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케 부인 (Frau Wilke)"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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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빌케 부인 || 산책 || || 로베르트 발저 || 박광자 || 2016 || 민음사 || 83-88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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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id="박광자(2016)" />[[#박광자(2016)R|1]] || 빌케 부인 || 산책 || || 로베르트 발저 || 박광자 || 2016 || 민음사 || 83-88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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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빌케 부인 || 세상의 끝 || || 로베르트 발저 || 임홍배 || 2017 || 문학판 || 127-135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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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id="임홍배(2017)" />[[#임홍배(2017)R|2]] || 빌케 부인 || 세상의 끝 || || 로베르트 발저 || 임홍배 || 2017 || 문학판 || 127-135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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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빌케 부인 || 산책자 || || 로베르트 발저 || 배수아 || 2017 || 한겨레출판 || 9-17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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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id="배수아(2017)" />[[#배수아(2017)R|3]] || 빌케 부인 || 산책자 || || 로베르트 발저 || 배수아 || 2017 || 한겨레출판 || 9-17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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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역 현황 및 개관'''
 
1. '''번역 현황 및 개관'''
  
프란츠 카프카에 능히 비견될 만한 스위스 작가 로베르트 발저가 열정적으로 수집한, 지극히 다채로운 삶의 편린들에 대한 문학적 유희의 증거물 ― 그의 1,500편이 넘는 산문과 짧은 이야기들은, 번역자라면 기꺼이 그 속에서 길을 잃고 싶은, 일종의 거대한 언어의 미로와도 같다. 이러한 역자들에는 2003년, 발저의 첫 작품집이자 그의 첫 단행본인 <프리츠 코허의 작문>을 국내에 처음 번역·소개한 박신자를 비롯해, 2016년에 <산책. 로베르트 발저 작품집>(민음사)을 펴낸 박광자, 그리고 2017년에 각각 <산책자. 로베르트 발저 작품집>(한겨례출판)과 <세상의 끝. 로베르트 발저 산문·단편 선집>(문학판)을 출간한 배수아, 임홍배가 있다. 본 번역비평에서 집중적으로 다룰 <빌케 부인>은 2016년 이후 출간된 이 세 작품집 모두에 발저의 주요 작품 중 하나로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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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에 능히 비견될 만한 스위스 작가 로베르트 발저가 열정적으로 수집한, 지극히 다채로운 삶의 편린들에 대한 문학적 유희의 증거물 ― 그의 1,500편이 넘는 산문과 짧은 이야기들은, 번역자라면 기꺼이 그 속에서 길을 잃고 싶은, 일종의 거대한 언어의 미로와도 같다. 이러한 역자들에는 2003년, 발저의 첫 작품집이자 그의 첫 단행본인 [[프리츠 코허의 작문 (Fritz Kochers Aufsätze)]]을 국내에 처음 번역·소개한 박신자를 비롯해, 2016년에 <산책. 로베르트 발저 작품집>(민음사)을 펴낸 박광자, 그리고 2017년에 각각 <산책자. 로베르트 발저 작품집>(한겨례출판)과 <세상의 끝. 로베르트 발저 산문·단편 선집>(문학판)을 출간한 배수아, 임홍배가 있다. 본 번역비평에서 집중적으로 다룰 <빌케 부인>은 2016년 이후 출간된 이 세 작품집 모두에 발저의 주요 작품 중 하나로 수록되어 있다.
<빌케 부인>이 들어 있는 번역서들의 편집 구성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박광자의 경우 표제작인 <산책>을 비롯하여 발저의 수많은 산문과 단편 중 11편을 임의로 선별해 번역하였다. 배수아의 작품집에는 그보다 약 네 배에 달하는 총 42편이 역시 뚜렷한 기준 없이 수록되어 있다. 임홍배는 기존에 번역된 대표작들의 익숙함과 아직 한국 독자에게 소개되지 않은 작품들의 새로움을 함께 고려해, 전형적이면서도 개성적인 발저의 중단편 산문 61편을 선별하였다. 특히 그는 이 작품들을 발저의 주요 창작 시기 동안 반복적으로 나타난 소재와 주제에 따라 분류하고, 이를 다섯 개의 부로 나누어 편집하였다. I. 자연, 가족, 자화상 / II. 사랑과 고독 / III. 세상의 이치 / IV. 삶과 노동 / V. 문학예술론. <빌케 부인>은 영락한 인간의 고독을 주제로 하는 동시에 발저의 자전적 이야기로 읽히는 작품으로, 두 번째 부에 해당하는 ‘사랑과 고독’ 범주에 속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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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케 부인>이 들어 있는 번역서들의 편집 구성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박광자의 경우 표제작인 [[산책 (Der Spaziergang) (로베르트 발저)|산책 (Der Spaziergang)]]을 비롯하여 발저의 수많은 산문과 단편 중 11편을 임의로 선별해 번역하였다. 배수아의 작품집에는 그보다 약 네 배에 달하는 총 42편이 역시 뚜렷한 기준 없이 수록되어 있다. 임홍배는 기존에 번역된 대표작들의 익숙함과 아직 한국 독자에게 소개되지 않은 작품들의 새로움을 함께 고려해, 전형적이면서도 개성적인 발저의 중단편 산문 61편을 선별하였다. 특히 그는 이 작품들을 발저의 주요 창작 시기 동안 반복적으로 나타난 소재와 주제에 따라 분류하고, 이를 다섯 개의 부로 나누어 편집하였다. I. 자연, 가족, 자화상 / II. 사랑과 고독 / III. 세상의 이치 / IV. 삶과 노동 / V. 문학예술론. <빌케 부인>은 영락한 인간의 고독을 주제로 하는 동시에 발저의 자전적 이야기로 읽히는 작품으로, 두 번째 부에 해당하는 ‘사랑과 고독’ 범주에 속해 있다.
 
발저가 남긴 방대한 산문과 짧은 이야기에 대해 지금까지 몇 차례 의미 있고 인상적인 번역 시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그의 작품 세계는 여전히 대부분이 한국어로는 미지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 발저 작품의 높은 예술성과 낮은 대중적 인지도의 불균형이라는 국내 번역 현실을 차치하더라도, 그의 다양한 문학적 형상물은 번역자의 접근 자체를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이는 비단 비독일어권 번역자만이 아니라 독일어 원어민에게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사실이다. 이러한 난점은 본질적으로 발터 벤야민이 그의 비평적 에세이 <로베르트 발저>(1929)에서 반어적 뉘앙스를 담아 언명한, 이 작가의 “완전히 비의도적이나, 그래도 사로잡는 매력이 있는 언어 황무지화 ein[e] [...] völlig absichtslos[e] und dennoch anziehend[e] und bannend[e] Sprachverwilderung”<ref>Walter Benjamin(1977): Gesammelte Schriften. Unter Mitwirkung v. Theodor W. Adorno u. Gershom Scholem hrsg. v. Rolf Tiedemann u. Hermann Schweppenhäuser. Vol. II. Frankfurt a. M.: Suhrkamp Verlag, 325. 앞으로 Gesammelte Schriften은 GS로 줄여져 로마숫자의 권수와 아라비아숫자의 쪽수와 함께 (부분 권수의 표기 없이) 인용된다.</ref>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순수한 의미의 번역적 노력은 이 언어의 황무지 속에서도 더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게 한다.
 
발저가 남긴 방대한 산문과 짧은 이야기에 대해 지금까지 몇 차례 의미 있고 인상적인 번역 시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그의 작품 세계는 여전히 대부분이 한국어로는 미지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 발저 작품의 높은 예술성과 낮은 대중적 인지도의 불균형이라는 국내 번역 현실을 차치하더라도, 그의 다양한 문학적 형상물은 번역자의 접근 자체를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이는 비단 비독일어권 번역자만이 아니라 독일어 원어민에게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사실이다. 이러한 난점은 본질적으로 발터 벤야민이 그의 비평적 에세이 <로베르트 발저>(1929)에서 반어적 뉘앙스를 담아 언명한, 이 작가의 “완전히 비의도적이나, 그래도 사로잡는 매력이 있는 언어 황무지화 ein[e] [...] völlig absichtslos[e] und dennoch anziehend[e] und bannend[e] Sprachverwilderung”<ref>Walter Benjamin(1977): Gesammelte Schriften. Unter Mitwirkung v. Theodor W. Adorno u. Gershom Scholem hrsg. v. Rolf Tiedemann u. Hermann Schweppenhäuser. Vol. II. Frankfurt a. M.: Suhrkamp Verlag, 325. 앞으로 Gesammelte Schriften은 GS로 줄여져 로마숫자의 권수와 아라비아숫자의 쪽수와 함께 (부분 권수의 표기 없이) 인용된다.</ref>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순수한 의미의 번역적 노력은 이 언어의 황무지 속에서도 더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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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광자 역의 <빌케 부인>(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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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광자(2016)|박광자 역의 <빌케 부인>(2016)]]<span id="박광자(2016)R" />'''
  
 
<빌케 부인>은 박광자에 의해 국내에 처음으로 번역·소개되었는데, 작품이 수록된 번역서의 말미에 위치한 옮긴이의 말 <로베르트 발저, 수수께끼 같은 작가>에서 역자는 번역 작업에서 느꼈던 문제와 어려움을 담담하게 술회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서술이 쉼표로 계속 이어지고 이어지는 발저 문장의 연장성이며 이러한 특이성은 한 문장 내에서도 나타난다.
 
<빌케 부인>은 박광자에 의해 국내에 처음으로 번역·소개되었는데, 작품이 수록된 번역서의 말미에 위치한 옮긴이의 말 <로베르트 발저, 수수께끼 같은 작가>에서 역자는 번역 작업에서 느꼈던 문제와 어려움을 담담하게 술회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서술이 쉼표로 계속 이어지고 이어지는 발저 문장의 연장성이며 이러한 특이성은 한 문장 내에서도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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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수아 역의 <빌케 부인>(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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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수아(2017)|배수아 역의 <빌케 부인>(2017)]]<span id="배수아(2017)R" />'''
  
이미 중견 작가로 탄탄한 지위를 자랑하고 있는 배수아는 2004년 야콥 하인의 <나의 첫 번째 티셔츠>를 한국어로 옮긴 이래 유수한 독일어권 작가의 작품 번역자로서도 꾸준하고 왕성한 활동을 보였는데, 세간의 많은 관심을 받았던 발저 산문의 번역서 역시 그 결과물 가운데 하나이다. 역자는 옮긴이의 말에서 ― <야콥 폰 군텐. 한 권의 일기> 영역본의 한 구절을 따 <to be small and to stay small>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 발저의 문장들이 지닌 돌발적이면서도 “랩소디적인 rhapsodisch”<ref>GS IV, 401.</ref> 성격을 지적하며 이러한 무정형의 자유로움에 매료되었던 번역 경험의 강한 파토스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이제 <빌케 부인>의 다음 부분에 대한 박광자와 배수아의 번역을 비교해 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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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중견 작가로 탄탄한 지위를 자랑하고 있는 배수아는 2004년 야콥 하인의 <나의 첫 번째 티셔츠>를 한국어로 옮긴 이래 유수한 독일어권 작가의 작품 번역자로서도 꾸준하고 왕성한 활동을 보였는데, 세간의 많은 관심을 받았던 발저 산문의 번역서 역시 그 결과물 가운데 하나이다. 역자는 옮긴이의 말에서 ― [[야콥 폰 군텐. 어느 일기 (Jakob von Gunten. Ein Tagebuch)]] 영역본의 한 구절을 따 <to be small and to stay small>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 발저의 문장들이 지닌 돌발적이면서도 “랩소디적인 rhapsodisch”<ref>GS IV, 401.</ref> 성격을 지적하며 이러한 무정형의 자유로움에 매료되었던 번역 경험의 강한 파토스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이제 <빌케 부인>의 다음 부분에 대한 박광자와 배수아의 번역을 비교해 보도록 하겠다.
  
 
  Laß sehen! Bitte, inkommodieren Sie sich keineswegs, mein Herr. Die Sache eilt durchaus nicht. Nehmen Sie sich Zeit, so viel Sie wollen! Hängt hier nicht die Tapete stellenweise in traurigen, wehmütigen Fetzen an der Wand herunter? Ganz gewiß! aber gerade das entzückt mich, denn ich liebe einen gewissen Grad von Zerlumptheit und Verwahrlosung sehr. Die Fetzen können ruhig hängen bleiben; um keinen Preis gestatte ich, daß sie weggenommen werden, da ich in jeder Hinsicht mit ihrer Existenz einverstanden bin. Wie ich gern glauben möchte, hat hier einst ein Baron gehaust.(99-100)
 
  Laß sehen! Bitte, inkommodieren Sie sich keineswegs, mein Herr. Die Sache eilt durchaus nicht. Nehmen Sie sich Zeit, so viel Sie wollen! Hängt hier nicht die Tapete stellenweise in traurigen, wehmütigen Fetzen an der Wand herunter? Ganz gewiß! aber gerade das entzückt mich, denn ich liebe einen gewissen Grad von Zerlumptheit und Verwahrlosung sehr. Die Fetzen können ruhig hängen bleiben; um keinen Preis gestatte ich, daß sie weggenommen werden, da ich in jeder Hinsicht mit ihrer Existenz einverstanden bin. Wie ich gern glauben möchte, hat hier einst ein Baron gehaust.(99-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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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임홍배 역의 <빌케 부인>(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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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임홍배(2017)|임홍배 역의 <빌케 부인>(2017)]]<span id="임홍배(2017)R" />'''
  
 
문학과 비문학을 가리지 않고 다채로운 독일어 텍스트 번역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온 독문학자 임홍배는 자세한 해설과 함께 2017년 발저의 산문 및 단편 번역 선집을 내놓았는데, <빌케 부인>이 여기에 수록돼 있다. 유려한 한국어 문장으로 잘 알려진 역자답게 임홍배의 <빌케 부인> 번역은 전체적으로 우리말의 표현 방식을 고려하며, 작품에 대한 이해의 정도를 더욱 깊게 하는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러한 자연스러움은 무엇보다 출발어와 도착어 사이를 계속해서 오가는, 달리 말하면, 두 언어 간의 경계를 허무는 역자의 유연한 태도에 기인한 것이다. 임홍배는 발저의 독일어 원문이 지닌 독특함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우리말로 옮김에 있어 경직(고지식한 직역)과 독선(지나친 의역) 모두를 동시에 경계한다.
 
문학과 비문학을 가리지 않고 다채로운 독일어 텍스트 번역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온 독문학자 임홍배는 자세한 해설과 함께 2017년 발저의 산문 및 단편 번역 선집을 내놓았는데, <빌케 부인>이 여기에 수록돼 있다. 유려한 한국어 문장으로 잘 알려진 역자답게 임홍배의 <빌케 부인> 번역은 전체적으로 우리말의 표현 방식을 고려하며, 작품에 대한 이해의 정도를 더욱 깊게 하는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러한 자연스러움은 무엇보다 출발어와 도착어 사이를 계속해서 오가는, 달리 말하면, 두 언어 간의 경계를 허무는 역자의 유연한 태도에 기인한 것이다. 임홍배는 발저의 독일어 원문이 지닌 독특함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우리말로 옮김에 있어 경직(고지식한 직역)과 독선(지나친 의역) 모두를 동시에 경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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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박광자(2016): 빌케 부인.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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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자(2016): 빌케 부인. 민음사.<br>
배수아(2017): 빌케 부인. 한겨례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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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2017): 빌케 부인. 한겨례출판.<br>
 
임홍배(2017): 빌케 부인. 문학판.
 
임홍배(2017): 빌케 부인. 문학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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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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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8일 (월) 10:43 기준 최신판

로베르트 발저(Robert Walser, 1878-1956)의 산문

빌케 부인 (Frau Wilke)
작가로베르트 발저(Robert Walser)
초판 발행1915
장르산문


작품소개

로베르트 발저가 1915년에 발표한 짧은 산문이다. 일인칭 화자는 시인으로 대도시의 외곽 철로가에 있는 빌케 부인의 집에 가구가 딸린 셋방을 찾아 들어온다. 그 집은 몰락과 쇠락의 자국들이 완연하며, 방은 어둡고 축축한 동굴과 비슷하다. 화자는 사회의 실패자로 사회를 피해 은둔처를 찾아 이곳에 온 것인데, 집과 방의 쇠락이 그를 둘러싸고 자기 스스로에게서도 같은 기운을 느낀다. 그런데 화자는 몰락의 기운을 독특한 시선으로 바라보아, 폐허 같은 집, 먼지투성이 커튼과 낡은 가구에서 드높고 고상한 과거의 광채를 찾고 쇠락에 일종의 존경을 표한다. 그는 그 방에서 여러 종류의 글들과 노벨레를 써서 외국의 저널에 기고할 것으로 기대하나 실제로는 온종일 침대에 누워 있다. “한 번이라도 가난하고 고독한 신세를 경험해본 자는 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타인의 가난과 고독을 더 잘 이해한다”는 서술자의 말처럼, 무명의 시인은 먹을 게 없어 굶주리는 빌케 부인에게 연민을 갖는다. 그는 빌케 부인이 죽을 것을 예감하며, 그녀가 죽은 후 부인의 옷가지와 소지품들이 침대에 놓여 있는 “기괴한 광경”에 그만 허무감과 허망함에 사로잡히고 마는데, 비록 한참 후이긴 하지만 삶의 어깨를 다시 붙잡으면서 인생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집에서 나와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 국내에서는 2016년 박광자에 의해 처음 번역됐다(민음사).


초판 정보

Walser, Robert(1915): Frau Wilke. In: Neue Zürcher Zeitung, 18. Jul. 1915. <단행본 초판> Walser, Robert(1918): Frau Wilke. In: Poetenleben. Frauenfeld/Leipzig: Verlag von Huber & Co.


번역서지 목록

번호 개별작품제목 번역서명 총서명 원저자명 번역자명 발행연도 출판사 작품수록 페이지 저본 번역유형 작품 번역유형 비고
빌케 부인 산책 로베르트 발저 박광자 2016 민음사 83-88 편역 완역
빌케 부인 세상의 끝 로베르트 발저 임홍배 2017 문학판 127-135 편역 완역
빌케 부인 산책자 로베르트 발저 배수아 2017 한겨레출판 9-17 편역 완역


번역비평

1. 번역 현황 및 개관

프란츠 카프카에 능히 비견될 만한 스위스 작가 로베르트 발저가 열정적으로 수집한, 지극히 다채로운 삶의 편린들에 대한 문학적 유희의 증거물 ― 그의 1,500편이 넘는 산문과 짧은 이야기들은, 번역자라면 기꺼이 그 속에서 길을 잃고 싶은, 일종의 거대한 언어의 미로와도 같다. 이러한 역자들에는 2003년, 발저의 첫 작품집이자 그의 첫 단행본인 프리츠 코허의 작문 (Fritz Kochers Aufsätze)을 국내에 처음 번역·소개한 박신자를 비롯해, 2016년에 <산책. 로베르트 발저 작품집>(민음사)을 펴낸 박광자, 그리고 2017년에 각각 <산책자. 로베르트 발저 작품집>(한겨례출판)과 <세상의 끝. 로베르트 발저 산문·단편 선집>(문학판)을 출간한 배수아, 임홍배가 있다. 본 번역비평에서 집중적으로 다룰 <빌케 부인>은 2016년 이후 출간된 이 세 작품집 모두에 발저의 주요 작품 중 하나로 수록되어 있다. <빌케 부인>이 들어 있는 번역서들의 편집 구성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박광자의 경우 표제작인 산책 (Der Spaziergang)을 비롯하여 발저의 수많은 산문과 단편 중 11편을 임의로 선별해 번역하였다. 배수아의 작품집에는 그보다 약 네 배에 달하는 총 42편이 역시 뚜렷한 기준 없이 수록되어 있다. 임홍배는 기존에 번역된 대표작들의 익숙함과 아직 한국 독자에게 소개되지 않은 작품들의 새로움을 함께 고려해, 전형적이면서도 개성적인 발저의 중단편 산문 61편을 선별하였다. 특히 그는 이 작품들을 발저의 주요 창작 시기 동안 반복적으로 나타난 소재와 주제에 따라 분류하고, 이를 다섯 개의 부로 나누어 편집하였다. I. 자연, 가족, 자화상 / II. 사랑과 고독 / III. 세상의 이치 / IV. 삶과 노동 / V. 문학예술론. <빌케 부인>은 영락한 인간의 고독을 주제로 하는 동시에 발저의 자전적 이야기로 읽히는 작품으로, 두 번째 부에 해당하는 ‘사랑과 고독’ 범주에 속해 있다. 발저가 남긴 방대한 산문과 짧은 이야기에 대해 지금까지 몇 차례 의미 있고 인상적인 번역 시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그의 작품 세계는 여전히 대부분이 한국어로는 미지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 발저 작품의 높은 예술성과 낮은 대중적 인지도의 불균형이라는 국내 번역 현실을 차치하더라도, 그의 다양한 문학적 형상물은 번역자의 접근 자체를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이는 비단 비독일어권 번역자만이 아니라 독일어 원어민에게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사실이다. 이러한 난점은 본질적으로 발터 벤야민이 그의 비평적 에세이 <로베르트 발저>(1929)에서 반어적 뉘앙스를 담아 언명한, 이 작가의 “완전히 비의도적이나, 그래도 사로잡는 매력이 있는 언어 황무지화 ein[e] [...] völlig absichtslos[e] und dennoch anziehend[e] und bannend[e] Sprachverwilderung”[1]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순수한 의미의 번역적 노력은 이 언어의 황무지 속에서도 더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게 한다.


2. 개별 번역 비평

발저의 글에서 삶과 예술은 결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내용과 형식의 폭넓은 스펙트럼을 자랑하는 그의 산문 텍스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삶의 길을 걸어가며 매 순간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채 마주치게 되는 포에지를 독특한 리듬 속에 탁월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이러한 점에 항상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번역자는 가장 중요한 실천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빌케 부인>에는 특히 “각 문장이 그 전 문장을 잊게 만드는 것을 유일한 임무로 하는 장광설 ein Wortschwall [...], in dem jeder Satz nur die Aufgabe hat, den vorigen vergessen zu machen” GS II, 326. 을 통해 1인칭 화자 ‘나’의 감정 기복이 생의 부조리와 희망을 드러내며 리드미컬하게 형상화되고 있다.


1) 박광자 역의 <빌케 부인>(2016)

<빌케 부인>은 박광자에 의해 국내에 처음으로 번역·소개되었는데, 작품이 수록된 번역서의 말미에 위치한 옮긴이의 말 <로베르트 발저, 수수께끼 같은 작가>에서 역자는 번역 작업에서 느꼈던 문제와 어려움을 담담하게 술회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서술이 쉼표로 계속 이어지고 이어지는 발저 문장의 연장성이며 이러한 특이성은 한 문장 내에서도 나타난다.

Eines Tages, da ich mich auf der Suche nach irgend geeignetem Zimmer befand, trat ich in ein außerhalb der großen Stadt, dicht an der Stadtbahnlinie gelegenes, seltsames, zierliches, ältliches und wie mir schien, ziemlich verwahrlostes Haus hinein, dessen Äußeres mir um seiner Absonderlichkeit willen sogleich ungemein gefiel.(98)[2]

인용한 부분은 <빌케 부인>의 첫머리인데, 이 작품의 주인공인 1인칭 화자 ‘나’는 새로운 거처를 찾아다니는 중이다.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문장이지만 쉼표의 연속적인 사용과 함께 그 길이가 무척 길어진 듯한 인상을 준다. “언어의 화환 Sprachgirland[e]”[3]과도 같은 문장으로 발저는 ‘쓰기’를 이어지듯 멈췄다 다시 계속되는 ‘걷기’의 리듬에 맞춘다. 이를 한국어 번역에서 제대로 구현하기란 실로 쉽지 않은 일일 텐데, 그럼 박광자의 시도를 살펴보도록 하자.

어느 날 적당한 방을 찾아다니던 나는 대도시의 외곽으로 가게 되었다. 전차역 바로 옆에 위치한, 특이하고 예쁘고 좀 낡고 외딴집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 집의 독특한 외양을 본 순간 내 마음에 꼭 들었다.(박광자, 83)

박광자의 번역은 그 성과물과의 자연스러운 일차적 만남, 다시 말해 그것이 우리말로 무리 없이 잘 읽히는 것에 신경을 쓰는 듯이 보인다. 역자는 본래 하나의 문장이었던 것을 마침표를 이용해 두 개로 나누었고, 한국어 독자를 의식하며 전체를 문법적으로 재구성했다. 기본적인 차원에서 그러한 시도는 도착어 텍스트에 대한 그 언어 사용자의 직관적 이해를 증진시킨다는 장점이 있다. 이에 비해 배수아는 발저의 문장에 내재한 고유한 리듬을 조금 더 살리는 쪽으로 번역의 방향을 잡는다. 그 결과 번역문은 원문과 마찬가지로 전체가 한 문장이며 쉼표에 의해 부분들이 단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어느 날 나는 적당한 방을 찾고 있었고, 대도시 외곽 지역 교외선 철로 바로 옆에 있는 특이하면서도 사랑스럽고 내 눈에는 예스러워 보이며 매우 낡고 황폐한, 하지만 외관의 독특함이 무척 마음을 끌어당기는 어느 집 건물로 들어섰다.(배수아, 9)


2) 배수아 역의 <빌케 부인>(2017)

이미 중견 작가로 탄탄한 지위를 자랑하고 있는 배수아는 2004년 야콥 하인의 <나의 첫 번째 티셔츠>를 한국어로 옮긴 이래 유수한 독일어권 작가의 작품 번역자로서도 꾸준하고 왕성한 활동을 보였는데, 세간의 많은 관심을 받았던 발저 산문의 번역서 역시 그 결과물 가운데 하나이다. 역자는 옮긴이의 말에서 ― 야콥 폰 군텐. 어느 일기 (Jakob von Gunten. Ein Tagebuch) 영역본의 한 구절을 따 <to be small and to stay small>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 발저의 문장들이 지닌 돌발적이면서도 “랩소디적인 rhapsodisch”[4] 성격을 지적하며 이러한 무정형의 자유로움에 매료되었던 번역 경험의 강한 파토스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이제 <빌케 부인>의 다음 부분에 대한 박광자와 배수아의 번역을 비교해 보도록 하겠다.

Laß sehen! Bitte, inkommodieren Sie sich keineswegs, mein Herr. Die Sache eilt durchaus nicht. Nehmen Sie sich Zeit, so viel Sie wollen! Hängt hier nicht die Tapete stellenweise in traurigen, wehmütigen Fetzen an der Wand herunter? Ganz gewiß! aber gerade das entzückt mich, denn ich liebe einen gewissen Grad von Zerlumptheit und Verwahrlosung sehr. Die Fetzen können ruhig hängen bleiben; um keinen Preis gestatte ich, daß sie weggenommen werden, da ich in jeder Hinsicht mit ihrer Existenz einverstanden bin. Wie ich gern glauben möchte, hat hier einst ein Baron gehaust.(99-100)
어디 보자. 자, 선생, 얼마든지 편안하게 지내도 되겠어. 급할 것도 없어. 시간은 남아도니까. 여기저기 벽에 도배가 처량하고, 우울하게 찢어진 데가 있군. 그래, 하지만 바로 그게 내 마음에 들어. 왜냐하면 나는 어느 정도 너덜너덜하고 엉망인 것을 좋아하거든. 너덜너덜한 것은 그냥 둬야지. 어떤 일이 있어도 그걸 뜯어내진 않을 거야. 그게 거기에 있는 것을 이미 완전히 인정했어. 생각해 보니 여긴 남작이 살았던 것 같아.(박광자, 85)
둘러보자고! 조금도 불편해할 필요가 없어. 결코 서두를 일은 아니니까. 그러니 천천히 원하는 대로 마음껏 보는 거야! 여기 이 자리에 벽지가 조금 찢어져 슬프고도 애수 어린 자태로 나달나달 매달려 있지 않으냐고? 정확히 맞는 말이야! 하지만 바로 그 점이 나를 매료시켰단 말이야! 나는 원래 어느 정도의 몰락과 피폐함을 무척 사랑하니까. 그러니 찢긴 조각은 그냥 그렇게 매달려 있게 두면 되는 거야. 절대로 뜯어내지 못하게 할 거야. 나는 벽지 조각들이 여기서 나와 공존하는 데 전적으로 동의하니까. 옛날에 이 방에 어느 남작이 살았다고 믿고 싶어지는군.(배수아, 11-12)

주인공 ‘나’는 빌케 부인과 방을 계약한 후 자신이 앞으로 지낼 곳을 주의 깊게 둘러보며 독백을 이어 나간다. 위의 인용문은 그중 일부분인데, “자기가 쓴 글에서 결코 단 한 줄도 고친 적이 없었다는 발저의 자백 das Eingeständnis von Walser [...], er habe in seinen Sachen nie eine Zeile verbessert” [5]에 걸맞듯이 거침없는 내적 수다의 향연이 펼쳐진다. 작가는 특히 느낌표와 물음표를 적절히 활용하면서 화자의 어딘지 모르게 묘하게 들뜬 상태를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배수아가 ‘나’의 내면에서 솟구치는 감정의 고조된 소리에 귀를 기울여 충실히 전달하려고 애쓰는 데 반해, 박광자는 한국어 번역문에서 앞에서 언급한 문장부호의 사용을 배제하며 원문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무력화시키고 있다.


3) 임홍배 역의 <빌케 부인>(2017)

문학과 비문학을 가리지 않고 다채로운 독일어 텍스트 번역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온 독문학자 임홍배는 자세한 해설과 함께 2017년 발저의 산문 및 단편 번역 선집을 내놓았는데, <빌케 부인>이 여기에 수록돼 있다. 유려한 한국어 문장으로 잘 알려진 역자답게 임홍배의 <빌케 부인> 번역은 전체적으로 우리말의 표현 방식을 고려하며, 작품에 대한 이해의 정도를 더욱 깊게 하는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러한 자연스러움은 무엇보다 출발어와 도착어 사이를 계속해서 오가는, 달리 말하면, 두 언어 간의 경계를 허무는 역자의 유연한 태도에 기인한 것이다. 임홍배는 발저의 독일어 원문이 지닌 독특함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우리말로 옮김에 있어 경직(고지식한 직역)과 독선(지나친 의역) 모두를 동시에 경계한다.

다음에 인용할 원문과 번역문에서 ‘나’는 마치 꼭 말해야만 한다는 강박증에 사로잡힌 듯, 자신의 방에 있는 가구들과 실내 장식에 대해 숨 가쁘게 이야기를 쏟아낸다.

Das Bett scheint ordentlich zu sein. Von diesbezüglichen, peinlichen Untersuchungen will und soll ich absehen. Einen recht merkwürdigen, gespenstischen Hutständer erblicke und bemerke ich hier, und der Spiegel dort über dem Waschtisch wird mir jeden Tag treulich sagen, wie ich aussehe. Hoffentlich wird das Bild, das er mich schauen lassen wird, stets schmeichelhaft sein. Das Ruhebett ist alt; folglich angenehm und passend. Neue Möbel stören leicht, weil Neuheit aufdringlich wirkt und uns im Weg ist. Eine holländische und eine Schweizerlandschaft hängen, wie ich zu meiner freudigen Genugtuung sehe, bescheiden an der Wand. Bestimmt werde ich diese zwei Bilder vielfach mit großer Aufmerksamkeit betrachten.(100-101. 이하 밑줄 강조 필자)
침대는 잘 정돈되어 있는 것 같네. 침대를 살펴보는 것은 성가시니까 그만둬야지. 여기 모자걸이는 이상하게 생겨서 꼭 유령 같군. 저기 세면대 위에 있는 거울은 날마다 내가 어때 보이는지 성실하게 말해주겠지. 바라건대 거울이 나한테 보여주는 모습이 늘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 휴식용 소파는 오래되어서 편안하고 몸에 맞아 보이는군. 새 가구는 방해가 되기 십상이지. 새것은 우리더러 적응하라고 보채고 성가시게 구니까. 벽에 네덜란드 풍경화 한 점과 스위스 풍경화 한 점이 얌전하게 걸려 있는 걸 보니 기분이 흡족해. 나중에 이 두 개의 그림들을 아주 주의 깊게 살펴봐야지.(임홍배, 130-131)
침대는 멀쩡해 보이는군. 이에 관련된 괴로운 조사는 하지 않을 작정이야,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 이쪽에는 정말 이상하고 귀신 나올 것 같은 모자걸이가 있고, 저쪽으로는 세면대 위에서 내일 내 모습을 성실하게 비춰 줄 거울이 있네. 내가 바라는 바는 거울이 항상 나의 좋은 모습을 비춰 주는 거야. 소파는 낡았지만, 그래서 더욱 편안하고 딱 맞아. 새 가구는 눈에 좀 거슬리는데, 새로운 것은 눈에 띄고 방해가 되기 때문이지. 벽에는 네덜란드 풍경화 한 점 하고 스위스 풍경화 하나가 걸려 있어서 심심풀이가 될 것 같아. 이 두 개의 그림을 내가 아주 관심 있게 여러 번 바라볼 게 확실해.(박광자, 85-86)
침대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군. 그렇다면 잠자리를 꼼꼼히 조사하는 일은 생략할 것이고, 생략해야겠어. 참으로 이상하고도 으스스한 모자걸이를 봤다고 일단 기록해두자. 저쪽 세면대에 달린 거울은 내 모습이 어떤지 매일 충실하게 일러줄 테지. 기왕이면 거울이 나를 비추는 모습이 늘 호의적이었으면 좋겠는데. 소파는 낡아서 안락하고 편안하군. 새 가구라면 좀 신경이 쓰일 텐데, 새것이란 집요하게 달라붙어서 우리 앞을 가로막으니까 말이야. 네덜란드 풍경화와 스위스 풍경화가 한 점씩, 내 마음을 흡족한 기쁨으로 채워주면서 벽에 소박하게 걸려 있군. 나는 저 두 그림을 아주 주의 깊게 몇 번이고 자세히 들여다볼 것이 분명해.(배수아, 13)

왠지 모를 조급함이 묻어나는 말의 리듬에 올라타 주저리주저리 이어지는 ‘나’의 설명과 묘사는 작품 전체의 의미 맥락상 그가 얼마나 외로움에 지쳐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우울증에 빠져 있기도 한 주인공-화자는 다름 아닌 발저 자신을 연상시키는데, 스스로를 다그치듯 잇달아 떠오르는 생각의 나열과 중첩이 장황한 혼잣말의 형태로 두서없이 표현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작가는 독일어 원문에서 같은 품사의 단어를 연속해서 쓰거나 접속사, 관계대명사 등을 이용해 문장의 길이를 늘이기도 하고, 문장과 문장을 연결하기도 한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현재시제와 werden 동사가 사용된 미래시제가 혼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원문의 밑줄 친 부분에 대한 세 번역을 비교하며 좀 더 찬찬히 들여다보려 한다.

먼저 첫 번째 밑줄 친 문장에 있어 박광자와 배수아는 화법 조동사 “will”과 “soll”을 각각 따로 번역하고자 했으나, 임홍배의 경우 독백하는 투로, 화자의 의지를 나타내는 종결 어미인 ‘-어야지’를 써 그것들의 결합된 뜻을 간결하게 한 단어로 옮기려 했다. 문맥상 후자의 시도만으로도 충분한 의미 전달이 가능해 보인다. 임홍배는 “diesbezüglich[e] [...] Untersuchungen”을 앞 문장에 대한 고려 속에 “침대를 살펴보는 것”으로 풀어서 구체적으로 번역했는데, 이는 다른 두 번역(원문을 축자적으로 옮긴 박광자의 “이에 관련된 [...] 조사”와 풀어서 옮기려 했지만, 조금은 어색한 느낌을 주는 배수아의 “잠자리를 [...] 조사하는 일”)에 비해 더 직관적이고 이해하기 쉽다. “Untersuchungen”을 꾸미는 또 다른 형용사 “peinlich[e]”에 대해선 병원 진찰과 관련된 용례를 생각해 볼 때 “성가시니까”(임홍배), “괴로운”(박광자), “꼼꼼히”(배수아) 가운데 임홍배의 번역이 가장 적절하다 하겠다. 불안정한 성격을 가진 ‘나’는 철두철미한 인물과는 거리가 멀다. 해당 일은 그에게 힘들다기보다는 귀찮은 일에 가깝다.

두 번째 문장에서는 독일어의 경우 사람 “ich”와 사물 “der Spiegel”을 각각 주어로 하는 주문장 둘이 대등 접속사 “und”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장소 부사 “hier”와 “dort”는 이런 문장 구조에서 개별 주문장들이 형식적, 내용적 관계를 볼 때 서로 대구를 이루고 있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그리고’라는 접속사를 배제한 채 두 개의 독립된 문장으로 옮겨 놓은 임홍배와 배수아의 번역을 비교해 보자. 두 문장의 주어를 사물 주어로 통일하기 위해 임홍배는 앞 문장의 주어를 과감하게 원문에서 목적어였던 “모자걸이”로 바꾸었다. 이러한 번역 시도가 주어와 관련해서 원문의 구조를 그대로 우리말로 옮긴 것보다는 해당 문장들의 상관성을 좀 더 의식하며, 글의 흐름에 부드러움과 자연스러움을 부여한 듯 보인다. 박광자는 두 문장을 이어주는 대등적 연결 어미 ‘-고’의 사용과 함께 임홍배와 비슷한 시도를 감행했다. 어딘지 모르게 방에 있는 물건 하나하나에 집착하는 ‘나’의 심리 상태를 고려해 보면, 사물 주어를 문장의 앞쪽에 위치시킨 후자의 번역이 그에 걸맞은 구조적 타당성을 가진다고 하겠다.

마지막 문장의 경우 “나중에”라는 미래와 관련된 부사를 (맨 앞에) 사용함으로써, 임홍배는 다른 역자들(말하는 이의 전망을 나타내는 표현인 박광자의 “-ㄹ 게”와 배수아의 “-ㄹ 것이”)에 견주어 더 직관적인 단어로 원문의 미래시제를 번역했다. 이것은 우리말의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고 볼 수 있다.


3. 평가와 전망

발저를 아주 높이 평가했던 헤르만 헤세나 프란츠 카프카 작품의 거듭되는 국내 번역과 비교해 볼 때 “이 외견상으로는 모든 시인들 가운데 가장 실패한 시인 dieser scheinbar verspielteste aller Dichter”[6]은 그동안 충분히 주목받지 못했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재발견을 통해 20세기 독일 문학사에서 나날이 중요성을 더해 가는, 스위스의 국민 작가 발저의 산문과 단편을 적극적으로 소개하고자 한 세 역자의 성과물에 기본적으로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다. 물론 전체적으로 조망할 때 이제 그 물꼬를 텄을 뿐이며 발저의 수많은 산문 텍스트는 여전히 번역의 깨우는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무엇보다 이것이 발저가 언어적으로 자기 작품에서 보였던 “아주 유별나고 묘사하기 힘든 황폐화됨 eine ganz ungewöhnliche, schwer zu beschreibende Verwahrlosung”[7]을 생산적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을 것이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박광자(2016): 빌케 부인. 민음사.
배수아(2017): 빌케 부인. 한겨례출판.
임홍배(2017): 빌케 부인. 문학판.


유종윤


  • 각주
  1. Walter Benjamin(1977): Gesammelte Schriften. Unter Mitwirkung v. Theodor W. Adorno u. Gershom Scholem hrsg. v. Rolf Tiedemann u. Hermann Schweppenhäuser. Vol. II. Frankfurt a. M.: Suhrkamp Verlag, 325. 앞으로 Gesammelte Schriften은 GS로 줄여져 로마숫자의 권수와 아라비아숫자의 쪽수와 함께 (부분 권수의 표기 없이) 인용된다.
  2. 독일어 원문은 다음 판본을 이용한다. Walser, Robert(1986): Frau Wilke. In: Sämtliche Werke in Einzelausgaben. Hrsg. v. Jochen Greven. Vol. 6. Zürich/Frankfurt a. M.: Suhrkamp Verlag. 원문 인용 시 본문에 쪽수를 표기한다.
  3. GS II, 326.
  4. GS IV, 401.
  5. GS II, 325.
  6. GS II, 327.
  7. GS II, 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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