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혼란 (Verwirrung der Gefühle)

Han10 (토론 | 기여)님의 2025년 9월 8일 (월) 10:0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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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 (Stefan Zweig, 1881-1942)의 소설

감정의 혼란
(Verwirrung der Gefühle)
작가슈테판 츠바이크 (Stefan Zweig)
초판 발행1927
장르소설

작품소개

슈테판 츠바이크가 1927년에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명망 있는 영문학과 교수 롤란트가 은퇴를 앞두고 지난 삶의 비밀을 회고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한다. 롤란트는 젊은 시절에 자신에게 정신적 삶의 길을 열어준 한 스승을 추억한다. 김나지움 교장의 아들이던 19세의 롤란트는 영어를 공부하러 간 베를린에서 수개월 간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되고, 이를 안 아버지는 중부 독일의 한 소도시 대학에 그를 보낸다. 그곳에서 우연히 롤란트는 40대 중반의 영문과 교수의 마법 같은 셰익스피어 강의를 듣고 그의 학문적 열정에 깊은 감동을 받는다. 롤란트는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문학적 세계에 빠지게 되고, 그에게 호감을 느낀 그 교수의 집에 세 들어서 교수 부부와 함께 살게 된다. 교수는 자신의 동성애를 숨기기 위해 위장 결혼을 한 이중인격의 소유자였다. 롤란트는 자신에게 친절하다가도 차가운 태도로 돌변하는 교수의 변덕과 기행으로 혼란을 느끼지만, 교수에게 그동안 중단한 엘리자베스 시대 문학에 관한 책을 다시 써보라고 하면서 필사를 돕겠다고 제안한다. 제자의 제안을 받아들여 매일 저녁 함께 작업하는 중에도 교수의 변덕스러운 태도는 계속되고, 교수가 느닷없이 여행을 떠났다 돌아오는 일이 이어진다. 교수의 부인과 가까워진 롤란트는 부인과 하룻밤을 보내게 되고 부인으로부터 교수의 동성애 성향에 대해 듣게 된다. 교수를 떠나야겠다고 결심한 그에게 교수는 마지막 이별을 계기로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그간의 변덕스러운 언행을 사과한다. 이 책은 롤란트, 교수, 교수 부인의 복잡한 삼각관계를 특유의 내밀한 심리분석을 통해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20세기 초에 형법적 처벌의 대상이던 동성애를 다룬다. 국내에서는 1959년 박찬기에 의해 처음 번역되었다(양문사).


초판 정보

Zweig, Stefan(1927): Verwirrung der Gefühle. Drei Novellen. Leipzig: Insel.


번역서지 목록

번호 개별작품제목 번역서명 총서명 원저자명 번역자명 발행연도 출판사 작품수록 페이지 저본 번역유형 작품 번역유형 비고
1 感情의 混亂 感情의 混亂 陽文文庫 49 슈테판 쓰봐이크 朴贊機 1959 陽文社 17-128 편역 완역
2 感情의 混亂 어느 女人의 二十四時間 노오벨클럽 13 슈테판 쓰봐이끄 崔赫洵 1960 大東堂 86-192 편역 완역
3 感情의 混亂 어느女人의 二十四時間 슈테판 쓰봐이끄 徐相浩 1968 惠明出版社 85-192 완역 완역 해설에서 역자가 본래의 단편집의 제목은 '감정의 혼란'이지만 편역자가 걸작이라 생각한 작품을 책의 제목으로 내세웠다고 밝힘. 역자가 적혀 있지 않지만 비교끝에 다른 번역서를 통해 역자를 추정하여 적음.
4 感情의 混亂 어느 女人의 24시간 슈테판 쓰봐이끄 徐相浩 1970 松仁出版社 85-192 완역 완역 해설에서 역자가 본래의 단편집의 제목은 '감정의 혼란'이지만 편역자가 걸작이라 생각한 작품을 책의 제목으로 내세웠다고 밝힘.
5 感情의 混亂 感情의 混亂 瑞文文庫 172 슈테판 쓰봐이크 朴贊機 1975 瑞文堂 17-128 편역 완역
6 감정의 혼란 감정의 혼란 슈테판 츠바이크 박찬기 1996 깊은샘 7-143 편역 완역


1. 번역 현황 및 개관

슈테판 츠바이크의 노벨레 <감정의 혼란>은 1927년에 출간된 동명의 소설집 <감정의 혼란>에 수록된 작품이다. 1959년 11월 박찬기의 번역으로 처음 한국에 소개되었고, 불과 두 달 뒤에, 그러니까 1960년 1월에 최혁순의 번역으로 다시 출간되었다.

박찬기의 역서는 양문사에서 나온 <감정의 혼란>이며 이 책에는 <감정의 혼란>과 <달밤의 뒷골목>이 수록되어 있다. 반면 대동사에서 출간된 최혁순의 역서 제목은 ‘어느 여인의 24시간’이며, 여기에는 표제작 <어느 여인의 24시간> 외에 <감정의 혼란> <마음의 파멸>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두 책은 독자적으로 기획된 별개의 책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특히 흥미롭게도, 최혁순의 역서는 츠바이크 자신이 출간한 소설집 <감정의 혼란>의 세 작품을 담고 있어서, 이 책이야말로 <감정의 혼란>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왔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볼 수 있다. 역자는 소설집 앞에 붙인 해설에서 <어느 여인의 24시간>이 가장 걸작이기 때문에 이 작품명을 책의 제목으로 삼았다고 밝히고 있다. 그것이 진짜 이유인지, 아니면 막 출간된 박찬기 역 <감정의 혼란>과 구별되기 위해서 그렇게 제목을 정한 것인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어쨌든 소설집 <감정의 혼란>의 초역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1960년 초에 나온 최혁순의 <어느 여인의 24시간>이라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외형적으로 박찬기의 <감정의 혼란>과 최혁순의 <어느 여인의 24시간>이 독립적으로 기획 출간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최혁순이 번역한 노벨레 <감정의 혼란>을 보면 박찬기 번역의 영향이 많이 느껴진다. 같은 번역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으나 꽤 많은 문장이 동일하다. 박찬기의 번역을 선행 텍스트로 본다면, 최혁순이 박찬기 번역을 가지고 수정 작업을 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볼 수 있을 정도의 유사성을 나타낸다. 그런데 두 책이 불과 두 달 간격을 두고 나온 것을 생각하면 당시 원고 작성 및 제작 여건에서 그런 식의 작업이 가능했을까 싶기도 하다. 박찬기는 1959년에 이미 츠바이크의 소설집 <황혼의 이야기>를 낸 바 있다. 이 책에 <마음의 파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것이 최혁순이 번역한 <마음의 파멸>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최혁순의 책에 수록된 세 편의 소설 가운데는 <어느 여인의 24시간>만이 선행 번역을 찾을 수 없는 초역이다.

최혁순의 번역에 대해 다소 의문을 가지게 하는 또 다른 문제점은 역자의 이력과 이후 이 책의 원고가 겪은 이력이다. <어느 여인의 24시간>에서 역자 소개를 보면 최혁순은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고 역서로 빠스떼르나크의 <백야>가 있다고 한다. 그는 이후 70년대, 80년대에 이르기까지 니체, 쇼펜하우어, 야스퍼스 등의 독일 철학서, 러셀 등의 영어권 철학자의 저서, 토인비의 저서 등을 두루 번역했다. 독문학 번역은 이후 <헤세의 명언>을 제외하면 더 이상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어느 여인의 24시간>과 해설을 포함하여 완전히 동일한 원고가 조판까지 똑같이 다른 출판사에서 1968년에 출간되는데, 이번에는 역자의 이름이 아예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역시 같은 책이 1970년에는 서상호라는 사람의 번역으로 제3의 출판사에서 출간된다. 이를 마지막으로 이 책은 재출간되지 않는다.

박찬기의 역서 <감정의 혼란>은 큰 수정 없이 1975년대에 서문문고로 재출간되었고 1996년에는 상당한 원고 수정과 함께 <모르는 여인의 편지> <황혼이야기>를 덧붙여 새롭게 출간되었다.

노벨레 <감정의 혼란>을 새로이 번역하려는 시도는 상당히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이루어졌다. 2019년과 2022년에 서정일, 김선형이 <감정의 혼란>의 새로운 번역을 단행본으로 출간하였고, 2024년에는 정상원이 <감정의 혼란> 외에 <아모크> <책벌레 멘델> <체스 이야기>를 묶어 역시 ‘감정의 혼란’이라는 제목으로 츠바이크의 소설집을 출간하였다(여기에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대표 소설집이라는 부제가 추가되었다). 여기에서는 번역의 역사적 단계에서 특징적인 지점을 이루는 세 편의 번역, 박찬기, 서정일, 정상원의 번역을 주요 대상으로 번역 비평을 시도하고자 한다.


2. 개별 번역 비평

1) 박찬기 역의 <감정의 혼란>(1959, 1975, 1996)

<감정의 혼란>의 한국어 번역에서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인칭대명사를 어떻게 번역할 것이냐이다. 정확히 말하면 소설 첫 문장의 첫 단어로 등장하는 인칭대명사의 문제다. 박찬기의 선택은 이후 번역에 심대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Sie haben es gut gemeint, meine Schüler und Kollegen von der Fakultät: da liegt, feierlich überbracht und kostbar gebunden, das erste Exemplar jener Festschrift, die zu meinem sechzigsten Geburtstag und zum dreißigsten meiner akademischen Lehrtätigkeit die Philologen mir gewidmet haben. Eine wahrhaftige Biographie ist es geworden; kein kleiner Aufsatz fehlt, keine Festrede, keine nichtige Rezension in irgendeinem gelehrten Jahrbuch, die nicht bibliographischer Fleiß dem papiernen Grabe entrissen hätte – mein ganzer Werdegang, säuberlich klar, Stufe um Stufe, einer wohlgefegten Treppe gleich, ist er aufgebaut bis zur gegenwärtigen Stunde – wirklich, ich wäre undankbar, wollte ich mich nicht freuen an dieser rührenden Gründlichkeit. Was ich selbst verlebt und verloren gemeint, kehrt in diesem Bilde geeint und geordnet zurück: nein, ich darf es nicht leugnen, daß ich alter Mann die Blätter mit gleichem Stolz betrachtete wie einst der Schüler jenes Zeugnis seiner Lehrer, das ihm Fähigkeit und Willen zur Wissenschaft erstmalig bekundete.
Aber doch: als ich die zweihundert fleißigen Seiten durchblättert und meinem geistigen Spiegelbild genau ins Auge gesehen, mußte ich lächeln. War das wirklich mein Leben, stieg es tatsächlich in so behaglich zielvollen Serpentinen von der ersten Stunde bis an die heutige heran, wie sichs hier aus papiernem Bestand der Biograph zurechtschichtet?(182)[1]

이 서두 부분을 박찬기는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우리 대학의 동료 교수들 및 우리 학부 학생 여러분, 여러분은 본인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본인의 六十번째의 탄생일과. 본인의 대학 교수 생활 三十년의 기념으로서, 언어 학자들이 마련하여 주신 축하 기념 논문집(論文集)의 최초의 한 권이, 지금 이 자리에 영광스럽게 증정(贈呈)되어 왔습니다. 값비싼 장정(裝幀)에 아담한 외모를 갖춘 책입니다. 이것으로서 나의 일생의 빠짐 없는 진정한 전기(傳記)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본인의 조그마한 논문도, 어느 축하 연설도, 다 들어 있을뿐더러, 어떤 학술지에 게재된 보잘것없는 조그만 비평까지 하나도 빠져 있지 않습니다. 문헌적인 열성이 모든 종이의 무덤으로부터 그것을 다 뽑아 내온 것이었읍니다.―나의 일생의 경로가 명백하고 세밀하게, 잘 청소된 계단처럼, 한 단씩 한 단씩 올라가서 도달하기까지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읍니다.―정말로 이와 같이 열성적인 일을 해 주신 데 대하여, 내가 기뻐하지 않는다면 나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내 자신이 과거의 일로서 잃어버린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그 전기는 다시 연결시켜서 되찾아 주었읍니다. 정말이지 나이 먹은 노인인 내가, 예전에 학생이었을 때에 교수들로부터 학문의 능력과 의지를 최초로 증명 받은 성적표를 보았을 때의 기분과 똑 같은 프라이드를 가지고 지금 이 책의 책장을 훑어보았다는 것을 고백하겠읍니다. 
그러나 여기 이 열성이 숨어 있는 二백 페이지의 책을 들추어보고, 내 스스로 자신의 정신상을 정밀하게 검토하였을 때에, 나로서는 미소를 짓지 않을 수가 없었읍니다. 이것이 과연 나의 진실한 일생이었을가? 과연 나의 일생이 최초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토록 기분 좋은 나선형을 그리며 이 책에 기록된 것처럼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상승하여 온 것일가?(박찬기 1975, 19)[2]

박찬기는 첫 단어 Sie를 존칭 2인칭 복수 대명사로 보았고, 그들은 화자이자 주인공이 몸담아온 대학 학부의 제자와 동료 교수들이며, 그리하여 소설은 화자가 강연자로서 그들을 향해 자신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한 인물과의 만남과 헤어짐을 이야기해주는 형식으로 해석된다. 이는 전반적으로 청중을 전제하는 경어체가 사용되고 있는 데서 잘 드러난다. 자신의 60회 생일과 교수로서의 30년 근속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제자와 동료들을 향해 고백하는 것이 이 소설의 기본적인 의사소통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학자로서의 생을 담은 기념 문집을 눈앞에 두고서 그 문집을 만들고 또 화자에게 헌정한 사람들을 향해 ‘당신들은 내게 호의를 베풀고 대단한 정성을 기울였지만 그래봤자 그 속에 진짜 삶의 진실은 전혀 들어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도발적이거나 무례해 보인다. 츠바이크는 화자를 그런 도발적 인간으로 그리고자 한 것일까?

좀 더 자연스러운 것은 Sie를 3인칭 복수 대명사로 보는 쪽일 것이다. 그러면 ‘meine Schüler und Kollegen von der Fakultät’는 상대를 부르는 말이 아니라 sie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구절로 나타난다. 그렇게 보아야 왜 화자가 그들을 달리 부르면서(“die Philologen”) 마치 3인칭인 것처럼 취급하는지도 설명된다. 게다가 말의 내용으로 보더라도 화자가 그들이 없는 자리에서 혼자서 자신에게 헌정된 책에 대해 반추하고 있다고 보는 쪽이 훨씬 더 자연스럽다. 마지막으로 3인칭 복수 대명사설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해주는 것은 작품의 부제(박찬기가 빠뜨리고 있는) ‘추밀고문관 R. V. D.의 개인적 수기’다. 이 부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소설은 혼자서 스스로에게 말하기 위해 적은 내밀한 일기 같은 성격의 글이지 청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한 강연이 아니다. 그것이 동성애라는 소설의 주제에도 훨씬 더 잘 부합한다. 화자의 이야기는 이런 것이다. 한 노교수의 열정적 강의에 매료되어 정신적으로 깊은 영향을 받은 젊은이가 스승이 동성애자라는 비밀을 알고 스승의 집을 떠난다. 스승의 가르침이 준 영향으로 그는 결국 훌륭한 학자가 되지만 스승과의 만남은 평생의 비밀로 묻어두고 살아왔다. 남들이 써준 피상적인 자신의 전기를 앞에 두고 그는 자신의 삶과 운명을 결정지은 그 불행한 노교수를 회상한다.

화자는 본문 중에 자신이 어떤 의도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를 밝힌다. 박찬기가 정확히 옮기지 않고 있지만, 화자는 자신의 인생에 결정적 영향을 준 숨은 은사를 언급하면서 앞으로 자신이 풀어갈 이야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Ich will ein verschwiegenes Blatt legen zu den offenbaren, ein Bekenntnis des Gefühls neben das gelehrte Buch und mir selbst um seinetwillen die Wahrheit meiner Jugend erzählen.(184) 
나는 공개되어 있는 페이지들 옆에다 침묵에 잠긴 한 페이지를, 학문적 서적 옆에 감정의 고백을 놓을 것이며 그를 위해 나 자신에게 나의 청춘의 진실을 이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박찬기가 소설 형식을 일종의 강연으로 해석한 이래 최혁순의 번역도 이를 따랐고 2019년에 새로운 번역을 내놓은 서정일 역시 그런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소설 서두를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나의 학생들과 동료 교수님들, 여러분께서 내게 호의를 베풀어 주셨습니다....(서정일, 15)

그런 식으로 소설의 마지막 문장까지 계속된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도, 아무것도 몰랐던 소년으로서 느꼈던 그때의 감정을 똑같이 느끼고 있습니다. 그를 알기 전의 내 부모님과 그를 알고 난 후의 내 아내와 아이들, 그 누구에 대해서도 그보다 더 고마워하지도, 더 사랑하지도 않았다는 것을.(서정일, 199)

이러한 식의 번역은 여기서 화자가 내밀한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야기 행위 자체도 내밀한 것임을, 독자는 소설이라는 장치를 통해서만 그 내밀함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을 잘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서정일 역시 소설의 부제를 번역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최혁순의 번역에서는 ‘추밀고문관 R.D.V.씨의 수기’라는 부제까지 붙여 놓으면서도 강연문 형식을 버리지 못했다.

소설 첫 단어 “Sie”를 처음으로 3인칭 복수 대명사로 번역한 것은 김선형이다.

나의 60세 생일과 30년 교수 경력을 축하하는 기념 논문집 중 첫 번째 권을 문헌학자들이 훌륭하게 제본하여 엄숙하게 나에게 헌정한 것을, 대학의 나의 제자들과 동료 교수들은 훌륭하다고 평가하였다. 하나의 진정한 전기傳記가 완성되었던 것이다. 즉 소논문, 축사, 학회지에 실린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비평들까지 포함한 저서가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출판 서지학적으로 열심히 정리해도 종이로 된 무덤과 같은 논문집에서 한 사람의 진실된 기록을 빼 올 수는 없으리라. ―그곳에는 나의 전체적인 완성 과정이 마치 잘 정리된 계단처럼 깨끗하고 명료하게, 그리고 현재의 상태에 이르기까지 단계별로 구축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실 나는 감사한 마음을 가질 수 없었고, 이 감동을 줄 정도의 철저함에 대해 기뻐할 수 없었다. 내가 살아왔던 삶과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것이 이 형상 속에 하나가 되고 정돈되어 되돌아왔을까?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나이 든 내가 한때 학생의 신분으로 스승의 학문에 대한 능력과 의지에 대해 처음으로 표명했던 증거를 보듯, 그 논문들을 똑같은 긍지를 가지고 보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김선형, 10-11)

그런데 원문과의 대조를 통해 드러나듯이 대명사의 번역을 올바르게 되돌려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내용에서 본래 문맥에서 크게 벗어나 있어서 아쉬움을 남긴다. 김선형의 번역은 군데군데 다른 번역본들의 부족함을 보완해줄 정확성을 보여줄 때도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부분에서 상당히 빗나간 해석을 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2024년에야 작품의 수기 형식을 살리면서 내용적으로도 상당히 충실한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정상원의 번역으로 출간된 <감정의 혼란>이 바로 그 책이다.

박찬기의 번역과 관련하여 살펴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1996년의 개정이다. 1996년 번역본은 원 번역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간직하고 있지만 표현의 현대화를 위해 많은 부분에서 크고 작은 수정이 가해져 더 깔끔해지고 읽기 좋게 바뀌었다. 그런데 과연 번역의 정확성 면에서 개선이 있었는가 하는 점에서는 의문이 있다. 거추장스럽게 보이는 부분들을 정리하다 보니 원문의 일부가 누락되어 오히려 번역의 충실성이 예전 번역에 비해 저하되는 부분도 상당히 눈에 띈다. 일관된 변화는 문단의 임의적 변경이다.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원문의 긴 문단을 더 나눈 것이지만, 이는 원문의 형태를 최대한도로 유지하려 한 본래의 번역(1959/1975)과 비교하여 바람직한 변화라고 할 수는 없을 듯하다. 예를 들어서 다음과 같은 대목을 자세히 살펴보자.

Der schon dem Schulknaben fühlbare Verdacht, in eine Leichenkammer des Geistes geraten zu sein, wo gleichgültige Hände an Abgestorbenem anatomisierend herumfingerten, schreckhaft erneute er sich in diesem Betriebsraum eines längst antiquarisch gewordenen Alexandrinertums – und wie intensiv erst wurde dieser abwehrende Instinkt, sobald ich von der mühsam ertragenen Lehrstunde hinaustrat in die Straßen der Stadt, jenes Berlin von damals, das, ganz überrascht von seinem eigenen Wachstum, strotzend von einer allzu plötzlich aufgeschossenen Männlichkeit, aus allen Steinen und Straßen Elektrizität vorsprühte und ein hitzig pulsierendes Tempo jedem unwiderstehlich aufnötigte, das mit seiner raffenden Gier dem Rausch meiner eigenen, eben erst bemerkten Männlichkeit höchst ähnlich war.(186)
벌써 어린 학생 시절에 느꼈던 바와 똑 마찬가지로, 정신의 시체 해부실에라도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일어나고, 여기 이 골동품적인 죽은 문자의 연구소 속에서, 다시 그 때의 지루함이 살아 나오는 것을 느끼며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읍니다.―간신히 참고 들은 강의에서 벗어나, 그 당시의 백림 거리를 산보하게 되었을 때에 그와 같은 반항적인 본능이 얼마나 강하게 발동하였던 것이겠읍니까!―그 당시의 백림시는, 자기 자신의 성장에 스스로 놀라고 있는 형편이었으며, 갑작스럽게 커진 어른다움에 넘쳐 흐르고 있었지요. 거리에 있는 한 조각의 자갈들에서도, 전기(電氣)의 불꽃이 튕겨 나오고, 뜨겁게 맥박치는 그 도시의 템포는 모든 물건 속에 강제적으로 파고 들어갔읍니다. 그와 같이 강력하고 탐욕스러운 그 템포는 그 때 비로소 깨어나기 시작한 나 자신의 남성으로서의 흥분과 대단히 닮아 있는 점이 있었읍니다.(박찬기 1975, 24)

화자가 학교 교장인 아버지의 강요로 베를린에서 영문학 전공으로 대학 생활을 시작한 시절의 이야기다. 따분한 학교 수업에 대한 그의 반발심은 당시 현대적 대도시로 빠르게 변화하던 베를린의 거리에서 탈출구를 발견한다. 상당히 많은 내용과 분량이지만 따지고 보면 한 문장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이야기되는 내용이 환기하는 빠른 호흡과 흥분, 격동과도 관련이 있다. 박찬기는 이 대목을 한국어로도 한 문장이 되도록 번역하지는 않지만 원문과 같이 줄표를 사용하면서 말을 빠르게 이어간다. 그런데 그것이 1996년의 번역에서는 다음과 같이 바뀐다.

이미 어린 학생 시절에 느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정신의 시체 해부실에라도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일어나고, 여기 이 골동품적인 죽은 문자의 연구소 속에서, 다시 그 때의 지루함이 살아 나오는 것을 느끼며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간신히 참고 들은 강의에서 벗어나, 그 당시의 베를린 거리를 산책하게 되었을 때, 그러한 반항적인 본능이 얼마나 강하게 발동했겠읍니까! 그 당시의 베를린 시는 자기 자신의 성장에 스스로 놀라고 있었으며, 성숙미가 넘쳐 흐르고 있었지요. 거리에 있는 한 조각의 자갈들에서도 전기의 불꽃이 튕겨 나오고, 뜨겁게 요동하는 그 도시의 물결은 모든 사물 속으로 힘차게 파고 들었습니다. 
그러한 강력하고 탐욕스러운 물결은 그 때 비로소 깨어나기 시작한 나 자신의 남성으로서의 흥분과 대단히 닮은 점이 있었습니다.(박찬기 1996, 13)

한 문장이 세 개의 문단으로 흩어진다. 줄표도 사라진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소설에서 갑작스런 생각의 흐름의 변경, 비약, 건너뜀 등을 표현하기 위해 줄표를 빈번히 사용하는데, 1975년 번역본까지 모두 살아 있던 그런 문장부호가 1996년 번역본에서는 완전히 사라진다. 줄표 대신 마침표를 사용하여 문장을 나누거나, 여기서처럼 줄표를 지우고 나서 심지어 새로운 문단으로 넘어가기도 한다. 이로써 독자에게는 읽으면서 숨돌릴 수 있는 넓은 틈이 생기고 글의 속도는 줄어든다.


2) 서정일 역의 <감정의 혼란>(2019)

서정일의 번역은 박찬기 번역의 영향과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되며, 박찬기의 1996년 번역을 더욱 현대화하고 개선한 판본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미 지적한 것처럼 서정일은 강연문 형식으로 작품을 옮기고 있는데, 화자가 자신의 서술 의도를 밝힌 대목을 어느 정도 정확히 번역했으면서도 박찬기 번역의 잘못을 간파하지 못한 것은 잘못된 편견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사례일 듯하다.

비밀로 남겨진 한 페이지를 드러내 이 학술적인 책에는 존재하지 않는 감정의 고백을, 그리고 그 분을 위해 내 젊은 시절의 진실을 이제 스스로에게 전하려 합니다.(서정일, 18-19)

이를 박찬기의 1996년 번역과 비교해 보자. 박찬기는 강연문 형식의 번역을 정당화하려는 듯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려 한다는 화자의 말을 살짝 변형시킨다.

숨겨진 비밀의 페이지를 밝게 드러나는 페이지에 첨가시키고, 학술적인 이 서적에 감정의 고백을 첨부시켜, 그 사람을 존중하는 뜻에서 내 자신의 청춘의 진실을 여기서 토로하려고 합니다.(박찬기 1996, 10) 

박찬기 번역과의 비교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서정일은 원문의 내용을 상당히 크게 변형하고 재구성한다. 그것은 더 잘 이해되는 매끄러운 한국어 표현을 위한 시도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과정은 의역과 오역의 경계를 넘나든다. ‘비밀로 남겨진 한 페이지를 드러내’ 같은 부분은 의미는 잘 통하지만 드러나 있는 페이지 옆에 숨겨진 페이지를 놓는다는 원문의 내용을 왜곡한 것이다.

이 번역본은 자유롭게 문단을 재구성한다는 점에서도 박찬기 1996년 판본의 길을 충실히 따라간다. 그리하여 위에서 살펴본 베를린 시에 관한 대목은 다음과 같이 옮겨진다.

이미 소년 시절에 느꼈던 지루함이 오래된 골동품같은 고루한 형식주의의 공간에서 섬뜩하게 되살아났습니다. 어떤 해부학 실험을 위해 죽은 사람의 차디찬 손을 이리저리 만지는 정신의 시체 보관소로 끌려가는 느낌이었습니다.
도저히 참기 힘든 수업시간에서 벗어나 도시의 거리, 베를린 시내로 나왔을 때야 비로소 나의 반항적인 본능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당시의 베를린은 한 조각의 돌에서도 전기가 튕겨 나오고, 모든 거리마다 뜨겁게 요동치는 에너지가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도시의 속도는 모든 사람에게 거부할 수 없이 파고들었으며, 자신의 성장에 스스로 놀라움에 사로잡힌 도시가 바로 베를린이었지요. 
이제야 비로소 깨닫게 된 사실이지만 베를린의 기세등등한 탐욕은 나의 남성성의 흥분과 너무도 닮아 있었습니다.(서정일, 22-23)

여기서 문단은 박찬기 1996년 판본에서와 동일하게 나누어져 있다. 차이점이라면 ‘도저히 참기 힘든 수업시간에’로 시작하는 문단과 앞 문단 사이에 간격이 더 벌어져 있다는 것이다. ‘죽은 사람의 차디찬 손을 이리저리 만지는’이라는 대목은 박찬기의 번역에서 누락한 것을 되살린 것이지만, 역시 원문의 의미를 다소 간단하게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의미가 전도되는 결과를 낳았다.


3) 정상원 역의 <감정의 혼란>(2024)

가장 원문에 충실하고 원작이 가진 수기로서의 성격을 살린 번역이다. 문단 역시 원문에 최대한 따르고 있다. 다만 줄표와 같은 원문의 부호가 모두 생략된 것은 아쉬운 점이다. 한국어에서 그런 부호가 없다는 것이 편집상의 이유일 텐데, 독일어 텍스트에서 의미 있는 기호로 사용되는 문장부호를 한국어 텍스트에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있다.

정상원은 <감정의 혼란> 번역사 6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소설의 서두를 상당히 정확하게 옮겼으니, 이 부분은 직접 살펴볼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내 제자와 동료 교수들의 의도는 좋았다. 이들 어문학자들이 30년에 걸친 내 교수 활동을 기리기 위해 환갑을 맞은 내게 엄숙히 헌정한 기념 문집 첫 권이 호화 양장본의 형태로 여기 놓여 있다. 내 소소한 논문이나 축하 연설, 어딘지도 모를 학술지에 실린 대단치 않은 평론까지 빠짐없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이 문집은 진정한 전기라고 할 만하다. 아무리 부지런히 서고를 뒤졌다 해도 어마어마한 종이 더미에서 그것들을 죄다 끄집어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 문집 안에서 나의 발전 과정은 말끔히 닦아놓은 계단처럼 차례차례 깔끔하고 명료하게 쌓이며 현재로 이어지고 있다. 뭉클하리만치 철저한 그들의 노력에 기뻐하지 않는다면 나는 배은망덕한 사람일 것이다. 나 자신조차 하도 오래되어서 소실되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서 이 문집 속으로 돌아왔으니까 말이다. 정말이지, 노인이 되어 문집의 책장을 넘기자니 학창 시절 학자의 능력과 자질을 처음으로 증명하는 성적표를 받아든 학생처럼 뿌듯한 기분이 드는 걸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빼곡한 200쪽의 책장을 넘기며 거기에 담긴 내 정신의 초상을 찬찬히 들여다보자니 피식 웃음이 나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정말 나의 삶은 문집의 소개 글이 밝히듯이, 처음부터 오늘날까지 흔들림 없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오르막길을 올라온 것일까?(정상원, 9-10)

화자는 기념문집에 대해 거리감을 느낀다. 만든 사람들의 뜻은 좋았지만 제대로 된 책이 아니다. 그렇게 혼잣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뉘앙스에 대한 파악 덕택에 역자는 ‘lächeln’이라는 동사를 미소 짓다 대신 ‘피식 웃다’로 번역할 수 있는 것이다. 정상원은 원문의 표현 하나하나를 얼버무리지 않고 세밀하게, 그러면서도 우리말의 어감을 살리면서 옮긴다.

다만 자연스러운 표현의 추구가 의역으로, 결국 과도한 해석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위의 인용문에서 “아무리 부지런히 서고를 뒤졌다 해도…다 끄집어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문장은 매우 자연스럽게 읽히지만, 사실은 박찬기가 번역했듯이 대단히 부지런히 뒤져서 다 끄집어내었다는 뜻이다.

위에서 살펴본 베를린 시에 관한 대목의 번역은 정상원의 번역 방법이 보여주는 이런 장단점을 모두 잘 보여준다.

소년 시절 내가 어쩌다가 사상가들의 시체를 모아둔 장소에 걸려들어서 시체들이 아무런 감정도 없는 손에 의해 이리저리 헤집어지며 해부당하는 것을 보고 있다는 의심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미 골동품이 된 고리타분한 학문을 다루는 공간에 들어서니 그 의심이 다시 들며 등골이 오싹했다. 
가까스로 수업을 마치고 베를린 거리로 나서자마자 나의 방어본능이 후끈 달아올랐다. 당시의 베를린은 놀라울 만큼 급속도로 성장중인 도시였다. 갑자기 솟구치는 남성성에 우쭐해진 청년처럼 거리의 돌조각 하나까지 불꽃을 튀겼기에 베를린에 사는 사람 모두는 어지러울 만치 요동치는 속도에 적응해야 했다. 기세등등해서 욕망에 넘치는 이 도시는 얼마 전에야 자신이 남자임을 깨닫고 거기에 흠뻑 취한 나와 똑 닮아 있었다.(정상원, 13)

지금까지 본 다른 번역에 비해 시체 보관소의 비유가 세부적으로 가장 정확하게 번역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정신의 시체 보관소 Leichenkammer des Geistes”(186)를 ‘사상가들의 시체를 모아둔 장소’로 번역한 것이 적절한지는 의문이다. 고전 연구의 고리타분함을 말하는 멋진 비유가 자연스러운 한국어가 되느라 평범한 표현으로 바뀌어 버렸다. 베를린 시가 갑자기 솟구친 남성성에 우쭐해하고 있다는 원문 표현에 만족하지 않고 “(우쭐해진) 청년처럼”이라는 표현을 추가한 것도 정신을 사상가로 바꾸는 것과 동일한 번역 감각의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이미 의인법적인 비유의 맥락이 구성되어 있는데 굳이 원문에 없는 청년이라는 말을 친절하게 삽입했어야 했을까?

한국어다움, 가독성의 요구에 따르다 보면 보통은 원문의 복잡함을 축약하고 심지어 어떤 부분을 아예 누락해 버리는 경향이 증대된다. 정상원은 그렇게 원문을 단순화하지 않으면서도 한국어다움과 가독성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도 원문과 일정한 편차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원문과의 편차와 한국어다움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아야 할 것이다.


3. 평가와 전망

지금까지 65년에 걸친 <감정의 혼란>의 번역사를 일별해 보았다. 그것이 직선적인 발전은 아니라 해도 선학이 개척한 자리에서 출발하여 후학들이 선행 번역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끝에 상당한 진전을 이루어낸 역사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과정에서 원문의 이해에 바탕을 둔 한국어다운 문장으로의 번역이라는 성과에 이르렀다면, 그 바탕 위에서 이 작품의 문체적 특징까지도 잘 살려내는 새로운 번역에 대한 기대도 생겨난다.

그러면 박찬기의 ‘기상천외한’ 오독은 교정되어야 할 단순한 오류였을까, 아니면 원저자도 전혀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의미를 산출해내는 창조적 오독이었을까? 원문과의 세밀한 비교를 통해 강연문 형식의 번역에서 어떤 어긋남이 발생하고 어떤 예기치 않은 의미가 산출되는지를 고찰한 뒤에야 이 물음에 답할 수 있을 것이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박찬기(1975): 감정의 혼란. 서문당.
박찬기(1996): 감정의 혼란. 깊은샘.
서정일(2019): 감정의 혼란. 녹색광선.
정상원(2024): 감정의 혼란. 하영북스.


기타
박찬기(1959): 감정의 혼란. 양문사.
최혁순(1960): 어느 여인의 24시간 외 2편. 대동당.
김선형(2022): 감정의 혼란. 세창출판사.


김태환
  • 각주
  1. 독일어 원문은 다음 판본을 이용한다. Zweig, Stefan(2009): Die Verwirrung der Gefühle. Frankfurt a. M.: Fischer Taschenbuch Verlag. 원문 인용 시 본문에 쪽수를 표기한다.
  2. 박찬기의 번역은 1959년과 1975년 판본 사이에 본질적 차이는 없다. 많은 변화를 가져온 개정은 1996년 판본에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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