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화력 (Die Wahlverwandtschaften)"의 두 판 사이의 차이
| 96번째 줄: | 96번째 줄: | ||
괴테 문장들을 <u>완전한 우리말다운 우리말로 옮김을 이상적인 목표로</u> 삼되 우리말화의 방향과 각도는 어디까지나 괴테가 이 작품에서 구사하는 문체의 문장들을 독자가 읽을 때 느끼는 리듬과 박자를 깨거나 헝크러뜨리지 않고 가능한 한 유지하는 쪽의 것으로 잡았다. 예를 들어, 같은 작가 괴테의 문장이라 해도 젊은 베르터의 슬픔에서 구사된 문체와 친화력에서 구사된 문체는 판이한 차이가 있음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u>문체의 리듬과 분위기를 유지시키려고 노력</u>했다고 말하고 싶다. 또 각 문장이 지니는 문장 개개의 분위기가 독특한 만큼 함축적인 의미를 포함하는 문장구조를 <u>아동 동화 번역에서와 같이 설명식으로 풀어 놓는 일은 가능한 한 피했다</u>. 즉 함축적인 문장 구조가 그대로 유지되도록 주의를 기울였다.(김황진, 286. 밑줄 강조 필자) | 괴테 문장들을 <u>완전한 우리말다운 우리말로 옮김을 이상적인 목표로</u> 삼되 우리말화의 방향과 각도는 어디까지나 괴테가 이 작품에서 구사하는 문체의 문장들을 독자가 읽을 때 느끼는 리듬과 박자를 깨거나 헝크러뜨리지 않고 가능한 한 유지하는 쪽의 것으로 잡았다. 예를 들어, 같은 작가 괴테의 문장이라 해도 젊은 베르터의 슬픔에서 구사된 문체와 친화력에서 구사된 문체는 판이한 차이가 있음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u>문체의 리듬과 분위기를 유지시키려고 노력</u>했다고 말하고 싶다. 또 각 문장이 지니는 문장 개개의 분위기가 독특한 만큼 함축적인 의미를 포함하는 문장구조를 <u>아동 동화 번역에서와 같이 설명식으로 풀어 놓는 일은 가능한 한 피했다</u>. 즉 함축적인 문장 구조가 그대로 유지되도록 주의를 기울였다.(김황진, 286. 밑줄 강조 필자) | ||
| + | |||
| + | “우리말다운 우리말로” 번역하면서도 동시에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하겠다는 역자의 의도가 가장 뚜렷하고도 충실하게 반영된 부분은 전체적으로 과거시제로 된 서술 한가운데 갑자기 현재시제의 문장이 이어지는 대목이다. 역자가 각주에서 ‘역사적 현재’ 또는 ‘극적 현재’로 규정하며 비교적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이 현재시제로 된 부분들은 1부 13장과 15장을 비롯하여 2부 13~14장, 16~18장에 걸쳐 종종 나타나며 “작중인물의 속마음과 긴장된 장면을 생생하게 드러내기 위한”(김황진, 97) 서술적 장치이다. 김황진은 “우리말 번역에 있어서는 흐름이 어색하지 않도록 그냥 과거 시칭으로 번역해 놓는 것이 관례”(김황진, 98)라는 점을 스스로 언급하면서도 본인은 이러한 관례를 거슬러 모든 현재시제 대목을 정확하게 현재시제로 번역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해당 부분을 모두 이탤릭체로 표시함으로써 나머지 부분과 철저히 구분하고 눈에 띄게 했다. 원문에 없는 이탤릭체까지 도입한 것은 다소 과한 면이 없지 않으나 각주에서 그 사정을 밝히고 있고 이렇게 함으로써 확실하게 독자의 주목을 끄는 효과는 있다. 그렇다면 김황진 이전과 이후의 다른 역자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 ||
| + | 초역자인 이병찬은 2부 14장의 첫 두 단락, 즉 아기 오토가 죽은 이후 별장에서 구급의가 애쓰는 가운데 오틸리에는 쓰러지고 샤를로테가 귀가하는 장면만을 현재시제로 번역하고 있으며, 홍경호는 사실상 이 ‘극적 현재’를 전혀 반영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는데 아주 제한적으로 현재시제로 번역한 한두 문장이(홍경호, 429) 눈에 띄는 정도이다. 김황진의 번역 이후에 나온 세 번역본의 경우, 오순희는 김황진과 마찬가지로 모두 충실하게 현재시제로 번역했으며 1부 13장에 이런 부분이 처음 등장할 때 각주를 달아 설명하고 있다. 반면, 김래현과 장희창의 경우는 어떤 대목은 과거 시제로 번역했다가 또 어떤 부분은 현재시제로 번역하는 등 일관성이 없다. 예컨대 김래현은 1부 13장 도입부에 오틀리에에 대한 무한한 열정으로 치닫는 에두아르트의 고조된 감정을 묘사하는 세 단락에 걸친 대목에서 두 번째 단락만 현재시제로 번역하고 있으며(김래현, 113-115) 1부 15장의 경우는 전혀 반영하지 않고 있다. 이 소설 전체에서 가장 결정적인 대목 중의 하나라고 할 2부 13장(김래현, 271-278)의 경우는 더욱 혼란스러운 양상을 보이는데, 산 위의 별장을 보고 에두아르트가 느끼는 그리움과 조바심을 묘사하는 대목에서는 현재시제를 반영하지 않고 있으며 이후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가 재회하는 순간은 반영하고 있다. 이어지는 장면, 에두아르트와 헤어진 후 오틸리에가 아기를 물에 빠뜨리는 사고가 나는 대목 역시, 오틸리에의 혼란스러운 정신상태를 묘사하는 부분은 현재시제를 반영하지 않았다가 사고가 일어나는 순간은 반영하고 그다음 단락은 또 반영하지 않았다가 오틸리에가 정신을 차리고 구조를 시도하는 대목은 다시 반영하는 등 시제 번역에 전혀 일관성이 없다. 이후 14장에서 18장 사이 부분은 대체로 원문대로 현재시제로 번역하고 있는 편이나 일부 부정확한 곳도 발견된다. 장희창의 경우는 김래현보다는 원문에 가깝게 현재시제로 번역하고 있는 편이나 역시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대목이 상당수 존재한다. 1부 13장의 세 단락 중 첫 단락의 현재시제를 반영하지 않고 있으며 김래현과 마찬가지로 1부 15장의 현재시제 역시 과거로 번역하고 있다. 2부의 경우는 대체로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편이나 역시 김래현처럼 2부 13장에서 에두아르트가 산장을 보고 그리움과 조바심을 느끼는 대목은 현재시제를 반영하지 않았다. 이 두 번역본은 <친화력>에서 현재시제 서술의 중요성을 이토록 강조한 김황진의 번역보다 나중에 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제를 일관성 없이 번역하여 이 문제에 대한 역자의 뚜렷한 의식이나 원칙이 없었음을 보여주고 있어 아쉽다 하겠다. | ||
| + | 김황진이 역자 후기에서 번역 시 가장 어려웠던 점으로 꼽고 있는 것은 바로 인물들 간의 대화에서 “경어사용의 문제”이다. 이는 실제로 우리가 번역할 때 자주 부딪히는 문제이기도 하고 또 특히나 <친화력>같이 몇백 년 전의 텍스트를 번역할 때는 더욱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아래 오순희의 번역본에 대한 개별번역비평에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룰 것이므로 유일하게 이 문제에 대해 직접 언급한 번역자 김황진의 입장을 한번 들어보기로 하자. | ||
| + | |||
| + | 그런데 무엇보다 난해했던 점은 경어사용의 문제이다. 18세기 독일 상류사회의 언어를, 시대적으로 그에 알맞는 우리나라 이조시대 상류사회의 언어에다 맞추게 되는 번역도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나라 교양인의 언어를 가미하는 형식을 취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도 있었음을 밝혀둔다. 언어문화의 발전과 사회의 발달은 동서양을 시대적으로만 일치시켜 동일시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남녀간, 부부간에 있어 자신의 호칭을 경우에 따라 '나'와 '저'를 혼용함이 필요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대체로 이 번역에서는 소위 문학 작품 번역어의 관점에서의 원어 텍스트 조작이 일어나지 않도록 가능한 한 원어 텍스트의 문화적 분위기에 맞추는 방식을 취하였고, 번역(목표)언어인 우리말 쪽은 대체적인 문화적 등가관계만을 참작하여 현재 우리나라 방송매체를 통하여 많이 익혀진 어휘 아니면 거의가 우리 한국 현대 중산층 표준말 사용 가정에서 사용되는 어감을 유지하도록 하자는 것이 본 번역의 방향 설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김황진, 286-287, 밑줄 강조 필자) | ||
| + | |||
| + | 위의 인용문에서 역자 김황진은 높임말 사용에 있어서 현재 우리나라의 언어는 물론 작품의 시대 배경도 함께 고려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김황진의 번역본은 앞선 두 번역본에 비해 훨씬 더 풍부한, 총 62개의 역주를 각주로 달아서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는데, 이때 단순히 한국의 독자에게 낯선 인명이나 주제를 설명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번역어 선택에 대한 부연설명이라든가(예컨대 19쪽, 29쪽, 43쪽 등) 관련 주제에 대한 연구서까지 소개하는(예컨대 52, 137쪽) 등 학술적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 ||
{{A05}}<!--바깥 링크(원서 읽기)--> | {{A05}}<!--바깥 링크(원서 읽기)--> | ||
2025년 5월 4일 (일) 13:04 판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의 소설
| 작가 |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
|---|---|
| 초판 발행 | 1809 |
| 장르 | 소설 |
작품소개
이 작품은 결혼 제도와 법의 테두리를 넘는 사랑의 친화력으로 벌어지는 비극적인 이야기를 담은 괴테의 장편소설이다. 에두아르트와 샤를로테는 재혼 부부이다.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으나 신분제적 결혼 관습 때문에 다른 사람과 결혼한 두 사람은 각각 배우자가 사별한 후 다시 합쳐진다. 탄탄할 줄 알았던 두 사람의 관계는 에두아르트가 어려움에 처한 대위 친구를 돕고자 그를 초청하고, 샤를로테가 기숙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조카 오틸리에를 집에 불러들이면서부터 깨지기 시작한다. 산과 알카리처럼 결합해서 안정을 이루더라도 더 친화력이 있는 원소를 만나면 새로운 결합을 하게 되듯이, 이성적이고 사려 깊은 샤를로테는 이성적이고 유능한 대위 오토에게, 충동적이고 열정적인 에두아르트는 말없고 내성적이면서 감정이 풍부한 오틸리에에게 끌린다. 그러나 화학반응에서의 친화력과 달리 남녀관계에서의 친화력은 결혼과 같은 사회적인 제도 안에서 위기의 시작이 된다. 샤를로테와 대위는 사회적 관습을 고려하고 의무감에 따라 사랑을 체념하기로 결심한 반면, 에두아르트는 자신의 격정에 따라 행동하고 싶어한다. 에두아르트와 샤를로테가 각자 다른 상대를 상상하면서 나눈 육체적 결합에서 아이가 생기고, 에두아르트는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심정으로 전쟁에 지원한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에두아르트는 오틸리에와 결합하고자 하지만, 아기를 정성껏 돌보던 오틸리에의 실수로 아기가 물에 빠져 죽자 오틸리에는 죄책감, 도덕적 의무감, 식지 않는 사랑의 열정 사이에서 번민한 끝에 죽음을 선택한다. 이에 절망한 에두아르트가 오틸리에를 따라가면서 새로운 친화력은 비극적인 결말로 끝난다. 이 소설은 낭만적인 사랑에 대한 요구와 결혼의 도덕적인 사회적인 의무 사이의 딜레마를 보여주면서 도덕적인 가치판단은 유보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1968년에 이병찬에 의해 처음 번역되었다(휘문출판사).
초판 정보
Goethe, Johann Wolfgang von(1809): Die Wahlverwandtschaften. Tübingen: Cottaische Buchhandlung.
번역서지 목록
| 번호 | 개별작품제목 | 번역서명 | 총서명 | 원저자명 | 번역자명 | 발행연도 | 출판사 | 작품수록 페이지 | 저본 번역유형 | 작품 번역유형 | 비고 |
|---|---|---|---|---|---|---|---|---|---|---|---|
| 1 | 親和力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헤르만과 도로테아 外 | (愛藏版)世界文學大全集 3 | 괴테 | 洪京鎬(홍경호) | 1981 | 금성출판사 | 171-404 | 편역 | 완역 | |
| 2 | 親和力 | 젊은 베르터의 슬픔, 헤르만과 도로테아, 親和力 | Sunshine series, 世界文學全集 4 | 괴테 | 洪京鎬(홍경호) | 1987 | 금성출판사 | 197-466 | 편역 | 완역 | |
| 3 | 親和力 | (金星版)世界文學大全集 10 | (金星版)世界文學大全集 10 | 괴테 | 洪京鎬(홍경호) | 1990 | 金星出版社 | 197-466 | 편역 | 완역 |
|
1. 번역 현황 및 개관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1809년 환갑의 나이에 출간한 <친화력>은 낭만적 사랑과 결혼이라는 사회제도 사이의 긴장관계를 잘 보여주는 연애소설이자 불륜소설이며 또한 프랑스혁명 이후의 사회상을 그리고 있는 사회소설이기도 하다. ‘이중의 간통’이라는 설정과 그로 인해 태어난 아기가 두 사람이 각각 마음에 품고 있던 상대방의 모습을 닮았다는 묘사는 지금 읽어도 파격적이며 작품이 발간되었을 당시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괴테의 대표작이라 할 <젊은 베르터의 고뇌>와 <파우스트>가 일제강점기에 이미 번역된 데에 비해서 <친화력>은 1968년에 가서야 초역이 나오며 지금까지 나온 번역본의 숫자도 역자 기준 총 8종으로 이 두 작품에 비하면 훨씬 적다. 이병찬의 초역은 휘문출판사의 <괴에테文學全集> 제6권으로 처음 출간되었으며 1974년과 1980년 같은 출판사의 다른 시리즈로 두 번 더 재출간되었다. 두 번째로 이 작품을 번역한 역자는 홍경호로 그의 번역본은 금성출판사에서 1981년, 1987년, 1990년 이렇게 세 번 총서번호를 달리 하여 세계문학전집 가운데 한 권으로 나왔다. 이후 1990년대에는 서석연, 김황진이, 2000년대 이후로는 김래현, 오순희, 곽복록이 <친화력>을 번역했으며 가장 최근에 번역한 역자는 장희창이다. <친화력>을 우리말로 옮긴 번역자들은 모두 독문학 전공자로 대학에 몸을 담았던 학자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친화력>의 한국어 번역에 대해 우리가 던져볼 법한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이백여 년 전 독일의 귀족계급과 시민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를 어떤 식으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인가? 19세기 초 독일 부부가 나누는 대화를 어떤 투로 재현해야 가장 자연스러울까? 독일어로 ‘siezen’하던 사이가 ‘duzen’하게 된 변화를 번역에서 어떻게 드러낼 수 있을까? 텍스트가 집필되던 시기의 언어와 그 텍스트를 번역하는 현재의 언어 사이, 언어의 시대적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 가능한가? 또 가능하다 해도 그 일이 꼭 필요한가? 달리 말하면, 2024년에 <친화력>을 번역하더라도 이 텍스트가 요즘 나온 소설이 아니라는 것을 독자가 알 수 있도록 문체에서 예스러운 느낌을 줄 필요가 있는가? 아니면, 정반대로 요즘 소설처럼 읽히도록 현대적인 문체로 번역하는 것이 좋은가? 원문 텍스트에서 작가가 의도적으로 쓴 ‘역사적 현재’ 또는 ‘극적 현재’는 번역에서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까? 아래에서는 이런 질문들을 염두에 두고 시대의 변화와 역자의 작품 이해에 따른 번역의 차이, 초역의 영향력, 극적 현재, 인물 간의 대화에서 상대 높임법의 활용 등의 논점을 중심으로 개별 번역을 비교, 분석해 보겠다.
2. 개별 번역 비평
1) 이병찬 역의 <친화력>(1968)
세로쓰기로 편집되어 있는 휘문출판사의 <괴에테文學全集> 제6권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詩와 眞實(第四部)>, <伊太利紀行>과 함께 수록되어 있는 이병찬의 <親和力> 번역본은 국내 초역이면서 가독성도 높고 번역도 정확한 편이다. 책 말미에 실린 두 쪽 가량의 역자해설을 보면 역자가 이 작품을 심도 있게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자는 괴테 자신이 쓴 책 광고문에서 “도처에 유일한 자연이 있을 뿐이다”라는 구절을 직접 인용하며 이 소설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친화력>은 그에게 특이한 객관적인 필치로써 연애의 친화 관계와 성격에 의해서 결정되는 각자의 운명을 마치 자연율(自然律)과 마찬가지로 초인간적인 불가항력적 결정력이라는 데에 귀일시켜 놓았다. 즉 여기에 나오는 것과 같은 연애에 있어서의 친화력 사상은 말하자면 사랑의 마신(魔神)의 사상으로서 샤를로테나 대위와 같은 이지적인 인간은 간단히 마신적 사랑의 세계에서 탈피될 수 있으나 선택된 인간이라고 할 만한, 천성으로 사랑의 마신의 자식인 옷티일리에는 에드아르트와 마찬가지로 한번 이 마신의 습격을 받으면 완전히 그 지배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이병찬, 490)
인용문에서 이병찬은 이 소설의 문체 또는 서술자의 태도를 “객관적인 필치”라는 말로 규정하고 있으며 오틸리에와 에두아르트의 “마신적 사랑”의 의미를 자연법칙과 같은 “초인간적인 불가항력적 결정력”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그는 “이 작품의 근저에 가로 놓인 본질적인 의미로서의 체념의 사상”(490)에도 주목하고 있으며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각각 실존했던 어떤 인물들을 모델로 했는가 하는 전기적 해석도 소개하고 있다. 짧지만 핵심을 잘 짚고 있는 이 해설은 역자의 번역에도 신뢰를 갖게 한다. 아래에서 이병찬의 정확한 번역이 돋보이는 한 대목을 살펴보자.
Sie wähnten, sie glaubten einander anzugehören (456)[1]
이제 그들은 서로의 것인양 망상하고 믿었다.(이병찬, 299) 두 사람은 서로 자신은 상대방 것이라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믿었다.(홍경호, 427) 그들은 서로 상대방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믿었다.(김황진, 245) 그들은 서로의 것이라고 생각했다.(김래현, 276)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속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믿었다.(오순희, 309) 그들은 서로를 서로의 것이라 생각하고 또 믿었다.(장희창, 348) [밑줄 강조 필자]
위의 인용문은 2부 13장에서 거의 일 년 만에 재회한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가 처음으로“대담한 자유로운 키쓰 entschiedene, freie Küsse”(이병찬, 299)를 나누는 대목이다. 서술자는 여기서 ‘망상하다, 착각하다, 잘못 생각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wähnen’이라는 동사를 씀으로써 이들이 희망하는 것처럼 앞으로 둘이 결합하는 방향으로 사건이 진행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병찬은 이를 “망상하고”로 옮김으로써 서술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는 반면, 나머지 역자들은 모두 그냥 ‘생각하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물론 다른 역자들이 이 동사를 이렇게 번역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연애소설에서 주인공 커플이 처음으로 키스하는 대목에서 망상이나 착각 같은 단어를 쓰면 아무래도 이 장면의 낭만성이 감소될 것이며, 비록 그러한 기대가 실현되지 않을지라도 그 순간 그렇게 ‘생각’한 것은 맞으므로 이를 두고 오역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망상’은 명사 형태로는 지금도 많이 쓰이지만‘망상하다’라는 동사는 요즘 잘 쓰이지 않는 편이나 50여 년 전에 나온 이병찬의 번역본에서는 자연스럽게 읽힌다. 비슷한 예를 몇 가지 더 들자면, 나머지 모든 번역본이 그냥‘고집’이라고 옮긴 단어“Eigensinn”(460)을 이병찬은 “외고집”(이병찬, 303)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에두아르트의 성격을 적확하게 나타내는 표현으로, 비록 요즘 많이 쓰는 단어는 아니지만 잘 살려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ich schlummerte”(462)를 이병찬은 “그저 등걸잠을 자고 있었습니다”(이병찬, 304)로 옮기고 있는데‘등걸잠’의 사전적 의미는“옷을 입은 채 아무것도 덮지 아니하고 아무 데나 쓰러져 자는 잠”으로 ‘schlummern’의 의미와 완전한 등가는 아니지만 “선잠”(오순희, 317)이나 “가볍게 졸고 있었죠”(장희창, 358)와 의미가 통한다. “그저 자기에 대해서 인내심을 가져달라는 Geduld mit ihm zu haben(475)”(오순희, 336) 같은 대목을 “그에게 참을 인자를 써달라”(이병찬, 314)로 옮긴 것 역시 언어가 시대에 따라 변해감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한국어 초역이면서도 그 이후에 나온 어느 번역본 못지 않은 정확성을 보여주는 이병찬의 번역은 최초로 번역된 만큼 이후의 번역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초역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한 대목을 아래에서 살펴보자.
Sollten sie es noch nicht versucht haben, wirkliche, bekannte Gemälde vorzustellen? Eine solche Nachbildung, wenn sie auch manche mühsame Anordnung erfordert, bringt dagegen auch einen unglaublichen Reiz hervor.(392)
여러분들은 아직 실제의 유명한 그림들을 연출해 보려고 시도한 적은 없습니까? 그러한 묘사는 여러 가지 힘드는 준비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이와 반면에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매력도 가지고 오는 것이예요.(이병찬, 248) 여러분은 유명한 회화의 장경(場景)을 자신이 직접 연기한 일이 아직 없었던가요? 그와 같은 활인화(活人畫)를 준비하려면 꽤 힘이 들지만, 그 대신 상상할 수 있는 이상의 매력이 있지요.(홍경호, 358-359) 그들은 유명한 진짜 그림들을 연출해 보이려는 시도를 아직 한번도 해보지 않았단 말인가요? 그러한 활인화(活人畫)는 여러 가지 힘드는 준비를 필요로 하기는 하지만, 반면에 또한 굉장한 매력을 창출해내지요.(김황진, 173) 그런 사람들이라면 지금까지 잘 알려진 그림들을 몸소 연출해 보려는 생각을 해보지는 않았을까요? 비록 매우 힘든 장치가 필요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러한 모방은 대단히 매력 있는 일이랍니다.(김래현, 198) 진짜 잘 알려진 그림들을 연기로 표현하는 작업은 아직껏 해본 적 없으신가요? 이런 활인화(活人畫)를 수행하는 것은 여러모로 어려운 작업이긴 합니다만, 그만큼 엄청난 매력을 발산하거든요.(오순희, 220) 그런 분들이 직접 나서서 우리가 잘 아는 실제의 그림을 몸으로 연출해 보여준다면 어떨까요? 아주 힘든 규율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그러한 모방은 엄청난 매력을 발산할 것입니다.(장희창, 250) [밑줄 강조 필자]
2부 5장에는 샤를로테의 친딸인 루치아네가 주축이 되어 ‘활인화 lebendes Bild/ tableau vivant’를 연출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위의 인용문은 백작이 이러한 공연을 제안하는 대목이다. 이병찬의 번역에서 3인칭 복수 sie를 “여러분들”이라고 번역한 것은 이 문장이 바로 앞선 문장에서 청중들 중에 그림 속에 나오는 동작이나 자세를 모방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다고 말한 다음에 이어지는 대목이므로 대화문의 자연스러움을 끌어올릴 수 있는 가능한 선택이다. 원문과 대조해 보면 이병찬의 번역은 일부 형용사를 빠뜨리거나 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인물과 사물을 그림 속의 장면과 똑같이 ‘배치, 배열, 구성’하는 것을 의미하는 ‘Anordnung’을 “준비”로 번역한 것이 눈에 띄는데, 물론 ‘준비’라는 단어는 이런 의미를 포괄할 수 있기에 번역문은 자연스럽게 읽힌다. 이병찬의 번역을 잇는 홍경호와 김황진의 번역이 이 단어를 똑같이 ‘준비’로 번역한 점이나 홍경호 역시 삼인칭 복수의 sie를 “여러분은”이라고 옮기고 있는 점은 초역의 영향으로 짐작된다. 한편, 홍경호는 원문의 “Nachbildung”을 “활인화”로 옮기고 있는데 이는 이병찬의 번역에서 이미 등장한 표현이지만, 홍경호는 이 주제가 처음 등장할 때 제시하고 있고 이병찬은 나중에 “so schön eingerichteten Gemälde”(395)를 “실로 아름답게 준비된 활인화(活人畫)”(이병찬, 250)라 번역하고 있다. 이로써 초역자도 이미 괴테 시대에 유행했던 이 새로운 문화현상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음이 드러나며 첫 번역에서부터 이 활인화 공연 대목에는 화가와 그림 주제에 대한 설명이 내주로 달려있어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이후 김황진과 오순희도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같은 역어를 선택하고 있으며 오순희는 각주까지 붙여 이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다.
2) 홍경호 역의 <친화력>(1990)
총 120권으로 구성된 金星版 <世界文學大全集>의 제10권으로 1990년에 출간된 홍경호의 <親和力>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헤르만과 도로테아>와 같이 수록되어 있으며 다른 두 작품과 달리 제목이 한자로 표기되어 있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1981년 판본에 비해 이후의 판본은 전체 분량이 약 60쪽 가량 늘었으며 1987년 판본과 1990년 판본은 수록 페이지까지 동일하다. 이 책에는 개별 작품에 대한 해설 대신 괴테의 일생과 그의 주요 작품을 연대기 순으로 상세히 소개하고 있는 ‘괴테의 생애와 작품세계’라는 해설이 실려 있다. 홍경호의 번역은 이병찬의 초역에 비해 1981년 초판 기준으로 십 년 이상의 시차가 있는 만큼 가로쓰기에다 문체 역시 보다 현대적이다. 이병찬이 정확하게 번역한 부분을 거꾸로 오역한 경우도 없지는 않으나[2] 작품의 시대 배경에 맞춰 적절한 역어를 선택한 부분이 돋보인다. 예컨대 2부 10장에 등장하는 영국 귀족이 가져온 ‘카메라 오브스쿠라 camera obscura’의 원문은 “tragbaren dunklen Kammer”(430)인데 이를 이병찬은 “휴대용 사진기”(이병찬, 278)로 옮기고 있는 데에 반해, 홍경호는 이를 “휴대용 암상(暗箱)”(홍경호, 398)으로 번역하고 있다. 카메라 오브스쿠라가 사진기의 전신이긴 하지만 스케치를 하기 위한 도구인 이 물건을 ‘휴대용 사진기’로 번역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어 보인다. 김황진은 “움직이는 암실”(김황진, 215)로 옮기고 각주에 ‘휴대용 사진기’라는 설명을 붙였으며, 오순희는 “휴대용 어둠상자”(오순희, 271)로 번역하고 각주에 “카메라 옵스큐라”의 독일어 번역이라는 부연 설명을 달았다. 반면, 김래현과 장희창은 초역과 마찬가지로 “휴대용 사진기”(김래현, 244; 장희창, 309)로 번역하고 있다. 또한 이 물건을 가져온 등장인물은 맨 처음 “영국인 Engländer”(429)으로, 그 이후에는 “Lord”(431)로 지칭되는데, 이를 이병찬은 “귀족”(이병찬, 279)으로 옮기고 있으나 홍경호는 “영국 귀족”(홍경호, 398)으로 옮겨 그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하고 있다. 뒤따르는 역자들 중 김황진과 오순희는 모두 홍경호의 예를 따르고 있으며(김황진, 216; 오순희, 272), 김래현과 장희창은 “후작”(김래현, 245; 장희창, 310)이라 번역하고 있다. ‘Lord’는 영국 귀족 일반에 대한 호칭 또는 통칭이므로 ‘후작’은 정확한 번역이라 하긴 어렵겠다. 아래에서는 홍경호의 번역 중 역자의 작품 해석이 돋보이는 한 군데를 같이 살펴보자.
aus ihrem halben Totenschlaf(460) / in meinem halben Totenschlaf(463)
이 반 죽음이 된 잠에서(이병찬, 303) / 반쯤 죽은 것같은 상태에서(이병찬, 305) 지금의 반죽음 같은 잠에서(홍경호, 432) / 반죽음과 같은 잠 속에서(홍경호, 434) 죽은 듯한 잠에서(김래현, 282; 장희창 356) / 반쯤 잠든 상태에서(김래현, 284; 장희창, 359) 반쯤 죽은 듯이 잠든 상태에서(오순희, 315) / 반쯤은 죽은 듯이 자고 있었지만(오순희, 318) [밑줄 강조 필자]
위에 인용한 부분은 오틸리에의 실수로 아기 오토가 물에 빠져 죽은 후 2부 14장에서 샤를로테와 소령이 나누는 대화와 이어지는 샤를로테와 오틸리에의 대화 중 각각 샤를로테와 오틸리에가 한 말이다. 이 대목에서 오틸리에는 샤를로테의 무릎에 기댄 채 잠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일종의 근육마비 상태에서 샤를로테와 소령이 나누는 대화를 모두 또렷이 듣고 있었고, 소령이 떠난 후 샤를로테에게 건네는 오틸리에의 말은 바로 앞서 들은 대화 내용에 비추어 스스로 성찰한 내용이다. 위의 인용문에서도 오틸리에는 직전에 샤를로테가 자신의 상태를 두고 쓴 표현을 그대로 따라 쓰고 있다. 이렇게 오틸리에가 샤를로테의 말을 거울처럼 반사하고 있는 상황을 가장 잘 반영한 것이 바로 홍경호의 번역이다. 두 번째 나올 때 조사 ‘과’까지 없었더라면 더욱 정확한 반복이 되었겠지만, 어쨌든 홍경호는 같은 어구가 반복해서 등장함을 의식하고 이를 똑같이 번역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앞뒤를 각각 다른 표현으로 번역하긴 했으나 ‘반죽음’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쓰고 있는 역자는 이병찬인데, 독일어 원문의 간결한 표현에 상응하게 짧으면서도 정확하게 이를 표현할 수 있는 좋은 역어를 찾았다고 생각된다.
3) 김황진 역의 <친화력>(1999)
괴테 탄생 25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에서도 여러 가지 기념행사가 열렸던 1999년[3] 충남대학교출판부에서 출간된 김황진의 번역은 번역 저본을 밝힌 최초의 판본이며 이 글에서 다루는 모든 번역본 가운데 역자의 번역 전략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거의 유일한 번역본이다.[4] 김황진은 번역본 말미에 실린 세 쪽의 <역자후기> 중 절반가량을 번역 의도와 전략을 설명하는 데에 할애하고 있는데 그중 한 대목을 살펴보자.
괴테 문장들을 완전한 우리말다운 우리말로 옮김을 이상적인 목표로 삼되 우리말화의 방향과 각도는 어디까지나 괴테가 이 작품에서 구사하는 문체의 문장들을 독자가 읽을 때 느끼는 리듬과 박자를 깨거나 헝크러뜨리지 않고 가능한 한 유지하는 쪽의 것으로 잡았다. 예를 들어, 같은 작가 괴테의 문장이라 해도 젊은 베르터의 슬픔에서 구사된 문체와 친화력에서 구사된 문체는 판이한 차이가 있음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문체의 리듬과 분위기를 유지시키려고 노력했다고 말하고 싶다. 또 각 문장이 지니는 문장 개개의 분위기가 독특한 만큼 함축적인 의미를 포함하는 문장구조를 아동 동화 번역에서와 같이 설명식으로 풀어 놓는 일은 가능한 한 피했다. 즉 함축적인 문장 구조가 그대로 유지되도록 주의를 기울였다.(김황진, 286. 밑줄 강조 필자)
“우리말다운 우리말로” 번역하면서도 동시에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하겠다는 역자의 의도가 가장 뚜렷하고도 충실하게 반영된 부분은 전체적으로 과거시제로 된 서술 한가운데 갑자기 현재시제의 문장이 이어지는 대목이다. 역자가 각주에서 ‘역사적 현재’ 또는 ‘극적 현재’로 규정하며 비교적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이 현재시제로 된 부분들은 1부 13장과 15장을 비롯하여 2부 13~14장, 16~18장에 걸쳐 종종 나타나며 “작중인물의 속마음과 긴장된 장면을 생생하게 드러내기 위한”(김황진, 97) 서술적 장치이다. 김황진은 “우리말 번역에 있어서는 흐름이 어색하지 않도록 그냥 과거 시칭으로 번역해 놓는 것이 관례”(김황진, 98)라는 점을 스스로 언급하면서도 본인은 이러한 관례를 거슬러 모든 현재시제 대목을 정확하게 현재시제로 번역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해당 부분을 모두 이탤릭체로 표시함으로써 나머지 부분과 철저히 구분하고 눈에 띄게 했다. 원문에 없는 이탤릭체까지 도입한 것은 다소 과한 면이 없지 않으나 각주에서 그 사정을 밝히고 있고 이렇게 함으로써 확실하게 독자의 주목을 끄는 효과는 있다. 그렇다면 김황진 이전과 이후의 다른 역자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초역자인 이병찬은 2부 14장의 첫 두 단락, 즉 아기 오토가 죽은 이후 별장에서 구급의가 애쓰는 가운데 오틸리에는 쓰러지고 샤를로테가 귀가하는 장면만을 현재시제로 번역하고 있으며, 홍경호는 사실상 이 ‘극적 현재’를 전혀 반영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는데 아주 제한적으로 현재시제로 번역한 한두 문장이(홍경호, 429) 눈에 띄는 정도이다. 김황진의 번역 이후에 나온 세 번역본의 경우, 오순희는 김황진과 마찬가지로 모두 충실하게 현재시제로 번역했으며 1부 13장에 이런 부분이 처음 등장할 때 각주를 달아 설명하고 있다. 반면, 김래현과 장희창의 경우는 어떤 대목은 과거 시제로 번역했다가 또 어떤 부분은 현재시제로 번역하는 등 일관성이 없다. 예컨대 김래현은 1부 13장 도입부에 오틀리에에 대한 무한한 열정으로 치닫는 에두아르트의 고조된 감정을 묘사하는 세 단락에 걸친 대목에서 두 번째 단락만 현재시제로 번역하고 있으며(김래현, 113-115) 1부 15장의 경우는 전혀 반영하지 않고 있다. 이 소설 전체에서 가장 결정적인 대목 중의 하나라고 할 2부 13장(김래현, 271-278)의 경우는 더욱 혼란스러운 양상을 보이는데, 산 위의 별장을 보고 에두아르트가 느끼는 그리움과 조바심을 묘사하는 대목에서는 현재시제를 반영하지 않고 있으며 이후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가 재회하는 순간은 반영하고 있다. 이어지는 장면, 에두아르트와 헤어진 후 오틸리에가 아기를 물에 빠뜨리는 사고가 나는 대목 역시, 오틸리에의 혼란스러운 정신상태를 묘사하는 부분은 현재시제를 반영하지 않았다가 사고가 일어나는 순간은 반영하고 그다음 단락은 또 반영하지 않았다가 오틸리에가 정신을 차리고 구조를 시도하는 대목은 다시 반영하는 등 시제 번역에 전혀 일관성이 없다. 이후 14장에서 18장 사이 부분은 대체로 원문대로 현재시제로 번역하고 있는 편이나 일부 부정확한 곳도 발견된다. 장희창의 경우는 김래현보다는 원문에 가깝게 현재시제로 번역하고 있는 편이나 역시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대목이 상당수 존재한다. 1부 13장의 세 단락 중 첫 단락의 현재시제를 반영하지 않고 있으며 김래현과 마찬가지로 1부 15장의 현재시제 역시 과거로 번역하고 있다. 2부의 경우는 대체로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편이나 역시 김래현처럼 2부 13장에서 에두아르트가 산장을 보고 그리움과 조바심을 느끼는 대목은 현재시제를 반영하지 않았다. 이 두 번역본은 <친화력>에서 현재시제 서술의 중요성을 이토록 강조한 김황진의 번역보다 나중에 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제를 일관성 없이 번역하여 이 문제에 대한 역자의 뚜렷한 의식이나 원칙이 없었음을 보여주고 있어 아쉽다 하겠다. 김황진이 역자 후기에서 번역 시 가장 어려웠던 점으로 꼽고 있는 것은 바로 인물들 간의 대화에서 “경어사용의 문제”이다. 이는 실제로 우리가 번역할 때 자주 부딪히는 문제이기도 하고 또 특히나 <친화력>같이 몇백 년 전의 텍스트를 번역할 때는 더욱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아래 오순희의 번역본에 대한 개별번역비평에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룰 것이므로 유일하게 이 문제에 대해 직접 언급한 번역자 김황진의 입장을 한번 들어보기로 하자.
그런데 무엇보다 난해했던 점은 경어사용의 문제이다. 18세기 독일 상류사회의 언어를, 시대적으로 그에 알맞는 우리나라 이조시대 상류사회의 언어에다 맞추게 되는 번역도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나라 교양인의 언어를 가미하는 형식을 취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도 있었음을 밝혀둔다. 언어문화의 발전과 사회의 발달은 동서양을 시대적으로만 일치시켜 동일시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남녀간, 부부간에 있어 자신의 호칭을 경우에 따라 '나'와 '저'를 혼용함이 필요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대체로 이 번역에서는 소위 문학 작품 번역어의 관점에서의 원어 텍스트 조작이 일어나지 않도록 가능한 한 원어 텍스트의 문화적 분위기에 맞추는 방식을 취하였고, 번역(목표)언어인 우리말 쪽은 대체적인 문화적 등가관계만을 참작하여 현재 우리나라 방송매체를 통하여 많이 익혀진 어휘 아니면 거의가 우리 한국 현대 중산층 표준말 사용 가정에서 사용되는 어감을 유지하도록 하자는 것이 본 번역의 방향 설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김황진, 286-287, 밑줄 강조 필자)
위의 인용문에서 역자 김황진은 높임말 사용에 있어서 현재 우리나라의 언어는 물론 작품의 시대 배경도 함께 고려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김황진의 번역본은 앞선 두 번역본에 비해 훨씬 더 풍부한, 총 62개의 역주를 각주로 달아서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는데, 이때 단순히 한국의 독자에게 낯선 인명이나 주제를 설명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번역어 선택에 대한 부연설명이라든가(예컨대 19쪽, 29쪽, 43쪽 등) 관련 주제에 대한 연구서까지 소개하는(예컨대 52, 137쪽) 등 학술적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바깥 링크
- ↑ 독일어 원문은 저본을 밝힌 역자들이 공통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다음 판본을 이용한다. Goethe, Johann Wolfgang(1996): Die Wahlverwandtschaften. In: Werke. Bd. 6. Textkritisch durchgesehen von Erich Trunz. Kommentiert von Erich Trunz und Benno von Wiese. München. (HA 6 = Hamburger Ausgabe Bd. 6) 원문 인용 시 본문에 쪽수를 표기한다.
- ↑ 예컨대 소설 도입부에 나오는 정원사의 말 중 한 부분이 그렇다. “그리고 그 교회의 첨탑(尖塔)너머의 경치가 거진 내다 보이죠.”(이병찬, 123) “자칫하면 눈길이 먼 곳으로 이끌려 교회의 뾰족탑은 못 보기가 일쑤지요.”(홍경호, 199)
- ↑ 김인철, "괴테 탄생 250주년 기념 페스티벌", <연합뉴스>, 1999년 3월 6일.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04521568?sid=103
- ↑ 오순희의 번역본 머리말에 “번역을 하면서 가장 신경 쓴 부분도 이러한 현대성을 어떻게 하면 잘 드러낼까 하는 문제였다”(오순희, vi)라는 언급이 나오긴 하지만 더 이상의 설명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