상이라는 두 주제의 내밀한 결합은 거부가 불가능한 자연의 힘 앞에서 어찌할 수 없음을 느껴야만 하는 1인칭 서정적 자아의 허무한 사랑을 통해 체념적으로 전달된다. ‘허무함’(Vanitas)의 모티프가 자주 등장하는 바로크 문학의 전통에 닿아 있는 <해변에서>는 국내에선 전혜린에 의해 처음으로 번역되어 <물결치는 물 가에서>란 제목과 함께 <世界戰後問題詩集>에 수록됐다(신구문화사).


초판 정보

Kaschnitz, Marie Luise(1947): Am Strande. In: Gedichte. Hamburg: Claassen & Goverts, 85.


번역서지 목록

번호 개별작품제목 번역서명 총서명 원저자명 번역자명 발행연도 출판사 작품수록 페이지 저본 번역유형 작품 번역유형 비고
물결치는 물 가에서 世界戰後問題詩集 世界戰後問題詩集 9 카슈니츠 전혜린 1962 新丘文化社 184 편역 완역
해변에서 시집 : 영국·미국·독일·프랑스 편 오늘의 世界文學 11 마리 루이제 카슈니츠 구기성 1970 民衆書館 199 편역 완역
해변에서 20世紀 獨逸詩. 2 探求新書 178 마리 루이제 카쉬니츠 이동승 1981 探求堂 80-81 편역 완역
해변에서 어린 시절의 뜰이여 : 사랑의 명시모음 : beautiful land 카시니쯔 김선영 1985 세일사 24 편역 완역


번역비평

1. 번역 현황 및 개관

1920년대 말부터 작품활동을 시작한 마리 루이제 카슈니츠는 시, 소설, 방송극, 수필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왕성한 집필 활동을 펼쳤던 작가들 가운데 하나인데, 종전 이전의 이력을 고려해 본다면, 광의적 차원에서 이른바 ‘내부(또는 내적) 망명’(innere Emigration)의 작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문학적 지향성이 서로 뚜렷하게 구분되는 창작 시기별로 산출된, 다채로운 내용과 형식의 시들이 담겨 있는 시집을 카슈니츠는 여러 권 세상에 내놓았다. 그렇지만 이 20세기의 중요한 독일어 작가는 시인으로서는 국내에서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며, 당연하게도 시작품 번역 또한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카슈니츠의 시집은 단 한 권도 완역된 적이 없고, 그녀가 지은 다수의 시 중 극히 일부만이 (때로는 반복해서) 우리말로 옮겨져 여러 시 모음집에 수록돼 있다.

본 번역비평에서 집중적으로 다룰 카슈니츠의 <해변에서>(Am Strande, 1934)는 나치 정권하의 독일에서 발표된 작가의 초기 시에 해당한다. 훗날, 이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온 그녀의 첫 번째 시집 <시집>(Gedichte, 1947)에 실리게 된다. 지금껏 산발적으로 시도된 <해변에서>의 한국어 번역출간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이 시는 전혜린이 처음으로 번역하여 <물결치는 물 가에서>란 제목으로 1962년 신구문화사가 펴낸 <세계전후문제시집>에 수록됐다. 그 후에 다소간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구기성, 이동승, 김선영 등에 의해 번역되어 <시집>(민중서관, 1970), <20세기 독일시. 2>(탐구당, 1981), <어린 시절의 뜰이여>(세일사, 1985) 등의 각종 시 모음집을 통해 소개됐다. 이 외에도 역자를 특정하기 곤란한 <해변에서>의 우리말 번역이 <산 너머 저쪽>(청연사, 1966), <영원한 서양의 명시>(한림출판사, 1973), <영원히 빛나는 별이여>(혜원출판사, 1980), <영원한 세계의 명시>(혜원출판사, 1981) 등의 시 모음집에 실려 있다. 요컨대, 총 8종의 시 모음집에 번역 수록된 카슈니츠의 <해변에서>는 작가의 시작품 가운데 국내 독자를 가장 많이, 자주 만난 시작품이라 할 수 있다.


2. 개별 번역 비평

Am Strande

Heute sah ich wieder dich am Strand
Schaum der Wellen dir zu Füßen trieb
Mit dem Finger grubst du in den Sand
Zeichen ein, von denen keines blieb.

Ganz versunken warst du in dein Spiel
Mit der ewigen Vergänglichkeit
Welle kam und Stern und Kreis zerfiel
Welle ging und du warst neu bereit.

Lachend hast du dich zu mir gewandt
Ahntest nicht den Schmerz, den ich erfuhr:
Denn die schönste Welle zog zum Strand
Und sie löschte deiner Füße Spur.(67)[1]

창작 시기상 카슈니츠의 초기 시에 속하는 <해변에서>의 원제목은 그 장소와 관련된 함축적 의미를 대변하는 <무상>(Vergänglichkeit)이다. 전체 3연으로 구성된 이 작품에서 각 연은 4행으로 짜여 있고 동일한 각운 형식, 즉 교차운(abab)을 사용한다. 개별 시행의 경우 강약격(Trochäus)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5개의 강음을 갖는다. 형식적인 면에서 볼 때 <해변에서>는 분명하고도 일정한 리듬 구조를 지니고 있다 하겠다. 내용적 측면에서 <해변에서>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사랑과 무상이다. 이 둘은 거부하는 것이 불가능한 자연의 위력 앞에서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한 인간의 허무한 사랑을 통해 체념적으로 전달된다. 사랑이라는 주제와 무상이라는 주제의 내밀한 결합은 <해변에서>가 바로크 문학의 전통에 닿아 있음을 환기시킨다. 다음에 이어질 개별 번역 비평에서는 이와 같은 형식적·내용적 특징들을 기본적으로 염두에 두고자 한다.


1) 전혜린 역의 <물결치는 물 가에서>(1962)

물결치는 물 가에서

오늘도 나는 물결치는 물 가에서 당신을 바라보고 있었읍니다.
물 가에 밀려온 흰 거품이 당신의 발까지 다가온다.
당신은 손가락으로 모래 위에 여러가지 標識를 그리신다.
그러나 당신이 그리신 標識는 하나도 남지 않는다.

당신은 그 장난에 참으로 딴 생각을 잃고 계시다.
어디까지 가도 끝이 없는 永劫無常과 희롱하면서.
파도가 밀려오면 그리셨던 별이며, 동그래미가 모두 사라진다.
파도가 밀려가면 당신은 또 똑 같은 일을 하신다.

당신은 웃으시며 나의 쪽을 향해 보시었지만,
나의 가슴에 솟고 있던 그 슬픔은 모르고 계시다.
그럴 것이 제일 아름다운 파도가 물 가로 밀려와서
당신 발의 발자국을 꺼져 버리게 하였으니까.(전혜린, 184)

카슈니츠의 <해변에서>는 국내에선 전혜린에 의해 처음 번역돼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 10개국 주요 전후 시인들의 작품을 선별해 모아놓은 <세계전후문제시집>에 수록되었다. 번역 저본에 관한 정보는 부재하며, 당시의 관행에 따라 세로쓰기 및 마침표와 쉼표에 해당하는 고리점(。)과 모점(、)이 사용되고 있다. 전혜린의 번역은 약간의 한자를 빼면 대부분 한글로 표기됐다. 번역과 관련하여 무엇보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번역된 제목이다. 카슈니츠 시의 독일어 제목은 <Am Strande>이다. 다른 역자들은 모두 <해변에서>라고 가감 없이 직역했는데, 전혜린은 “물결치는”을 덧붙여 원제를 <물결치는 물 가에서>로 번역했다. “파도” 또는 “물결”로 옮길 수 있는 독일어 단어 “Welle”는 카슈니츠의 시에서 가장 핵심적인 주제인 무상을 상징하는 자연 현상이다. 전혜린의 번역 제목은 작품의 주제를 은연중에 내비치고자 하는 욕구를 지닌 것처럼 보인다. 역자로서 전혜린은 때때로 원문에 자유로운 개입을 개의치 않는다.

in dein Spiel / Mit der ewigen Vergänglichkeit(67)
어디까지 가도 끝이 없는 永劫無常과 희롱하면서.(전혜린, 184)
영원한 무상함과의 장난에(구기성, 199)
영원한 無常과의 유희 속에(이동승, 80)


Ahntest nicht den Schmerz, den ich erfuhr(67)
나의 가슴에 솟고 있던 그 슬픔은 모르고 계시다.(전혜린, 184)
내가 겪은 고통을 짐작하진 않았다.(구기성, 199)
저가 느낀 고통은 짐작도 못하셨으니(이동승, 80)

전혜린의 번역에 있어 우선 ‘영원한 시간’을 뜻하는 “永劫”은 원문의 “ewig[]”와 대응한다. 역자는 여기에 “어디까지 가도 끝이 없는”을 첨언함으로써 “永劫”의 의미를 강조한다. 동시에 “永劫”과 “無常”의 결합, 즉 계속해서 밀려오는 파도에 해변의 모래 위에 그린 그림이 부단히 지워져 가는 상황에 대한 추상적 표현을 직관화하려 한다. 다음으로 동사 “erfuhr”의 원형인 ‘erfahren’은 기본적으로 ‘경험하다’의 뜻을 갖는다. 이 말이 번역되는 과정에서 전혜린은 일종의 문학적 변용을 꾀한다. 단순히 ‘경험하다’의 의미를 지닌 우리말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솟고 있던”으로 번역해 1인칭 서정적 자아가 느끼고 있는 감정의 상태를 더 생생하게 표현한다. 요컨대, 전혜린이 역자로서 가지고 있는 ‘파토스’(Pathos)가 시적 화자가 지닌 정조와 조응한다. 이에 비해 구기성과 이동승은 가능한 한 원문에 충실한 의미를 전달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3연 마지막 행의 “löschte”를 “꺼져 버리게 하였으니까”로 옮긴 전혜린의 번역은 일견 오역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동사 원형 ‘löschen’은 ‘(불·초·전등 등을) 끄다’라는 의미도 있기는 하나, 여기에선 파도가 밀려와 1인칭 서정적 자아가 사랑하는 사람의 발자국을 없애 버리는 것이기에 ‘지우다’의 뜻을 지닌 표현으로 번역하는 것이 원문의 의미에 맞다 하겠다. 그렇지만 전혜린의 번역은 역자가 의도했는지와 상관없이 두 사람 관계의 단절, 아니 소멸을 극적으로 나타내는 효과를 가진다고도 말할 수 있다.


2) 구기성 역의 <해변에서>(1970)

해변에서

오늘 다시 해변에서 너를 보았다
파도의 거품이 너의 발로 몰아치고
너는 손가락으로 모래 속에 표적들을 새긴다
하나도 남지 않는 표적을.

영원한 무상함과의 장난에
너는 온통 빠져 있었다
파도가 밀려 오고 별과 궤도가 무너져 버리고
파도가 가 버리면 너는 새로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웃으면서 너는 내게 몸을 돌렸고
내가 겪은 고통을 짐작하진 않았다.
아름다운 파도가 해변으로 밀려 와서
너의 발자국을 없애 버렸기.(구기성, 199)

구기성이 번역한 <해변에서>는 다른 독일어권 작가들 그리고 영국, 미국, 프랑스 등의 시와 더불어 시 모음집 <시집>에 실려 있다. 저본은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따로 작품의 독일어 원문이 수록돼 있다. 전혜린의 초역과 마찬가지로 구기성의 번역 역시 세로쓰기와 고리점을 사용하고 있다. 2연 1행과 2행의 번역 순서를 바꾼 것을 제외하면 구기성은 카슈니츠의 시어를 매우 충실하게 우리말로 옮겼는데, 이러한 번역자의 자세는 구두법에도 적용되었다. 원문은 각 연 마지막 행 끝에만 마침표가 찍혀 있다. 이로써 독자는 <해변에서>의 한 연을 읽다 보면 시의 핵심 제재인 파도의 부단한 움직임처럼 시어가 잇달아 밀려오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구기성은 거의 모든 시행을 고리점으로 종결한 전혜린과는 달리 카슈니츠의 시적 표현 수단을 그대로 살리고 있다.

카슈니츠의 <해변에서>에서는 등장인물로 두 사람, 즉 “ich”와 “du”가 나온다. 1인칭 서정적 자아가 인간적 관계망을 형성하고자 하는 상대방인 이른바 ‘das lyrische Du’의 경우 전혜린, 이동승, 김선영 등이 모두 “당신”으로 번역하는데 비해, 구기성은 “너”로 옮기고 있다. 시의 핵심 주제에 속하는 사랑을 고찰함에 있어 그것을 꼭 연인에 대한 사랑으로 단정 지을 이유는 없다. 카슈니츠는 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작품 속에 잘 녹여 넣는 작가로 유명하다. 이와 함께 “놀이”가 주요 활동으로 그려지는 <해변에서>의 내용을 고려해 볼 때 시에서 “du”는 그녀의 딸을 염두에 둔 것일 수도 있다. 구기성의 번역은 해석의 다양성과 관련하여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한다고 하겠다. 구기성은 2연 3행에 나오는 “Kreis”를 “궤도”로 번역하고 있는데, 분명하고도 흥미로운 오역으로 보인다(전혜린은 “동그래미”, 김선영은 “동그라미”로 옮겼다). 아마도 “별”을 뜻하는 앞 단어 “Stern”의 번역에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도 같다. 비록 오역의 느낌이 강하지만 원문과 번역을 같이 읽을 때 예상치 못한 상상적 사고의 기회를 마련해 준다고 할 수 있다.


3) 이동승 역의 <해변에서>(1981)

해변에서

오늘 또다시 저는 당신을 해변에서 보았읍니다
파도의 거품은 당신의 발로 밀려왔고
당신은 손가락으로 모래 속에
그림을 새기셨으나, 남은 것은 하나도 없었읍니다.

영원한 無常과의 유희 속에
당신은 완전히 빠져 계셨고
파도와 별이 오자 파문은 헤어졌으며
파도가 가자 당신은 새로이 채비를 했읍니다.

웃으시며 당신은 저를 향하셨으나
저가 느낀 고통은 짐작도 못하셨으니:
가장 아름다운 파도가 해변으로 밀려
당신의 발자국을 씻어간 까닭입니다.(이동승, 80)

이동승의 <해변에서> 번역은 탐구당에서 출판한 독일시의 대표적인 작품이 총망라되어 있는 시집 시리즈 마지막 권인 <20세기 독일시. 2>에 수록돼 있다. 저본은 나와 있지 않고, 우리말 번역 바로 다음에 독일어 원문을 볼 수 있다. 이동승의 경우 구기성과 마찬가지로 원문 형식 그리고 시어에 매우 충실하게 번역 작업을 진행한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빨리 들어오는 오역이 있는데, 다름 아닌 2연 3행의 번역이다.

Welle kam und Stern und Kreis zerfiel(67)
파도와 별이 오자 파문은 헤어졌으며(이동승, 80)
파도가 밀려오면 그리셨던 별이며, 동그래미가 모두 사라진다.(전혜린, 184)

명백한 오역으로 다가오는 이동승의 번역은 어떤 면에서는 시작품을 번역하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를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역자 자신이 머리말에서 “더우기 현금의 시는 그 애매성과 난삽성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번역을 거부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토로하고 있다. 비교적 짧은 텍스트인 시에 있어 해석의 난이도를 떠나 한두 개의 단어나 짧은 구문을 매우 불완전하게 번역하면 아주 높은 가능성으로 전체의 이해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에 따라 번역 행위와 관련하여 특히 시언어에 가능한 한 신중한 접근이 요청된다.


4) 김선영 역의 <해변에서>(1985)

해변에서

오늘도 나는 해변에서 당신을 바라보고 있었지요.
기슭에 물결치는 하얀 물거품이 당신 발목까지 다가옵니다.
당신은 손가락으로 모래를 파고 여러가지 그림을 그립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린 그림은 하나도 남지를 않는군요.

당신은 이 장난에 여념이 없었지요.
어디까지 가도 끝없는 영원과 노닐면서
물결이 밀려오면 그리신 별이랑 동그라미는 지워집니다.
물결이 밀려가면 당신은 같은 일을 곧 되풀이합니다.

당신은 웃으면서 나를 바라보고 계셨지만
내 가슴에 솟구치는 슬픔은 모르십니다.
가장 아름다운 물결이 해변에 밀려오면
당신 발자국을 지워 버리는군요.(김선영, 24)

이 역시(譯詩)가 수록된 <어린 시절의 뜰이여>는 사랑을 주제로 한 여러 나라의 유명한 시를 모아놓은 책이다. 역자는 단독 역자로서 이름이 표기되어 있으나, 실제로 번역 작업을 진행했는지는 대단히 회의적이다. 해당 시 모음집에는 독일 이외에도 그리스, 미국, 에스파냐, 영국, 이탈리아, 칠레, 프랑스 등의 시들이 번역되어 실려 있는데, 역자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찾아볼 수 없다. <해변에서>의 경우 함께 수록된 여타 다른 역시와 마찬가지로 저본이 제시되어 있지 않다. 김선영의 번역은 매우 높은 확률로 전혜린의 초역을 상세하게 참조한 것처럼 보인다.

어디까지 가도 끝없는 영원과 노닐면서(김선영, 24)
어디까지 가도 끝이 없는 永劫無常과 희롱하면서.(전혜린, 184)
내 가슴에 솟구치는 슬픔은 모르십니다.(김선영, 24)
나의 가슴에 솟고 있던 그 슬픔은 모르고 계시다.(전혜린, 184)

전혜린의 <해변에서> 번역 중 “標識”, “참으로 딴 생각을 잃고 계시다”, “꺼져 버리게 하였으니까” 등이 김선영의 역시에서는 “그림”, “여념이 없었지요”, “지워 버리는군요” 등으로 바뀌어 나타난다.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후자는 우리말 번역이 좀 더 무난하고 부드럽게 읽히기를 바랐던 듯싶다.


3. 평가와 전망

카슈니츠의 시는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선 독자나 연구자를 불문하고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초기 시 <해변에서>는 그동안 여러 번 번역자의 부름을 받았다. 어떤 번역자는 매우 적극적으로 원문에 개입했지만, 다른 번역자들은 원문에 충실한 번역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 <해변에서>의 번역은 외국 시를 우리말로 옮기는 것이 지니는 중대한 문제점을 환기시키기도 한다. 시 모음집이 무분별하게 양산되는 가운데 명확한 언급 없이 기존의 번역을 약간만 손보는 경우도 자주 있다. 이는 번역의 품질뿐만 아니라 번역자의 윤리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고 하겠다. 낯선 땅과도 같은 카슈니츠의 시가 좋은 번역을 통해 앞으로 빈번하게 국내 시 애호가들과 만남을 가지기를 희망해본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전혜린(1962): 물결치는 물 가에서. 신구문화사.

구기성(1970): 해변에서. 민중서관.

이동승(1981): 해변에서. 탐구당.

김선영(1985): 해변에서. 세일사.

유종윤

바깥 링크

  1. 독일어 원문은 다음 판본을 이용한다. Kaschnitz, Marie Luise(1985): Am Strande. In: Gesammelte Werke in sieben Bänden. Vol. 5. Frankfurt a. M.: Insel Verlag. 원문 인용 시 본문에 쪽수를 표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