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여름 (Der Nachsom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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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달베르트 슈티프터 (Adalbert Stifter, 1805-1868)의 소설

늦여름 (Der Nachsommer)
작가아달베르트 슈티프터 (Adalbert Stifter)
초판 발행1857
장르소설


작품소개

오스트리아의 소설가 아달베르트 슈티프터가 1857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하나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빈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주인공이며 1인칭 화자인 하인리히 드렌도르프는 어린 시절 부모님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고 가정교사를 통해 교육받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러 혼자 공부를 하기 시작한다. 실용적이고 학문적인 여러 지식을 섭렵하다가 그는 실제로 산속을 돌아다니며 자연사, 특히 지질학을 공부하게 된다. 어느 날 그는 산에 갔다가 비를 피하려고 인가로 내려와 발견한 집에서 머물기를 청하는데, 온통 장미로 뒤덮인 그 집은 장미 집 또는 아스퍼호프라고 불린다. 집주인 구스타프 리자흐 남작은 그를 친절하게 맞이하고, 이후 하인리히가 정기적으로 장미 집을 방문하면서 그들 사이의 우정은 깊어진다. 자연에 대한 지식, 학문, 예술 등에 조예가 깊은 리자흐 남작의 도움으로 하인리히도 자신의 지평을 넓히게 되며, 리자흐 남작과 가까운 사이인 마틸데 타로나의 딸인 나탈리에와 사랑하게 된다. 그 둘의 결혼식 직전에 리자흐 남작은 자신의 지난 이야기를 들려준다. 젊은 시절 마틸데의 남동생을 위해 가정교사로 일했던 그는 마틸데와 열렬한 사랑에 빠지지만, 마틸데의 어린 나이와 그의 보잘것없는 사회적 지위 때문에 이들의 결합에 반대하는 그녀의 부모로 인해 마틸데와 헤어지게 된다. 세월이 흐른 후 각자의 배우자와 사별한 후 다시 만나게 된 리자흐와 마틸데는 결혼을 하지는 않지만, 한여름 없이 늦여름을 누리는 것처럼 부드러운 애정 속에서 서로의 삶을 다시 나누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마틸데의 딸 나탈리에와, 리자흐가 아들처럼 신뢰하고 사랑하는 하인리히가 서로 사랑하고 결합하는 데서 그들은 자신들을 비켜갔던 행복이 완성되는 것을 본다. 슈티프터의 대표작으로, 19세기의 중요한 독일어권 교양소설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국내에서는 1983년에 이덕호에 의해 <晩夏>라는 제목으로 처음 번역되었다(금성출판사).


초판 정보

Stifter, Adalbert(1857): Der Nachsommer. Eine Erzählung. Vol. 1-3. Pesth: Heckenast.


번역서지 목록

번호 개별작품제목 번역서명 총서명 원저자명 번역자명 발행연도 출판사 작품수록 페이지 저본 번역유형 작품 번역유형 비고
1 晩夏 晩夏 (愛藏版)世界文學大全集 86 시티프터 李德浩 1983 금성출판사 5-514 완역 완역
2 시골집 구테 나흐트! 달콤한 잠으로의 여행 아달베르트 슈티프터 김세나 2009 좋은책만들기 97-104 완역 편역 『Gute Nacht!』라는 모음집의 번역. 원작의 편자가 <늦여름> 중 '작별'의 장을 발췌했다고 밝힘. 해당 번역서에 표기된 작품 제목은 편자가 임의로 붙인 것을 번역한 것임.
3 늦여름 늦여름 1 세계문학전집 087 아달베르트 슈티프터 박종대 2011 문학동네 7-460 편역 완역
4 늦여름 늦여름 2 세계문학전집 088 아달베르트 슈티프터 박종대 2011 문학동네 7-422 편역 완역


1. 작품에 관하여

스위스 출신의 작가 막스 프리쉬는 희곡, 소설, 일기, 에세이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호모 파베르. 한 보고서>는 그가 1957년에 발표한 장편소설로 단번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1991년 독일의 유명 영화감독 폴커 슐뢴도르프(Volker Schlöndorff)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프리쉬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이 소설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국내에서는 총 다섯 명의 역자가 번역작업에 뛰어들었다. 독문학자이자 시인인 손재준(고려대학교 교수 역임)이 1974년 “호모 파버르”라는 제목으로 국내 초역을 내놓았고, 같은 해에 독문학자 장남준(중앙대학교 교수 역임)이 “現代人의 肖像”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서를 출판했다. 장남준의 번역은 1978년, 1982년, 1992년에 삼성출판사에서 “호모 파베르”라는 제목으로 재출판되었으며, 2004년에는 다시 박영사에서 예전과 같이 “현대인의 초상”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1992년 남궁옥은 “사랑과 슬픔의 여로”라는 제목으로 번역했으며, 2003년에는 봉원웅이, 2021년에는 정미경이 “호머 파버”라는 제목으로 번역서를 출판했다. 따라서 막스 프리쉬의 이 소설은 1974년에 초역이 나온 후 80년대와 90년대에도 계속 번역서가 출판되었고, 2000년대에 들어서도 2021년까지 총 3권이 나왔는바, 꾸준히 읽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섯 명의 역자에 의해 총 9종의 번역서가 나왔으며, 제목도 “호모 파버르”, “현대인의 초상”, “호모 파베르”, “사랑과 슬픔의 여로”, “호모 파버” 등 다섯 개가 존재한다. 이 글에서는 작업하는 인간,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이란 뜻의 라틴어 Homo faber를 라틴어 표기법에 따라 “호모 파베르”로 정하여 사용한다.

이 소설은 정거장(Station)으로 칭해지는 두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정거장은 일인칭 서술자 발터 파버가 카라카스에서 6월 21일에서 7월 8일까지 쓴 것으로, 두 번째 정거장은 아테네 병원에서 7월 19일부터 쓰기 시작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술자라는 서술자의 직업을 반영하듯 작품에는 정확한 시간과 장소 정보가 제시되며, 기술 용어와 통계 데이터 등도 자주 등장한다. ‘보고서’라는 부제에 걸맞게 소설의 문체는 전반적으로 매우 간결하고 딱딱하며, 때론 전문 용어도 곁들인 엔지니어의 언어를 보여준다. 대부분 번역자도 이 점을 인지하고 작품의 특징으로 제시했는바, 이 글에서는 소설의 문체적 특징이 어떻게 번역에 반영됐는지를 중심으로 비평해 보려 한다.


2. 개별 번역 비평

슈티프터의 <늦여름>은 독일어 초판 분량이 1,000쪽이 넘는 대장편 소설이지만 그 분량에 비해 줄거리는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이 소설은 지금까지 한국어로 총 3차례 번역되었으나, 이중 완역에 해당하는 번역본 또한 두 편에 불과하다. 슈티프터의 단편소설들이 이미 1970년대 초반부터 번역되어 한국 독자층에 소개된 것과 달리 이 대장편 소설은 역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오랫동안 어둠 속에 묻혀 있다가 간간이 빛을 보았다. 한국어 초역은 1983년 독어학자 이덕호가 번역하여 <晩夏>라는 제목으로 금성출판사에서 출간하였다. 26년이 지난 2009년도에 김세나가 이 소설의 극히 짧은 한 장을 번역했으나 파편에 불과한 이 번역이 작가나 작품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도모했다고 보기엔 너무도 빈약한 시도로 보인다. 그로부터 2년 후인 2011년 박종대가 이 장편을 제대로 완역하여 <늦여름>으로 문학동네에서 출간하였다. 이후 새로운 번역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황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한국어 번역이 극히 저조한 이유가 궁금해진다. 무엇 때문일까? 우선 그 방대한 원문의 분량이 분명 역자에게 번역의 동기를 부여하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분량을 제쳐놓더라도 이 소설의 특징으로 꼽히는, 지나치게 서술적인 문체, 서사적 긴장감의 부재, 빈약한 줄거리 등도 역시 이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소설은 1857년 출판 당시부터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평가를 받아왔다. 한 예로 동시대인 프리드리히 헵벨은 1858년 일기에 이 작품에 풍자적인 비판을 가했는데, 지나치게 길고 지루하며, 전문적인 비평가가 아닌 일반인이 이 책을 자발적으로 끝까지 읽는다면 그것만으로도 경이로운 일이어서 ‘폴란드의 왕관’을 줄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업적이라고 혹평하였다. „Drei starke Bände! Wir glauben Nichts zu riskieren, wenn wir Demjenigen, der beweisen kann, daß er sie ausgelesen hat, ohne als Kunstrichter dazu verpflichtet zu sein, die Krone von Polen versprechen.“ Friedrich Hebbel(1905): Werke. Historisch-kritische Ausgabe, hrsg. von Richard Maria Werner u.a., Band 8: Tagebücher 1854–1863, Berlin: Behr, S. 198.

그런 반면 프리드리히 니체는 인간의 자기수양의 이상, 절제된 양식미, 자연과 윤리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슈티프터의 소설을 높이 평가했으며, 되풀이해서 읽을 가치가 있는, 몇 안 되는 “독일 산문문학의 보배”라고 하였다. 프리드리히 니체(1978):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I. 동서문화사. 서울. 제2권/2장/109절. S. 601.

원작에 대한 이런 대조적인 평가는 지금까지 이 소설이 한국어로 거의 번역되지 못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만만치 않은 분량, 장편소설임에도 상대적으로 빈약하고 지루한 줄거리, 사물에 대한 극히 세밀하고 학술적인 묘사와 수많은 과학적, 예술적 지식의 나열, 긴 대화들로 채워진 이 소설의 특별함은 과연 이것을 소설로 볼 수 있을까 하는 논쟁을 출판 초기부터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원작이 이러하니, 이 소설의 번역은 힘든 도전임이 분명하며, 그 번역을 비평의 대상으로 삼는 작업 역시 그에 못지않게 힘든 도전일 것이다. 이런 작품의 번역에서 과연 무엇을 비평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을까? 따라서 이 비평은 첫 시도로서 지금까지 출간된 한국어 번역본들의 대략적 특징을 살펴보는 것으로 그치고자 한다.


1) 이덕호 역의 <晩夏>(1983)

이 소설은 국내에서 독일문학의 전성기가 시작되던 1983년에 독어학자 이덕호가 최초로 번역하여 금성출판사의 <세계문학대전집 86>에 발표하였다. 이 번역은 작가명을 “아달베르트 시티프터”로, 제목은 한문 <만하晩夏>로 옮겨 1980년대 번역의 시대적 특징을 보여준다. 가로 이단 짜기로 구성된 이 완역본의 분량은 514쪽에 달하며, 총 3부 17장에 이르는 원본의 구성을 그대로 따랐다. 다만 이덕호 번역본은 제목이 달린 각 장을 목차로 나열하는 대신 본문 삽입형으로 처리하여 독자가 이 장편소설의 전개를 한 눈에 개관하는데 어려움이 따른다. 역자는 언어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문학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스테이크”를 도착어권 문화에 동화시켜 “불고기”(이덕호, 5)로 옮기는 등 문화적 번역에 있어 ‘낯설게 하기’를 기피하고 자국화하는 전통적인 번역전략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2) 김세나 역의 <시골집>(2009)

이덕호의 초역 이후 긴 휴지기를 두고 2009년에 <구테 나흐트. 달콤한 잠으로의 여행>이라는 번역모음집에 이 소설의 한 장만이 김세나의 편역으로 실린 바 있다. 해당 번역은 소설의 제1부에 나오는 7쪽 분량의 “Der Abschied” 장으로서, 제목 또한 “작별”이 아니라 편역자가 임의로 <시골집>이라고 옮겼다. 김세나의 편역은 여러 면에서 이 소설의 올바른 번역본으로 보기에 적합하지 않다.


3) 박종대 역의 <늦여름>(2011)

가장 최근 번역에 속하는 박종대의 번역은 완역으로서 2011년에 문학동네에서 <늦여름>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다(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7권 및 88권). 이 번역본의 구성에서 눈에 띄는 점은, 원작을 재구성하여 3부를 2부로 축소하고, 따라서 각 부에 속한 장들 역시 재편성한 것이다. 460쪽 분량에 달하는 제1부엔 원작 제2부의 첫 2장까지를 포함시켰고, 나머지는 422쪽의 분량인 제2부에 모두 담았다. 박종대는 한글로 읽기에 수월하고 이해 가능한 번역을 지향하기 때문에 원문이 가지고 있는 세세한 뉘앙스와 문법적 특이성을 포기하는 경우가 잦다. 번역으로만 읽으면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지만, 원문과 비교했을 때 그 차이와 간격이 크게 벌어지는 번역문들은 때로는 오역으로, 때로는 역자의 의도로 드러나기도 한다.


3. 번역본 비교

1) <늦여름>의 한국어 번역본의 특징을 살펴보기 위해 이 장에서는 완역에 속하는 이덕호와 박종대의 번역본을 함께 비교해보고자 한다. 두 번역본 모두 저본을 밝히지 않았다. 그래서 원작의 1857년도 초판과 비교하여 그 구성상의 차이를 살펴보기로 한다. 초판 당시 이 소설의 원작은 3부로 구성되고 총 1,327쪽에 달하는 장편소설로 출간되었다. Adalbert Stifter: Der Nachsommer. Eine Erzählung. Pesth: G. Heckenast 1857, 3 Bde. 483, 420, 444 S., Titel von Bd. 1 lithographiert und mit Abbildung.

이와 비교하여 두 한국어 번역본의 구성적 특징을 도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개관하면, 이덕호의 번역은 원작의 구성과 제목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으나 제1부 3장의 제목 “비를 긋다”는 역자의 의역임이 드러난다. 이 장은 여행 중인 주인공 하인리히가 하늘에 깔린 먹구름을 보고 곧 내릴 비를 우려하여 리자흐의 집 대문을 두드리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여기서 “비를 피하다”라는 의미의 “긋다”라는 번역어는 이 의미를 모호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실제 비를 피한 것이 아니라 비를 피하기 위한 예방책으로 남의 집에 손님으로 들르는 장면이지만 마치 내리는 비를 피해 어딘가에 들른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이 장은 후에 하늘의 먹구름과 저기압이 정말 비가 내릴 징조인지 아닌지에 대해 손님이자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하인리히의 과학적 예측과 주인이자 구세대를 대표하는 리자흐의 경험론적 예측이 팽팽하게 맞서는 것으로 유명하며, 이로써 오늘날 일기예보 및 기후 담론과 접점을 이루며 논의되곤 한다. 그런 만큼 이 장의 제목을 의역하는 것은 예민한 지점을 건드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덕호와 달리 박종대는 “잠시 들름”으로 옮겨 이 같은 해석의 문제를 아예 건드리지 않는다. 그런 한편 박종대의 번역본은 원문 구성을 재편성한 점 외에도 각 장의 번역이 모두 원작에 상응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주인공이 부모님 집에서의 성장기를 서술한 첫 장, “Die Häuslichkeit”는 간단히 “집”으로 옮겼다. “집”은 사람이 사는 공간으로서 건축물을 뜻하기도 하므로, 주인공의 성장환경이 되는 “가정생활”이란 원뜻을 충실히 옮긴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 점에서 이덕호는 원작 어휘의 의미를 보다 잘 살려 “가정”으로 옮겼다. 그런 한편 제1부 2장의 “Der Wanderer”를 이덕호는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나그네”로 옮겼지만, 박종대는 사람 주체보다는 그의 행동을 강조하여 “편력”으로 옮긴 점이 눈에 띈다. 이로써 그는 이 소설의 ‘레퍼런스 텍스트’로서 괴테의 교양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와의 연관성을 암시한다. 실제로 이 소설에선 독일 고전주의 핵심어인 인간의 자기교육, Bildung이 중심에 서 있다. 소설에 서술된 심정의 수양, 신체와 영혼, 사유와 도덕, 법과 역사 등에 관한 교육, 고대 언어를 포함한 고전 교육, 교양 여행, 학문적 관심 등은 자기 수양과 자기 인식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것을 경험’하는 “편력”은 주인공의 독자적인 자기 수양의 길을 적합하게 옮긴 번역이라고 볼 수 있다. 나아가 두 번역본의 차이를 만드는 또 하나의 제목으로 제2부 3장 “Der Einblick”을 들 수 있다. 이 제목을 이덕호가 내면적 인식능력을 강조한 “통찰”로 옮긴 반면, 박종대는 “들여다보기”로써 눈의 표면적인 운동을 강조하였다.

2) 19세기 사실주의 문체를 보여주는 이 교양소설은 이상화된 시민계급의 삶과 세계관을 제시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소설은 각 장면에 등장하는 자연물, 사물들, 행위들을 상세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매우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그건 마치 소설 내에서도 언급된 고대 호머의 작품처럼, 이 작품 역시 문학 공간에 실천적 삶의 지식들이며, 수양의 과정, 그 과정에서 주인공이 습득하는 온갖 지식과 인식의 내용들을 빼곡히 기록한 백과사전과 같다. 이를 대표하는 예가 등장인물들의 고유한 특징으로 나오는 “수집 활동”이다. 소설의 인물들은 식물이든, 돌이든, 그림이든, 책이든, 가구든 모두가 ​​이 ‘취미’를 즐긴다. 이들에게 수집은 지식교환과 수양의 원리라는 기능을 수행한다. 인간의 수집 활동을 통해 사물들은 의미를 얻으며 수집을 통해 사물의 변형과 특징에 대한 의미 있는 설명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사물의 수집에 헌신적인 사람들은 자신이 속해 있는 환경의 모범이 된다. 작가는 이러한 모범적 인물들을 특히 강조하는데, 정원사와 치타 연주자, 가구장인들 뿐 아니라 책과 그림을 수집하는 아버지와 리자흐야말로 이런 수집가의 표본으로서 제시되고 있다. 주인공 하인리히의 두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회화, 조각, 책과 같은 수집품을 통해 시민계급에 고유한 “교육 Bildung”에 대한 충동과 실현을 이상적으로 표현한다. 나아가 비더마이어 시대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시민계급의 집안 인테리어와 가구들 역시 자기 수양에 대한 표현으로 제시되어 있다. 주인공이 소설 도입부에서 부모님 댁에 있었던 서재와 책장들을 묘사한 장면은 이에 대한 좋은 예가 된다. 이제 한국어 역자들이 이 내용을 어떻게 이해하고 옮겼는지 살펴보자.

In der Wohnung war ein Zimmer, welches ziemlich groß war. In demselben standen breite, flache Kästen von feinem Glanze und eingelegter Arbeit. Sie hatten vorne Glastafeln, hinter den Glastafeln grünen Seidenstoff, und waren mit Büchern angefüllt. Der Vater hatte darum die grünen Seidenvorhänge, weil er es nicht leiden konnte, daß die Aufschriften der Bücher, die gewöhnlich mit goldenen Buchstaben auf dem Rücken derselben standen, hinter dem Glase von allen Leuten gelesen werden konnten, gleichsam als wolle er mit den Büchern prahlen, die er habe. Vor diesen Kästen stand er gerne und öfter, wenn er sich nach Tische oder zu einer andern Zeit einen Augenblick abkargen konnte, machte die Flügel eines Kastens auf, sah die Bücher an, nahm eines oder das andere heraus, blickte hinein, und stellte es wieder an seinen Platz.(이하 밑줄 강조는 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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