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푸른 피아노 (Mein blaues Klavier)"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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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나의 푸른 피아노 || 20世紀詩選 = An Anthology of twentieth century verse || 世界文學全集 69 || 라스커ž쉬러, E || 李東昇 || 1971 || 乙酉文化社 || 260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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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id="이동승(1971)" />[[#이동승(1971)R|1]] || 나의 푸른 피아노 || 20世紀詩選 = An Anthology of twentieth century verse || 世界文學全集 69 || 엘제 라스커-쉴러 || 李東昇 || 1971 || 乙酉文化社 || 260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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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내 푸른 피아노 || 20世紀 獨逸詩 1 || 探求新書 177 || 엘제 라스커-쉴러 || 전광진 || 1982 || 探求堂 || 350-351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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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id="전광진(1982)" />[[#전광진(1982)R|2]] || 내 푸른 피아노 || 20世紀 獨逸詩 1 || 探求新書 177 || 엘제 라스커-쉴러 || 전광진 || 1982 || 探求堂 || 350-351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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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나의 푸른 피아노 || 독일 시선 : 18세기에서 현대까지 ||  || 엘제 라스커-쉴러 || 정두홍 || 2005 || 삼영 || 83-84 || 편역 || 완역 ||  
 
| 3 || 나의 푸른 피아노 || 독일 시선 : 18세기에서 현대까지 ||  || 엘제 라스커-쉴러 || 정두홍 || 2005 || 삼영 || 83-84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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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 나의 푸른 피아노 || 독일시선집 ||  || 엘제 라스커-쉴러 || 최연숙 || 2013 || 신아사 || 228-229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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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id="최연숙(2013)" />[[#최연숙(2013)R|4]] || 나의 푸른 피아노 || 독일시선집 ||  || 엘제 라스커-쉴러 || 최연숙 || 2013 || 신아사 || 228-229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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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나의 파란 피아노 || 엘제 라스커쉴러 시선 || 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 엘제 라스커쉴러 || 이정순 || 2022 || 지식을만드는지식 || 155-158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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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id="이정순(2022)" />[[#이정순(2022)R|5]] || 나의 파란 피아노 || 엘제 라스커쉴러 시선 || 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 엘제 라스커쉴러 || 이정순 || 2022 || 지식을만드는지식 || 155-158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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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 나의 푸른 피아노 || 독일시 : 독일 서정 ||  || 엘제 라스커 쉴러 || 정명순 || 2022 || 전남대학교출판문화원 || 240-241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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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id="정명순(2022)" />[[#정명순(2022)R|6]] || 나의 푸른 피아노 || 독일시 : 독일 서정 ||  || 엘제 라스커 쉴러 || 정명순 || 2022 || 전남대학교출판문화원 || 240-241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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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 나의 푸른 피아노 || 우리는 밤과 화해하기 원한다 : 엘제 라스커 쉴러 시집 ||  || 엘제 라스커 쉴러 || 배수아 || 2023 || 아티초크 || 127-128 || 완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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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id="배수아(2023)" />[[#배수아(2023)R|7]] || 나의 푸른 피아노 || 우리는 밤과 화해하기 원한다 : 엘제 라스커 쉴러 시집 ||  || 엘제 라스커 쉴러 || 배수아 || 2023 || 아티초크 || 127-128 || 완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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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제 라스커-쉴러는 시 <Mein blaues Klavier>를 두 차례 직접 출간했는데, 한번은 1937년에 신문에 실었고(이하 신문판으로 약칭) 또 한번은 1943년에 펴낸 마지막 시집에 표제작으로 실었다(이하 시집판으로 약칭). 두 편집 간에는 어휘와 문장부호에서 일견 소소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꽤 큰 차이가 있다.<ref>본문에서 인용되는 원작시의 출처는 온라인 아카이브에 있는 1937년 신문과 1943년 시집이다. 신문판은 Lasker-Schüler(1937): Mein blaues Klavier. In: Neue Züricher Zeitung, 7. Feb. 1937. (주소는 https://www.e-newspaperarchives.ch/?a=d&d=NZZ19370207-02.2.7&dliv=none&e=-------de-20—1—img-txIN--------0-----). 시집판은 Lasker-Schüler, Else(1943): Mein blaues Klavier. Neue Gedichte. Jerusalem, 14. 이 시집은 독일국립도서관(Deusche National Bibliothek)의 전자자료로 열람이 가능하다. (주소는 https://portal.dnb.de/bookviewer/view/1032607858#page/14/mode/2up) 이 온라인 출처는 당시 편집상태를 보여주는 점에서 시인의 사후에 출판된 여느 판본들보다 더욱 정확하다. 이하 본문에 인용한 원작시 및 번역시의 밑줄은 모두 필자의 강조이다.<br>
 
엘제 라스커-쉴러는 시 <Mein blaues Klavier>를 두 차례 직접 출간했는데, 한번은 1937년에 신문에 실었고(이하 신문판으로 약칭) 또 한번은 1943년에 펴낸 마지막 시집에 표제작으로 실었다(이하 시집판으로 약칭). 두 편집 간에는 어휘와 문장부호에서 일견 소소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꽤 큰 차이가 있다.<ref>본문에서 인용되는 원작시의 출처는 온라인 아카이브에 있는 1937년 신문과 1943년 시집이다. 신문판은 Lasker-Schüler(1937): Mein blaues Klavier. In: Neue Züricher Zeitung, 7. Feb. 1937. (주소는 https://www.e-newspaperarchives.ch/?a=d&d=NZZ19370207-02.2.7&dliv=none&e=-------de-20—1—img-txIN--------0-----). 시집판은 Lasker-Schüler, Else(1943): Mein blaues Klavier. Neue Gedichte. Jerusalem, 14. 이 시집은 독일국립도서관(Deusche National Bibliothek)의 전자자료로 열람이 가능하다. (주소는 https://portal.dnb.de/bookviewer/view/1032607858#page/14/mode/2up) 이 온라인 출처는 당시 편집상태를 보여주는 점에서 시인의 사후에 출판된 여느 판본들보다 더욱 정확하다. 이하 본문에 인용한 원작시 및 번역시의 밑줄은 모두 필자의 강조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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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le:Mein blaues klavier 1937.png|thumb|1937년 산문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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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le:Mein blaues klavier 1937.png|thumb|1937년 신문판]]
![[File:Mein blaues klavier 1943.png|thumb|1943년 시집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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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le:Mein blaues klavier 1943.png|thumb|1943년 시집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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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in blaues Klavier (1937) !! Mein blaues Klavier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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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Mein blaues Klavier (1937)</u> !! <u>Mein blaues Klavier (1943)</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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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Es steht im Dunkel der Kellertur,<br>
 
③ Es steht im Dunkel der Kellertur,<br>
 
④ Seitdem die Welt verrohte.<br><br>
 
④ Seitdem die Welt verrohte.<br><br>
⑤ Es spielten Sternenhände vier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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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Es spielten Sternenhände vier ―</u><br>
⑥ Die Mondfrau sang im Boote.<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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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Die Mondfrau sang im Boote.</u><br>
⑦ ― Nun tanzen die Ratten im Geklirr.<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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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 Nun tanzen die Ratten im Geklirr.</u><br><br>
 
⑧ Zerbrochen ist die Klaviatür.<br>
 
⑧ Zerbrochen ist die Klaviatür.<br>
 
⑨ Ich beweine die blaue Tote.<br><br>
 
⑨ Ich beweine die blaue Tote.<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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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Es steht im Dunkel der Kellertür,<br>
 
③ Es steht im Dunkel der Kellertür,<br>
 
④ Seitdem die Welt verrohte.<br><br>
 
④ Seitdem die Welt verrohte.<br><br>
⑤ Es spielen Sternenhände vier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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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Es spielen Sternenhände vier</u> <br>
⑥ ― Die Mondfrau sang im Boote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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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 Die Mondfrau sang im Boote ―</u><br>
⑦ Nun tanzen die Ratten im Geklirr.<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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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un tanzen die Ratten im Geklirr.</u><br><br>
⑧ Zerbrochen ist die Klaviatür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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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Zerbrochen ist die Klaviatür .....</u><br>
 
⑨ Ich beweine die blaue Tote.<br><br>
 
⑨ Ich beweine die blaue Tote.<br><br>
 
⑩ Ach liebe Engel öffnet mir<br>
 
⑩ Ach liebe Engel öffnet mir<br>
 
⑪ ― Ich ass vom bitteren Brote ―<br>
 
⑪ ― Ich ass vom bitteren Brote ―<br>
⑫ Mir lebend schon die Himmelstür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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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Mir lebend schon die Himmelstür ―</u><br>
 
⑬ Auch wider dem Verbote.<br>
 
⑬ Auch wider dem Verbote.<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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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판에서 시집판으로 어떻게 변화했는지 하나하나 짚어보자. 1) ③행의 Klaviatur가 Klaviatür로 바뀌었다. 2) ⑤행에 동사 “spielten”이 과거형에서 현재형 “spielen”으로 달라졌다. 3) ⑤행을 끝내고 ⑦행을 시작하는 줄표가 ⑥행으로 자리를 옮겼다. 4) ⑧행이 마침표로 끝났는데, 시집판에서 말줄임표 “.....”로 바뀌었다. 5) ⑪행에 동사 “aß”가 “ass”로 바뀌었다. 6) ⑫행에 줄표가 없었으나, 시집판에서 첨가되었다.  
 
신문판에서 시집판으로 어떻게 변화했는지 하나하나 짚어보자. 1) ③행의 Klaviatur가 Klaviatür로 바뀌었다. 2) ⑤행에 동사 “spielten”이 과거형에서 현재형 “spielen”으로 달라졌다. 3) ⑤행을 끝내고 ⑦행을 시작하는 줄표가 ⑥행으로 자리를 옮겼다. 4) ⑧행이 마침표로 끝났는데, 시집판에서 말줄임표 “.....”로 바뀌었다. 5) ⑪행에 동사 “aß”가 “ass”로 바뀌었다. 6) ⑫행에 줄표가 없었으나, 시집판에서 첨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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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동승 역의 <나의 푸른 피아노>(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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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동승(1971)|이동승 역의 <나의 푸른 피아노>(1971)]]<span id="이동승(1971)R" />'''
  
 
처음으로 이 시를 번역한 이동승은 시의 제목을 <나의 푸른 피아노>로 옮겼다. 저본을 제시하지 않았으며, ⑤행의 현재형 시제로 보면 시집에 실린 시와 같으나 ⑧행의 말줄임표는 없다. 한편, ④행에는 “世界가 불타버린 以來 −” <ref>이하 번역시의 본문 직접 인용시 출처는 서지에 표기된 면수와 동일하다.</ref>로 줄표를 첨가했는데, 이는 역자가 시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결정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동승의 번역은 초역이지만 글의 흐름이 유연하며, 어휘를 서정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도록 번역하였다. 제목의 “Mein blaues Klavier”의 색깔을 ‘푸른’으로 옮겨서 신비로운 이미지를 살리고, ⑤행의 “Sternenhände”를 “별님의 손”으로 번역하여 동화적인 정서를 가미한다. 4연(⑧,⑨행) “鍵盤은 부서졌다./ 나는 이 푸른 死者에 대해 눈물을 뿌린다.”는 대목은 원문의 ‘beweinen’에 함의된 ‘울다 weinen’를 살리면서 시적으로 쓰고 있다. 그런데 오류를 피하지 못하기도 했는데, 3연(⑤,⑥,⑦행) “별님의 손이 네 시면 연주하고/ - 月婦人은 보우트에서 노래했다 -/ 音響들 속에서 쥐들이 춤춘다.”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두 손을 가리키는 “vier”를 ‘네 시’라고 하여 시간으로 오역하였다. 3연의 번역에서 피아노의 연주, 달의 노래, 쥐의 춤이 아기자기하게 어우러지는 것도 문제적인데, 라스커-쉴러의 원작에서 나타나는 파괴적이고 끔찍한 내용과 상당히 어긋나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이 시를 번역한 이동승은 시의 제목을 <나의 푸른 피아노>로 옮겼다. 저본을 제시하지 않았으며, ⑤행의 현재형 시제로 보면 시집에 실린 시와 같으나 ⑧행의 말줄임표는 없다. 한편, ④행에는 “世界가 불타버린 以來 −” <ref>이하 번역시의 본문 직접 인용시 출처는 서지에 표기된 면수와 동일하다.</ref>로 줄표를 첨가했는데, 이는 역자가 시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결정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동승의 번역은 초역이지만 글의 흐름이 유연하며, 어휘를 서정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도록 번역하였다. 제목의 “Mein blaues Klavier”의 색깔을 ‘푸른’으로 옮겨서 신비로운 이미지를 살리고, ⑤행의 “Sternenhände”를 “별님의 손”으로 번역하여 동화적인 정서를 가미한다. 4연(⑧,⑨행) “鍵盤은 부서졌다./ 나는 이 푸른 死者에 대해 눈물을 뿌린다.”는 대목은 원문의 ‘beweinen’에 함의된 ‘울다 weinen’를 살리면서 시적으로 쓰고 있다. 그런데 오류를 피하지 못하기도 했는데, 3연(⑤,⑥,⑦행) “별님의 손이 네 시면 연주하고/ - 月婦人은 보우트에서 노래했다 -/ 音響들 속에서 쥐들이 춤춘다.”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두 손을 가리키는 “vier”를 ‘네 시’라고 하여 시간으로 오역하였다. 3연의 번역에서 피아노의 연주, 달의 노래, 쥐의 춤이 아기자기하게 어우러지는 것도 문제적인데, 라스커-쉴러의 원작에서 나타나는 파괴적이고 끔찍한 내용과 상당히 어긋나기 때문이다.  
  
  
2) 전광진 역의 <내 푸른 피아노>(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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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광진(1982)|전광진 역의 <내 푸른 피아노>(1982)]]<span id="전광진(1982)R" />'''
  
 
전광진은 제목을 <내 푸른 피아노>로 번역했다. 원작을 병치한 대역본으로, 1943년 시집에 수록된 시집판의 시제와 문장부호를 충실히 옮겼다. ⑪행을 신문판처럼 “aß”로 쓴 것은 역자가 현대 독일어의 정서법에 맞춰서 고친 것으로 보인다. 이 번역은 원작에 있는 세 개의 문(門), “Kellertür”, “Klaviatür”, “Himmelstür”를 모두 ‘문’으로 살리는 점에서 다른 번역들과 차별성을 갖는다.
 
전광진은 제목을 <내 푸른 피아노>로 번역했다. 원작을 병치한 대역본으로, 1943년 시집에 수록된 시집판의 시제와 문장부호를 충실히 옮겼다. ⑪행을 신문판처럼 “aß”로 쓴 것은 역자가 현대 독일어의 정서법에 맞춰서 고친 것으로 보인다. 이 번역은 원작에 있는 세 개의 문(門), “Kellertür”, “Klaviatür”, “Himmelstür”를 모두 ‘문’으로 살리는 점에서 다른 번역들과 차별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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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Es steht im Dunkel der Kellertü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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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Es steht im Dunkel der <u>Kellertür,</u><br>
⑧ Zerbrochen ist die Klaviatür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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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Zerbrochen ist die <u>Klaviatür .....</u><br>
⑫ Mir lebend schon die Himmelstür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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⑫ Mir lebend schon die <u>Himmelstür −</u><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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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는 어두컴컴한 地下室 문안에 놓여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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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는 어두컴컴한 <u>地下室 문안에</u> 놓여있다.<br>
부서져 버린 피아노 문······<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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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져 버린 <u>피아노 문······</u><br>
살아 있는 나에게 어느덧 天國의 門을 열어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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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나에게 어느덧 <u>天國의 門</u>을 열어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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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에서 ‘~tür’는 각운을 이루면서 시에 리듬을 만들어 낸다. 라스커-쉴러는 운을 맞추기 위해서 피아노 건반을 가리키는 ‘Klaviatur’(신문판)을 일부러 ‘Klaviatür’(시집판)으로 바꾸었다. 그래서 위 세 어휘를 직역하면 ‘지하실(의) 문’, ‘(피아노) 건반’, ‘하늘의 문’이 된다. 전광진의 번역에서는 각각 “地下室 문”, “피아노 문······”, “天國의 門”인데, 한국어의 어순에 따르다 보니 ‘문’이라고 소리가 반복되어도 리듬감을 만들지는 못한다. 그리고 “피아노 문”은 직관적으로 피아노 뚜껑을 가리키는 이미지로 은유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마는데, 그래도 세 번 ‘문’이 반복됨으로써 독자가 그 ‘의미’를 찾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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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에서 ‘~tür’는 각운을 이루면서 시에 리듬을 만들어 낸다. 라스커-쉴러는 운을 맞추기 위해서 피아노 건반을 가리키는 ‘Klaviatur’(신문판)을 일부러 ‘Klaviatür’(시집판)으로 바꾸었다. 그래서 위 세 어휘를 직역하면 ‘지하실(의) 문’, ‘(피아노) 건반’, ‘하늘의 문’이 된다. 전광진의 번역에서는 각각 “<u>地下室 문</u>”, “<u>피아노 문······</u>”, “<u>天國의 門</u>”인데, 한국어의 어순에 따르다 보니 ‘문’이라고 소리가 반복되어도 리듬감을 만들지는 못한다. 그리고 “피아노 문”은 직관적으로 피아노 뚜껑을 가리키는 이미지로 은유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마는데, 그래도 세 번 ‘문’이 반복됨으로써 독자가 그 ‘의미’를 찾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전광진의 번역은 ⑦행을 “이제 쥐들이 달캉달캉 춤을 춘다.”고 옮겼다. “달캉달캉”은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달카당달카당”의 줄임말로 “단단하고 작은 물건이 서로 거세게 자꾸 부딪쳐 울리는 소리를 나타내는 말”이다. 원작에서는 ⑦행의 “im Geklirr”가 쥐들이 피아노 건반을 깨부수거나 혹은 부서지고 깨어진 잔해 위에서 설쳐대는 쥐들이 내는 청각적인 소음을 가리키는데, ‘달캉달캉’의 의성어로는 원문의 이미지가 썩 잘 나타나지는 않는다. 전광진 번역의 또 다른 특징은 명령문의 형식으로 쓰인 5연(⑩~⑬행)을 평서문으로 바꿔서 옮긴 것이다. “아아 귀여운 天使들 나에게/ -나는 쓰디쓴 빵을 뜯어먹고 있었다- / 살아 있는 나에게 어느덧 天國의 門을 열어준다./ 禁止된 것도 무릅쓰고.” 원작에서는 2인칭 복수인 ‘너희들 사랑스러운 천사들’에게 하는 기도로, 살아 있는 지금 천국의 문을 열어달라는 염원이다. 전광진의 번역은 평서문으로 (잘못) 번역함으로써 죽음의 문턱에 있는 화자가 구원을 받는 이미지로 끝나는 부작용 효과를 낳는다.
 
전광진의 번역은 ⑦행을 “이제 쥐들이 달캉달캉 춤을 춘다.”고 옮겼다. “달캉달캉”은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달카당달카당”의 줄임말로 “단단하고 작은 물건이 서로 거세게 자꾸 부딪쳐 울리는 소리를 나타내는 말”이다. 원작에서는 ⑦행의 “im Geklirr”가 쥐들이 피아노 건반을 깨부수거나 혹은 부서지고 깨어진 잔해 위에서 설쳐대는 쥐들이 내는 청각적인 소음을 가리키는데, ‘달캉달캉’의 의성어로는 원문의 이미지가 썩 잘 나타나지는 않는다. 전광진 번역의 또 다른 특징은 명령문의 형식으로 쓰인 5연(⑩~⑬행)을 평서문으로 바꿔서 옮긴 것이다. “아아 귀여운 天使들 나에게/ -나는 쓰디쓴 빵을 뜯어먹고 있었다- / 살아 있는 나에게 어느덧 天國의 門을 열어준다./ 禁止된 것도 무릅쓰고.” 원작에서는 2인칭 복수인 ‘너희들 사랑스러운 천사들’에게 하는 기도로, 살아 있는 지금 천국의 문을 열어달라는 염원이다. 전광진의 번역은 평서문으로 (잘못) 번역함으로써 죽음의 문턱에 있는 화자가 구원을 받는 이미지로 끝나는 부작용 효과를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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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⑬ 禁令을 거스를지라도
 
  ⑬ 禁令을 거스를지라도
  
④행 “Seitdem die Welt verrohte.”를 “세계가 야만화한 이후로”라고 옮긴 것도 눈에 띈다. 한국어의 언어문화에서 정치적인 독재와 도덕적인 타락이 횡횡한 시기를 종종 ‘야만’과 결부시켜 야만의 시대 등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김주연의 번역은 독자에게 역사적 상상력을 작동시키는 효과를 발휘한다. 다른 번역자들도 동사 ‘verrohte’를 ‘불타다’(이동승), ‘타락하다’(정두홍, 배수아), ‘야비해지다’(전광진, 최연숙, 이정순), ‘거칠어지다’(정명순) 등으로 옮겨서 원작이 탄생한 시대의 폭력성을 나타내고 있으나, 김주연의 ‘야만이 지배하는 세계’는 원문의 사전적 뜻을 거의 직역하면서 또한 국가 주도하에 일어난 반유대주의를 가리키는 데 적합해 보인다. (일례로 이미 1935년에 발효된 뉘른베르크 인종법은 유대인을 독일국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시민권을 박탈한다). ⑦행은 “이제 쥐들이 달그락거리며 춤춘다.”로 옮겼다. 이미 전광진이 ‘달캉달캉’으로 번역했고, 김주연 이후에 정두홍, 정명순, 배수아 등도 공통적으로 ‘달가닥’으로 옮겼다. 이로써 3연(⑤,⑥,⑦행)에서 진정한 예술이 사라지고 가벼운 유흥으로 전락한 현주소를 보여주는 모습이 나타난다. 어쩌면 번역자들이 이 부분을 예술이 불가능한 시대적 문제로 해석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이러한 해석과 번역에서는 라스커-쉴러가 반유대주의가 팽배한 시대에서 유대인으로 겪은 ‘야만화’의 경험이 탈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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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행 “Seitdem die Welt verrohte.”를 “세계가 야만화한 이후로”라고 옮긴 것도 눈에 띈다. 한국어의 언어문화에서 정치적인 독재와 도덕적인 타락이 지배했던 시기를 종종 ‘야만’과 결부시켜 야만의 시대 등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김주연의 번역은 독자에게 역사적 상상력을 작동시키는 효과를 발휘한다. 다른 번역자들도 동사 ‘verrohte’를 ‘불타다’(이동승), ‘타락하다’(정두홍, 배수아), ‘야비해지다’(전광진, 최연숙, 이정순), ‘거칠어지다’(정명순) 등으로 옮겨서 원작이 탄생한 시대의 폭력성을 나타내고 있으나, 김주연의 ‘야만이 지배하는 세계’는 원문의 사전적 뜻을 거의 직역하면서 또한 국가 주도하에 일어난 반유대주의를 가리키는 데 적합해 보인다. (일례로 이미 1935년에 발효된 뉘른베르크 인종법은 유대인을 독일국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시민권을 박탈한다). ⑦행은 “이제 쥐들이 달그락거리며 춤춘다.”로 옮겼다. 이미 전광진이 ‘달캉달캉’으로 번역했고, 김주연 이후에 정두홍, 정명순, 배수아 등도 공통적으로 ‘달가닥’으로 옮겼다. 이로써 3연(⑤,⑥,⑦행)에서 진정한 예술이 사라지고 가벼운 유흥으로 전락한 현주소를 보여주는 모습이 나타난다. 어쩌면 번역자들이 이 부분을 예술이 불가능한 시대적 문제로 해석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이러한 해석과 번역에서는 라스커-쉴러가 반유대주의가 팽배한 시대에서 유대인으로 겪은 ‘야만화’의 경험이 탈각된다.  
  
 
5연은 원문 ⑩행의 “mir”, ⑪행의 “Ich”, ⑫행의 “mir”를 전부 살린다. ⑩행의 “나에게”에서 ⑫행의 “나에게”로 부드럽게 이어지면서, ⑪행의 “나는”을 감싸는 모양도 원문에 충실하다. ⑬행도 원문의 문법을 지키면서 또한 의미도 살렸다.  
 
5연은 원문 ⑩행의 “mir”, ⑪행의 “Ich”, ⑫행의 “mir”를 전부 살린다. ⑩행의 “나에게”에서 ⑫행의 “나에게”로 부드럽게 이어지면서, ⑪행의 “나는”을 감싸는 모양도 원문에 충실하다. ⑬행도 원문의 문법을 지키면서 또한 의미도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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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최연숙 역의 <나의 푸른 피아노>(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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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최연숙(2013)|최연숙 역의 <나의 푸른 피아노>(2013)]]<span id="최연숙(2013)R" />'''
  
 
최연숙의 번역은 대역본으로 ⑦행이 과거 시제로 신문판과 같으나 문장부호는 신문판과 다르고 시집판과도 다르다. 판본이 확실하지 않아서 저본을 밝히지 않은 점이 상당히 아쉽다. 최연숙의 번역은 청자를 가정하고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②행 “난 악보를 몰라요.”, ④행 “피아노는 어두운 지하실에 있네요.”, ⑤행 “별 손 넷이 연주를 했지요”, ⑨행 “나는 내 푸른 악보가 아쉬워 눈물짓네요.” 등, 종결어미를 존대를 나타내는 ‘~요’체로 끝낸다. 이전의 번역자들이 모두 ‘~이다’식의 서술형 종결어미를 택한 것과 차별된다.  
 
최연숙의 번역은 대역본으로 ⑦행이 과거 시제로 신문판과 같으나 문장부호는 신문판과 다르고 시집판과도 다르다. 판본이 확실하지 않아서 저본을 밝히지 않은 점이 상당히 아쉽다. 최연숙의 번역은 청자를 가정하고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②행 “난 악보를 몰라요.”, ④행 “피아노는 어두운 지하실에 있네요.”, ⑤행 “별 손 넷이 연주를 했지요”, ⑨행 “나는 내 푸른 악보가 아쉬워 눈물짓네요.” 등, 종결어미를 존대를 나타내는 ‘~요’체로 끝낸다. 이전의 번역자들이 모두 ‘~이다’식의 서술형 종결어미를 택한 것과 차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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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정명순 역의 <나의 푸른 피아노>(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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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정명순(2022)|정명순 역의 <나의 푸른 피아노>(2022)]]<span id="정명순(2022)R" />'''
  
정명순의 번역은 독일어 대역본인데 번역과 함께 수록된 원작의 출처가 불분명하다. 독일의 문학평론가였던 라이히-라니츠키가 편집한 시선집인 <독일어 명시 Die besten deutschen Gedichte>를 참조했다고 밝히고 있으나, 이 책에 수록된 원작이 시집판인데 비해서 정명순의 번역에 병치된 원문은 ⑤행에 동사가 “spielten”으로 신문판과 같다. 역자는 문장부호를 전혀 번역에 옮기지 않았는데, 아마도 문장부호의 함의를 역어의 선택과 구문의 구성에 담으려고 한 듯하다. 선행 번역들과 달리 시해설을 짧게나마 첨언했는데, 이를테면 ⑦행의 ‘쥐’를 “나치에 대한 은유적 표현”(정명순, 239)으로 설명한다. 쥐=나치의 비유는 반유대주의가 횡횡했던 시대적 배경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유대인을 전염병을 옮기는 쥐와 등치시키는 비유와 함께 박멸해야 할 기생충을 연상하도록 세뇌하는 서사는 당시에 널리 퍼져 있었다. (나치의 선전영화인 <영원한 유대인 Der ewige Jude>은 공포감을 야기하는 쥐떼를 배경으로 유대인을 이야기한다.) 시대의 야만은 폭력에 대한 무감각과 무의식적인 동조를 포함한다. 라스커-쉴러가 신문판을 시집판으로 재출간하면서 쥐가 등장하는 3연에 가장 많이 수정한 사실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시인은 1943년에 떼로 몰려다니는 쥐의 인종적 은유와 나치의 정치적인 목적을 분명 깊이 의식했을 것이고 ‘유대인=쥐’의 이미지를 ‘쥐=나치’로 역전시켰다고 판단된다. 이와 같은 배경을 고려하면 이 시에 단정한 화음을 부여하는 교차운 abab의 운율이 깨지는 ⑦행 “Nun tanzen die Ratten im Geklirr”를 그 역사성을 살려서 번역하는 문제가 생겨난다. 정명순은 ⑦행을 “이제는 쥐들이 달가닥 달가닥 춤춘다.”로 옮겼는데, ‘달가닥 달가닥’ 춤추는 모습이 ‘쥐=나치’의 비유에 썩 어울려 보이지는 않는다. 5연은 “아 사랑하는 천사들이/ 쓰디쓴 빵을 뜯고 있는 나를 위해/ 금기를 거슬리면서까지/ 살아있는 내게 벌써 천국 문을 연다.”로 명령문인 원문을 평서문으로 바꾸었으며, 시행의 구성을 한국어 구문의 형식으로 변형하고 내용적으로 인과관계가 드러나도록 문장을 만들어 자국화하였다. 역자는 “구원에 대한 소망을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소천하는 모습으로”(정명순, 239) 해석하며 원문의 형식과 내용에 깊숙이 개입했는데, 이로써 원작시에서는 화자의 갈급한 염원이 전면에 드러나는 5연이 번역문에서는 오히려 화자의 구원이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나타나는 차이가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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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순의 번역은 독일어 대역본인데 번역과 함께 수록된 원작의 출처가 불분명하다. 독일의 문학평론가였던 라이히-라니츠키가 편집한 시선집인 <독일어 명시 Die besten deutschen Gedichte>를 참조했다고 밝히고 있으나, 이 책에 수록된 원작이 시집판인데 비해서 정명순의 번역에 병치된 원문은 ⑤행에 동사가 “spielten”으로 신문판과 같다. 역자는 문장부호를 전혀 번역에 옮기지 않았는데, 아마도 문장부호의 함의를 역어의 선택과 구문의 구성에 담으려고 한 듯하다. 선행 번역들과 달리 시해설을 짧게나마 첨언했는데, 이를테면 ⑦행의 ‘쥐’를 “나치에 대한 은유적 표현”(정명순, 239)으로 설명한다. 쥐=나치의 비유는 반유대주의가 횡행했던 시대적 배경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유대인을 전염병을 옮기는 쥐와 등치시키는 비유와 함께 박멸해야 할 기생충을 연상하도록 세뇌하는 서사는 당시에 널리 퍼져 있었다. (나치의 선전영화인 <영원한 유대인 Der ewige Jude>은 공포감을 야기하는 쥐떼를 배경으로 유대인을 이야기한다.) 시대의 야만은 폭력에 대한 무감각과 무의식적인 동조를 포함한다. 라스커-쉴러가 신문판을 시집판으로 재출간하면서 쥐가 등장하는 3연을 가장 많이 수정한 사실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시인은 1943년에 떼로 몰려다니는 쥐의 인종적 은유와 나치의 정치적인 목적을 분명 깊이 의식했을 것이고 ‘유대인=쥐’의 이미지를 ‘쥐=나치’로 역전시켰다고 판단된다. 이와 같은 배경을 고려하면 이 시에 단정한 화음을 부여하는 교차운 abab의 운율이 깨지는 ⑦행 “Nun tanzen die Ratten im Geklirr”를 그 역사성을 살려서 번역하는 문제가 생겨난다. 정명순은 ⑦행을 “이제는 쥐들이 달가닥 달가닥 춤춘다.”로 옮겼는데, ‘달가닥 달가닥’ 춤추는 모습이 ‘쥐=나치’의 비유에 썩 어울려 보이지는 않는다. 5연은 “아 사랑하는 천사들이/ 쓰디쓴 빵을 뜯고 있는 나를 위해/ 금기를 거슬리면서까지/ 살아있는 내게 벌써 천국 문을 연다.”로 명령문인 원문을 평서문으로 바꾸었으며, 시행의 구성을 한국어 구문의 형식으로 변형하고 내용적으로 인과관계가 드러나도록 문장을 만들어 자국화하였다. 역자는 “구원에 대한 소망을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소천하는 모습으로”(정명순, 239) 해석하며 원문의 형식과 내용에 깊숙이 개입했는데, 이로써 원작시에서는 화자의 갈급한 염원이 전면에 드러나는 5연이 번역문에서는 오히려 화자의 구원이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나타나는 차이가 발생한다.  
  
  
  
6) '''이정순 역의 <나의 파란 피아노>(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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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정순(2022)|이정순 역의 <나의 파란 피아노>(2022)]]<span id="이정순(2022)R" />'''
  
 
이정순이 번역한 <나의 파란 피아노><ref>이정순의 번역은 역자가 선정한 130편의 시들을 편역한 <엘제 라스커쉴러 시선>(지만지)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엘제 라스커-쉴러의 시세계를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국내 최초의 시선집으로 의의가 크다. 이 책에 수록된 시들은 Else Lasker-Schüler(2004): Sämtliche Gedichte, Frankfurt am Main:Suhrkamp 및 Else Lasker-Schüler(2016): Sämtliche Gedichte mit einem Nachwort von Uljana Wolf, Frankfurt am Main: Fischer Verlag을 저본으로 하였으며, 이정순은 시마다 주석을 붙이고 해제도 달았으며, 덧붙여 상세한 작가 소개도 하고 있다.</ref>는 1943년 시집판과 형식이 같은데, ⑦행의 동사 ‘spielen’의 시제에 있어서 만큼은 “문맥상 과거형으로 쓴 원전을 존중”(이정순, 155) 한다는 부연설명과 함께 1937년도에 나온 신문판을 따라서 과거형으로 옮긴다. 제목과 본문에 나오는 ‘blau’를 ‘파란’으로 번역한 것도 눈에 띈다. 역자의 해설에 의하면 “파란색(blau), 그것은 그녀의 시 속에서 일찍부터 ‘시인의 색깔’이고, ‘동경의 색깔’이며, 무한성의 색깔로서 그녀의 시적 견해에 따르면 신의 가장 총애하는 색깔이기도 하다.”(이정순, 377). 이 다층의 상징성을 담기에는 추상성과 환상성이 돋보이는 ‘푸른색’이 ‘파란색’보다 어울린다고 생각되나, 라스커-쉴러가 실제로 파란색/푸른색 장난감 피아노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파란 피아노’가 어울리기도 한다.<ref>라스커-쉴러는 1933년 4월 19일 베를린을 떠나면서 짐을 맡겼는데, 푸른색/파란색 장난감 피아노도 그 안에 있었다고 한다.</ref> “나의 파란 피아노”는 모음 ‘아’가 있어서 ‘나의 푸른 피아노”보다 소리가 더 밝은 느낌을 준다.  
 
이정순이 번역한 <나의 파란 피아노><ref>이정순의 번역은 역자가 선정한 130편의 시들을 편역한 <엘제 라스커쉴러 시선>(지만지)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엘제 라스커-쉴러의 시세계를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국내 최초의 시선집으로 의의가 크다. 이 책에 수록된 시들은 Else Lasker-Schüler(2004): Sämtliche Gedichte, Frankfurt am Main:Suhrkamp 및 Else Lasker-Schüler(2016): Sämtliche Gedichte mit einem Nachwort von Uljana Wolf, Frankfurt am Main: Fischer Verlag을 저본으로 하였으며, 이정순은 시마다 주석을 붙이고 해제도 달았으며, 덧붙여 상세한 작가 소개도 하고 있다.</ref>는 1943년 시집판과 형식이 같은데, ⑦행의 동사 ‘spielen’의 시제에 있어서 만큼은 “문맥상 과거형으로 쓴 원전을 존중”(이정순, 155) 한다는 부연설명과 함께 1937년도에 나온 신문판을 따라서 과거형으로 옮긴다. 제목과 본문에 나오는 ‘blau’를 ‘파란’으로 번역한 것도 눈에 띈다. 역자의 해설에 의하면 “파란색(blau), 그것은 그녀의 시 속에서 일찍부터 ‘시인의 색깔’이고, ‘동경의 색깔’이며, 무한성의 색깔로서 그녀의 시적 견해에 따르면 신의 가장 총애하는 색깔이기도 하다.”(이정순, 377). 이 다층의 상징성을 담기에는 추상성과 환상성이 돋보이는 ‘푸른색’이 ‘파란색’보다 어울린다고 생각되나, 라스커-쉴러가 실제로 파란색/푸른색 장난감 피아노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파란 피아노’가 어울리기도 한다.<ref>라스커-쉴러는 1933년 4월 19일 베를린을 떠나면서 짐을 맡겼는데, 푸른색/파란색 장난감 피아노도 그 안에 있었다고 한다.</ref> “나의 파란 피아노”는 모음 ‘아’가 있어서 ‘나의 푸른 피아노”보다 소리가 더 밝은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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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배수아 역의 <나의 푸른 피아노>(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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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배수아(2023)|배수아 역의 <나의 푸른 피아노>(2023)]]<span id="배수아(2023)R" />'''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배수아도 엘제 라스커-쉴러의 시선집을 번역 출판했다. 이 번역 시집은 특이하게도 미국 시인 브룩스 핵스턴 Brooks Haxton이 편역한 <My blue piano> (시러큐스대학교 출판부, 2015)를 완역한 것으로, 책의 제목을 <우리는 밤과 화해하기 원한다>로 바꾸었다.<ref>이 제목은 라스커-쉴러가 1910년에 발표했던 시 <화해>(Versöhnung) 중 “Wir wollen uns versöhnen die Nacht-”를 번역한 것이다.</ref> 기점텍스트인 <My blue piano>가 독일어-영어 대역본이기 때문에 독일어 원작을 번역한 것이 분명하나 자연스레 영어 번역을 참조했을 가능성도 있다.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배수아도 엘제 라스커-쉴러의 시선집을 번역 출판했다. 이 번역 시집은 특이하게도 미국 시인 브룩스 핵스턴 Brooks Haxton이 편역한 <My blue piano> (시러큐스대학교 출판부, 2015)를 완역한 것으로, 책의 제목을 <우리는 밤과 화해하기 원한다>로 바꾸었다.<ref>이 제목은 라스커-쉴러가 1910년에 발표했던 시 <화해>(Versöhnung) 중 “Wir wollen uns versöhnen die Nacht-”를 번역한 것이다.</ref> 기점텍스트인 <My blue piano>가 독일어-영어 대역본이기 때문에 독일어 원작을 번역한 것이 분명하나 자연스레 영어 번역을 참조했을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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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제 라스커-쉴러의 시 <나의 푸른 피아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발표되었고, 전쟁의 잔악함이 절정에 달했을 때 시집으로 묶였다. 라스커-쉴러는 관능적인 어휘로 예술의 아름다움을 추구한 시인이었고, 예루살렘에 머문 말년에 유대인과 아랍인의 화해를 꿈꾸던 비정치적인 시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유대-여성-시인’ 라스커-쉴러의 이 시를 홀로코스트의 역사를 통하지 않고서 읽을 수 있는가? <나의 푸른 피아노>는 번역자에게 해석자의 역할을 강력히 요구한다. 시적 화자는 예술 활동을 할 수 없는 현시점에서 예술혼을 불태웠던 과거를 돌아보면서 애절한 목소리로 아련한 슬픔을 노래하는가? 혹은 나치 독일의 땅과 언어에서 내쫓긴 탄압과 박해의 경험을 꾹꾹 눌러 담아 비통하게 울음을 울부짖는가? 이런 양립하기 곤란한 내용 해석은 예를 들어 시의 한 가운데서 ‘춤추는’ ‘쥐 die Ratten’을 생쥐, 쥐, 쥐떼, 시궁쥐, 혹은 쥐새끼 등에서 무엇을 역어로 선택할 것인지 묻는다. 평자의 주관적인 견해로는 번역자들이 시의 역사적·정치적 맥락을 잘 알고 있으나, 이 점을 부각하기보다는 ‘쥐’라는 중립적인 역어를 선택하여 좀 더 보편적인 차원으로 확장하는 시도를 하는 듯 보인다. 또 다른 공통된 특징으로는 이정순의 번역을 제외하면 역자들이 기점텍스트를 제시하지 않으며, 문장부호를 포함하여 시의 형식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듯 보인다. 그런데 이 시는 시제 하나의 변화와 문장부호의 이동만으로도 의미와 정서가 달라진다는 점에서 시 번역의 어려움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한편 지금까지의 번역과 차별되는 새로운 번역을 부르고 있다.  
 
엘제 라스커-쉴러의 시 <나의 푸른 피아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발표되었고, 전쟁의 잔악함이 절정에 달했을 때 시집으로 묶였다. 라스커-쉴러는 관능적인 어휘로 예술의 아름다움을 추구한 시인이었고, 예루살렘에 머문 말년에 유대인과 아랍인의 화해를 꿈꾸던 비정치적인 시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유대-여성-시인’ 라스커-쉴러의 이 시를 홀로코스트의 역사를 통하지 않고서 읽을 수 있는가? <나의 푸른 피아노>는 번역자에게 해석자의 역할을 강력히 요구한다. 시적 화자는 예술 활동을 할 수 없는 현시점에서 예술혼을 불태웠던 과거를 돌아보면서 애절한 목소리로 아련한 슬픔을 노래하는가? 혹은 나치 독일의 땅과 언어에서 내쫓긴 탄압과 박해의 경험을 꾹꾹 눌러 담아 비통하게 울음을 울부짖는가? 이런 양립하기 곤란한 내용 해석은 예를 들어 시의 한 가운데서 ‘춤추는’ ‘쥐 die Ratten’을 생쥐, 쥐, 쥐떼, 시궁쥐, 혹은 쥐새끼 등에서 무엇을 역어로 선택할 것인지 묻는다. 평자의 주관적인 견해로는 번역자들이 시의 역사적·정치적 맥락을 잘 알고 있으나, 이 점을 부각하기보다는 ‘쥐’라는 중립적인 역어를 선택하여 좀 더 보편적인 차원으로 확장하는 시도를 하는 듯 보인다. 또 다른 공통된 특징으로는 이정순의 번역을 제외하면 역자들이 기점텍스트를 제시하지 않으며, 문장부호를 포함하여 시의 형식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듯 보인다. 그런데 이 시는 시제 하나의 변화와 문장부호의 이동만으로도 의미와 정서가 달라진다는 점에서 시 번역의 어려움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한편 지금까지의 번역과 차별되는 새로운 번역을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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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text-align: right">박희경</div>
 
<div style="text-align: right">박희경</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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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각주'''

2025년 11월 24일 (월) 07:52 기준 최신판

엘제 라스커-쉴러(Else Lasker-Schüler, 1869-1945)의 시

나의 푸른 피아노
(Mein blaues Klavier)
작가엘제 라스커-쉴러(Else Lasker-Schüler)
초판 발행1937
장르

작품소개

엘제 라스커-쉴러의 시로 1937년 신문 지면을 통해서 발표되었으며, 1943년에 동명의 시집에 수록 출간되었다. 총 13행으로, 2행-2행-3행-2행-4행씩인 5개의 연으로 구성되어있다. 운율은 약강격인 얌부스가 주를 이루며 전체적으로 교차운(abab)이나 시의 한가운데인 일곱 번째 행은 예외이다. 시의 화자는 일인칭 ‘나’이다. 화자가 고향 집에 갖고 있는 푸른 피아노는 야만의 시대가 되면서 어두운 지하실에 있다. 곡을 연주하고 노래했을 피아노의 건반들은 부서졌고 쥐들이 시끄럽게 설쳐댄다. 화자는 상실을 슬퍼하면서 천사가 하늘의 문을 열어주기를 염원한다. 시의 제목이기도 한 푸른 피아노는 라스커-쉴러가 망명길에 오르면서 베를린에 남겨둔 장난감 피아노를 가리킨다고 한다. 이 시에서는 고향과 행복한 유년기를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동시에 예술과 창조력을 은유적으로 나타낸다. 미술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졌던 라스커-쉴러는 푸른색과 피아노(소리)를 조합하여 독창적인 이미지를 만들며, 시 전체에 환상적인 정조를 부여한다. 실향과 유랑의 신산한 삶, 유대주의의 종교적인 모티브, 모국어의 소실 (시인이 1939년부터 머물던 예루살렘에서는 독일어가 금지되었다) 등등, 다층위의 의미들이 감각적인 시어와 음악적인 리듬에 절묘하게 짜이면서 탁월한 서정성을 이루고 있다. 이 시는 나치 시대에 독일을 떠난 작가들의 문학 활동을 가리키는 ‘망명문학’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한편 오늘날 20세기 최고의 독일시 중 한 편으로 손꼽힌다. 국내에서는 1971년 이동승에 처음 번역되어 <20세기시선>에 수록 출판되었다(을유문화사).

초판 정보

Lasker-Schüler, Else(1937): Mein blaues Klavier. In: Neue Zürcher Zeitung. 7. Feb. 1937. 222, 2.

<단행본 초판>

Lasker-Schüler, Else(1943): Mein blaues Klavier. In: Mein blaues Klavier - Neue Gedichte. Jerusalem: Jerusalem Press, 14.


번역서지 목록

번호 개별작품제목 번역서명 총서명 원저자명 번역자명 발행연도 출판사 작품수록 페이지 저본 번역유형 작품 번역유형 비고
나의 푸른 피아노 20世紀詩選 = An Anthology of twentieth century verse 世界文學全集 69 엘제 라스커-쉴러 李東昇 1971 乙酉文化社 260 편역 완역
내 푸른 피아노 20世紀 獨逸詩 1 探求新書 177 엘제 라스커-쉴러 전광진 1982 探求堂 350-351 편역 완역
3 나의 푸른 피아노 독일 시선 : 18세기에서 현대까지 엘제 라스커-쉴러 정두홍 2005 삼영 83-84 편역 완역
나의 푸른 피아노 독일시선집 엘제 라스커-쉴러 최연숙 2013 신아사 228-229 편역 완역
나의 파란 피아노 엘제 라스커쉴러 시선 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엘제 라스커쉴러 이정순 2022 지식을만드는지식 155-158 편역 완역
나의 푸른 피아노 독일시 : 독일 서정 엘제 라스커 쉴러 정명순 2022 전남대학교출판문화원 240-241 편역 완역
나의 푸른 피아노 우리는 밤과 화해하기 원한다 : 엘제 라스커 쉴러 시집 엘제 라스커 쉴러 배수아 2023 아티초크 127-128 완역 완역


번역비평

1. 번역 현황 및 개관

<나의 푸른 피아노>는 유대계 작가이자 시인인 엘제 라스커-쉴러가 스위스와 팔레스티나를 불안하게 떠돌던 1937년에 취리히 신문에 발표한 시이다. 라스커-쉴러는 20세기 초반 베를린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했던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고, 1932년에 독일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클라이스트 상을 수상한 저명인사였으나, 공공연히 횡행하던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피하지 못했고 1933년에 나치가 정권을 잡자 독일을 떠나야 했다. 그 후 라스커-쉴러는 망명 허가를 내주지 않은 스위스와 꿈꾸던 고향이 아니라 낯선 고장이던 팔레스티나를 오가며 1945년 죽을 때까지 궁핍과 결핍에 시달렸다. <나의 푸른 피아노>가 발표된 이후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달아, 1938년에 라스커-쉴러의 독일 시민권이 박탈당했고 저술물은 분서 처분을 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스위스는 비자 갱신 문제로 팔레스티나에 머물던 라스커-쉴러의 재입국을 거부했고 예루살렘에서는 독일어의 공적인 사용이 금지되었다. <나의 푸른 피아노>는 ‘야만의 시대’를 살았던 시인의 비극적인 삶을 탁월한 서정성에 담고 있는데, 라스커-쉴러가 이 시를 1943년에 예루살렘에서 펴낸 마지막 시집 <나의 푸른 피아노>의 표제작으로 출간했을 때 홀로코스트의 전모를 (얼마나) 알았는지 밝혀지지 않았으나, 오늘날의 독자라면 국가 주도하에 일어난 제노사이드의 프리즘으로 이 시를 읽게 된다.

국내에서는 이동승, 전광진, 김주연, 정두홍, 최연숙, 정명순, 이정순, 배수아 등 여덟 명의 번역자가 번역하였다. 이동승의 초역은 1971년에 <나의 푸른 피아노>로 번역되어 을유문화사에서 펴낸 <20世紀詩選>에 실렸다. 그 후 전광진이 1982년에 <내 푸른 피아노>로 번역하여 탐구당에서 나온 <20世紀 獨逸詩>에 실었고, 김주연이 1994년에 <나의 푸른 피아노>로 번역하여 정우사에서 나온 편역서 <나의 푸른 피아노. 독일현대시>에 표제작으로 수록하였다. 2005년에는 정두홍이 <나의 푸른 피아노>로 번역해서 <독일 시선: 18세기에서 현대까지>에 실었는데 독일어 원시도 나란히 실은 대역본이다. 2013년에는 최연숙이 <나의 푸른 피아노>로 번역하여, 중세 이래 현대에 이르는 독일시들을 선별하여 묶고 번역한 편저 <독일시선집>에 실었다. 2022년에 정명순이 번역한 <나의 푸른 피아노>는 독일의 인젤 출판사에서 나온 시선집 <Die besten deutschen Gedichte>를 편역한 책 <독일 시. 독일 서정>에 실렸다. 같은 해에 이정순은 제목을 <나의 파란 피아노>로 하여 라스커-쉴러의 시를 모은 시선집 <엘제 라스커쉴러 시선>에 실었고, 2023년에는 배수아가 <나의 푸른 피아노>로 번역하여 라스커-쉴러의 시선집 <나는 밤과 화해하기를 원한다>에 실었다. 이처럼 <나의 푸른 피아노>는 대략 십 년 정도의 시차를 두고 꾸준히 번역되었다. 특히 이정순과 배수아가 라스커-쉴러의 시선집을 출간한 것은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시인을 (재)발견하고 제대로 평가가 이루어지도록 토대를 마련한 의의가 크다.


2. 개별 번역 비평

엘제 라스커-쉴러는 시 <Mein blaues Klavier>를 두 차례 직접 출간했는데, 한번은 1937년에 신문에 실었고(이하 신문판으로 약칭) 또 한번은 1943년에 펴낸 마지막 시집에 표제작으로 실었다(이하 시집판으로 약칭). 두 편집 간에는 어휘와 문장부호에서 일견 소소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꽤 큰 차이가 있다.[1]


Mein blaues Klavier (1937) Mein blaues Klavier (1943)

① Ich habe zu Hause ein blaues Klavier
② Und kenne doch keine Note.

③ Es steht im Dunkel der Kellertur,
④ Seitdem die Welt verrohte.

Es spielten Sternenhände vier ―
Die Mondfrau sang im Boote.
― Nun tanzen die Ratten im Geklirr.

⑧ Zerbrochen ist die Klaviatür.
⑨ Ich beweine die blaue Tote.

⑩ Ach liebe Engel öffnet mir
⑪ ― Ich aß vom bitteren Brote ―
⑫ Mir lebend schon die Himmelstür,
⑬ Auch wider dem Verbote.

① Ich habe zu Hause ein blaues Klavier
② Und kenne doch keine Note.

③ Es steht im Dunkel der Kellertür,
④ Seitdem die Welt verrohte.

Es spielen Sternenhände vier
― Die Mondfrau sang im Boote ―
Nun tanzen die Ratten im Geklirr.

Zerbrochen ist die Klaviatür .....
⑨ Ich beweine die blaue Tote.

⑩ Ach liebe Engel öffnet mir
⑪ ― Ich ass vom bitteren Brote ―
Mir lebend schon die Himmelstür ―
⑬ Auch wider dem Verbote.


신문판에서 시집판으로 어떻게 변화했는지 하나하나 짚어보자. 1) ③행의 Klaviatur가 Klaviatür로 바뀌었다. 2) ⑤행에 동사 “spielten”이 과거형에서 현재형 “spielen”으로 달라졌다. 3) ⑤행을 끝내고 ⑦행을 시작하는 줄표가 ⑥행으로 자리를 옮겼다. 4) ⑧행이 마침표로 끝났는데, 시집판에서 말줄임표 “.....”로 바뀌었다. 5) ⑪행에 동사 “aß”가 “ass”로 바뀌었다. 6) ⑫행에 줄표가 없었으나, 시집판에서 첨가되었다.

특히 ⑤행의 시제의 변화 및 ⑤,⑥,⑦행에서 줄표 위치의 이동은 3연의 내용까지도 변모시킨다. 신문판에서는 ⑤행 ‘피아노를 연주했다’와 ⑥행 ‘달의 여인이 노래했다’로 과거에 동시적으로 발생했던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⑦행의 줄표와 ‘지금은 쥐떼가 춤춘다’는 사태는 과거와 현재를 대조한다. 이 세 시행을 번역해보면 “별들의 손 넷이 연주했어 -/ 달의 여인은 쪽배에서 노래했지./ - 지금은 춤추지 쥐새끼들이 새청맞게 소리내며” 정도가 되겠다. ⑤행과 ⑥행의 예술적 행위가 ⑦행에서 피아노를 망가트리며 설쳐대는 쥐들이 내는 소음으로 바뀐다. 시의 한가운데 위치한 ⑦행은 두 행씩 교차운으로 운율을 만드는 형식을 깨뜨린다. 이에 비해서 시집판에서는 ⑤행이 현재 시제이고, 줄표가 ⑥행을 삽입구로 틀지운다. 번역해 보면 “별들의 손 넷이 연주하네/ - 달의 여인은 쪽배에서 노래했지 -/ 이제 춤추지 쥐새끼들이 새청맞게 소리내며”로, 피아노를 연주하고 쥐들이 그 음악에 맞춰서 춤을 추는 모양이 된다. 그런데 ⑤행이 불러일으키는 화음으로 가득한 피아노의 청각적 이미지와 ⑦행에서 쥐떼가 ‘im Geklirr’, 불쾌한 불협화음 내지는 소음을 내면서 난무(亂舞)하는 것이 상호 간 호응하지 않는다. 그리고 달의 여인이 과거에 노래했다는 ⑥행은 ⑤행, ⑦행과 병렬적인 관계도 아니고 인과관계도 아닌 모호한 삽입구가 되고 만다. 그래서 독일어권의 라스커-쉴러 연구자들은 시집판 ⑤행의 “spielen”을 시인이 편집하면서 ‘spielten’을 오기(誤記)한 것으로 본다.[2] 사정이 이러하므로 번역에 있어서 저본의 선택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데, 번역자 이정순만이 예외적으로 번역의 저본을 밝히고 있을 뿐이다. 개별 번역 비평에 있어서는 번역에 차별성을 밝히기가 어려운 정두홍의 번역을 제외하고 모든 번역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이동승 역의 <나의 푸른 피아노>(1971)

처음으로 이 시를 번역한 이동승은 시의 제목을 <나의 푸른 피아노>로 옮겼다. 저본을 제시하지 않았으며, ⑤행의 현재형 시제로 보면 시집에 실린 시와 같으나 ⑧행의 말줄임표는 없다. 한편, ④행에는 “世界가 불타버린 以來 −” [3]로 줄표를 첨가했는데, 이는 역자가 시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결정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동승의 번역은 초역이지만 글의 흐름이 유연하며, 어휘를 서정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도록 번역하였다. 제목의 “Mein blaues Klavier”의 색깔을 ‘푸른’으로 옮겨서 신비로운 이미지를 살리고, ⑤행의 “Sternenhände”를 “별님의 손”으로 번역하여 동화적인 정서를 가미한다. 4연(⑧,⑨행) “鍵盤은 부서졌다./ 나는 이 푸른 死者에 대해 눈물을 뿌린다.”는 대목은 원문의 ‘beweinen’에 함의된 ‘울다 weinen’를 살리면서 시적으로 쓰고 있다. 그런데 오류를 피하지 못하기도 했는데, 3연(⑤,⑥,⑦행) “별님의 손이 네 시면 연주하고/ - 月婦人은 보우트에서 노래했다 -/ 音響들 속에서 쥐들이 춤춘다.”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두 손을 가리키는 “vier”를 ‘네 시’라고 하여 시간으로 오역하였다. 3연의 번역에서 피아노의 연주, 달의 노래, 쥐의 춤이 아기자기하게 어우러지는 것도 문제적인데, 라스커-쉴러의 원작에서 나타나는 파괴적이고 끔찍한 내용과 상당히 어긋나기 때문이다.


2) 전광진 역의 <내 푸른 피아노>(1982)

전광진은 제목을 <내 푸른 피아노>로 번역했다. 원작을 병치한 대역본으로, 1943년 시집에 수록된 시집판의 시제와 문장부호를 충실히 옮겼다. ⑪행을 신문판처럼 “aß”로 쓴 것은 역자가 현대 독일어의 정서법에 맞춰서 고친 것으로 보인다. 이 번역은 원작에 있는 세 개의 문(門), “Kellertür”, “Klaviatür”, “Himmelstür”를 모두 ‘문’으로 살리는 점에서 다른 번역들과 차별성을 갖는다.


③ Es steht im Dunkel der Kellertür,
⑧ Zerbrochen ist die Klaviatür .....
⑫ Mir lebend schon die Himmelstür −

피아노는 어두컴컴한 地下室 문안에 놓여있다.
부서져 버린 피아노 문······
살아 있는 나에게 어느덧 天國의 門을 열어준다−


원작에서 ‘~tür’는 각운을 이루면서 시에 리듬을 만들어 낸다. 라스커-쉴러는 운을 맞추기 위해서 피아노 건반을 가리키는 ‘Klaviatur’(신문판)을 일부러 ‘Klaviatür’(시집판)으로 바꾸었다. 그래서 위 세 어휘를 직역하면 ‘지하실(의) 문’, ‘(피아노) 건반’, ‘하늘의 문’이 된다. 전광진의 번역에서는 각각 “地下室 문”, “피아노 문······”, “天國의 門”인데, 한국어의 어순에 따르다 보니 ‘문’이라고 소리가 반복되어도 리듬감을 만들지는 못한다. 그리고 “피아노 문”은 직관적으로 피아노 뚜껑을 가리키는 이미지로 은유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마는데, 그래도 세 번 ‘문’이 반복됨으로써 독자가 그 ‘의미’를 찾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전광진의 번역은 ⑦행을 “이제 쥐들이 달캉달캉 춤을 춘다.”고 옮겼다. “달캉달캉”은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달카당달카당”의 줄임말로 “단단하고 작은 물건이 서로 거세게 자꾸 부딪쳐 울리는 소리를 나타내는 말”이다. 원작에서는 ⑦행의 “im Geklirr”가 쥐들이 피아노 건반을 깨부수거나 혹은 부서지고 깨어진 잔해 위에서 설쳐대는 쥐들이 내는 청각적인 소음을 가리키는데, ‘달캉달캉’의 의성어로는 원문의 이미지가 썩 잘 나타나지는 않는다. 전광진 번역의 또 다른 특징은 명령문의 형식으로 쓰인 5연(⑩~⑬행)을 평서문으로 바꿔서 옮긴 것이다. “아아 귀여운 天使들 나에게/ -나는 쓰디쓴 빵을 뜯어먹고 있었다- / 살아 있는 나에게 어느덧 天國의 門을 열어준다./ 禁止된 것도 무릅쓰고.” 원작에서는 2인칭 복수인 ‘너희들 사랑스러운 천사들’에게 하는 기도로, 살아 있는 지금 천국의 문을 열어달라는 염원이다. 전광진의 번역은 평서문으로 (잘못) 번역함으로써 죽음의 문턱에 있는 화자가 구원을 받는 이미지로 끝나는 부작용 효과를 낳는다.


3) 김주연 역의 <나의 푸른 피아노>(1994)

김주연의 번역은 제목을 다시 이동승의 번역과 같이 <나의 푸른 피아노>로 옮겼다. 이후의 번역도 대체적으로 이 번역을 제목으로 하고 있다. 저본을 밝히지 않았으나 시제와 문장부호로 볼 때 시집판 원작을 번역하였다. 이 번역은 무엇보다도 선행 번역들에서 나타났던 문법적인 오류가 없이 원문을 충실히 옮긴 것으로 판단된다. 김주연이 번역한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① 나는 집에 푸른 피아노 한 대를 갖고 있다
② 그러나 하나의 음도 알지 못한다.

③ 그것은 지하실문의 어둠 속에 서 있다,
④ 세계가 야만화한 이후로.

⑤ 별의 손 넷이 연주한다
⑥ − 달의 여인은 보트 안에서 노래하였다 − 
⑦ 이제 쥐들이 달그락거리며 춤춘다.

⑧ 건반이 부서졌다 ···
⑨ 나는 푸른 死者를 애도한다.

⑩ 아, 친애하는 천사여, 나에게
⑪ − 나는 쓰디쓴 빵을 먹었다 − 
⑫ 나에게 살아 있을 때 하늘의 문을 열어다오 − 
⑬ 禁令을 거스를지라도

④행 “Seitdem die Welt verrohte.”를 “세계가 야만화한 이후로”라고 옮긴 것도 눈에 띈다. 한국어의 언어문화에서 정치적인 독재와 도덕적인 타락이 지배했던 시기를 종종 ‘야만’과 결부시켜 야만의 시대 등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김주연의 번역은 독자에게 역사적 상상력을 작동시키는 효과를 발휘한다. 다른 번역자들도 동사 ‘verrohte’를 ‘불타다’(이동승), ‘타락하다’(정두홍, 배수아), ‘야비해지다’(전광진, 최연숙, 이정순), ‘거칠어지다’(정명순) 등으로 옮겨서 원작이 탄생한 시대의 폭력성을 나타내고 있으나, 김주연의 ‘야만이 지배하는 세계’는 원문의 사전적 뜻을 거의 직역하면서 또한 국가 주도하에 일어난 반유대주의를 가리키는 데 적합해 보인다. (일례로 이미 1935년에 발효된 뉘른베르크 인종법은 유대인을 독일국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시민권을 박탈한다). ⑦행은 “이제 쥐들이 달그락거리며 춤춘다.”로 옮겼다. 이미 전광진이 ‘달캉달캉’으로 번역했고, 김주연 이후에 정두홍, 정명순, 배수아 등도 공통적으로 ‘달가닥’으로 옮겼다. 이로써 3연(⑤,⑥,⑦행)에서 진정한 예술이 사라지고 가벼운 유흥으로 전락한 현주소를 보여주는 모습이 나타난다. 어쩌면 번역자들이 이 부분을 예술이 불가능한 시대적 문제로 해석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이러한 해석과 번역에서는 라스커-쉴러가 반유대주의가 팽배한 시대에서 유대인으로 겪은 ‘야만화’의 경험이 탈각된다.

5연은 원문 ⑩행의 “mir”, ⑪행의 “Ich”, ⑫행의 “mir”를 전부 살린다. ⑩행의 “나에게”에서 ⑫행의 “나에게”로 부드럽게 이어지면서, ⑪행의 “나는”을 감싸는 모양도 원문에 충실하다. ⑬행도 원문의 문법을 지키면서 또한 의미도 살렸다.


4) 최연숙 역의 <나의 푸른 피아노>(2013)

최연숙의 번역은 대역본으로 ⑦행이 과거 시제로 신문판과 같으나 문장부호는 신문판과 다르고 시집판과도 다르다. 판본이 확실하지 않아서 저본을 밝히지 않은 점이 상당히 아쉽다. 최연숙의 번역은 청자를 가정하고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②행 “난 악보를 몰라요.”, ④행 “피아노는 어두운 지하실에 있네요.”, ⑤행 “별 손 넷이 연주를 했지요”, ⑨행 “나는 내 푸른 악보가 아쉬워 눈물짓네요.” 등, 종결어미를 존대를 나타내는 ‘~요’체로 끝낸다. 이전의 번역자들이 모두 ‘~이다’식의 서술형 종결어미를 택한 것과 차별된다.

⑦행 “이제 쥐들이 찍찍거리며 춤을 추지요.”는 “im Geklirr”를 쥐들이 내는 ‘찍찍’ 소리로 옮겼다. 이는 원문에 담긴 쇳소리와 유리 조각 등이 부딪치는 소리에서 멀어진 번역이지만, ‘달캉달캉’(전광진), ‘달그락거리며’(김주연, 정두홍), ‘달가닥 달가닥’(정명순), ‘달가닥대며’(배수아) 등 보다 쥐들이 설치며 난무하는 행태를 나타내기에 더 효과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4연(⑧,⑨행)은 “피아노 문이 부서지고/ 나는 내 푸른 악보가 아쉬워 눈물짓네요.”로 원문인 “die blaue Tote”를 ‘푸른 악보’로 옮겨서 거의 창작하다시피 했다. 5연(⑩~⑬행)은 “아 사랑하는 천사가 내게/ -나는 쓰디쓴 빵을 먹었어요.-/ 벌써부터 천국의 문을 열어주네요./ 금기인데도 불구하고.”이다. 전광진의 번역, 정두홍의 번역처럼 평서문으로 옮겼는데, 원문 ⑫행의 “lebend schon”에서 ‘살아있음’을 생략하고, ‘벌써부터’로 번역하였다. 그래서 최연숙의 번역에서는 천사가 천국의 문을 열어주는 것이 왜 금기인지 그 이유가 누락된 채, 시의 화자에게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음이 확실시된다.


5) 정명순 역의 <나의 푸른 피아노>(2022)

정명순의 번역은 독일어 대역본인데 번역과 함께 수록된 원작의 출처가 불분명하다. 독일의 문학평론가였던 라이히-라니츠키가 편집한 시선집인 <독일어 명시 Die besten deutschen Gedichte>를 참조했다고 밝히고 있으나, 이 책에 수록된 원작이 시집판인데 비해서 정명순의 번역에 병치된 원문은 ⑤행에 동사가 “spielten”으로 신문판과 같다. 역자는 문장부호를 전혀 번역에 옮기지 않았는데, 아마도 문장부호의 함의를 역어의 선택과 구문의 구성에 담으려고 한 듯하다. 선행 번역들과 달리 시해설을 짧게나마 첨언했는데, 이를테면 ⑦행의 ‘쥐’를 “나치에 대한 은유적 표현”(정명순, 239)으로 설명한다. 쥐=나치의 비유는 반유대주의가 횡행했던 시대적 배경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유대인을 전염병을 옮기는 쥐와 등치시키는 비유와 함께 박멸해야 할 기생충을 연상하도록 세뇌하는 서사는 당시에 널리 퍼져 있었다. (나치의 선전영화인 <영원한 유대인 Der ewige Jude>은 공포감을 야기하는 쥐떼를 배경으로 유대인을 이야기한다.) 시대의 야만은 폭력에 대한 무감각과 무의식적인 동조를 포함한다. 라스커-쉴러가 신문판을 시집판으로 재출간하면서 쥐가 등장하는 3연을 가장 많이 수정한 사실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시인은 1943년에 떼로 몰려다니는 쥐의 인종적 은유와 나치의 정치적인 목적을 분명 깊이 의식했을 것이고 ‘유대인=쥐’의 이미지를 ‘쥐=나치’로 역전시켰다고 판단된다. 이와 같은 배경을 고려하면 이 시에 단정한 화음을 부여하는 교차운 abab의 운율이 깨지는 ⑦행 “Nun tanzen die Ratten im Geklirr”를 그 역사성을 살려서 번역하는 문제가 생겨난다. 정명순은 ⑦행을 “이제는 쥐들이 달가닥 달가닥 춤춘다.”로 옮겼는데, ‘달가닥 달가닥’ 춤추는 모습이 ‘쥐=나치’의 비유에 썩 어울려 보이지는 않는다. 5연은 “아 사랑하는 천사들이/ 쓰디쓴 빵을 뜯고 있는 나를 위해/ 금기를 거슬리면서까지/ 살아있는 내게 벌써 천국 문을 연다.”로 명령문인 원문을 평서문으로 바꾸었으며, 시행의 구성을 한국어 구문의 형식으로 변형하고 내용적으로 인과관계가 드러나도록 문장을 만들어 자국화하였다. 역자는 “구원에 대한 소망을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소천하는 모습으로”(정명순, 239) 해석하며 원문의 형식과 내용에 깊숙이 개입했는데, 이로써 원작시에서는 화자의 갈급한 염원이 전면에 드러나는 5연이 번역문에서는 오히려 화자의 구원이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나타나는 차이가 발생한다.


6) 이정순 역의 <나의 파란 피아노>(2022)

이정순이 번역한 <나의 파란 피아노>[4]는 1943년 시집판과 형식이 같은데, ⑦행의 동사 ‘spielen’의 시제에 있어서 만큼은 “문맥상 과거형으로 쓴 원전을 존중”(이정순, 155) 한다는 부연설명과 함께 1937년도에 나온 신문판을 따라서 과거형으로 옮긴다. 제목과 본문에 나오는 ‘blau’를 ‘파란’으로 번역한 것도 눈에 띈다. 역자의 해설에 의하면 “파란색(blau), 그것은 그녀의 시 속에서 일찍부터 ‘시인의 색깔’이고, ‘동경의 색깔’이며, 무한성의 색깔로서 그녀의 시적 견해에 따르면 신의 가장 총애하는 색깔이기도 하다.”(이정순, 377). 이 다층의 상징성을 담기에는 추상성과 환상성이 돋보이는 ‘푸른색’이 ‘파란색’보다 어울린다고 생각되나, 라스커-쉴러가 실제로 파란색/푸른색 장난감 피아노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파란 피아노’가 어울리기도 한다.[5] “나의 파란 피아노”는 모음 ‘아’가 있어서 ‘나의 푸른 피아노”보다 소리가 더 밝은 느낌을 준다.

⑤ 별들의 손 넷이서 연주를 했었지			
⑥ - 달 부인(月婦人)은 보트 위에서 노래를 불러 주었는데- 
⑦ 지금은 시궁쥐들이 그 삐걱 소리에 맞춰 춤을 춘다네. 

⑧ 산산이 바스러졌구나, 그 피아노 건반들...		
⑨ 나 그 파란 시체들을 애도한다.			

이 번역에서는 피아노의 소리와 달의 노래소리가 조화롭게 어우러졌던 과거와 쥐들이 피아노 위를 뛰어다니며 건반을 부수면서 내는 불협화음이 지배하는 현재가 꽤 선명히 대비된다. 선행 번역들이 “Ratten”을 ’‘쥐’로 “im Geklirr”를 ‘달카당’ 등으로 옮긴 데 비해서 이정순은 ‘시궁쥐’로 특정하고 ‘삐걱 소리’로 의역하여, “현재 진행 중인 나치의 만행과 유럽 대륙에서의 전화”(이정순, 157)라는 역사적인 맥락을 드러내려고 시도한다. 형식적인 특징으로는 “그 삐걱 소리”, “그 피아노 건반들”, “그 파란 시체들을”에서 나타나는 지시관형사 ‘그’의 반복적인 삽입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역자가 피아노 건반이 부서진 ⑧행 “Zerbrochen ist die Klaviatür .....”를 상당히 중요시한다고 보이는데, 역자들이 대체적으로 한국어 구문에 맞추어서 ‘건반이 부서졌다’와 같이 주어를 앞세우는 것과 달리 이정순은 원문의 어순을 그대로 옮기어 술어를 주어에 앞세운다. 그리고 동사 ‘zerbrechen’에 ‘산산히’라는 부사를 덧붙여 ‘산산이 바스러졌구나’라고 옮겨서 파괴의 상태를 강조하면서, 주어를 문장의 끝에 위치시키어 영탄조로 끝낸 술어의 여운을 길게 살린다. ⑨행 “die blaue Tote”(3인칭 단수)를 부서진 건반 하나하나를 가리키는 ‘파란 시체들’(3인칭 복수)로 옮겼다. 이렇듯 이정순의 번역에는 역자의 해석이 꽤 녹아 들어있는데, 아래의 시행들에서도 유감없이 나타난다.

⑩ 아아, 사랑하는 천사님네들, 부디 문을 열어 주세요	
⑪ - 나 쓰디쓴 빵을 뜯어 먹고 있었는데 -			
							
⑫ 멀쩡히 살아 있는 나에게 천국의 문을 - 			
⑬ 물론 [신(神)의] 금지령(禁止令)은 어기셔야죠.

여기서 이정순은 원작에서는 하나의 연을 이루는 ⑩행~⑬행을 두 개의 연으로 나눈다. ⑫행에서 “Mir lebend schon”을 ‘멀쩡히 살아 있는 나에게’로 옮겨서 원문을 상당히 주관적으로 해석해서 번역했고, ⑬행에서는 금지령 앞에 “[신(神)의]”를 첨언하고 “역자의 자의적인 표현임을”(이정순, 156) 밝힌다는 주석을 달았다. 이처럼 선행 번역들에 비해서 이정순의 번역은 역자의 해석이 번역에 녹아들어 있음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7) 배수아 역의 <나의 푸른 피아노>(2023)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배수아도 엘제 라스커-쉴러의 시선집을 번역 출판했다. 이 번역 시집은 특이하게도 미국 시인 브룩스 핵스턴 Brooks Haxton이 편역한 <My blue piano> (시러큐스대학교 출판부, 2015)를 완역한 것으로, 책의 제목을 <우리는 밤과 화해하기 원한다>로 바꾸었다.[6] 기점텍스트인 <My blue piano>가 독일어-영어 대역본이기 때문에 독일어 원작을 번역한 것이 분명하나 자연스레 영어 번역을 참조했을 가능성도 있다.

배수아의 번역은 역자가 원문을 비교적 자유롭게 옮기는 특징이 있는데, 일례로 ①행 “Ich habe zu Hause ein blaues Klavier”에서 다른 번역자들과 달리 ‘zu Hause’를 생략하고 “나는 푸른 피아노를 갖고 있네”로 옮겼다. ‘zu Hause’는 실제로 시의 화자가 집을 떠났고 피아노와 화자의 시간적, 공간적 거리를 알려주는 중요한 정보라는 점에서 언어에 지극히 예민한 시인 번역자가 그 부분을 번역하지 않은 선택을 한 까닭이 궁금하다. ③행과 ④행은 “온 세계의 타락 이후/ 피아노는 지하실 문 그늘에 서 있네”로 원작의 구문을 한국어의 구문에 맞춰서 시행을 바꾸었다. “온 세계”는 영어 번역인 ‘whole world’를 참조한 것으로 보이는데, 독일어 원문인 “세계 Welt”를 ‘온 세계’로 함으로써 시가 탄생했던 나치독일의 역사적 지평에서 멀어져 실존적인 차원으로 옮겨간다. ⑧행과 ⑨행은 “건반은 부서지고 .../ 나는 푸른 죽음을 우네”로 옮겼다. ‘푸른 죽음’은 핵스턴이 번역한 ‘the blue of death’와 같은데 죽음 그 자체를 가리키면서, 주검을 가리키는 원문 ‘die blaue Tote’에서 멀어졌다. 선행한 번역의 역자들이 원문의 어휘에 주목하여 “그 파란 시체들”(이정순), “푸른 주검들”(정명순), “이 푸른 死者”(이동승, 김주연), “푸른 시신”(정두홍)처럼 직역하는 것과 달리, 배수아의 ⑨행 ‘나는 푸른 죽음을 우네’는 원작을 살짝 스치는 정도지만 원문의 뉘앙스를 살린다고 생각된다. 글자의 차원에서 ‘die blaue Tote’는 부서진 피아노 건반을 가리키지만, 여성 3인칭 단수를 가리키는 ‘die Tote’는 독일어로 시를 빚어낼 수 없는 시인 자신을 가리킬 수도 있고, 나아가 예술하기가 불가능해진 시대 및 제노사이드의 위협에 처한 유대 종족 등을 포괄하여 많은 것을 담을 수 있기에 감각적 인지(‘주검’)에서 관념적 인식(‘죽음’)으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5연에서 시적 화자는 천사를 부르면서 하늘의 문을 열어 달라고 하는데, 배수아는 ⑫행 “Mir lebend schon die Himmelstür ― ”를 “살아 있는 시간에 그것을 보기를 원하노라 -”로 옮긴다. 여기서도 역자는 원문의 어휘 ‘lebend’를 ‘살아 있는 시간’으로 의역하면서 ‘보기를 원하노라’를 덧붙였다. 이로써 배수아의 번역에서는 시의 화자가 여느 번역에서 보지 못한 정도로 강렬한 의지를 보인다.


3. 평가와 전망

엘제 라스커-쉴러의 시 <나의 푸른 피아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발표되었고, 전쟁의 잔악함이 절정에 달했을 때 시집으로 묶였다. 라스커-쉴러는 관능적인 어휘로 예술의 아름다움을 추구한 시인이었고, 예루살렘에 머문 말년에 유대인과 아랍인의 화해를 꿈꾸던 비정치적인 시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유대-여성-시인’ 라스커-쉴러의 이 시를 홀로코스트의 역사를 통하지 않고서 읽을 수 있는가? <나의 푸른 피아노>는 번역자에게 해석자의 역할을 강력히 요구한다. 시적 화자는 예술 활동을 할 수 없는 현시점에서 예술혼을 불태웠던 과거를 돌아보면서 애절한 목소리로 아련한 슬픔을 노래하는가? 혹은 나치 독일의 땅과 언어에서 내쫓긴 탄압과 박해의 경험을 꾹꾹 눌러 담아 비통하게 울음을 울부짖는가? 이런 양립하기 곤란한 내용 해석은 예를 들어 시의 한 가운데서 ‘춤추는’ ‘쥐 die Ratten’을 생쥐, 쥐, 쥐떼, 시궁쥐, 혹은 쥐새끼 등에서 무엇을 역어로 선택할 것인지 묻는다. 평자의 주관적인 견해로는 번역자들이 시의 역사적·정치적 맥락을 잘 알고 있으나, 이 점을 부각하기보다는 ‘쥐’라는 중립적인 역어를 선택하여 좀 더 보편적인 차원으로 확장하는 시도를 하는 듯 보인다. 또 다른 공통된 특징으로는 이정순의 번역을 제외하면 역자들이 기점텍스트를 제시하지 않으며, 문장부호를 포함하여 시의 형식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듯 보인다. 그런데 이 시는 시제 하나의 변화와 문장부호의 이동만으로도 의미와 정서가 달라진다는 점에서 시 번역의 어려움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한편 지금까지의 번역과 차별되는 새로운 번역을 부르고 있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이동승(1971): 나의 푸른 피아노. 을유문화사.
전광진(1982): 내 푸른 피아노. 탐구당.
김주연(1994): 나의 푸른 피아노. 정우사.
최연숙(2013): 나의 푸른 피아노. 신아사.
정명순(2022): 나의 푸른 피아노. 전남대학교 출판문화원.
이정순(2022): 나의 파란 피아노. 지식을만드는지식.
배수아(2023): 나의 푸른 피아노. 아티초크.


박희경


  • 각주
  1. 본문에서 인용되는 원작시의 출처는 온라인 아카이브에 있는 1937년 신문과 1943년 시집이다. 신문판은 Lasker-Schüler(1937): Mein blaues Klavier. In: Neue Züricher Zeitung, 7. Feb. 1937. (주소는 https://www.e-newspaperarchives.ch/?a=d&d=NZZ19370207-02.2.7&dliv=none&e=-------de-20—1—img-txIN--------0-----). 시집판은 Lasker-Schüler, Else(1943): Mein blaues Klavier. Neue Gedichte. Jerusalem, 14. 이 시집은 독일국립도서관(Deusche National Bibliothek)의 전자자료로 열람이 가능하다. (주소는 https://portal.dnb.de/bookviewer/view/1032607858#page/14/mode/2up) 이 온라인 출처는 당시 편집상태를 보여주는 점에서 시인의 사후에 출판된 여느 판본들보다 더욱 정확하다. 이하 본문에 인용한 원작시 및 번역시의 밑줄은 모두 필자의 강조이다.
    1937년 신문판
    1943년 시집판
  2. Bauschinger, Sigrid(2013): Else Lasker-Schüler. Biographie. Göttingen: Wallenstein Verlag, 433.
  3. 이하 번역시의 본문 직접 인용시 출처는 서지에 표기된 면수와 동일하다.
  4. 이정순의 번역은 역자가 선정한 130편의 시들을 편역한 <엘제 라스커쉴러 시선>(지만지)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엘제 라스커-쉴러의 시세계를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국내 최초의 시선집으로 의의가 크다. 이 책에 수록된 시들은 Else Lasker-Schüler(2004): Sämtliche Gedichte, Frankfurt am Main:Suhrkamp 및 Else Lasker-Schüler(2016): Sämtliche Gedichte mit einem Nachwort von Uljana Wolf, Frankfurt am Main: Fischer Verlag을 저본으로 하였으며, 이정순은 시마다 주석을 붙이고 해제도 달았으며, 덧붙여 상세한 작가 소개도 하고 있다.
  5. 라스커-쉴러는 1933년 4월 19일 베를린을 떠나면서 짐을 맡겼는데, 푸른색/파란색 장난감 피아노도 그 안에 있었다고 한다.
  6. 이 제목은 라스커-쉴러가 1910년에 발표했던 시 <화해>(Versöhnung) 중 “Wir wollen uns versöhnen die Nacht-”를 번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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