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무. 열 개의 대화 (Reigen. Zehn Dialoge)"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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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윤무. 열 개의 대화 (Reigen. Zehn Dialo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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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윤무 || 윤무 || 독일 희곡시리즈 8 || 아르투어 슈니츨러 || 김기선 || 2009 || 성신여자대학교 출판부 || 7-113 || 완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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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라이겐 - 열 개의 대화 || 엘제 아씨 || || 아르투어 슈니츨러 || 백종유 || 2010 || 문학과지성사 || 183-308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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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id="백종유(2010)" />[[#백종유(2010)R|3]] || 라이겐 - 열 개의 대화 || 엘제 아씨 || || 아르투어 슈니츨러 || 백종유 || 2010 || 문학과지성사 || 183-308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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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 윤무 || 윤무 || 지식을만드는지식 희곡선집 || 아르투어 슈니츨러 || 최석희 || 2011 || 지식을만드는지식 || 3-154 || 편역 || 완역 ||
 
| 4 || 윤무 || 윤무 || 지식을만드는지식 희곡선집 || 아르투어 슈니츨러 || 최석희 || 2011 || 지식을만드는지식 || 3-154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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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윤무 || 윤무 || 지식을만드는지식 희곡선집 큰글씨책 || 아르투어 슈니츨러 || 최석희 || 2014 || 지식을만드는지식 || 1-154 || 완역 || 완역 || 큰글씨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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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 윤무 || 윤무, 섹스파트너 10쌍의 대화 || || 아르투어 슈니츨러 || 이관우 || 2017 || 써네스트 || 10-104 || 편역 || 완역 || 한독대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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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 윤무 || 윤무 || || 아르투어 슈니츨러 || 최석희 || 2019 || 지만지드라마 || 7-154 || 편역 || 완역 ||
 
| 7 || 윤무 || 윤무 || || 아르투어 슈니츨러 || 최석희 || 2019 || 지만지드라마 || 7-154 || 편역 || 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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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별 번역 비평'''
 
2. '''개별 번역 비평'''
  
1) '''최석희 역의 <윤무>(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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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석희(2008)|최석희 역의 <윤무>(2008)]]<span id="최석희(2008)R" />'''
  
 
최석희의 번역 <윤무>는 무엇보다도 슈니츨러의 <Reigen>을 처음으로 한국어로 옮겼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역자는 책 앞머리에서 출판 금지, 소송과 공연 금지 등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윤무> 수용의 역사를 상술하고, 이어서 작품의 의미에 대한 해설을 덧붙인다. 이에 따르면 <윤무>는 현대인의 불안과 섹스로의 도피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진정한 관계없는 섹스를 통해 드러나는 “거짓과 비겁함, 어리석음과 허영, 편협함과 냉혹함의 지옥”(12쪽)을 보여준다.  
 
최석희의 번역 <윤무>는 무엇보다도 슈니츨러의 <Reigen>을 처음으로 한국어로 옮겼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역자는 책 앞머리에서 출판 금지, 소송과 공연 금지 등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윤무> 수용의 역사를 상술하고, 이어서 작품의 의미에 대한 해설을 덧붙인다. 이에 따르면 <윤무>는 현대인의 불안과 섹스로의 도피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진정한 관계없는 섹스를 통해 드러나는 “거짓과 비겁함, 어리석음과 허영, 편협함과 냉혹함의 지옥”(12쪽)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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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홍진호 역의 <라이겐>(2008)'''
 
2) '''홍진호 역의 <라이겐>(2008)'''
  
‘윤무’의 두 번째 한국어 번역본은 초역보다 불과 3-4개월 뒤에 출간되었다. 이 번역본은 을유문화사 세계문학 전집 속 슈니츨러 작품집 속에 <아나톨>, <구스틀 소위>와 함께 수록되었는데, 역자 홍진호는 작품 제목을 원어 그대로 음역하여 ‘라이겐’이라고 번역하고 이를 표제작으로 삼았다. 윤무가 여럿이 둥글게 돌며 추는 춤 정도의 일반적인 의미로 풀이되어 있어서, 슈니츨러가 5명의 남자와 5명의 여자가 파트너를 바꾸어 가며 나누는 10개의 대화로 이루어진 이 작품의 제목을 ‘Reigen’이라고 했을 때는 그런 일반적인 의미의 윤무보다는 좀더 특수한 형식의 춤을 염두에 두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역자가 (번역은 되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윤무’로 알려져 온 이 작품의 제목을 ‘라이겐’으로 정한 데는 이런 고민이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라이겐이라는 춤에 대한 역자의 다음과 같은 설명에서도 잘 드러난다. “원래 궁정에서 추던 춤의 일종으로 남녀 한 쌍이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지나가면, 다음 한 쌍이 뛰어나와 춤을 추고 지나가고, 또 다음 한 쌍이 뛰어나와 춤을 추며 지나가는 리드미컬한 윤무를 뜻한다.”(홍진호, 317) 다만 이러한 춤 형식은 유럽 전역에 퍼져 있는 것으로 독일어권의 전유물이 아니고 이 춤을 라이겐으로 부르는 관습이 한국어 사용자 사이에 정착되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제목으로서 독일어에서 유래한 명칭인 ‘라이겐’이 독자들에게 얼마나 다가갈 수 있는지는 미지수다. 이에 반해 윤무라는 단어는 어느 정도 작품 형식과의 연관성을 직관적으로 느끼게 해준다는 장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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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무’의 두 번째 한국어 번역본은 초역보다 불과 3-4개월 뒤에 출간되었다. 이 번역본은 을유문화사 세계문학 전집 속 슈니츨러 작품집 속에 [[아나톨 (Anatol)]], [[구스틀 소위 (Leutnant Gustl)]]와 함께 수록되었는데, 역자 홍진호는 작품 제목을 원어 그대로 음역하여 ‘라이겐’이라고 번역하고 이를 표제작으로 삼았다. 윤무가 여럿이 둥글게 돌며 추는 춤 정도의 일반적인 의미로 풀이되어 있어서, 슈니츨러가 5명의 남자와 5명의 여자가 파트너를 바꾸어 가며 나누는 10개의 대화로 이루어진 이 작품의 제목을 ‘Reigen’이라고 했을 때는 그런 일반적인 의미의 윤무보다는 좀더 특수한 형식의 춤을 염두에 두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역자가 (번역은 되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윤무’로 알려져 온 이 작품의 제목을 ‘라이겐’으로 정한 데는 이런 고민이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라이겐이라는 춤에 대한 역자의 다음과 같은 설명에서도 잘 드러난다. “원래 궁정에서 추던 춤의 일종으로 남녀 한 쌍이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지나가면, 다음 한 쌍이 뛰어나와 춤을 추고 지나가고, 또 다음 한 쌍이 뛰어나와 춤을 추며 지나가는 리드미컬한 윤무를 뜻한다.”(홍진호, 317) 다만 이러한 춤 형식은 유럽 전역에 퍼져 있는 것으로 독일어권의 전유물이 아니고 이 춤을 라이겐으로 부르는 관습이 한국어 사용자 사이에 정착되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제목으로서 독일어에서 유래한 명칭인 ‘라이겐’이 독자들에게 얼마나 다가갈 수 있는지는 미지수다. 이에 반해 윤무라는 단어는 어느 정도 작품 형식과의 연관성을 직관적으로 느끼게 해준다는 장점이 있다.
  
 
홍진호의 번역에 대해서도 위에서 제시한 예문들을 토대로 함축성의 파악, 방언의 이해와 재현, 존칭 문제와 관계의 표현이라는 세 가지 관점에서 검토해보자.
 
홍진호의 번역에 대해서도 위에서 제시한 예문들을 토대로 함축성의 파악, 방언의 이해와 재현, 존칭 문제와 관계의 표현이라는 세 가지 관점에서 검토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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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기선 역의 <윤무>(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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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기선(2009)|김기선 역의 <윤무>(2009)]]<span id="김기선(2009)R" />'''
  
 
김기선의 번역 <윤무>는 성신여대 출판부의 독일희곡시리즈 중 제8권으로 출간되었다. 레싱, 클라이스트에서 슈니츨러, 브레히트에 이르는 총 12편의 독일희곡이 이 시리즈에서 출간되었으며 모두 같은 역자의 번역이다. 각 권은 한 편의 희곡과 역자가 쓴 작품 해설로 구성되어 있다. 역자는 <윤무>에도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윤무’ - 언어와 행동의 이중성과 20세기 전환기 비엔나 사회>라는 상세한 해설을 붙여 <윤무>의 험난한 수용사와 작품의 사회비판적 의의를 서술한다. 이에 따르면 이 작품은 “욕구 충족의 메커니즘에 따라 모두가 모두를 기능화하고 모두가 모두를 대체할 수 있는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151)  
 
김기선의 번역 <윤무>는 성신여대 출판부의 독일희곡시리즈 중 제8권으로 출간되었다. 레싱, 클라이스트에서 슈니츨러, 브레히트에 이르는 총 12편의 독일희곡이 이 시리즈에서 출간되었으며 모두 같은 역자의 번역이다. 각 권은 한 편의 희곡과 역자가 쓴 작품 해설로 구성되어 있다. 역자는 <윤무>에도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윤무’ - 언어와 행동의 이중성과 20세기 전환기 비엔나 사회>라는 상세한 해설을 붙여 <윤무>의 험난한 수용사와 작품의 사회비판적 의의를 서술한다. 이에 따르면 이 작품은 “욕구 충족의 메커니즘에 따라 모두가 모두를 기능화하고 모두가 모두를 대체할 수 있는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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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백종유 역의 <라이겐>(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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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백종유(2010)|백종유 역의 <라이겐>(2010)]]<span id="백종유(2010)R" />''''
  
 
2010년에는 슈니츨러의 <Reigen>의 네 번째 한국어 번역본이 출간된다. 백종유가 슈니츨러의 작품집 <엘제 아씨> 속에 이 작품을 ‘라이겐’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수록하였다. 백종유 번역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최대한 구어체를 강화하기 위해 원문에 크게 구애받지 않으며 자유롭게 번역하는 경향이다. 이 점에 유의하면서 역시 세 가지 논점을 중심으로 백종유의 번역을 검토해보도록 한다.
 
2010년에는 슈니츨러의 <Reigen>의 네 번째 한국어 번역본이 출간된다. 백종유가 슈니츨러의 작품집 <엘제 아씨> 속에 이 작품을 ‘라이겐’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수록하였다. 백종유 번역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최대한 구어체를 강화하기 위해 원문에 크게 구애받지 않으며 자유롭게 번역하는 경향이다. 이 점에 유의하면서 역시 세 가지 논점을 중심으로 백종유의 번역을 검토해보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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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관우 역의 <윤무>(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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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관우(2017)|이관우 역의 <윤무>(2017)]]<span id="이관우(2017)R" />'''
  
 
2008년에서 2010년에 이르는 기간은 <윤무> 번역 붐이 일어난 시기라고 할 만하다. 2년 정도의 시간에 무려 4개의 번역본이 잇달아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다시 상당한 시간이 지나 이관우의 번역으로 새 한국어본이 출간된다. 최석희와 김기선에 이어 <윤무> 한 작품만 단행본으로 수록한 세 번째 사례다. 역자의 작품 해설은 소략하나, 뒤에 원문이 덧붙여져 총 208페이지의 분량을 이룬다. 또 하나 특징적인 점은 작품의 부제를 ‘의역’하여 책 표지에 내세운 것이다. 원작의 부제는 “Zehn Dialoge”(열 개의 대화)이고 다른 역자들은 대체로 이 부제를 그대로 번역하여 속 표지에 제시하고 있다. 이에 반해 이 번역본은 표지에 붉은 글씨로 “섹스파트너 10쌍의 대화”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작품의 내용과 어긋나는 것은 아니나 원작의 함축적인 부제, 실제 인물들의 성관계 장면에 예외 없이 적용된 생략법, 인물들의 복합적인 심리를 나타내는 암시적인 언어 등을 생각해볼 때 독자에게 엉뚱한 추측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노골적인 부제가 과연 적절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2008년에서 2010년에 이르는 기간은 <윤무> 번역 붐이 일어난 시기라고 할 만하다. 2년 정도의 시간에 무려 4개의 번역본이 잇달아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다시 상당한 시간이 지나 이관우의 번역으로 새 한국어본이 출간된다. 최석희와 김기선에 이어 <윤무> 한 작품만 단행본으로 수록한 세 번째 사례다. 역자의 작품 해설은 소략하나, 뒤에 원문이 덧붙여져 총 208페이지의 분량을 이룬다. 또 하나 특징적인 점은 작품의 부제를 ‘의역’하여 책 표지에 내세운 것이다. 원작의 부제는 “Zehn Dialoge”(열 개의 대화)이고 다른 역자들은 대체로 이 부제를 그대로 번역하여 속 표지에 제시하고 있다. 이에 반해 이 번역본은 표지에 붉은 글씨로 “섹스파트너 10쌍의 대화”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작품의 내용과 어긋나는 것은 아니나 원작의 함축적인 부제, 실제 인물들의 성관계 장면에 예외 없이 적용된 생략법, 인물들의 복합적인 심리를 나타내는 암시적인 언어 등을 생각해볼 때 독자에게 엉뚱한 추측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노골적인 부제가 과연 적절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2025년 9월 9일 (화) 10:00 기준 최신판

아르투어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 1862-1931)의 희곡

윤무. 열 개의 대화 (Reigen. Zehn Dialoge)
작가아르투어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
초판 발행1903
장르희곡


작품소개

1896/1897년에 쓰인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희곡이다. 외설적인 내용으로 인해 출판이 금지되자, 슈니츨러는 1900년 개인 인쇄물로 텍스트를 출판하여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903년 빈과 라이프치히에서 정식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03년 뮌헨 대학 연극단체에서 부분적인 공연이 이루어졌고, 1920년 12월 23일 베를린의 소극장 클라이네스 샤우슈필하우스에서 공식 초연되었다. 둘씩 짝을 이룬 열 명의 사람들이 만나 대화를 이어가면서, 각각의 커플은 매번 성관계를 맺는다. 슈니츨러는 이 작품의 구성을 위해 한 인물이 다음 장면을 위해 새로운 인물에게 손을 내미는 윤무라는 춤의 형식을 사용한다. 이때 성교 이전이나 이후 상황에 대해서만 묘사할 뿐, 성교 자체에 대해서는 암시만 될 뿐이다. 하나의 장면이 끝나면 파트너가 교체되는데, 그때마다 사회 계층이 창녀와 군인, 하녀와 젊은이, 아내와 남편, 귀여운 아가씨와 시인, 여배우와 백작으로 한 단계씩 올라가는데, 마지막에 백작이 다시 하녀와 만나면서 윤무가 완성된다. 국내 초역은 2008년 최석희에 의해 이루어졌다(지만지).


초판 정보

Schnitzler, Arthur(1903): Reigen. Zehn Dialoge. Wien/Leipzig: Wiener Verlag.


번역서지 목록

번호 개별작품제목 번역서명 총서명 원저자명 번역자명 발행연도 출판사 작품수록 페이지 저본 번역유형 작품 번역유형 비고
윤무 윤무 지만지 고전천줄 155 아르투어 슈니츨러 최석희 2008 지만지 21-168 완역 완역
윤무 윤무 독일 희곡시리즈 8 아르투어 슈니츨러 김기선 2009 성신여자대학교 출판부 7-113 완역 완역
라이겐 - 열 개의 대화 엘제 아씨 아르투어 슈니츨러 백종유 2010 문학과지성사 183-308 편역 완역
4 윤무 윤무 지식을만드는지식 희곡선집 아르투어 슈니츨러 최석희 2011 지식을만드는지식 3-154 편역 완역
5 윤무 윤무 지식을만드는지식 희곡선집 큰글씨책 아르투어 슈니츨러 최석희 2014 지식을만드는지식 1-154 완역 완역 큰글씨책
윤무 윤무, 섹스파트너 10쌍의 대화 아르투어 슈니츨러 이관우 2017 써네스트 10-104 편역 완역 한독대역본
7 윤무 윤무 아르투어 슈니츨러 최석희 2019 지만지드라마 7-154 편역 완역


번역비평

1. 번역 현황 및 개관

슈니츨러가 1896년에서 1897년 사이에 쓴 희곡 <윤무. 열 개의 대화>는 10쌍의 남녀가 잠자리 전후에 나누는 대화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총 10명의 남녀이다. 그것은 모든 인물이 두 명의 파트너를 갖는다는 의미다. 이러한 파격적인 설정 때문에 슈니츨러도 처음에는 이 작품을 공식 출판하지 않고 비매품으로 소량 인쇄하여 지인들에게만 선물했을 정도였다. <윤무>는 1920년에야 베를린에서 작가의 승인하에 공식적으로 무대 위에 올려졌지만, 이후 극의 상연에 대한 많은 논란과 공격이 도처에서 계속되었고, 슈니츨러는 1922년에 스스로 자기 작품의 상연을 금지하기에 이른다. 금지의 법적 효력은 1982년 1월 1일까지 유지되었다.

이런 작품 자체의 파격성 때문인지, <윤무>는 작품의 높은 인지도에도 불구하고 21세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2008년 7월 최석희의 번역 <윤무>(지만지)가 그 출발이었다. 그러나 한 번 번역이 시작되자 후속 번역이 이어졌다. 최석희의 번역본이 빛을 본 지 불과 몇 개월이 지난 시점에(2008년 11월) 홍진호의 번역본이 <라이겐>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고(을유문화사), 김기선의 번역본 <윤무>가 그 이듬해에(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2009), 백종유의 번역본 <라이겐>이 다시 그 이듬해에(문학과지성사 2010) 연이어 독자와 만나게 된다. 2017년에는 현재로서 마지막 번역본인 이관우의 <윤무 – 섹스파트너 10쌍의 대화>가 나왔다(써네스트). 그중 홍진호의 <라이겐>은 동명의 제목이 붙은 슈니츨러 작품선 속에 <아나톨> <구스틀 소위>와 함께 수록되어 있고, 백종유의 <라이겐>도 슈니츨러 작품선 <엘제 아씨> 속에 수록되어 있다.

희곡이라는 장르는 본래 서술자의 설명적 진술이 없이 거의 인물의 대화만으로 상황을 전달하고 인물의 내면적 움직임까지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언어가 함축적이고 암시적으로 되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윤무>는 대체로 노골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대화가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는 까닭에 이러한 경향은 더욱 심화된다. 이를 얼마나 잘 포착하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함축적인 언어로 재현하는가가 성공적인 번역의 관건이 될 것이다. 그 외에 번역자가 부딪히는 어려움은 슈니츨러가 등장인물 가운데 비교적 하위 계층의 인물에게 빈 사투리를 사용하도록 한 데서 생겨난다. 방언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 그리고 이러한 언어적 표지를 한국어 번역 속에서 살려내는 것, 번역자는 이 두 가지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유의해서 살펴볼 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0편의 대화에서는 대부분 남녀 간의 성관계를 전후로 관계의 변화가 일어나며, 그것은 무엇보다 서로에 대해 사용하는 말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때 일반적으로 존칭(siezen)에서 비존칭(duzen)으로의 전환이 일어나는데, 이 변화를 한국어에서 재현하는 것에 하나의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번역자는 나름의 해법을 찾게 된다. 다음에서는 이상의 세 측면을 중심으로 하여 각 번역의 특성을 살펴볼 것이다.


2. 개별 번역 비평

1) 최석희 역의 <윤무>(2008)

최석희의 번역 <윤무>는 무엇보다도 슈니츨러의 <Reigen>을 처음으로 한국어로 옮겼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역자는 책 앞머리에서 출판 금지, 소송과 공연 금지 등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윤무> 수용의 역사를 상술하고, 이어서 작품의 의미에 대한 해설을 덧붙인다. 이에 따르면 <윤무>는 현대인의 불안과 섹스로의 도피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진정한 관계없는 섹스를 통해 드러나는 “거짓과 비겁함, 어리석음과 허영, 편협함과 냉혹함의 지옥”(12쪽)을 보여준다. 작품 의미에 대한 이해를 돕는 비교적 상세한 해설이 붙은 것은 최석희의 번역본이 이 한 작품만으로 이루어진 단행본 형태로 출간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때 확인해야 할 것은 해설 속에 지적된 작품의 특성이 번역을 통해 얼마나 잘 구현되는가 하는 문제다. 도입부에서 이 작품의 번역에서 유의해야 할 세 가지 문제로 함축적 의미의 이해와 표현, 방언의 이해와 번역, 존칭/비존칭 코드의 번역을 꼽았는데, 우선 그 첫 번째 문제와 관련하여 최석희의 번역을 살펴보자.

여배우: 키스 한 번 해주세요. 
백작: (그녀에게 키스를 하고 그녀는 가만히 있다.)
여배우: 당신을 차라리 보지 말았어야 했는데. 
백작: 그랬다면 더 좋았을 거요. 
여배우: 백작님, 당신은 거드름을 피우는 사람이군요!
백작: 내가- 왜?
여배우: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자리에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라는 생각 안 하세요?
백작: 나는 아주 행복하오. 
여배우: 글쎄, 행복이란 없다고 나는 생각했어요. 왜 그렇게 나를 쳐다보세요? 백작님! 백작님이 나를 무서워한다고 생각했어요.(최석희, 150-151)

이것은 9번째 대화로서 여배우와 백작이 잠자리를 함께하기 전에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일부이다. 이 번역에서 여배우는 “당신을 차라리 보지 말았어야 했는데”라고 말하고 백작은 “그랬다면 더 좋았을 거”라고 대꾸한다. 백작을 알게 된 것을 후회하는 (혹은 후회하는 척하는) 여배우의 말에 백작이 “그랬다면 더 좋았을 거”라고 응답한다면 백작은 여배우와의 관계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오히려 귀찮아한다는 뜻이 된다. 심지어 그냥 지금 당장 만남을 중단하자는 뜻으로까지 들릴 수 있어서 대단히 모욕적인 언사라 할 만하다. 그렇다면 여배우가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백작을 향해 거드름을 피운다고 힐난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이에 대해 백작이 “내가- 왜?”라고 어리둥절해하는 것도 그의 뻔뻔하고 오만한 성격과 태도를 잘 보여주는 대목으로 읽힌다.

그런데 문제는 “그랬다면 더 좋았을 거요”라는 백작의 대사이다. 이 부분의 원문은 “Es ist doch besser so!”(223)[1]로서 가정문이 아니라 직설법으로 된 문장이다. 여배우가 “당신을 차라리 보지 말았어야 했는데”라고 말한 것에 대해 백작은 ‘그래도 이렇게 지금 함께 있게 된 것이 더 잘된 일 아니냐’고 반문한 것이다. 그 자체로는 모욕적인 말도, 부정적인 말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 여배우가 모욕을 당한 듯이 발끈하며 백작의 ‘거드름’을 비난하는 것은 의외로 여겨질 수 있다. 백작의 반응이 바로 그런 심정을 표현한다. 왜, 당신에 대한 호감을 표현했을 뿐인데 대체 내가 무슨 거드름을 피웠다는 거지? 여배우는 왜 백작에게 분노한 것일까? 그것은 여배우가 –수 많은 사람이 백작처럼 자신과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극히 행복해할 거라는 뒤의 대사에서도 드러나듯이- 많은 남성의 추앙을 받고 있고 그런 면에서 매우 강한 자존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만 이해할 수 있다(“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자리에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라는 최석희의 번역은 여배우의 말에 담긴 그런 함의도 아주 분명하게 드러내 주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여배우는 이 만남이 없었던 게 더 나았을 거라는 자신의 말에 대해 백작에게서 더 강렬한 반발이 나오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 말라. 당신과 함께 있게 되어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로 기쁘고 즐겁다 등등. 그런 기대를 받는 상황에서 백작은 ‘그래도 보길 잘한 거지 뭐’라는 식으로 다소 미적지근한 언급밖에 해주지 않은 것이고, 이는 전혀 여배우의 성에 전혀 차지 않는 반응일 수밖에 없다. 여배우는 그래서 분노하고 남작을 거만하다고 비난한 것이다. 여배우의 분노와 비난은 누구나 그런 상황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라 이해할 수 있는 대응이 아니라 그녀의 오만할 정도로 높은 자존심과 허영심의 표현인 셈이며, 백작은 그런 상대방의 입장을 잘 생각하지 않았기에 여배우의 예상 밖의 반응에 어리둥절해한 것이다.

이처럼 단 한 줄의 짧은 대사를 직설법으로 번역하느냐 가정법(접속법)으로 번역하느냐에 따라 인물의 성격과 심리에 대한 해석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그렇기에 인물의 대화를 번역할 때는 말 그 자체의 의미를 옮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물이 왜 이런 말을 하느냐에 대한 질문을 가지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번역자의 무관심은 ‘나는 아주 행복하오’라는 백작의 말에 대한 여배우의 대꾸를 “글쎄, 행복이란 없다고 나는 생각했어요”라고 번역한 데서도 드러난다. 그것은 문자적으로는 옳은 번역이다.(“Nun, ich dachte, es gibt kein Glück.” 224) 그러나 왜 여배우가 그렇게 말하느냐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대답해주지 못하는 번역이다. 여기서 여배우는 백작이 앞에서(이 인용문 이전에) 세상에 행복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시니컬하게 말한 것을 암시하고 있다. 즉 아까는 행복 따위는 없는 거라고 하던 사람이 이제 와서 매우 행복하다고 하니 어떻게 그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고 묻는 것이다. 그런 문맥을 고려한다면 “아, 그러세요? 난 또 행복 같은 건 없는 줄 알았네요” 하는 식으로 다소 비꼬는 어조를 집어넣어서 번역했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 단순히 중립적으로 문장을 번역함으로써 그 말을 하는 인물의 심정은 표현되지 못하고 앞서 두 사람이 나눈 대화와의 연관성도 사라지고 말았다.

다음으로 <윤무>의 번역에서 특히 어려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오스트리아 방언이 최석희의 번역에서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이 작품에서 방언으로 된 대사의 의미는 이중적인데, 하나는 그 말이 가지는 일차적인 언어학적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말하는 사람의 신분과 관련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의미다. 즉 방언은 신분이 낮은 인물들의 표지로 기능하는 것이다. 백작이나 시인 같은 인물들은 거의 표준 독일어를 구사한다. 방언의 이러한 두 차원의 의미는 번역자에게 어려움을 안겨준다. 방언은 일반적인 사전을 통해서는 정확히 의미를 파악하는 게 쉽지 않다. 오스트리아 방언에 관한 일정한 공부나 경험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방언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한다고 해도 또 하나의 문제가 남는다. 방언과 표준어가 인물의 신분에 대한 표지가 된다면 그 구별 번역으로 어떻게 살릴 것인가? 번역자가 말의 의미만 살려서 일반적인 한국어로 옮기는 데 그친다면 그 구별은 사라질 것이다. <윤무>의 첫 번째 대화인 <창녀와 군인>에서 창녀와 군인은 낮은 신분의 인물이고 구어체적 방언을 구사한다. 그들의 어투는 특히 명사나 동사 뒤의 모음 발음이나 접두사 같은 것을 자주 생략하는 것에서 특징적으로 드러난다(“von dort ist er mit dir z’Haus gangen” 11). 이런 문장은 의미 파악이 어렵진 않지만 의미대로만 번역하면(“그곳에서 만나 너랑 집에 갔었지” 최석희, 26) 말투 속에 드러나는 인물의 성격이 사라진다. 최석희의 번역에서는 그런 문제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방언의 특징적 표현법을 놓쳐서 의미상으로 부정확하게 번역된 부분도 있다. 이를테면

창녀: 난 자기 같은 남자를 애인으로 갖고 싶어. 
군인: 내가 너무 성급하게 굴었나. 
창녀: 알았어요, 그런 말 하지 않을게. 

여기서 군인은 “Ich tät’ dir zu viel eifern”(14)이라고 말한다. 이것도 방언 투의 표현으로 “tät’”는 가정적 의미를 나타내는 조동사 “würde –할 것이다”에 해당된다. 자신이 애인이 된다면 질투로 문제가 생길 거라고 경고하는 말이다. 그러자 “Das möcht’ ich dir schon abgewöhnen”(14), 즉 그런 버릇이 있다면 당장 버리게 하고 싶다고 창녀가 대꾸한다. 최석희의 번역은 ‘tät’’의 용법을 잘 파악하지 못한 바람에 대화 전체가 원의에서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의미가 전혀 통하지 않는 번역이 되어 버렸다.

그런 번역의 문제를 노정하는 또 하나의 예는 역시 두 인물이 방언을 구사하는 두 번째 대화 <군인과 방 청소하는 하녀>에서도 발견된다. 여기서 군인과 하녀는 ‘우리’를 의미하는 대명사로 표준어 ‘wir’ 대신 오스트리아 방언 ‘mir’를 사용하는데, 최석희의 번역에서는 이를 1인칭의 의미로 옮기고 있다.

Soldat: Sehn S’, da sind zwei g’rad wie mir.
Stubenmädchen: Wo denn? Ich seh’ gar nichts.
Soldat: Da ... vor uns.
Stubenmädchen: Warum sagen S’ denn: zwei wie mir? –
Soldat: Na, ich mein’ halt, die haben sich auch gern’.(27) 
군인: 봐, 저기 바로 나 같은 두 사람이 있잖소. 
하녀: 어디요? 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군인: 저기…. 우리 앞에. 
하녀: 왜 당신 같은 두 사람이라고 해요? 
군인: 아, 단지 그들도 서로 좋아한다는 의미지.(최석희, 35) 

여기서 강조 표시된 부분은 ‘나’도 ‘당신’도 아니고 ‘우리’로 번역해야 한다.

다음으로 존칭 대화와 비존칭 대화가 교차하는 부분의 번역을 살펴보자. 이 작품은 모두 일정한 거리가 있는 남녀 혹은 처음 만난 남녀가 처음으로 사랑을 나누는 과정을 그리고 있기에 존칭 대화에서 시작하여 비존칭 대화로 전환되는 순간이 반복해서 나타난다. 독일어에서는 대화 상대에 대한 호칭이 관계에 따라 존칭 아니면 비존칭, 이렇게 둘 중 하나로 비교적 간단하게 결정되지만, 한국어의 경우 관계의 질적 내용에 따라 훨씬 세분화된 뉘앙스가 표현되어야 한다. 원문의 표현 자체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런 뉘앙스를 문화적 차이를 넘어서까지 살려내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난문을 던져주는 대표적인 구절에서 번역자가 어떻게 대응하는지 살펴보자.

Der Gatte: Schon wieder sagst du Sie.
Das süße Mädel: So? – Ja wissen S', man gewöhnt sich halt so schwer.
Der Gatte: Weißt du.
Das süße Mädel: Was denn?
Der Gatte: Weißt du, sollst du sagen; nicht wissen S'. – Komm setz' dich zu mir.
Das süße Mädel: Gleich .... bin noch nicht fertig.
(...)
Der Gatte: Einen Kuß möcht' ich haben.
Das süße Mädel: (giebt ihm einen Kuß). Sie sind .... oh pardon, du bist ein kecker Mensch.
Der Gatte: Jetzt fällt dir das ein?
Das süsse Mädel: Ah nein, eingefallen ist es mir schon früher...schon auf der Gassen. - Sie müssen - 
Der Gatte: Du mußt
Das süsse Mädel: Du mußt dir eigentlich was Schönes von mir denken. 
Der Gatte: Warum denn?
Das süsse Mädel:  Daß ich gleich so mit Ihnen ins chambre separée gegangen bin. 
Der Gatte: Na, gleich kann man doch nicht sagen.
Das süsse Mädel: Aber Sie können halt so schön bitten.(116)   
남편: 너는 내게 또 존댓말을 하나?
귀여운 소녀: 그랬어요? 아시잖아요. 말투를 바꾸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거.
남편: 있잖아.
귀여운 소녀: 뭐가요?
남편: 존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너 알지. 자 내 옆으로 와.
귀여운 소녀: 곧 갈게.. 아직 다 안 먹었어.
(중략)
남편: 키스하고 싶어.
귀여운 소녀: (그에게 키스를 해준다.) 당신은.... 오 미안, 자기는 뻔뻔한 인간이야.
남편: 이제야 그 생각이 드나?
귀여운 소녀: 아 아니, 이미 벌써 그런 생각은 했었지.... 이미 골목에서. - 당신은 반드시...
남편: 자기는 반드시.
귀여운 소녀: 자기는 반드시 나에 대해 뭔가 우아한 생각을 해야 해.
남편: 도대체 왜?
귀여운 소녀: 내가 곧장 당신과 함께 샹브레 세파레에 들어왔다는 사실 말이에요.
남편: 글쎄, 곧장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귀여운 소녀: 그러나 당신이 그렇게 정중하게 부탁하니까.(최석희, 91-92)     

여기서 “남편”(“귀여운 소녀”의 남편이 아니라 바로 전 대화에 등장한 여성 인물의 남편)은 “귀여운 소녀”에게 존칭 2인칭 대명사 ‘Sie’를 사용하지 말고 친밀한 사이에서 사용하는 ‘du’로 불러줄 것을 계속 강조한다. 여기서 Sie와 du의 차이는 거리감과 친밀성의 차이, 일정한 예의를 차리는 남녀 관계와 연인 관계의 차이에 상응한다. 그것은 한국어의 존댓말과 반말의 의미 차이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du’로 불러달라는 남성의 말을 존댓말을 쓰지 말라는 것으로 번역하거나, 이 요구에 따르는 ‘귀여운 소녀’의 말을 완전한 반말체로 번역하는 것이 꼭 적절하지는 않을 수 있다. 역자는 du는 ‘자기’로, Sie는 ‘당신’으로 옮기고 종결어미로는 각각 해체와 해요체를 사용하는데, 그것이 나이가 더 많은 유부남과 거리에서 만난 ‘귀여운 소녀’ 사이에 성적인 친밀도를 둘러싸고 옥신각신하는 상황을 잘 전달해주지는 못하는 듯하다. 물론 이에 대한 대안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다만 특히 크게 눈에 띄는 것은 “남편”의 의중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 따른 오역이다. “귀여운 소녀”가 “아시잖아요 Wissen S‘”라고 존칭을 사용하자, “남편”은 “Weißt du”라고 비존칭 표현으로 정정해준다. 그러나 “귀여운 소녀”는 그 말을 못 알아듣고 “뭘 말이에요 Was denn”라고 되묻는다. 이에 “남편”은 “Weißt du, sollst du sagen, nicht wissen S’”라고 자기 말의 뜻을 다시 해설해준다. “아시지요”라고 하지 말고 “알죠/알지 Weißt du”라고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고(114). 역자는 이러한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여 원문을 원의에서 동떨어진 이해하기 어려운 말로 옮기고 있다.

사실 존칭/비존칭의 문제는 여기서 처음에 인용한 백작과 여배우의 대화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여배우가 백작에게 키스를 요구했을 때 두 사람 사이에서 처음으로 비존칭 화법이 사용된다. 그녀는 비존칭 명령형으로 말함으로써(“Und gib mir endlich einen Kuß” 223), 계속 점잔만 빼고 있는 백작에게 그와 그녀 자신이 이미 친밀한 연인 사이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당신을 차라리 보지 않았어야 하는데’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도 ‘당신을’에 해당하는 독일어 단어는 ‘dich’, 즉 비존칭 2인칭 대명사의 목적격이다. 그러다가 백작이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그녀는 돌연 존칭 화법으로 돌아간다. “당신은 거드름을 피우는 사람이군요”에서의 “당신”은 원문에서는 존칭 2인칭 대명사인 “Sie”(223)다. 이러한 예에서 존칭 화법과 비존칭 화법은 인물들 사이의 관계는 물론 그 화법을 구사하는 인물의 심리와 태도를 표현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최석희의 번역에서는 여배우가 존칭과 비존칭 사이에서 동요한다는 사실이 아예 드러나지 않는다. 두 화법의 차이를 한국어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상에서 확인되는 약점들은 이 번역 전체에 대해 표본적인 성격을 지닌다. 오랫동안 소개되지 못한 고전적 작품의 첫 한국어판으로서 의의가 있으나 많은 아쉬움을 남기는 번역이라 생각된다.


2) 홍진호 역의 <라이겐>(2008)

‘윤무’의 두 번째 한국어 번역본은 초역보다 불과 3-4개월 뒤에 출간되었다. 이 번역본은 을유문화사 세계문학 전집 속 슈니츨러 작품집 속에 아나톨 (Anatol), 구스틀 소위 (Leutnant Gustl)와 함께 수록되었는데, 역자 홍진호는 작품 제목을 원어 그대로 음역하여 ‘라이겐’이라고 번역하고 이를 표제작으로 삼았다. 윤무가 여럿이 둥글게 돌며 추는 춤 정도의 일반적인 의미로 풀이되어 있어서, 슈니츨러가 5명의 남자와 5명의 여자가 파트너를 바꾸어 가며 나누는 10개의 대화로 이루어진 이 작품의 제목을 ‘Reigen’이라고 했을 때는 그런 일반적인 의미의 윤무보다는 좀더 특수한 형식의 춤을 염두에 두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역자가 (번역은 되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윤무’로 알려져 온 이 작품의 제목을 ‘라이겐’으로 정한 데는 이런 고민이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라이겐이라는 춤에 대한 역자의 다음과 같은 설명에서도 잘 드러난다. “원래 궁정에서 추던 춤의 일종으로 남녀 한 쌍이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지나가면, 다음 한 쌍이 뛰어나와 춤을 추고 지나가고, 또 다음 한 쌍이 뛰어나와 춤을 추며 지나가는 리드미컬한 윤무를 뜻한다.”(홍진호, 317) 다만 이러한 춤 형식은 유럽 전역에 퍼져 있는 것으로 독일어권의 전유물이 아니고 이 춤을 라이겐으로 부르는 관습이 한국어 사용자 사이에 정착되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제목으로서 독일어에서 유래한 명칭인 ‘라이겐’이 독자들에게 얼마나 다가갈 수 있는지는 미지수다. 이에 반해 윤무라는 단어는 어느 정도 작품 형식과의 연관성을 직관적으로 느끼게 해준다는 장점이 있다.

홍진호의 번역에 대해서도 위에서 제시한 예문들을 토대로 함축성의 파악, 방언의 이해와 재현, 존칭 문제와 관계의 표현이라는 세 가지 관점에서 검토해보자.

홍진호는 우선 백작과 여배우의 대화를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여배우: 그리고 이제 어서 키스해 주세요. 
백작: (키스한다. 그녀는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여배우: 당신을 바라보는 게 아니었어요. 
백작: 그게 진짜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군요!
여배우: 백작님은 참 뻔뻔한 분이에요.
백작: 내가 – 왜 그렇지요?
여배우: 지금 백작님의 위치에 있다면 굉장히 기뻐할 사람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백작: 그래요, 난 매우 행복합니다. 
여배우: 글쎄,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줄 알았더니. 왜 그렇게 바라보세요? 절 무서워하고 있는 것 같군요. 백작님!(홍진호, 103)

첫 번째 여배우의 말을 “키스 한 번 해주세요”라고 옮긴 최석희와 달리 홍진호는 “한 번” 대신 “어서”라는 부사를 넣는다. 그렇게 해서 원문의 “endlich”(마침내, 드디어, 이젠 정말 등의 의미) 속에 담겨 있는 조바심을 잡아낸다.

이에 반해 “당신을 바라보는 게 아니었어요”라는 번역은 원문의 뉘앙스와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원문 문장의 동사는 erblicken으로, 그것은 순간적이고 비의지적인 지각을, 그러니까 뜻하지 않게 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순간 백작이 눈에 들어온 바람에 여기까지 왔고, 그렇게 백작과 정면으로 마주치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어야 한다는 후회의 함의가 담겨 있는 말이다. 바라보다라는 동사는 의지적이고 지속적인 행위를 가리키는 표현이어서 이 문맥에서는 적절한 어휘 선택이라고 하기 어렵다. 이러한 불일치는 이후 더 큰 원문과의 격차로 이어진다. ‘왜 그런 말을 해요, 이렇게 된 게 더 낫지’라는 투로 여배우의 말에 가볍게 반박하기 위해 직설법의 형태로 발설한 백작의 말이 여배우에게 동조하는 가정법 발화로 옮겨진 것이다. 그것은 최석희의 번역에서도 문제가 된 오류다. 여배우는 백작의 심드렁한 태도가 못마땅하여 “Sie sind ein Poseur!”라고 외치는데, “Poseur”는 거드름을 피우는 남자, 허세를 부리는 남자, 잘난 척하는 남자 등의 의미를 지니는 말이다. 자신을 추앙하는 듯한 기미가 별로 보이지 않는 상대를 향해 “뻔뻔한 분”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어색하다. 마지막으로 최석희 번역에 대한 논의에서도 보았듯이 “백작님”을 비난하는 여배우의 존칭 화법은 그 앞에서 여배우가 백작에게 친밀하게 비존칭 화법을 시도한 것과 대비를 이룬다. 그 차이는 홍진호의 번역도 포착해내지 못한다. 번역에서 여배우는 계속 같은 말투를 구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끝으로 여배우의 마지막 대사는 역자의 세심한 주의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매우 행복하다는 백작의 말에 여배우는 “Nun, ich dachte, es gibt kein Glück”이라고 응수하는데, 위에서 설명한 대로 이는 이전 장면에서 자신에게 행복은 없다고 주장한 백작의 말을 비꼰 것이다. 역자는 그 점을 잘 이해하고 ‘-고 생각하는 줄-’이라는 표현을 추가하여 함축적 의미를 명확히 나타낸다.

방언의 측면에서는 홍진호 역시 이를 특별한 말씨로 표시하는 것은 포기하고 의미에 따른 번역을 하는 데 그친다. 원문의 방언을 한국어 임의의 방언으로 옮기는 것이 마땅한 해결책이 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것은 불가피한 선택일 수 있다. 방언이 섞인 표현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서는 최석희의 번역에 비해 훨씬 더 진전된 면모를 보여준다. 다음은 최석희 번역에서도 살펴본 군인과 창녀의 대화 중 한 대목이다.

창녀: 전 당신 같은 사람이 제 남자친구였으면 좋겠어요. 
군인: 질투 나는 일이 많을 텐데. 
창녀: 그 버릇을 고쳐드리고 싶군요.(홍진호, 11)

홍진호는 군인의 대사 “Ich tät’ dir zu viel eifern”에서 “tät’”에 들어 있는 가정적 의미를 잘 파악하고 번역에 반영한다. “질투 나는 일이 많을 텐데.” 다만 주어를 원문의 ‘ich’(나)에서 ‘질투 나는 일’로 바꿈으로써 의미가 다소 모호해진다. 자신이 질투를 하여 괴롭히게 된다는 뜻인지, 자기로 인하여 질투할 일이 생길 거라는 뜻인지 불투명한 것이다. 물론 원문의 문장 자체가 의미가 그렇게 분명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영역본의 경우도 어떤 판본에서는 “I’d fight too much”(저자가 승인한 1920년 번역)라고 하기도 하고 또 다른 판본에서는 “You couldn’t handle me”(Stephen Unwin, Peter Zombory-Moldovan 번역)라고 되어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오히려 모호한 번역이 현명한 번역일 수도 있을 것이다.

두 인물은 원문에서 모두 방언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비존칭 2인칭 대명사를 사용하며 서로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하지만 이 번역에서 군인은 해체로 말하고 창녀는 해요체를 구사한다. 역자는 이로써 독일어에서의 상호 비존칭 사용이 한국어에서도 무조건 대화 상대자가 서로에게 반말을 하는 것으로 번역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관계의 위계적 질서에 따른 한국어의 존칭-비존칭 표현법을 번역에 반영하여야 한다는 인식을 드러낸다. 다만 상당히 예의를 차린 듯한 말투(‘고쳐드리고 싶군요’)가 창녀의 성격이나 군인과의 관계를 정말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홍진호 번역이 최석희 번역에 비해 방언에 대해 더 정확한 이해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다음 부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군인: 보여요? 저기 우리 같은 사람이 또 둘 있잖아요. 
하녀: 대체 어디요? 아무것도 안 보여요. 
군인: 저기....... 우리 앞에요.
하녀: 그런데 왜 “우리 같은 사람 둘”이라고 하는 거예요?(홍진호, 16)

최석희가 1인칭 대명사로 이해한 ‘mir’가 여기서는 복수 1인칭 대명사 ‘wir’의 의미로 정확히 번역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논점인 존칭/비존칭의 문제와 관련된 부분을 검토해보자.

남편: 또 존댓말한다. 
귀여운 아가씨: 아 그렇지 -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버릇이란 게 그렇게 무섭다니까요. 
남편: 그런 거 있잖아. 
귀여운 아가씨: 뭐가요? 
남편: “그런 거 있잖아.” 말을 놓으라고. “그런 거 있잖아요”가 아니라- 자, 내 옆에 앉아. 
귀여운 아가씨: 잠깐만요...... 아직 다 안 먹었어요. 
(중략) 
남편: 난 네 키스를 원해.
귀여운 아가씨: (키스를 해준다.) 아저씨는요.... 앗, 미안, 아저씨는 뻔뻔한 사람이야. 
남편: 이제 알았어?
귀여운 아가씨: 아 아니, 알기야 이미 오래전에...... 그 골목길에서부터 알았지요. 아저씨는- 
남편: 알았지! 
귀여운 아가씨: 아저씨는 나를 고맙게 생각해야 할 거야........ 반드시 나에 대해 뭔가 우아한 생각을 해야 해. 
남편: 왜? 
귀여운 소녀: 내가 곧바로 아저씨와 별실로 들어왔으니까.
남편: 글쎄, 곧바로라고는 할 수 없지. 
귀여운 아가씨: 그런데 아저씨는 데이트 신청을 아주 멋지게 할 줄 아는 것 같아.(홍진호, 56-57)

이 대목의 기본 상황은 이미 최석희의 번역을 검토하면서 언급한 바 있다. 홍진호 역시 존칭 2인칭 대명사 Sie 대신 비존칭 2인칭 대명사 du를 사용해 달라는 “남편”의 요구를 존댓말 대신 반말을 쓰라는 요구로 해석한 점은 최석희와 같다. 다만 최석희가 해요체와 해체의 구별 외에도 “당신”과 “자기”의 구별을 통해 존댓말과 반말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데 반해, 홍진호는 어미만으로 존댓말과 반말을 구별한다. “귀여운 아가씨”는 상대를 부를 때 어색한 번역투로 느껴지는 ‘당신’이라고 하는 대신 ‘아저씨’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이는 “반말”을 하는 경우에도 변함이 없다. 한국의 문화적 맥락에서 남성이 자기보다 어린 여성에게 친밀감을 요구할 때 어미보다는 호칭의 변화에 더 관심이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남편”이 “귀여운 아가씨”에게 ‘아저씨’라고 부르지 말라고 하는 것으로 번역하고 “귀여운 아가씨”의 말투의 차이도 상대에 대한 호칭의 차이(이를테면 ‘아저씨’와 ‘자기’)를 통해 만들어내는 것이 더 상황의 뉘앙스를 살려내는 방법일 수도 있을 것이다. 원문에서 “귀여운 아가씨”는 마지막 두 번의 대사에서 “남편”의 성가신 요구를 무시하기로 한 듯이 존칭으로 돌아온다. 두 사람 관계의 불확실성이 드러나는 대목인데, 역자는 이 부분에서부터 “귀여운 아가씨”의 대사를 모두 반말로 처리한다. 원문에서 그녀는 이후에도 계속 ‘du’와 ‘Sie’ 사이에서 동요하다가 “남편”의 격렬한 키스 이후에 비로소 완전히 ‘du’에 정착하지만, 그러한 중요한 변화의 지점이 번역에서는 특별한 이유 없이 원작과는 다른 곳으로 옮겨져 버렸다.

위 인용문의 앞부분, 즉 최석희의 번역에서 다소 엉뚱하게 옮겨진 부분은 여기서 어떻게 번역되었을까? 홍진호는 문맥을 정확히 파악하여 원문에는 없는 인용부호까지 추가하면서 오해의 여지가 없는 정확한 번역을 제공한다. “귀여운 아가씨”가 “왜 그런 거 있잖아요”라고 존댓말을 쓰자 그것을 지적하기 위해 “남편”은 “그런 거 있잖아”라고 대꾸한다. “귀여운 아가씨”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으니까, 그제야 “남편”은 자기의 의도를 더 분명히 드러낸다.

“그런 거 있잖아”. 말을 놓으라고. “그런 거 있잖아요”가 아니라. 

원문을 직역하면 “알지? 이렇게 말하라고, 알죠? 하지 말고.” 정도가 될 터인데, 홍진호는 좀더 친절하게 부연 설명하는 말을 추가한다(“말을 놓으라고”).

요컨대 홍진호는 전반적으로 어색한 문어투보다 생생한 구어의 느낌을 살리면서(최석희의 “너는 내게 또 존댓말을 하니?”와 홍진호의 “또 존댓말한다”를 비교해보라), 원문의 의미 파악에 충실한 번역을 선사한다. 일부 인물의 말투의 적절성 문제, 원문의 뉘앙스와의 차이, 일부 번역상의 오류에 관해 지적할 수 있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문맥 속에서 드러나는 암시까지 꼼꼼하게 읽어내는 신뢰할 만한 번역으로 읽힌다.


3) 김기선 역의 <윤무>(2009)

김기선의 번역 <윤무>는 성신여대 출판부의 독일희곡시리즈 중 제8권으로 출간되었다. 레싱, 클라이스트에서 슈니츨러, 브레히트에 이르는 총 12편의 독일희곡이 이 시리즈에서 출간되었으며 모두 같은 역자의 번역이다. 각 권은 한 편의 희곡과 역자가 쓴 작품 해설로 구성되어 있다. 역자는 <윤무>에도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윤무’ - 언어와 행동의 이중성과 20세기 전환기 비엔나 사회>라는 상세한 해설을 붙여 <윤무>의 험난한 수용사와 작품의 사회비판적 의의를 서술한다. 이에 따르면 이 작품은 “욕구 충족의 메커니즘에 따라 모두가 모두를 기능화하고 모두가 모두를 대체할 수 있는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151)

이 번역 역시 지금까지 살펴본 세 가지 논점을 중심으로 검토해보자.

여배우: 그리고 이제 드디어 키스를 해 주시지요.
백작: (키스를 하자 그녀는 그를 놓지 않는다.)
여배우: 자기를 보지 않았어야 하는 건데.
백작: 이렇게 된 게 더 낫지요.
여배우: 백작님, 당신은 너무 체면을 차리세요!
백작: 내가요 – 왜요? 
여배우: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처지에 처하게 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해할지 아세요?
백작: 전 아주 행복합니다.
여배우: 글쎄, 난 행복이란 없다고 생각했지요. 당신 왜 날 그렇게 보는 거예요? 백작님, 제가 무서우신가 보네요. 백작님!(김기선, 99)

김기선의 번역은 지금까지 살펴본 두 번역과 세 가지 지점에서 명백한 차이를 드러낸다. 첫째, 여배우는 백작과 키스한 후 “자기를 보지 않았어야 하는 건데”라고 말한다. 원문에서 여배우가 백작을 향해 비존칭 화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 즉 그와 그녀 자신이 친밀한 연인 사이임을 선언한다는 것이 번역에서도 잘 드러난다. 여기서 2인칭 대명사를 “자기”라고 번역함으로써, 이후 백작의 반응에 대한 불만으로 여배우가 백작을 다시 ‘당신’이라고 부르며 태도를 바꾼다는 것도 명확해진다. 둘째 여배우가 백작을 보았다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사건에 대해 후회하는 듯이 말하고 있음도 정확히 번역되었다. 셋째, 앞의 두 역자가 백작의 말을 가정법으로 번역하는 바람에 생겨난 의미의 왜곡이 여기서는 바로잡혀 있다. 백작은 “이렇게 된 게 더 낫지요”라고 말하고, 여배우는 다소 무심한 척하는 그의 태도에 화를 내며 “너무 체면을 차리”고 있다고 백작을 비난한다. 문맥을 정확히 읽어낸 번역으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의문스러운 부분도 있다. “자기를 보지 않았어야 하는 건데”라고 여배우의 비존칭 화법을 잘 살려냈으면서도 왜 그 전의 비존칭 명령형은 지극히 격식을 차린 듯한 딱딱한 톤으로 번역한 것일까?(“그리고 이제 드디어 키스를 해 주시지요.”) 또 하나 문제로 지적할 수 있는 점은 “난 행복이란 없다고 생각했지요”라고 원문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여 문맥 속에 함축된 조소와 비아냥의 뉘앙스를 살리지 못한 부분이다. 그 점에서는 최석희 번역의 오류를 답습하고 있다. 홍진호처럼 원문에 없는 말까지 추가하며 숨은 뜻을 밝히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난 또 행복이란 없는 건 줄 알았네요” 정도로 말하는 사람의 어조에 일정한 냉소적 감정이 실리도록 번역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방언의 문제가 여기서는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자. 김기선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직선적인 해결책을 택한다. 오스트리아식 방언을 경상도 방언으로 옮기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번역이 나온다.

병사: 글쎄, 와 그라는데? 낸 어두운 게 싫단 말이다.
하녀: 말해 봐, 프란츠, 낼 좋아하노? 
병사: 방금 니 좋아한다고 말했잖나.(김기선, 15)

이러한 번역은 방언을 방언으로 옮긴다는 것 외에는 정당화할 근거가 박약해 보인다. 왜 경상도 방언인가? 표준 독일어와 오스트리아 방언 사이의 관계를 표준 한국어와 특정 지역의 방언 사이의 관계로 치환할 수 있는가? 물론 다른 역자들처럼 방언의 음조를 살리지 않고 의미 중심으로 번역하는 것은 문체적 측면에서 상당한 손실을 감수하는 선택임은 분명하다. 그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 했다는 점을 평가할 수는 있지만, 김기선이 제시하는 해결책도 설득력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방언의 의미에 대한 파악은 얼마나 정확한가? 다음 대목을 보자.

창녀: 니 같은 애인이 있으믄 좋겄다. 
병사: 내가 니하꼬 너무 열심히 할 텐데.
창녀: 그럼 내가 버릇을 고쳐주지.(김기선, 9)

병사의 말에서 역자는 역시 방언에서 “tät’”가 가지는 가정법적 의미를 잘 파악하였다. 다만 eifern을 “열심히 하다”로 번역한 것은 원의에서 어긋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원문 문장 자체가 쉽게 번역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오류로 단정하기도 어렵다. 번역자마다 번역이 제각각인 것은 이 구절의 의미가 아주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에서 “mir”를 “우리”로 번역한 것도 이 번역이 방언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임을 보여준다.

병사: 저 봐요. 저기 우리 같은 사람이 둘 있제. 
하녀: 어디예?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 
병사: 저기...우리 앞에. 
하녀: 무슨 말잉교? 우리 같은 두 사람이라니?(김기선, 14)
 

마지막으로 존칭/비존칭 문제를 검토해 보자. 이와 관련하여 앞에서 살펴본 “남편”과 “귀여운 아가씨”의 대화 장면이 김기선 번역본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 있다.

남편: 또 선생님 한다.
귀여운 아가씨: 그랬어예? - 습관이란 게 고치기가 힘들어서예. 
남편: 이것 봐요.
귀여운 아가씨: 뭘요? 
남편: 선생님, 합니다...하지 말고 그냥 말 놓아. 자 이리 와서 내 옆에 앉아. 
귀여운 아가씨: 잠깐요, 아직 다 안먹었어예.
(중략)
남편: 키스하고 싶어서. 
귀여운 아가씨: (키스한다) 선생님은...오, 미안. 자기는 뻔뻔스러운 사람이라예. 
남편: 무슨 소리야? 
귀여운 아가씨: 아, 아니라예. 아까부터 생각했는데... 밖에서부터요 – 선생님이 -
남편: 자기가 - 
귀여운 아가씨: 자기가 날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
남편: 왜? 
귀여운 아가씨: 곧장 별실로 따라 들어온 것에 대해서.
남편: 글쎄,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
귀여운 아가씨: 하지만 당신은 멋있게 부탁할 줄을 알아요.(김기선, 54)

김기선은 여기서 독일어 du/Sie의 구별을 한국어에서 주로 종결어미의 차이로 표현되는 존댓말/반말의 대립보다는 자기/선생님이라는 호칭의 대립으로 변환함으로써 친밀성에 대한 “남편”의 요구와 그 요구 앞에서 아직은 주저하는 “귀여운 아가씨”의 동요를 좀더 뉘앙스 있게 표현한다. 일단 “남편”이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말 것을 요구하고, 이에 상응하는 하십시오체(“합니다”)의 사용을 금지하기 때문에 “귀여운 아가씨”의 문제는 상대를 “자기”라고 다정하게 불러주느냐,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거리를 두고 대하느냐 사이의 갈등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그녀가 “자기..해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남편”이 용인하는 범위 안에 들어간다. 이러한 번역은 “귀여운 아가씨”가 해체와 해요체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것보다는 두 인물의 관계에서 문제되는 바를 더 효과적으로 표현해준다.

이 대목에서 김기선의 번역이 눈에 띄는 또 한 가지 긍정적인 점은 “귀여운 아가씨”의 심리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다. “귀여운 아가씨”는 남자를 따라 곧장 별실로 들어온 것이 어떤 좋지 않은 인상을 주었을까 걱정한다. 원문에는 “Du musst dir eigentlich was schönes von mir denken”(116)인데 여기서 schön은 문자 그대로 아름답거나 좋다는 의미가 아니라 문맥상 반어적으로 사용된 말이다. 그것은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는 “남편”의 물음에 “귀여운 아가씨”가 낯선 남자를 따라 바로 별실로 들어온 것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데서 분명히 드러난다. “귀여운 아가씨”는 “남편”의 눈에 자기가 “쉬운” 여자, 도덕적으로 타락한 여자로 비칠까 걱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장을 ‘날 우아하게 생각해야 한다’(최석희)거나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홍진호)고 번역해서는 본래의 대화 맥락을 드러낼 수 없다. ‘당신은 날 참 좋게도 생각할 게 뻔하다’라는 어감에 가까울 것이다. 김기선은 “귀여운 아가씨”의 말을 “자기가 날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라고 옮김으로써 이런 속뜻을 잘 살려낸다. 이런 맥락에서 “귀여운 아가씨”가 “남편”에게 “하지만 당신은 멋있게 부탁할 줄을 알아요”라고 한 것은 별실로 바로 따라 들어온 것에 대한 변명으로 읽힌다. 내가 곧장 별실에 따라 들어온 것 때문에 부끄럽지만, 그렇게 행동한 데는 당신 책임도 없지 않다는 정도의 의미로 한 말이다. “하지만 당신이 워낙 멋지게 청해서 그랬죠.” 정도로 의역한다면 그 의미가 훨씬 더 분명해졌을 것이다.

김기선은 빈의 평범한 사람들의 말씨를 과감하게 경상도 방언으로 옮김으로써 실험적 시도를 해보았지만, 이는 독자들에게 오히려 번역이 진지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줄 위험이 없지 않아 보인다. 그런 외관과는 달리 김기선은 곳곳에서 인물들의 대화의 숨은 속뜻을 포착해내는 데 있어 희곡 번역가로서의 역량을 충분히 보여준다.


4) 백종유 역의 <라이겐>(2010)'

2010년에는 슈니츨러의 <Reigen>의 네 번째 한국어 번역본이 출간된다. 백종유가 슈니츨러의 작품집 <엘제 아씨> 속에 이 작품을 ‘라이겐’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수록하였다. 백종유 번역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최대한 구어체를 강화하기 위해 원문에 크게 구애받지 않으며 자유롭게 번역하는 경향이다. 이 점에 유의하면서 역시 세 가지 논점을 중심으로 백종유의 번역을 검토해보도록 한다.

여배우: 그럼 이제 키스 한번 해줘요, 드디어! 
백작: (그녀에게 키스하고, 그녀는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여배우: 차라리 당신 얼굴은 아예 쳐다보지 않는 게 역시 좋아. 
백작: 분명 그렇게 하는 게 좋지, 음!
여배우: 백작니임, 당신은 거드름쟁이야!
백작: 내가 – 어째서 그래?
여배우: 당신 같은 지위에 오르게 되면, 행복할 것이라고 헛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숱하게 많더라고요. 그렇잖아요? 
백작: 난 정말 행복한데 뭘 그래.
여배우: 글쎄, 내 생각으론, 그런 것은 행복이 아냐. 뭘 그렇게 날 빤히 쳐다보죠? 내가 알기론, 당신은 나를 두려워하고 있어, 백작 니임!(백종유, 291-292)

이 번역의 문제는 원문에 표현된 인물들의 심정을 오해했다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역자는 그런 오해에서 출발하여 원문에 없는 말들을 자의적으로 추가한다. 여배우는 백작을 맞닥뜨린 사건으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을 한탄하듯이 말하고 있는데(“자기를 보지 못했으면 좋았을 텐데”), 역자는 이 문장을 지금처럼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키스만 하고 있으면 좋겠다는 식의 뉘앙스로 옮긴다. 게다가 이러한 해석을 정당화하려는 듯이 원문에는 없는 얼굴이라는 단어를 추가한다. 본래 여배우에게 가볍게 반박하는 백작의 말은 –자신의 얼굴에 대한 박한 평가를 자조적으로 받아들이듯이- 호응하는 말로 바뀐다. 여배우가 백작의 무심한 척하는 태도를 비난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백작처럼 자신을 차지했다면 얼마나 행복해했을지 아느냐고 물어보는 대목에서는 “an deiner Stelle”를 “당신 같은 입장이 된다면, 당신 같은 처지가 된다면”이라고 보지 않고 “당신 같은 지위에 오르게 되면”이라고 오해함으로써 역시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행복’이 뜻하는 바가 달라지고, 이에 따라 다른 사람들 같으면 나의 사랑을 얻어서 얼마나 행복해할 텐데 당신은 행복한 줄을 모르냐라는 여배우의 오만한 질문은 엉뚱하게도 다른 사람들이 백작 지위가 되면 행복할 거라고 헛꿈을 꾼다는 주장으로 왜곡된다. ‘헛생각’이라는 표현도 역자가 자신의 해석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의적으로 끼워 넣은 것이다. “백작니임, 당신은 거드름쟁이야!”라는 문장은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원문에서는 여배우가 친근하게 굴다가 백작의 심드렁한 태도에 화가 나서 존칭을 사용하며 거리를 두는 태도로 내뱉은 말이다. 원문은 정상적이고 표준적인 존칭법 문장인데 백종유는 이를 친밀한 사이에서의 애교 섞인 비난처럼 만들어 버렸다. 여기에서도 역자의 자의적 개입이 본래의 심리적 드라마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든다.

창녀: 당신 같은 남자가 애인이었음 좋겠어, 정말이야. 
군인: 내가 너무 질투를 부릴 텐데. 
창녀: 그런 버르장머리는 내가 싹 고쳐놓을 거야.(백종유, 188) 

방언 문제에 관한 입장으로 보면, 백종유 역시 최석희, 홍진호같이 방언 사용자에게 따로 두드러진 말씨를 부여하지 않고 표준 한국어를 구사하게 한다. “그런 버르장머리는 내가 싹 고쳐놓을 거야” 같은 번역 문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전반적으로 구어체적 성격을 강화하는 경향을 보이며, 때로 원문에는 없는 비속어를 특정 인물의 입에 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원문에서는 군인이 하녀에게 “Das ist der Zeivilist gewesen”(그건 민간인이었어요, 24)이라고 말하는데, 그런 군인의 말이 번역에서는 “그 놈은 민간인 새끼야”로 한층 거칠어진다. 이는 정도를 넘어서는 역자의 개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방언의 의미 전달 면에서 살펴보면, 군인의 말은 “tät’”의 가정법적 의미를 살려 “내가 너무 질투를 부릴 텐데”라고 정당하게 번역하고 있다(물론 내용적인 면에서 다르게 번역할 여지는 남아 있다). 반면 군인과 하녀의 대화에서는 1인칭 복수 대명사 ‘wir’의 방언 ‘mir’를 1인칭 단수 대명사 ‘나’로 오인하여 의미가 통하지 않게 되었다(“저기 나 같은 사람이 두 사람 더 있는데.”-“그런데 왜 ‘당신 같은 사람이 두 사람’ 더 있다고 그래요?” 백종유, 192-193). 이것은 최석희의 오류와 같다. 다만 최석희의 오류가 1인칭 복수 대명사를 1인칭 단수 대명사로 대체하는 데 그친다면, 백종유는 ‘우리 같은 두 사람’이 ‘나 같은 두 사람’으로 바뀐 데서 발생하는 의미론적 불균형을 지우기 위해 역시 원문에는 없는 ‘더’라는 부사를 추가함으로써(두 사람이 더 있는데) 다시 한번 필요하다고 느끼면 자의적으로 표현을 삽입하는 번역 태도를 보여준다.

남편: 또 벌써 ‘요요’라고 말하네.
감미로운 아가씨: 그렇잖아요 - 그찮아용. 바로 쉽게 익숙해지는 게 아니잖아요.
남편: 근데 말이야.
감미로운 아가씨: 뭐가요?
남편: 근데 말이다. 그런 말은 쓰지 말라고. 그찮아용, 이란 말. - 이리와, 내 옆에 와 앉아.
감미로운 아가씨: 쪼금만 있다가 아직 난 안 끝났는데.
남편: [일어나 의자 뒤에 서서 감미로운 아가씨를 두 팔로 얼싸안으며 그녀 머리를 자신의 쪽으로 돌리게 만든다.]
감미로운 아가씨: 아잉, 뭣 땜에 그래요?
남편: 뽀뽀 한번 하고 싶어서 그런다.
감미로운 아가씨: [그에게 키스를 해준다.) 선생니임두... 아 참, 자기는, 자기는 뻔뻔스러운 사람이야.
남편: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들었어. 응?
감미로운 아가씨: 아 아뇨, 그런 생각이야 벌써 훨씬 전부터… 그 골목길에서. – 선생니임은 분명 –
남편: 자기는 분명.
감미로운 아가씨: 자기는 분명 나한테서 진짜로 뭔가 아름다운 걸 생각했나 봐.
남편: 왜 그런 말을?
감미로운 아가씨: 제가 곧바로 선생님과 함께 샹브르 세파레까지 갈 정도라면.
남편: 그런가, 하지만 곧바로, 라고는 말할 수 없지.
감미로운 아가씨: 하지만 선생님이 정말로 그렇게 애원까지 하실 수 있다면야.(백종유, 237-238)

존칭/비존칭 문제에서 백종유는 김기선을 제외한 다른 역자들과 마찬가지로 독일어의 존칭과 비존칭의 대립을 한국어에서는 해요체와 해체 사이의 대립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두 종류의 어미에 상응하는 호칭은 각각 선생님과 자기로 설정한다. 비존칭 화법에 대한 “남편”의 요구가 거리를 두지 않는 친밀성을 보이고 성적 접근의 가능성을 열라는 신호라고 한다면, 그것을 반드시 해체로 말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다시 제기해볼 수 있다. “그찮아용” 같은 말투가 충분히 가까운 사이의 애교 섞인 말투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 남편이 굳이 “그찮아용”이라는 식의 말까지 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것은 어색해 보인다. 다만 존칭 대명사와 비존칭 대명사의 대립을 ‘선생님’과 ‘자기’라는 호칭의 대립으로도 표현한 것은 이런 문제점을 어느 정도 보완해준다. 다만 ‘선생니임’처럼 -‘백작니임’과 마찬가지로- 원문의 표현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구어적 변이형의 사용이 어떤 효과를 위한 것인지 불투명해 보인다.

이 번역에서 원문의 세밀한 읽기, 원문의 미묘한 뉘앙스 포착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백종유는 “남편”이 “감미로운 아가씨”의 “그렇잖아요 Wissen S’”라는 말을 고쳐주기 위해 “Weißt du”라고 말했다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냥 “그런데 말이야” “그런데 말이다”와 같은 식으로 “남편” 자신의 말로 해석한다. “감미로운 아가씨”의 반어적인 말도 여기서는 전혀 반어적이지 않게 “자기는 분명 나한테서 진짜로 뭔가 아름다운 걸 생각했나 봐”로 옮겨진다. 다른 역자들도 오류가 있지만, 백종유처럼 자의적으로 시제까지 변경한 경우는 없다.(문법적으로 가능한 번역은 “생각해야 한다” 혹은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다” 둘 중의 하나다.) 백종유는 “Das süße Mädel”을 ‘감미로운 아가씨’로 옮긴다. 하지만 이 표현이야말로 구어체적 느낌을 살려서 옮기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이 번역본은 의미의 측면에서나 문체의 측면에서나 상당히 불만족스러운 점을 남긴다. 역자의 자유로운 원문 가공이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주는 번역이기도 하다.


5) 이관우 역의 <윤무>(2017)

2008년에서 2010년에 이르는 기간은 <윤무> 번역 붐이 일어난 시기라고 할 만하다. 2년 정도의 시간에 무려 4개의 번역본이 잇달아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다시 상당한 시간이 지나 이관우의 번역으로 새 한국어본이 출간된다. 최석희와 김기선에 이어 <윤무> 한 작품만 단행본으로 수록한 세 번째 사례다. 역자의 작품 해설은 소략하나, 뒤에 원문이 덧붙여져 총 208페이지의 분량을 이룬다. 또 하나 특징적인 점은 작품의 부제를 ‘의역’하여 책 표지에 내세운 것이다. 원작의 부제는 “Zehn Dialoge”(열 개의 대화)이고 다른 역자들은 대체로 이 부제를 그대로 번역하여 속 표지에 제시하고 있다. 이에 반해 이 번역본은 표지에 붉은 글씨로 “섹스파트너 10쌍의 대화”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작품의 내용과 어긋나는 것은 아니나 원작의 함축적인 부제, 실제 인물들의 성관계 장면에 예외 없이 적용된 생략법, 인물들의 복합적인 심리를 나타내는 암시적인 언어 등을 생각해볼 때 독자에게 엉뚱한 추측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노골적인 부제가 과연 적절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역시 여배우와 백작의 대화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해보자.

여배우: 그럼 이제 키스해 주세요. 
백작: (그녀에게 키스하고, 그녀는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여배우: 당신을 쳐다보지 않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백작: 그게 더 나을 거요.
여배우: 백작님, 당신은 거드름쟁이예요!
백작: 내가 – 왜지요?
여배우: 생각해보세요,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위치에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백작: 나는 아주 행복하오. 
여배우: 글쎄요, 저는 행복이란 없다고 생각했어요. 저를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절 두려워하시는 것 같군요, 백작님!(이관우, 91-92)

이관우는 앞선 번역에서 반복된 오류들을 거의 다 답습한다. 여배우는 “당신을 쳐다보지 않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라고 하고 백작은 “그게 더 나을 거요”라고 대꾸한다. 백종유와 유사하게 번역했는데, 백종유처럼 임의적인 설명을 덧붙이지도 않기 때문에 대체 왜 그런 문답이 오가는지 이유를 짐작하기도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위치에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라는 번역문은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보통은 어떤 여성의 사랑을 받는 입장에 있다는 의미로 “위치”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기 때문에 원의를 독자에게 전달하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게다가 앞의 오역으로 인해 여배우가 왜 백작을 거드름쟁이라고 비난하는지도, 여기서 “당신의 위치”가 무엇을 말하는지도 모두 불분명해져 버렸다. 여배우가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위치에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라는 질문을 한 것은 백작이 그런 “위치”에 있는데도 행복해할 줄 모른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작이 이를 반박한다면 ‘나도 당연히 행복하지’라고 대답해야 하지만, 번역에서는 “나는 아주 행복하오”라고 하여 질문과의 연관성을 잘 보이지 않게 만든다. 여배우의 말에는 ‘그래요? 난 또 행복이란 건 없는 건 줄 알았죠’라며 백작이 전에 한 말을 비꼬는 어조가 담겨 있지만 번역은 그것 역시 전혀 포착하지 못한다. 대화의 저변에 깔린 인물들의 감정과 생각, 태도의 흐름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는 경우에 축자적 의미에서는 크게 어긋남이 없는 번역도 원작과 상당히 멀리 떨어지게 된다는 교훈을 여기서 얻을 수 있다.

다음으로 방언과 관련된 부분을 보자. 다음 대목에서 보듯이 이관우 역시 방언을 특별히 다르게 번역하려고 시도하거나 이에 대해 고민을 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창녀: 나는 당신 같은 남자를 애인으로 삼고 싶어요. 
병사: 난 네게 너무 열렬히 해줄 텐데. 
창녀: 그럼 내가 버릇 좀 고쳐주지요.(이관우, 13) 

이관우는 서로를 비존칭으로 격식 없이 대하는 원문과 달리 병사에게는 해체를, 창녀에게는 해요체를 구사하게 하여 창녀의 낮은 신분적 위치를 표시한다. 그러나 창녀가 사회적 예의 코드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행동하고 말하는 존재라면, 지나치게 깍듯해 보이는 존대법의 구사는 창녀라는 인물형과 썩 잘 어울리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방언의 의미 해석의 면에서 살펴본다면, 이관우 역시 “tät’”를 가정법적 의미의 조동사로 파악하여 적절하게 번역한다. 그러나 방언의 문제와는 무관하게 문장 전체를 ‘네게 너무 열렬히 해줄 텐데’라고 번역한 것은 부정확해 보인다. 병사가 창녀의 말에 호응하는 것인지 제동을 거는 것인지도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니 “버릇 좀 고쳐주”겠다는 창녀의 대답도 의미가 모호해진다. 첫 번째 인용문에 이어 이 부분의 번역에서도 의미의 흐름이 잘 이어지지 않고 인물들이 각자의 말을 하는 듯한 현상이 나타난다.

이관우는 앞에서 일부 번역에서 문제가 된 대명사 “mir”를 “우리”로 제대로 옮긴다.

병사: 저기 좀 봐. 우리 같은 사람이 둘 있네. 
하녀: 어디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병사: 저기... 우리 앞에. 
하녀: 대체 무슨 말이에요. 우리 같은 두 사람이라니?
병사: 아, 내 말은 그저 그들도 서로 좋아한다는 뜻이지.(이관우, 17) 

하지만 문제는 다른 지점에서 발견된다. 원문에서는 병사와 하녀가 이 부분까지는 아직 서로 존칭을 사용하는 사이로 그려져 있다. 둘은 이날 저녁 술집에서 처음 만나 아직은 예의를 차리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관우는 남자 인물에게는 해체로, 여자 인물에게는 해요체로 말하게 하는 관습적 틀을 적용한다. 원작에서 두 사람은 성관계를 맺은 후에 비존칭으로 말투가 바뀌는데 이관우의 번역에서는 그러한 변화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번역본에서는 두 사람이 그 후에도 여전히 해체와 해요체로 대화를 나눈다. 원문이 표현하는 관계의 변화가 번역본에서는 언어적으로 구현되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논의가 이미 존칭/비존칭의 문제로 옮겨갔지만, 다른 번역본과의 비교를 위해 다시 한번 “남편”과 “귀여운 소녀”의 대화에서 이 문제가 이관우의 번역에서는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지 검토해보자.

남편: 또 존댓말을 하는구나. 
귀여운 소녀: 그랬어요? - 아시다시피 습관이란 게 고치기 힘든 거잖아요.
남편: 이봐.
귀여운 소녀: 뭘요?
남편: 이봐, 나한테 높여서 말하지 마. 아시다시피라고 존댓말 쓰지 마. 이리 와, 내 옆에 앉아.
귀여운 소녀: 잠깐만요 •·•••. 아직 다 안 먹었어요.
남편: (일어나서 안락의자 뒤로 가 귀여운 소녀의 머리를 자기 쪽으로 돌리면서 포옹한다.)
귀여운 소녀: 아니, 뭐하는 거예요?
남편; 키스하고 싶어.
귀여운 소녀; (그에게 키스한다.) 당신은····· 오 미안, 자기는 뻔뻔스런 사람이야.
남편: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들어? 
귀여운 소녀: 아, 아니 벌써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이미 골목에서부터. -당신은 틀림없이-
남편: ‘자기는 틀림없이’라고 해야지. 
귀여운 소녀: 자기는 틀림없이 나에 대해 뭔가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있어.
남편: 왜 그렇게 생각해?
귀여운 소녀: 내가 곧장 당신과 함께 별실로 들어왔으니까요.
남편: 그런데 곧장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이관우, 51-52)

여기서도 “남편”의 비존칭에 대한 요구는 존댓말을 쓰지 말라는 명령으로 옮겨진다. 존칭과 비존칭의 대립, Sie와 du의 대립은 존댓말과 반말, 해요체와 해체의 대립에 상응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여기에 상응하는 호칭의 대립은 “자기”와 “당신”이다. 이관우의 번역 방식은 최석희가 택한 방식과 일치한다. 역자는 이 원칙하에서 존칭과 비존칭을 오락가락하는 “귀여운 소녀”의 말투를 충실하게 번역한다. 그러나 그것이 친밀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연상 연하의 남녀커플 사이의 실랑이를 얼마나 잘 재현하는지는 의문이다.

그 외에 위의 인용문 중 한 번 더 생각해보아야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드러나는 부분에서 역자는 건조하게 표면적 의미만을 재현하면서 핵심을 모두 놓치고 만다. “남편”이 “Wissen S’(아십니까/아시지요)”라는 “귀여운 소녀”의 말을 “Weißt du(알죠/알아)”로 고쳐주고 있다는 것도, “귀여운 소녀”가 자기가 바로 별실로 따라온 것에 대해 찜찜해 하고 있다는 것도 포착되지 않는 것이다.

이관우의 번역은 주관적 해석을 번역문에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백종유의 번역과 대조적이다. 원문에 역자가 읽어내는 것을 덧붙이는 법 없이 원문에 적힌 그대로 번역한다. 하지만 대화 상황과 인물의 심리를 세심하게 살피지 않으면 잡히지 않는 함축적 의미와 관련하여 그러한 번역은 취약성을 드러낸다. 희곡에서는, 특히 슈니츨러의 심리적 드라마에서는 바로 그러한 의미가 중요하다.


3. 평가와 전망

<윤무> 번역의 역사는 길지 않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5인의 독문학자가 자기만의 번역본으로 독일어권 연극사에서 세기의 스캔들을 일으킨 이 작품을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했다. 상이한 시대적, 문화적 배경, 사회적 관계와 도덕의식, 예절 코드를 배경으로 표현되는 미묘한 심리적 드라마를 읽어내고 또 한국어에서 상응하는 표현법을 찾아내는 것은 만만치 않은 과업이다. 원문이 직접 말하지 않는 함축적인 의미의 번역은 때로는 정답이 없는 주관적 해석의 영역에 속한다. 또 바로 그러한 점이 번역자의 창조적 의욕을 자극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 번역의 성과를 바탕으로 이 번역비평에서 논의한 세 가지 문제와 관련하여 더 진전된 면모를 보여주는 새로운 번역을 기대해 본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최석희(2008): 윤무. 지만지.
홍진호(2008): 라이겐. 을유문화사.
김기선(2009): 윤무. 성신여대출판부.
백종유(2010): 엘제 아씨. 문학과지성사.
이관우(2017): 윤무. 섹스파트너 10쌍의 대화. 써네스트.

김태환
  • 각주
  1. 독일어 원문은 다음 판본을 이용한다. Schnitzler, Arthur(1914): Der Reigen. Zehn Dialoge, geschrieben 1896-1897. Berlin/Wien: B. Harz. 원문 인용 시 본문에 쪽수를 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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