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적 떼 (Die Räuber)"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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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프리드리히 쉴러의 첫 희곡인 <도적 떼>는 독일 문학사에서는 단명했던 사조, 슈투름 운트 드랑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꼽힌다. 작품의 주제어라고 할 수 있는 ‘자유’에 대한 열망은 권위적이고 난폭한 군주 칼 오이겐 공의 학교에서 7년 동안이나 원치 않는 학업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던 젊은 쉴러의 번민과 고통의 산물로 <도적 떼>에 직접적으로 투영되었다. 그 결과 이 작품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갈등과 형제 갈등을 원동력 삼아 구태의연한 세대에 저항하는 도적들과 그 우두머리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급진적 경향을 띠게 된다. 이러한 연유로 작품을 출간해 줄 출판사를 찾지 못했던 쉴러는 1781년 익명으로 <도적 떼>를 자비 출판한다. 쉴러는 자신을 ‘편집자 Herausgeber’로 위장한 ‘서문 Vorrede’에서 왜 전통적인 극작법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지 설명하고(슈투름 운트 드랑의 극미학), 작품의 진지한 이해를 위해서 이 작품을 ‘극적 이야기 eine dramatische Geschichte’, 다시 말하면 레제드라마로 꼼꼼히 ‘읽을’ 것을 요구한다. | + | 프리드리히 쉴러의 첫 희곡인 <도적 떼>는 독일 문학사에서는 단명했던 사조, 슈투름 운트 드랑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꼽힌다. 작품의 주제어라고 할 수 있는 ‘자유’에 대한 열망은 권위적이고 난폭한 군주 칼 오이겐 공의 학교에서 7년 동안이나 원치 않는 학업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던 젊은 쉴러의 번민과 고통의 산물로 <도적 떼>에 직접적으로 투영되었다. 그 결과 이 작품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갈등과 형제 갈등을 원동력 삼아 구태의연한 세대에 저항하는 도적들과 그 우두머리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급진적 경향을 띠게 된다. 이러한 연유로 작품을 출간해 줄 출판사를 찾지 못했던 쉴러는 1781년 익명으로 <도적 떼>를 자비 출판한다. 쉴러는 자신을 ‘편집자 Herausgeber’로 위장한 ‘서문 Vorrede’에서 왜 전통적인 극작법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지 설명하고(슈투름 운트 드랑의 극미학), 작품의 진지한 이해를 위해서 이 작품을 ‘극적 이야기 eine dramatische Geschichte’, 다시 말하면 레제드라마로 꼼꼼히 ‘읽을’ 것을 요구한다.<ref>서문에서 쉴러는 왜 희곡, 그것도 레제드라마로서 이 장르를 선택했는지, 이를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설명하고, 특히 왜 도적들을 작품의 주인공으로 삼았는지, 그것을 통해 최종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세하게 논의한다. 신화와 문학에서 악명높은 주인공들, 클롭슈토크의 ‘아들라멜레히’, 밀턴의 ‘사탄’, 그리스 비극의 ‘메데아’,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 등을 언급하며, 사악한 캐릭터들이 불러일으키는 ‘경탄과 혐오 Bewunderung in Abscheu’, 그리고 그 극적 효과로서의 ‘전율 어린 경이로움 mit schauderndem Erstaunen’을 설명한다. 그러나 쉴러에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극적 효과에만 매료되어서는 안 되고, ‘그 속에 숨겨진 추악한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하며 daß er das Laster nicht ziere, bei diesem, daß er sich nicht von einer schönen Seite bestechen lasse, auch den häßlichen Grund zu schätzen’, 바로 이러한 연유로 쉴러 자신은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릴 수 없다고 예단했다.</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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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출간 바로 이듬해인 1782년 1월 13일 <도적 떼>는 우여곡절 끝에 만하임에서 초연이 성사되는데, 당시 관객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ref>“극장은 마치 정신병원 같았다. 관객들은 주먹을 쥐고 눈을 부릅뜨며 환호성을 질러 댔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끼리 흐느끼며 서로 부둥켜안았다. 여성 관객들은 마치 쓰러질 듯 문 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모든 것이 혼돈처럼 녹아내렸고, 그 혼돈의 안개 속에서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졌다.”</ref>이러한 분위기는 함부르크, 라이프치히, 베를린, 슈투트가르트와 빈 공연까지 이어졌으며, 만하임에서의 초연 10년 후인 1792년에는 파리에서도 공연되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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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 작품은 개연성이 떨어지는 급진적 전개, 비극적 동기의 결여, 대사의 부자연스러움, 시간과 장소의 문제 등 형식적 미완결성으로 인해 비판받기도 하는데, 훗날 쉴러 자신도 이 작품을 ‘거칠다’고 평가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적 떼>를 쓰기 전 쉴러의 극작에 대한 사전 지식이 셰익스피어 포함 극 작품을 몇 편 읽은 것이 전부였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첫 희곡에서 거둔 성공만으로도 그가 극작가로서 천재천재적 재능을 지니고 있었음을 증명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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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도적 떼>의 국내 초역은 세계문학번역이 본격적인 활기를 띠기 시작한 원년인 1959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자료 기준(2025.2.21.) 1963년 북한에서 출간된 번역 종을 포함하면 지금까지 총 8인의 번역자가 이 작품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으로 확인된다. 북한 번역본 제외 국내 번역본을 기준으로 하면 2000년 이전에 세 사람의 번역자가, 2000년 이후에는 네 명의 번역자가 이 작품을 새로 번역 출간했다. 1959년 박찬기가 초역을 내놓은 이래, 1973년에는 강두식이, 1990년에는 정영호가 선집 형태의 <도적 떼> 번역을 발표해, 대략 15년 정도의 시차를 두고 순차적으로 새로운 번역이 나왔고, 2000년대 이후에는 2002년 홍경호, 2007년 김인순, 2009년 이경미, 2023년 홍성광이 새로운 번역본을 출간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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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 중 정영호의 번역본을 제외한 나머지 번역자의 번역본들은 출판사 변경 등을 통해 여전히 시중에 유통 중이다. 다시 말하면 <도적 떼>를 읽고자 하는 오늘날의 독자들은 1959년의 초역부터 2023년 새롭게 번역된 최신 번역까지 65년여에 걸쳐 나온 상이한 번역본들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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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26일 (목) 08:59 판
프리드리히 쉴러(Friedrich Schiller, 1759-1805)의 희곡
| 작가 | 프리드리히 쉴러(Friedrich Schiller) |
|---|---|
| 초판 발행 | 1781 |
| 장르 | 희곡 |
작품소개
프리드리히 쉴러의 5막극으로 1781년에 익명으로 발표되었다. 슈투름 운트 드랑 시대의 대표작으로 1782년 만하임에서 초연된 후 오늘날까지도 자주 공연된다. 외모가 추한 둘째 아들 프란츠는 일생 동안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의 형 카알이 학업을 위해 라이프치히에 머무르는 동안 프란츠는 아버지 막시밀리안 폰 모어 백작의 유산을 가로채기 위해 계략을 꾸며 아버지와 형을 속인다. 이에 카알은 아버지에게서 쫓겨났다고 믿고 사회적 불의에 복수하기 위해 도적 떼에 합류한다. 하지만 두 인물은 모두 실패한다. 모어 가문의 성을 차지한 양심 없는 지배자 프란츠는 도적 떼의 습격을 받고는 달아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카알 또한 자신이 행한 도적 행위와 살상 행위 때문에 점차 양심의 갈등에 빠진 채 스스로 법정에 출두하는 것으로 속죄한다. 가족 간의 갈등을 다루지만 동시에 사회적 갈등을 다룬 작품으로, 이 작품으로 쉴러는 일약 유명해졌다. 1955년 고금출판사 개집부의 편역이 나왔고, 1959년 박찬기가 <群盜>라는 제목으로 처음 완역했다(양문사).
초판 정보
Schiller, Friedrich(1781): Die Räuber. Frankfurt/Leipzig.
번역서지 목록
| 번호 | 개별작품제목 | 번역서명 | 총서명 | 원저자명 | 번역자명 | 발행연도 | 출판사 | 작품수록 페이지 | 저본 번역유형 | 작품 번역유형 | 비고 |
|---|---|---|---|---|---|---|---|---|---|---|---|
| 1 | 群盜 | 獨逸篇 | 縮少世界文字全集 3 | 쉴러 | 古今出版社 概輯部(고금출판사 개집부) | 1955 | 古今出版社 | 85-108 | 편역; 개작 | 개작; 편역 | |
| 2 | 群盜 | 群盜 | 陽文文庫 59 | 쉴러 | 朴贊機(박찬기) | 1959 | 陽文社 | 1-198 | 완역 | 완역 | |
| 3 | 群盜 | 世界名作 다이제스트 5, 군도 외 4편 | 世界名作 다이제스트 5 | 쉴러, F. | 正信社 編輯部(정신사 편집부) | 1959 | 正信社 | 12-43 | 편역 | 편역; 개작 | |
| 4 | 群盜 | 群盜 | 릴케 ; 世界文學全集 5 | 쉴러 | 합동출판사 편집부 | 1964 | 合同出版社 | 12-43 | 편역 | 개작; 편역 | |
| 5 | 群盜 | 全小說集 外 | 世界古典文學大全集 3 | Fredrich Von Schiller | 姜斗植; 朴煥德; 洪京鎬(강두식; 박환덕; 홍경호) | 1973 | 文友社 | 199-319 | 편역 | 완역 | |
| 6 | 群盜(五幕) | 群盜(五幕) | <레싱, G.E. 外 ; 獨逸古典戱曲選> (世界文學全集) 87 | 프리드리히 폰 실러 | 姜斗植(강두식) | 1974 | 乙酉文化社 | 227-358 | 편역 | 완역 | |
| 7 | 群盜 | 群盜 | 世界代表古典文學 6 | 실러 | 강두식 | 1982 | 韓國出版社 | 199-319 | 편역 | 완역 | |
| 8 | 군도 | 군도 | 범우희곡선 17 | 프리드리히 실러 | 홍경호 | 2002 | 범우사 | 13-246 | 완역 | 완역 | |
| 9 | 도적 떼 | 도적 떼 | Mr.Know 세계문학 | 프리드리히 폰 실러 | 김인순 | 2007 | 열린책들 | 6-150 | 완역 | 완역 | |
| 10 | 도적 떼 | 도적 떼 | 열린책들 세계문학 55 | 프리드리히 폰 실러 | 김인순 | 2009 | 열린책들 | 9-242 | 완역 | 완역 | |
| 11 | 도적 떼 | 도적 떼 | 고려대학교 청소년문학시리즈 17 | 프리드리히 폰 실러 | 이경미 | 2009 | 고려대학교 출판부 | 9-307 | 완역 | 완역 | |
| 12 | 군도 | 군도 1 | 큰글 세계문학전집2 013 | 프리드리히 실러 | 강두식 | 2012 | 큰글 | 11-197 | 편역 | 완역 | |
| 13 | 군도 | 군도 2 | 큰글 세계문학전집2 014 | 프리드리히 실러 | 강두식 | 2012 | 큰글 | 11-193 | 편역 | 완역 |
|
1. 번역 현황 및 개관
프리드리히 쉴러의 첫 희곡인 <도적 떼>는 독일 문학사에서는 단명했던 사조, 슈투름 운트 드랑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꼽힌다. 작품의 주제어라고 할 수 있는 ‘자유’에 대한 열망은 권위적이고 난폭한 군주 칼 오이겐 공의 학교에서 7년 동안이나 원치 않는 학업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던 젊은 쉴러의 번민과 고통의 산물로 <도적 떼>에 직접적으로 투영되었다. 그 결과 이 작품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갈등과 형제 갈등을 원동력 삼아 구태의연한 세대에 저항하는 도적들과 그 우두머리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급진적 경향을 띠게 된다. 이러한 연유로 작품을 출간해 줄 출판사를 찾지 못했던 쉴러는 1781년 익명으로 <도적 떼>를 자비 출판한다. 쉴러는 자신을 ‘편집자 Herausgeber’로 위장한 ‘서문 Vorrede’에서 왜 전통적인 극작법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지 설명하고(슈투름 운트 드랑의 극미학), 작품의 진지한 이해를 위해서 이 작품을 ‘극적 이야기 eine dramatische Geschichte’, 다시 말하면 레제드라마로 꼼꼼히 ‘읽을’ 것을 요구한다.[1]
출간 바로 이듬해인 1782년 1월 13일 <도적 떼>는 우여곡절 끝에 만하임에서 초연이 성사되는데, 당시 관객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2]이러한 분위기는 함부르크, 라이프치히, 베를린, 슈투트가르트와 빈 공연까지 이어졌으며, 만하임에서의 초연 10년 후인 1792년에는 파리에서도 공연되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이 작품은 개연성이 떨어지는 급진적 전개, 비극적 동기의 결여, 대사의 부자연스러움, 시간과 장소의 문제 등 형식적 미완결성으로 인해 비판받기도 하는데, 훗날 쉴러 자신도 이 작품을 ‘거칠다’고 평가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적 떼>를 쓰기 전 쉴러의 극작에 대한 사전 지식이 셰익스피어 포함 극 작품을 몇 편 읽은 것이 전부였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첫 희곡에서 거둔 성공만으로도 그가 극작가로서 천재천재적 재능을 지니고 있었음을 증명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도적 떼>의 국내 초역은 세계문학번역이 본격적인 활기를 띠기 시작한 원년인 1959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자료 기준(2025.2.21.) 1963년 북한에서 출간된 번역 종을 포함하면 지금까지 총 8인의 번역자가 이 작품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으로 확인된다. 북한 번역본 제외 국내 번역본을 기준으로 하면 2000년 이전에 세 사람의 번역자가, 2000년 이후에는 네 명의 번역자가 이 작품을 새로 번역 출간했다. 1959년 박찬기가 초역을 내놓은 이래, 1973년에는 강두식이, 1990년에는 정영호가 선집 형태의 <도적 떼> 번역을 발표해, 대략 15년 정도의 시차를 두고 순차적으로 새로운 번역이 나왔고, 2000년대 이후에는 2002년 홍경호, 2007년 김인순, 2009년 이경미, 2023년 홍성광이 새로운 번역본을 출간했다.
이 중 정영호의 번역본을 제외한 나머지 번역자의 번역본들은 출판사 변경 등을 통해 여전히 시중에 유통 중이다. 다시 말하면 <도적 떼>를 읽고자 하는 오늘날의 독자들은 1959년의 초역부터 2023년 새롭게 번역된 최신 번역까지 65년여에 걸쳐 나온 상이한 번역본들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바깥 링크
1. Projekt-Gutenberg 원문 보기
- ↑ 서문에서 쉴러는 왜 희곡, 그것도 레제드라마로서 이 장르를 선택했는지, 이를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설명하고, 특히 왜 도적들을 작품의 주인공으로 삼았는지, 그것을 통해 최종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세하게 논의한다. 신화와 문학에서 악명높은 주인공들, 클롭슈토크의 ‘아들라멜레히’, 밀턴의 ‘사탄’, 그리스 비극의 ‘메데아’,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 등을 언급하며, 사악한 캐릭터들이 불러일으키는 ‘경탄과 혐오 Bewunderung in Abscheu’, 그리고 그 극적 효과로서의 ‘전율 어린 경이로움 mit schauderndem Erstaunen’을 설명한다. 그러나 쉴러에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극적 효과에만 매료되어서는 안 되고, ‘그 속에 숨겨진 추악한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하며 daß er das Laster nicht ziere, bei diesem, daß er sich nicht von einer schönen Seite bestechen lasse, auch den häßlichen Grund zu schätzen’, 바로 이러한 연유로 쉴러 자신은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릴 수 없다고 예단했다.
- ↑ “극장은 마치 정신병원 같았다. 관객들은 주먹을 쥐고 눈을 부릅뜨며 환호성을 질러 댔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끼리 흐느끼며 서로 부둥켜안았다. 여성 관객들은 마치 쓰러질 듯 문 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모든 것이 혼돈처럼 녹아내렸고, 그 혼돈의 안개 속에서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