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꽃 (Aste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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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트프리트 벤(Gottfried Benn, 1886-1956)의 시

과꽃 (Astern)
작가고트프리트 벤(Gottfried Benn)
초판 발행1936
장르


작품소개

고트프리트 벤이 쓴 시로 1936년 1월 잡지 <시. 문예지>(Das Gedicht. Blätter für die Dichtung)에 실렸다. 총 16행으로 4행-4행-4행-4행의 4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교차운 abab을 갖고 있다. 명사들을 병렬하면서 서술어를 생략하는 것이 특징적이며 1,2,3연의 첫 행과 둘째 행에는 술어가 없다. 제목인 과꽃은 시의 첫 어휘이기도 하다. 과꽃은 여름부터 가을까지 피는 꽃으로, 이 시에서는 '생성'의 시간이 지속되면서 그 끝이 확연한 지점을 상징한다. 과꽃이 가리키는 남은 여름날들은 불꽃이 사그라들고 열기가 남은 상태이다. 시적 화자는 이 상태를 신들이 얼마간 천칭의 균형을 맞추는 거라고 해석한다. 2연에서는 황금빛으로 찬란했던 여름에 속하는 하늘, 광명, 만개한 꽃이 소환된다. 이로써 여름이 끝나는 징조("죽어가는 날개")와 함께 지난 여름날의 "오래된 생성"이 공존한다. 3연에서 여름은 의인화되어 일련의 행동을 하는데, "멈췄고 기대어섰고 응시하였다"로 과거형이어서 한여름의 찬연한 생성은 이제 한물가고 있다. 여름이 응시하는 대상은 따뜻한 곳을 향하여 떠나는 제비들이다. 2,3,4연은 매번 "다시 한번"으로 시작한다. 이 어휘는 어떤 과정의 돌이킬수 없는 끝을 가리키면서 '아직도'와 '이미'의 경계를 저울질하는 시의 내용을 절묘하게 담아낸다. 4연은 "다시한번 추측하기"로 시작하여 '천칭의 균형'이 겨울로 기우는 것을 지연하고 '아직도'를 기대하는 멜랑콜리한 정조가 나타난다. 하지만 이어지는 시행들은 제비들이 여정을 떠났다는 '이미 확실한 사실'을 알려준다. 벤은 1935년부터 하노버에서 군의관으로 있으면서 그해 여름과 초가을에 몇 편의 시를 썼는데 그 중 <다시 한번(Noch einmal)> 과 <여름이 끝나는 날(Tag, der den Sommer endet)>이 이 시 <과꽃>과 비슷한 주제를 형상화한다. 이 시가 처음 발표되었을 때는 나치가 지배한 시대적 상황때문에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벤은 나치정권이 몰락한 후 1948년에 시집 <정역학적인 시들 (Statische Gedichte)>에 이 시를 재수록했고 이후 시인의 대표적인 '자연시'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국내 초역은 1971년 이동승의 번역으로 <20세기시선>에 실렸다.(을유문화사)


초판 정보

Benn, Gottfried(1936): Astern. In: Das Gedicht. Blätter für die Dichtung. 2(7), Hamburg.


번역서지 목록

번호 개별작품제목 번역서명 총서명 원저자명 번역자명 발행연도 출판사 작품수록 페이지 저본 번역유형 작품 번역유형 비고
과꽃 고트프리드 벤 이동승 1971 을유문화사 편역 완역
2 과꽃 20世紀 獨逸詩. 2 探求新書 178 고트프리드 벤 이동승 1981 探求堂 30-31 편역 완역
과꽃 혼자 있는 사람은 세계문제시인선집 18 고트프리트 벤 이승욱 1992 청하 64 편역 완역
과꽃 이보다 쓸쓸했던 때는 없네 한권의 시 33 고트프리트 벤 윤동하 1994 태학당출판사 92-93 편역 완역
과꽃 모든 이별에 앞서가라 : 독일 대표시선 창비세계문학 91 고트프리트 벤 임홍배 2023 창비 313 편역 완역


번역비평

1. 번역 현황 및 개관

<과꽃 Astern>은 독일 현대시를 대표하는 문제적 시인 고트프리트 벤이 1935년에 쓴 시이다. 벤은 나치가 정권을 잡은 해인 1933년에 나치에 동조하는 글을 발표했고, 프로이센 예술아카데미(Preußische Akademie der Künste)의 문학 부문 책임자로 아카데미가 나치의 기관으로 전락하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열광은 짧았고 곧 차갑게 식어, 벤은 1934년에 자칭 귀족적인 내적 망명의 길을 택했다. <Astern>은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 있던 벤이 1935년 8월 말과 9월 초 사이에 하노버의 시청회관 테라스에서 쓴 것으로 추정되는데, 친구인 욀체 F. W. Oelze에게 보낸 9월 3일 자 서신에 이 시를 동봉했다. 그 후 이 시는 1936년 <시 Gedichte>에 처음 실렸고, 같은 해에 시인의 오십 세를 기념해서 인쇄한 <시선집 Ausgewählte Gedichte>에도 실렸다. 이 시집은 나치의 기관지로부터 원색적인 비난과 욕설을 받았고, 시 <Astern>도 주목받지 못했다. 벤은 1938년에 집필 금지 조치를 당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치 정권이 무너진 후 1948년에 벤은 시집 <정역학적 시들 Statische Gedichte>에 <Astern>을 다시 실었다. 주로 1937년부터 쓴 시들을 선별적으로 수록한 이 시집은 시인의 명성을 공고히 했고 전후 독일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Astern>은 오늘날 벤의 대표적인 시로 평가되고 또 가장 유명한 시 중 한 편으로 손꼽힌다. 국내에서는 이동승, 이승욱, 윤동하, 임홍배 등 네 명의 번역자가 총 다섯 번 번역하였으며, 주로 독일대표시인 시선집이나 고트프리트 벤 시선집에 수록되어 있다. 첫 번역은 1970, 80년대에 활발한 번역 활동을 했던 독문학자 이동승의 <과꽃>으로 이 번역시는 1971년 <20세기 시선>에 독일을 대표하는 시인과 시로 수록되었다. 이동승은 십 년 후에 초역을 수정했고, 탐구당에서 기획, 출판한 탐구신서 178권, <20세기 독일시 (II)>에 다시 실었다. 저본 정보는 없으나 원작 시를 번역과 나란히 배치한 대역(對譯)이다. 그 후 이승욱이 1992년에 번역했다. 이승욱의 <과꽃>은 역자가 편역한 벤의 시선집 <혼자 있는 사람은>(청하)에 수록되어 있다. 1994년에는 윤동하의 번역이 출판되었으나, 이동승의 번역과 같아서 표절이 의심된다. 최근에는 임홍배가 번역했고 2023년에 시선집 <모든 이별에 앞서가라. 독일 대표시선>(창비)에 수록되었다. 임홍배의 번역에는 시에 대한 개별적인 해설도 첨부되어 있다.


2. 개별 번역 비평

벤의 시 <Astern>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번역비평에 앞서서 본 논평자의 번역을 덧붙여본다.

Astern – schwälende Tage,			과꽃 – 잔열타는 날들,
Alte Beschwörung, Bann,			        오랜 주문(呪文), 주술(呪術)
die Götter halten die Waage			신들은 망설이는 시간에
eine zögernde Stunde an.			천칭의 수평을 잡는다.

Noch einmal die goldenen Herden		        다시 한 번 금빛 나는 무리
der Himmel, das Licht, der Flor,		하늘, 빛, 꽃무리,
Was brütet das alte Werden			무엇을 오래된 생성이  
unter den sterbenden Flügeln vor?		스러지는 날개 품에서 부화하는가?

Noch einmal das Ersehnte,			다시 한 번 열망했던 것,
den Rausch, der Rosen Du -			도취, 장미의 그대 -
der Sommer stand und lehnte		        여름이 멈춰 섰고 기대었고
und sah die Schwalben zu,			그리고 제비들을 응시했다.

noch einmal ein Vermuten,			다시 한 번 어떤 추측,
wo längst Gewißheit wacht:			이미 자명함이 눈 뜬지 오래인데: 
die Schwalben streifen die Fluten		제비들이 물결을 스치며
und trinken Fahrt und Nacht.		        여정과 한밤을 마신다.	

시의 제목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자. 독일어 원제는 Astern으로 이 시의 번역자들은 전부 과꽃으로 번역했다. Astern과 과꽃은 국화과에 속하는데, 속(Genus)이 다르다.[1]

둘은 닮은 모양이지만 같은 꽃이 아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과꽃을 예전부터 동북아시아에서 야생하는 꽃으로 규정하면서, 유럽에서 유입된 아스터와 구별한다. 그런데 시에 쓰인 꽃에 굳이 학명을 들이밀 필요가 있을까? 시에 쓰였다면 필경 은유일 테니 말이다. 시적 메타포로서 한국의 과꽃은 누나에 대한 그리움으로 친숙하다.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꽃밭 가득 예쁘게 피었습니다/ 누나는 과꽃을 좋아했지요/ 꽃이 피면 꽃밭에서 아주 살았죠.” 이 노래에 들어있는 과꽃은 소슬한 슬픔과 그리움의 정조를 담고 있다. 벤의 시에서는 Astern이 제목으로 한번, 그리고 시의 첫 어휘 “Astern―”로 한번 나오는데, 줄표를 달고 있어 잔영을 드리우며 여운을 남긴다. 여운을 끄는 것은 어떤 슬픔의 행위이다. 끝날 것을 알지만 제 쪽에서는 결단하지 않으려는 머뭇거림이라고 보면, 여운에 담긴 정조도 그리움과 아주 다르지는 않다. 과꽃과 Astern은 도저히 데칼코마니가 되지 않고, 하나가 다른 하나로 대체될 수 없다. 그런데 서로가 ‘먼 그대’인 두 꽃은 어딘가 포개어진다. 부재를 알면서 그리움을 묻히고 있는 한국의 동요 “과꽃”과 줄표의 꼬리를 길게 끄는 독일어 시 <Astern>은 닮은 구석이 있어 보인다. 원작 시와 번역시도 이렇지 않을까? 시의 원천적인 번역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번역시 <과꽃>은 원작 시 <Astern>과 어디쯤에선가 포개진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원작 시에서 도착어로 옮겨와야 할 것을 찾아내는 번역자의 선택과 결정에 달려있다. 이 점에 유의하면서 이동승, 이승욱, 임홍배의 번역시 <과꽃>의 특징들을 짚어보기로 한다.


1) 이동승 역의 <과꽃>(1971), (1981)

이동승은 <과꽃>을 국내 최초로 번역했으며 십 년 후에는 초역을 수정하는 재번역을 하였다. 두 번의 번역시 전문은 다음과 같다.

과꽃― 灼熱하는 날들.				과꽃― 灼熱하는 날들,
낡은 盟誓, 그리고 强制,			        낡은 맹서, 그리고 강제, 
神들은 저울과					神들은 저울과
주저하는 時間을 押留한다.			주저하는 시간을 押留한다.

또다시 금빛나는 家畜의 무리			하늘과, 빛, 만발한 꽃들은,
하늘, 광명, 그리고 면사포,			또 한번 황금빛 가축의 무리,
낡은 生成은 또한 무엇을			        낡은 생성은 무엇을 
낡은 날개 아래 품고 있는가?			죽어가는 날개 아래 품고 있을까?

또다시 그 渴望하던 것,				또 한 번 그 갈망하던 것,
그 陶醉를, 그리고 장미의 그대―			그 陶醉, 장미의 그대―
여름은 停止하고 기대서서			여름은 정지하고 기대어 서서
제비의 무리들을 보고 있었다.			제비들을 보고 있었다.

벌써 確信이 눈을 뜬 곳에			이미 확신이 눈을 뜬 곳에,
또다시 臆測,					또 다시 억측이 나타났으니: 
제비는 물결을 타고 가면서			제비들은 물결을 스쳐가면서
遍歷과 밤을 마시고 있다.			遍歷과 밤을 마시고 있다.
(이동승 1971, 266)				(이동승 1981, 30)(이하 밑줄 강조는 평자)

초역과 재번역을 나란히 놓고 보면 변한 것 보다 변하지 않은 것이 더 눈에 띈다. 시어의 상당수를 이루는 명사, “작열, 맹서, 강제, 압류, 가축, 갈망, 도취, 확신, 억측” 등이 초역 상태 그대로 재번역으로 이동되었다. “der Flor”를 면사포로 오역한 것만 “만발한 꽃”으로 수정되었을 뿐이다. 벤의 시 <Astern>을 가장 이 시답게 하는 것이 뭔지 확 잡히지 않으나, 그것의 한 구성 요소가 명사와 명사화인 것은 확실하다. 이 시에는 명사가 다수일 뿐 아니라, 매 연의 1행과 2행은 술어 없이 명사들이 병렬되어 있다. 동사가 있을 곳에는 “das alte Werden”, “ein Vermuten”처럼 동사가 명사로 조탁되고, “schwälende Tage”, “sterbende Flügel”처럼 동사가 형용사화된다. 이런 까닭에 이동승이 두 번역에서 번역자의 의지가 느껴지도록 명사를 수정하지 않은 점에 주목하게 된다. 1971년에 번역한 1연은 토씨 하나 변하지 않고 1981년의 재번역에 고스란히 옮겨졌다. “작열하는 날들”은 불꽃이 강렬히 타오르는 이미지로 뜨거운 여름의 한가운데 있는 듯하다. 뜨겁게 불타오르는 날들에 “강제”적으로 시간을 압류하는 신들이 대구를 이룬다. 신들이 강제를 당했을 리는 없을 터, 신들은 그들의 위력으로 시간을 무효화한다. “주저하는 시간을”에 해당하는 원문은 “eine zögernde Stunde”로 부사로 읽는 게 문법적이지만, 이동승의 번역처럼 목적어로 읽으면 신들의 압류 대상임이 확실히 드러난다. 이동승의 <과꽃> 1연은 여름의 한 가운데서 신들이 시간의 흐름을 정지시키고, 이로써 여름이 계속될 것 같은 연상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과꽃―”은 그만 철모르고 빨리 꽃을 피운 셈이다.

이번에는 초역과 비교해서 재번역에서 변한 지점을 보자. 벤의 원작 시 <Astern>에는 쉼표, 줄표, 쌍점 등으로 끝나는 시행들이 많고 이는 문장부호의 기능을 넘어 벤이 ‘기예 Artistik’라고 불렀던 형식화와 구성화의 한 특성을 보여준다. 벤은 타이프라이터로 쓴 초고에서는 4연의 2행을 “wo längst die Gewißheit wacht -”로 써서 줄표를 넣었는데, 출판을 위한 원고에서는 줄표를 쌍점으로 바꾸었다. 이로써 3행과 4행, 즉 제비가 저공비행으로 밤을 가로지르며 떠나가는 것이 2행의 자명한 사실의 내용이 된다. 1연에서 신들이 시간의 흐름을 잠시 멈추었지만 4연에서는 계절의 변화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다. 이동승은 1971년의 번역에서는 “또다시 臆測,”이라고 하여 쉼표로 시행을 매겼고 1981년의 번역에서는 쉼표를 쌍점으로 바꾸어 원작 시와 문장부호를 똑같이 만든다. 1971년의 쉼표는 전반부와 후반부 사이에 휴지부를 만들어, 확신과 억측이 공존하는 전반부와 제비가 날아가는 후반부의 연결이 필연적이지 않다. 1981년 번역에 있는 쌍점은 제비들이 떠나는 후반부를 전반부 “또 다시 억측이 나타났으니:”의 내용으로 만든다. 1연에서 신들이 시간을 압류하였고 시간은 여름에 정지해 있어서, 4연에서 제비들의 길 떠남이 뜨거운 계절에 맞지 않는 억지스러운 추측이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동승의 <과꽃>은 벤의 <Astern>과는 상당히 다른 번역시이다. 이동승의 번역은 오롯이 혼자서 원문을 감당해야 하는 초역의 무게 아래 오역이 대단하나, 독일의 현대 시문학에서 중요하게 평가되는 시를 처음으로 소개하고 알린 의의는 여전히 있다.


2) 이승욱 역의 <과꽃>(1992)

이승욱은 독문학자이면서 1991년에 계간지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한 후 여러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하다. 이승욱이 번역한 <과꽃>은 시선집 <혼자 있는 사람은>에 실려 있다. 이 책은 벤의 시집 <靜詩 Statische Gedichte>[2]에 실린 44편 중 42편을 번역하여 엮은 것으로, 비록 완역은 아니지만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이 시집 전체를 번역의 대상으로 삼은 의의가 있으며, 또 상당한 분량의 해설을 첨부하여 시집과 시인의 시론을 소개하는 의미가 있다. 이승욱이 번역한 <과꽃>은 다음과 같다.

과꽃―, 팽창된 날들,
해묵은 맹서, 마력,
신들은 머뭇거리는 시간을 
천칭 저울에 갖다 댄다. 

또 한번 금빛 가축의 무리
하늘, 빛, 꽃핀 한 철,
무엇이 이 케케묵은 생성을
죽어 가는 날개 아래 보듬고 있는가?

또 한번 열망하던 것,
도취, 장미의 그대― 
여름은 비스듬히 기대고 서서
제비들이 날아가는 쪽을 바라보고 있고, 

또 한번 추측,
이미 확실한 곳에서. 
제비들은 물결을 스쳐 나르며
여행과 밤을 마시고 있다.
(이승욱 1992, 64)

이승욱은 1연의 “머뭇거리는 시간”에 “여름에서 가을로 변화하는 시간”(이승욱 1992, 64)이라는 각주를 달았다. 올해도 과꽃이 피었다고 동요를 익힌 한국 독자는 “과꽃 -”에 줄표까지 모사(摹寫)해도 그리운 누나를 제치고 과꽃이 피는 시간을 연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역자는 독자에게 주석을 열쇠로 쥐여주며 시로 들어가는 통로 하나를 가리킨다. 신들은 그들에게 고유한 힘, “마력”을 써서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시간을 멈춘다. “팽창된 날들”은 schwälen을 schwellen으로 읽은 것이리라. 오독이지만 역자의 번역시 안에서는 나름의 이미지를 얻기도 한다. 신들이 그들에 귀속된 자연의 섭리를 어기면서까지 시간을 멈춰 세운 덕분에 늘어난 ‘긴 여름’을 가리킨다면 말이다. 2연에서 시간을 정지한 효력이 나타난다. 여기서 이승욱은 “was brütet das alte Werden”을 “무엇이 이 케케묵은 생성을”로 번역한다. was를 주어로, das alte Werden을 목적어로 옮겨서 주어를 묻는 시행을 만든 것으로, 이는 was를 목적어로 das alte Werden을 주어로 번역하여 목적어를 묻는 이동승과 임홍배의 번역과 차별되는 지점이다. 그런데 이승욱이 번역한 2연에서 그 “무엇이”의 정체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이 “죽어가는 날개”를 실제로 가졌다고 읽으면 조류일까?, 혹시 이 시에서 유일하게 새인 제비일까? 라고 질문하게 되고, 그것의 죽어가는 날개를 은유로 읽으면 “금빛 가축의 무리”를 낳은 여름일까? 라고 묻게 된다. “케케묵은 생성”은 생명을 낳는 번식 활동이 이미 오래전이며 여름의 번식력이 그 왕성한 힘을 잃었음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하늘, 빛, 꽃핀 한 철”은 한참 철 지난 이야기이다. 신들이 여름의 시간을 늘렸음에도, 2연에서 그 “무엇이” 보듬고 있으나, 생성은 옛날 한 철에 불과하고 날개는 보듬을지언정 부화하지 못하는 걸로 보인다. 2연 4행에서 ‘보듬다’로 번역된 독일어 어휘는 vor/brüten인데 “부화”의 뜻이 번역에서는 탈각된다.

벤의 시 <Astern>에서 스러지는 날개의 품에서 부화되는 것은 3연의 “열망했던 것”, “도취”일 것으로 짐작된다. 원어 das Ersehnte와 den Rausch는 둘 다 목적어로 쓰였기 때문이다. 이승욱의 번역시 3연에서는 “열망하던 것”, “도취”, “장미의 그대”가 주격인지 목적격인지 결정되지 않는다. 여름은 눈부시게 화려했고 찬란히 빛났지만 이미 생명력을 잃은 듯하다. 3연의 3행에서 여름이 의인화되어 “비스듬히 기대고 서서” 제비들을 바라보는데, 이 여름의 눈길은 시간을 덤으로 얻은 이의 여유로움을 담고 있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시간이 끝났음을 받아들이는 이의 비애가 배어 있다. 벤의 <Astern>에는 3연의 3행과 4행에 동사가 stand, lehnte, zu/sah 등 세 개씩이나 몰려 있는데, 이승욱은 stand에서 걷다가 멈추는 의미를 택하는 대신에 무엇인가에 기대고 의지하는 뜻의 lehnte에 수렴시킨다. 이승욱의 번역은 이동승의 번역에 비해서 시의 형식적인 요소를 더 지키고 있다. 벤의 <Astern>은 각운(교차운 abab)과 강약(한 행에 3개 내지 4개의 강음)을 갖추고 있다. 시의 운율과 리듬을 옮기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이승욱은 2연, 3연, 4연의 서두에 있는 “noch einmal”을 “또 한번”으로 동일하게 번역하여 원작 시와 같은 자리에 위치시키고, “alt”를 “해묵은”, “케케묵은”으로 각각 접두어를 달리하되, 형용사 “~묵은”을 반복하는 등, 원작 시의 리듬을 최소한이나마 옮긴다. 또 4연의 쌍점을 마침표로 바꾸기는 하지만, 번역시의 문장부호를 전반적으로 원작 시의 그것에 일치시킨다. 명사와 명사를 병렬하되 고립시키는 쉼표를 원작 시와 똑같이 한 것은, 이동승의 번역이 접속사 “그리고”와 조사 “~과”를 첨언하여 명사들을 연결한 것과 차별된다. 그리고 이승욱은 원작 시의 시행 순서를 지킨다. 앞서 보았듯이 이동승이 “확신”과 “억측”의 시행을 바꾸어서 내용적인 파국에 이르고, 아래에서 살펴볼 임홍배의 번역에서도 2연의 3행과 4행의 순서가 바뀌는 변화가 있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번역자 이승욱이 원문을 직역으로 살리려고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 윤동하 역의 <과꽃>(1994)

윤동하가 번역한 <과꽃>은 벤의 시 <Einsamer nie ->를 표제어로 한 시선집 <이보다 쓸쓸했던 때는 없네>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에는 벤의 초기 시부터 후기 시를 포괄하여 36편의 시가 실렸는데, 시의 선별 기준을 밝히지 않고, 초기 시와 후기 시를 뒤섞은 목차 정렬에 대한 설명도 없다. 역자에 대해서는 “서울대 문리대 독문과 졸업. 1994년 현재 자유기고가로 활동중”이라는 극도로 한정된 정보만이 제시되어 있다. 윤동하가 번역한 <과꽃>은 이동승의 1981년 번역과 모든 어휘가 같으며, 독일어 원작 시를 병기한 것조차도 이동승의 번역과 똑같다. 역자가 아주 사사로이 손을 댄 구석이 있으나[3], 그것이 이동승의 번역과 어떤 차별성을 갖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이는 <과꽃>에 한정된 평으로 다른 시들에까지 확대될 수는 없다.


4) 임홍배 역의 <과꽃>(2023)

독문학자면서 전문번역가에 버금가는 위상을 지닌 임홍배의 번역이 2024년 8월 현재 기준 최근의 번역이다. 임홍배의 <과꽃>은 역자가 괴테부터 현역 시인에 이르기까지 독일어권 주요 시인들의 대표작들을 선별하여 번역하고 엮은 <모든 이별에 앞서가라. 독일대표시선집>에 수록되어 있다. 임홍배는 여러 번역서에서 ‘연구 번역’의 모범을 보여주었는데, 이 시선집의 경우에도 “원작 자체에 대한 충실한 이해”(임홍배 2023, 465)를 바탕으로 한 번역을 목표로, 해당 시와 시인에 대해서 조사하였고 연구의 결과를 담은 상세한 해설을 작품마다 첨부하였다. 임홍배의 <과꽃>은 벤의 시 <Astern>에 대한 해설이 있는 번역이라는 점에서 이전의 번역들과 확연히 차별된다. 시에 대한 해설은 번역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번역의 거울에 비친 원작 시를 그려 보는 데도 일조한다. 다만, <Astern>은 자연시, 정치시, 역사시 등 여러 갈래로 해석이 가능한 시인데, 역자의 해설이 기본적인 정보를 넘어서 해석이 되면 독자를 특정한 방향으로 이끄는 (부)작용을 아주 배제할 수는 없다. 임홍배의 역자 해설에도 그가 시를 어떻게 읽고, 해석하고, 평하는지 비평가적 면모가 나타나기도 한다. 여기 이 번역비평에서는 번역가 임홍배의 번역시 <과꽃>에 집중하며, 벤의 <Astern>을 해설하고 해석하는 비평가적 존재를 가능한 한 의식하지 않기로 한다. 번역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과꽃들 – 내연(內燃)하는 나날, 
오랜 간구, 주문(呪文), 
신들은 잠시 머뭇거리며 
저울 균형을 맞춘다.

다시 한번 황금빛 무리,		
하늘, 빛, 만발한 꽃, 
죽어가는 날개 아래에서		
오랜 생성은 무엇을 부화하려는가?

다시 한번, 선망했던 것,	 	
도취를, 장미의 그대여 -	
여름은 멈추고 기대어 서서
제비들을 바라보았다.	 	 

다시 한번, 추측하기, 		
이미 오래전에 확신이 깨어 있는 곳에서 	
제비들이 강물을 스치며 날고
여정과 밤을 마신다.
(임홍배 2023, 313)

시의 1행에 나오는 ‘내연하다’에 해당하는 schwälen은 독일어 사전에 나오지 않는 말로 시인이 schwelen을 Astern의 /–a-/ 발음과 소리를 맞추기 위해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4] schwelen의 사전적인 뜻은 천천히, 불꽃이 없는 상태로 타는 것이다. “내연”은 불이 안으로 탄다는 뜻을 지닌 어휘로, “내연하는 나날”은 여름의 뜨겁게 타오르던 불꽃이 과꽃이 피는 무렵에 안으로 잦아드나 여전히 잔불로 타고 있는 이미지를 살린다. “오랜 간구, 주문”은 과거의 시점부터 현재에 이르도록 간절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원해서 마침내 신들의 호응을 불러내는 것을 보여준다. 신들이 “저울 균형을 맞춘다”의 원문은 “die Götter halten die Waage ... an”으로 동사 anhalten의 사전적인 뜻을 저울의 균형 상태로 옮겨서 시간이 멈추는 것을 표현한다. 신들이 “잠시 머뭇거리”는데, 시간을 멈추는 행위의 양태를 가리키는지 혹은 정지시킨 시간의 길이를 가리키는지 애매하다. 암튼 주술과 주문의 영향으로 멈춰진 것이라서 시간이 정지된 상태는 여름의 ‘잔불이 사그라지기 전’으로 한정된 만큼만 유지될 것이다.

신들이 저울 균형을 맞춘 덕분에 2연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여름을 이루는 자연이 다시 한번 재생된다. “다시 한번” 여름날이고 “오랜 생성”은 무엇인가를 부화하려고 한다. 벤의 <Astern>에서는 부화에 시간의 뉘앙스를 넣어서 “vor/brüten”인데, 접두어 vor 때문에 시간을 앞서서, 즉 다가오는 가을의 계절 안으로 부화하는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이에 비해서 임홍배의 <과꽃>에서는 “부화하려는가?”로 부화의 주어인 “생성”의 의지에 방점이 있다. 임홍배는 3연의 “den Rausch”에 조사 ‘~를’을 붙여 원작 시에서와 같이 4격 목적어로 만들었다. 이로써 2연에서 애써 부화한 것이 “도취”, 바로 그것이거나 최소한 그것과 연관 있음이 드러난다. 명사 도취는 벤이 1936년에 쓴 시 <더 고독한 때는 없었네 Einsamer nie ->에 8월을 특징짓는 “Rausch der Dinge”로도 쓰이는데, <Astern>에서도 여름날의 황홀함, 찬란함, 생명력 등이 농축된 최상의 정점을 가리키는 은유로 보인다.

3연 2행 “도취를, 장미의 그대여―”에서 이동승과 이승욱이 “장미의 그대―”로 옮긴 것과 달리, 임홍배는 호격조사 “~여”를 써서 장미의 그대를 부른다. 이렇게든 저렇게든 원작 시의 난해함은 여전해서 ‘장미의 이름’ 암호를 풀 열쇠는 시에서 찾을 수 없다. 하지만 호격으로 ‘다시 쓰기’를 하자 한 시행안에서 목적격에서 주격으로 바뀌는 문법적인 기능 변화를 넘어서 시의 분위기에 전기(轉機)가 발생하는 특기할 만한 효과가 생긴다. “장미의 그대여―”로 주의를 환기하자, 줄표의 여운이 이어지는 3행에서 시간을 정지시킨 마법이 풀리고 불현듯 시제가 나타난다. ‘여름은 멈췄고, 기대었고, 제비들을 바라보았다.’ 신들이 균형을 잡은 저울을 손에서 놓은 건가? 이 “장미의 그대여―”는 벤의 <Astern>을 다시 읽게 한다. <Astern>에서는 연마다 1, 2행과 3, 4행이 전반부와 후반부를 이루며 팽팽히 마주 본다. 명사들로 이루어진 전반부에는 여름의 이미지들이 제각각 있고, 한 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후반부는 ‘신들이 시간을 멈추고(1연) - 여름은 생식과 번식이 활개 치는 시간임을 확인하고(2연) - 여름은 그의 시간이 지나갔음을 알며(3연) - 제비들은 길 떠난다(4연)’와 같이 서사를 쓴다. 비유컨대 매 연의 전반부는 몸을 앞으로 한 채 시선을 뒤로 돌리고, 후반부는 시선을 뒤로한 채 앞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장미의 그대여―”를 <Astern>에 포개면, “der Rosen Du―”를 기점으로 시간을 멈추는 전반부와 제비들이 떠나(고 시간이 흐르)는 후반부가 형식적으로 균형을 이루는 게 나타난다. 그래서 4연에서 시간이 흐르는 순리에의 “확신”이 이미 지배적인데 그래도 시간의 정지를 “추측”하기가 가능하다. 1연에서 신들이 거는 주술은 시의 마지막까지 영향력을 미친다고 읽을 수도 있고, 그것은 3연에서 문득 나타난 깨달음의 줄표 이후 영향력을 상실한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임홍배의 <과꽃>을 거울로 삼아서 <Astern>을 비추면, 독일어 원작 시가 전체적인 구성에 있어서, 그리고 연의 구성에 있어서 시간의 정지와 시간의 흐름을 ‘정역학적’으로, 즉 정지와 운동을 맞부딪히면서 ‘동중정(動中靜)’의 상태로 만든다는 해석을 용기 내어보게 한다. 결론적으로 벤의 시 <Astern>을 이 시답게 만드는 고유한 특수성은 시의 형식과 시의 내용이 다르지 않다는 데서 찾아진다. 번역시를 통해서 원작 시의 정수를 다소간 맛보게 하는 점에서 임홍배의 <과꽃>은 일정 정도 성취를 이룬 번역으로 보인다. ■ 첨언: 번역비평을 쓴 후 역자의 해설을 다시 읽었다. 평자가 번역시에서부터 읽어낸 것과 역자의 해설 내용이 호응하지 않는 부분들에 눈길이 멈췄다. 원작 시가 번역시를 만나서 자신을 알듯이, 번역시는 도착어의 독자를 만나서야 자신을 아는 것 아닐까.


3. 평가와 전망

출발어로 쓰인 아름다운 시, 훌륭한 시가 도착어로 도착하면 아름다움이 소실되고 난해함이 더해져서 그저 이상한 시로 바뀔 위험이 있다. 벤의 <Astern>도 그렇다. 번역시를 눈으로 보거나 입으로 읽으면 역자의 노고가 무색하게 감상하기도 어렵고 이해는 더욱 어렵다. 그래서 “독일어 텍스트를 모른 채 우리말로 번역된 시만 놓고 보면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번역된 독일시를 읽을 때면 늘 이런 의문이 든다”(임홍배 2023, 466)는 원론적인 질문이 예나 지금이나 시 번역이 일어나는 자리 주변을 떠돈다. 어떻게든 시를 이해하는 방도를 찾아 이동승은 독일어로 쓰인 원작 시를 번역시 옆에 배치했고 (이 경우 독일어를 모르는 독자에겐 의미가 없다), 이승욱은 주석을 달았고(이 경우 시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임홍배는 해설을 첨부했다.(이 경우 독자는 해설을 이해하는 수고도 덤으로 해야 한다). 세 번역자의 번역시 텍스트를 비교해보면, 공통적으로 원작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한국말 어휘들이 첨언되는 경향이 있다. <Astern>에서 상징과 은유, 그 너머의 의미조차도 모조리 응축하여 농축된 명사, 명사, 명사는 번역시 <과꽃>에서 풀어지고 연결되어 원작 시보다 길어지는데 때로는 도착어의 리듬을 얻어 운문적으로 되기도 한다. 이는 번역자가 원작 시에 자유롭게 개입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원작 시를 가능한 한 원래 모습 그대로 옮겨오려고 몸을 사리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으로 보인다. 논평자도 시험 삼아 한 시역(試譯)에서 그랬음을 털어놓으며, 시 번역에 동반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번역자 개인이 떠안을 게 아니라 좋은 번역에 대한 담론을 거듭거듭 창출함으로써 그 어려움에 맞서야 한다고 생각해본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이동승(1971): 과꽃. 을유문화사.

이동승(1981): 과꽃. 탐구당.

이승욱(1992): 과꽃. 청하.

윤동하(1994): 과꽃. 태학당출판사.

임홍배(2023): 과꽃. 창비.



박희경

바깥 링크

  1. Astern의 학명은 Aster L.이고 과꽃의 학명은 Callistephus chinensis (L.) N.이다.
  2. 이승욱은 벤의 시집 <Statische Gedichte>를 <靜詩>로 번역했다. 최근의 논문에서는 <정역학적 시들>로 번역되어 있다.
  3. 이동승의 <과꽃> 2연 3행의 “무엇을”을 4행으로 옮기고(낡은 생성은/ 죽어가는 날개 아래 무엇을 품고 있을까?), 4연 2행의 “또 다시”를 “또다시”로 붙여서 쓴 것만이 다르다.
  4. 혹자는 schwelen과 schwären의 결합으로, 혹자는 schwelen과 quälen의 결합으로 생각한다. schwälen은 3연의 제비 Schwalbe와 소리가 비슷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승욱의 번역에서 나타나는 동사 schwellen(=dick machen, groß machen)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