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의 지진 (Das Erdbeben in Chili)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Heinrich von Kleist, 1777-1811)의 소설
| 작가 |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Heinrich von Kleist) |
|---|---|
| 초판 발행 | 1807 |
| 장르 | 소설 |
작품소개
독일 작가 클라이스트가 1807년에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작가의 첫 단편소설로, 원래 제목은 <헤로니모와 호세파. 1647년 칠레 지진의 한 장면>(Jeronimo und Josephe. Eine Scene aus dem Erdbeben zu Chili, vom Jahr 1647)이었으나 1810년 라이머가 펴낸 클라이스트 단편집에 재수록되면서 현재 알려진 <칠레의 지진>으로 변경되었다. 소설은 실제로 칠레 산티아고에서 1647년 5월 13일에 일어났던 대지진을 배경으로 한다. 가정교사 헤로니모와 금지된 사랑에 빠져 혼전임신으로 세상에 물의를 일으킨 귀족 아가씨 호세파가 처형당하는 날, 때마침 산티아고에서 대지진이 일어난다. 불쌍한 연인을 갈라놓고 처벌하려 했던 호세파의 부친과 대주교, 법원장을 포함한 시민들이 대거 몰살되는 등 도시 전체가 무너지자, 두 연인은 아이러니하게도 목숨을 구하고, 수녀원에 강제로 맡겨졌던 아이까지 되찾아 행복하게 해후한다. 잿더미가 된 도시를 재건하고자 신분 구분 없이 서로 돕는 시민들을 보면서 그들은 낙원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되찾은 행복을 낙관적으로 만끽하지만, 결국 대재앙의 희생양을 찾으려는 시민들의 광기에 희생되고 만다. 소설에서 지진이 시민 사회의 금기를 어긴 연인을 단죄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연인을 억압하는 교회와 시민 사회를 단죄하는 것인지 확정하기 어려워 지진의 의미가 수수께끼로 여겨진다. 주로 1755년 리스본 대지진으로 인해 촉발된 ‘변신론’(Theodizee) 논쟁의 맥락에서 혹은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입장과 연관 지어 많은 해석이 시도되었다. 또한 단일한 해석을 좌초시키는 소설의 성격 덕분에 해석학이나 해체비평적 해석의 주목을 받기도 한다. 국내에서는 1960년 구기성에 의해 <智利(지리)의 지진>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번역되었다(을유문화사).
초판 정보
Kleist, Heinrich von(1807): Jeronimo und Josephe. Eine Scene aus dem Erdbeben zu Chili, vom Jahr 1647. In: Morgenblatt für gebildete Stände, 10. Sep. 1807, 866-868/ 11. Sep. 1807, 871-872/ 12. Sep. 1807, 875/ 14. Sep. 1807, 878-879/ 15. Sep. 1807, 883-884. <단행본 초판 정보> Kleist, Heinrich von(1810): Das Erdbeben in Chili. In: Erzählungen. Berlin: Realschulbuchhandlung, 307-342.
번역서지 목록
| 번호 | 개별작품제목 | 번역서명 | 총서명 | 원저자명 | 번역자명 | 발행연도 | 출판사 | 작품수록 페이지 | 저본 번역유형 | 작품 번역유형 | 비고 |
|---|---|---|---|---|---|---|---|---|---|---|---|
| 智利의 地震 | 近代獨逸短篇集 | 世界文學全集 20 |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 丘冀星 | 1960 | 乙酉文化社 | 31-57 | 편역 | 완역 | ||
| 2 | 칠리의 地震 | 世界의文學百選 3 | 世界의文學百選 3 | H·클라이스트 | 李炳宇 | 1964 | 徽文出版社 | 266-279 | 편역 | 완역 | |
| 3 | 칠리의 地震 | (컬러版)世界短篇文學大系 7 | (컬러版)世界短篇文學大系 7. 象徵·心理主義·其他文學 | 클라이스트 | 宋永擇 | 1971 | 博文社 | 275-286 | 편역 | 완역 | |
| 칠리의 地震 | 세계단편문학선 : 獨·佛 篇 2 | (三省版)世界文學全集 29 | H·클라이스트 | 金錫道 | 1975 | 三省出版社 | 45-58 | 편역 | 완역 | ||
| 5 | 칠레의 地震 | 聖 도밍고 섬의 約婚 | 瑞文文庫 174 | H. 클라이스트 | 朴鍾緖 | 1975 | 瑞文堂 | 79-111 | 편역 | 완역 | |
| 6 | 칠레 大地震 | 시토름ㆍ클라이스트 短篇集 | 世界短篇文學全集 29 | 클라이스트 | 金光珍 | 1976 | 汎朝社 | 340-368 | 편역 | 완역 | |
| 7 | 칠리의 지진 | 世界短篇文學選集.2 |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 申洙澈 | 1980 | 啓民出版社 | undefined-undefined | 편역 | 확인불가 | ||
| 8 | 칠리의 地震 | 세계단편선 | 삼성판 세계문학전집 32 | H. 클라이스트 | 金錫道 | 1984 | 삼성출판사 | 307-321 | 편역 | 완역 | |
| 9 | 칠레의 지진 | 세계의 명단편 | 대표작가대표문학 5 | 클라이스트 | 국일문학사 편집부 | 1989 | 국일문학사 | 353-370 | 편역 | 완역 | |
| 10 | 칠레의 지진 | 약혼, 붉은 고양이, 금수 외 | Elit practical writing, 우리들의 실전 엘리트 논리·논술 33 | 클라이스트 | 논술문학편집위원회 | 1996 | 범한 | 176-196 | 편역 | 완역 | |
| 칠레의 지진 | 칠레의 지진: 클라이스트 단편전집 |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 배중환 | 2003 | 세종출판사 | 29-47 | 편역 | 완역 | |||
| 칠레의 지진 | 붉은 고양이 외 : 독일 대표단편선 고전주의에서 전후문학까지 |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 이관우 | 2005 | 우물이 있는 집 | 309-331 | 편역 | 완역 | |||
| 13 | 칠레의 지진 | 민들레꽃의 살해 |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 김재혁 | 2005 | 현대문학 | 311-343 | 편역 | 완역 | ||
| 칠레의 지진 | 버려진 아이 외 |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24 |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 진일상 | 2005 | 책세상 | 182-203 | 편역 | 완역 | ||
| 칠레의 지진 | 미하엘 콜하스 | 창비세계문학 14 |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 황종민 | 2013 | 창비 | 181-203 | 편역 | 완역 | ||
| 16 | 칠레의 지진 | (독일대표단편문학선) 금발의 에크베르트 | 세계단편문학선집 1 |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 이관우 | 2013 | 써네스트 | 38-55 | 편역 | 완역 | |
| 17 | 칠레의 지진 | 미하엘 콜하스1 | 창비세계문학 14 |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 황종민 | 2018 | 창비 | 181-203 | 편역 | 완역 |
번역비평
1. 번역 현황 및 개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가 1807년에 발표한 이 단편소설은 제목에서 드러나듯 1647년 칠레 산티아고에서 일어난 대지진을 배경으로 한다. 금지된 사랑으로 물의를 일으킨 연인 헤로니모와 호세파[1]는 지진으로 인해 목숨을 구하고 잠시 행복을 되찾지만, 결국 광기에 휩쓸린 시민들에게 희생되고 만다. 처형 직전에 일어난 지진은 두 사람에게 구원의 기회가 되는 듯 보였으나,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기도 했다.
이 소설은 클라이스트의 작품 중 가장 활발하게 번역된 것으로 보인다. 1960년 구기성의 초역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모두 11명의 번역자에 의해 17종의 번역서가 출간되었다. 1960년대(2종), 1970년대(4종), 1980년대(2종), 1990년대(1종), 2000년대(4종), 2010년대(3종), 2024년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번역서가 나왔다. 단편인 만큼 근대독일단편집, 세계단편문학대계, 세계단편문학선, 독일대표단편문학선 같은 단편 문학 총서에 다른 작가의 작품과 함께 수록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2000년대 이후에는 클라이스트 전공자들에 의해 클라이스트 단편 전집에 포함되어 출간되었다. 이 작품이 표제작으로 사용된 사례는 단 한 번으로, 2003년 클라이스트 전공자인 배중환이 이 작품을 표제작으로 하여 작가의 단편 전집을 출간한 것이 그것이다.
<칠레의 지진>이 이렇게 많이 번역되고 널리 읽힌 것은 이 소설에 대한 다양한 해석 시도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어떤 연구자들은 클라이스트가 1755년 리스본 대지진에 관한 볼테르와 루소의 변신론 논쟁을 염두에 두고 이 소설을 썼다고 본다. 또 다른 연구자들은 이 작품을 프랑스혁명에 대한 시적 재해석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작품이 우연과 필연의 경계를 끊임없이 흔들며, 우연이 지배하는 존재론적 세계관을 드러낸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계몽주의적 질서와 도덕적 권위를 해체하고, 폭력과 구원의 아이러니를 동시에 보여주면서, 독자가 일관된 해석의 기준을 붙잡을 수 없게 만드는 서사로 이해되기도 한다.
제목 번역의 경우 “智利의 地震”, “칠리의 지진”, “칠레 대지진”, “칠레의 지진” 등 4개가 있는데, 1980년대 이후로는 원문에 가장 부합하는 “칠레의 지진”이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다.
이하에서는 구기성의 초역을 비롯해 각 시기의 주요 번역을 개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개별 번역 비평
독문학자인 구기성은 1960년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 제20권 근대독일단편집에 아홉 명의 독일 작가의 작품을 번역해 출간했다. 그는 독일 작가들의 작품만으로 세계문학전집 한 권을 구성한 것이 국내 최초의 사례라는 점에서, “飜譯(번역)을 담당한 本人(본인)에게는 여간 意義(의의)있는 일로 여겨지지 않았으며, 동시에 벅찬 感(감)을 琴(금)할 길 없”(구기성, 25)다고 토로한다.[2] 아홉 작가에 대해 각각 3~4쪽의 해설을 제공하는데, 저본 정보나 번역 전략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클라이스트의 작품이 가장 먼저 실려 있고, 바로 “智利의 地震”이다. 지리는 ‘칠레’를 음역한 표기이다. 제목에서는 이 음역어를 사용했지만, 본문에서는 “칠리”라고 표기되어 있다.
구기성의 번역본은 국내 초역이라는 의의를 지니며, 전반적으로 내용 전달이 잘 되고 원문의 문체와 문장 구조를 충실히 재현하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클라이스트의 문체는 종속절을 활용해 문장이 길고 구조가 복잡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첫 문장은 한 문장 안에 장소, 시간, 인물, 사건을 차례로 겹겹이 삽입해 서술하는 방식이 두드러진다. 화자는 전지적 시점을 취하면서도 인물의 내면에 들어가지 않고 외부적 사실만을 보고한다. <칠레의 지진>에서도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나는데, 구기성의 번역과 16년 후인 1976년에 나온 김광진의 번역을 비교해 살펴보자.
In St. Jago, der Hauptstadt des Königreichs Chili, stand gerade in dem Augenblicke der großen Erderschütterung vom Jahre 1647, bei welcher viele tausend Menschen ihren Untergang fanden, ein junger, auf ein Verbrechen angeklagter Spanier, namens Jeronimo Rugera, an einem Pfeiler des Gefängnisses, in welches man ihn eingesperrt hatte, und wollte sich erhenken.(144)[3]
칠리 왕국의 수도 산티야고에서 수천명의 사람들이 죽은 바있는 一六四七년의 대지진이 일어난 순간에 제로니이모 루게라라는 범죄로 고소당한 젊은 서바나인은 감금당한 감옥의 기둥에 기대어 막 목매달아 죽으려고 하고 있었다.(구기성, 32)
一六四七년의 일이다. 칠레 왕국의 수도 성(聖) 라고에 큰 지진이 일어났다. 수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삽시간에 떼죽음을 당하고 만 것이다. 바로 이 무렵, 어떤 범죄 사건으로 고소를 당해 감옥에 갇히게 된 죄수 제로니모 뤼제라라는 스페인 청년 한 사람이 감옥의 기둥에 목을 매어 막 목숨을 끊으려는 찰나였다.(김광진, 340)
김광진은 한 문장으로 된 원문을 네 개의 문장으로 나누어 번역한 반면, 구기성은 원문의 긴 종속절 구조와 정보를 한 문장 안에 모두 유지하여 한 문장으로 번역함으로써 원문의 장문 구조를 그대로 유지했다. 김광진은 “떼죽음을 당하고 만 것이다”와 같은 표현을 넣어 사건의 비극성을 강조하면서 번역자의 감정을 개입시켰다면, 구기성은 감정적 해석이나 설명적 수사 없이 원문의 건조한 보고체를 그대로 전달했다. 구기성의 번역은 1960년에 출간되었기에 “서바나인” 같은 고풍스러운 어휘가 종종 사용되어 오늘날 독자에게는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으나 내용 전달에는 전혀 무리가 없어 보인다.
클라이스트 문체의 또 다른 특징은 직접화법보다 간접화법이 더 많이 사용된다는 점이다. 이는 사실을 보고하듯 건조하게 기술하는 화자의 서술 방식과 맞닿아 있는데, 인물들의 말과 생각을 간접화법으로 전달함으로써 독자가 인물의 말에 직접적으로 몰입하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한다. 예컨대 지진이 일단 진정되자 신의 진노를 달래기 위해 주민들이 성당에 모여 미사를 드리던 중 벌어진 다음 장면을 살펴보자. 신부가 이번 지진은 최근 도시에서 벌어진 풍기 문란, 즉 헤로니모와 호세파가 혼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관계를 맺어 호세파가 수녀원에서 아이를 낳은 사건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고 말하자, 분노와 광기에 휩쓸린 군중이 호세파를 폭력적으로 끌어내어 처형하려 들고, 돈 페르난도가 신분을 드러내며 이를 제지한다.
Und als eine andere Stimme schreckenvoll (...) fragte: wo? hier! versetzte ein Dritter, (...) “Seid ihr wahnsinnig?” rief der Jüngling, und schlug den Arm um Josephen: “ich bin Don Fernando Ormez, Sohn des Kommandanten der Stadt, den ihr alle kennt.” Don Fernando Ormez? rief, dicht vor ihn hingestellt, ein Schuhflicker (...) (156)
다른 목소리가 물었다. “어디에?” “여기!”하고 제삼의 사나이가 대답하고 (...) “당신들 미쳤소?”하고 청년이 외치며 요제프의 몸 둘레를 팔로 감싸주었다. “나는 여러분들이 모두 아는 이 시의 사령관의 아들 동 훼르난도 오르메쓰요.” “동 훼르난도 오르메쓰?”하고 (...) 한 구두 고치는 사람이 그의 앞에 바싹 나와 서서 외쳤다.(구기성, 41)
원문에는 직접화법과 간접화법이 혼재해 있지만, 구기성은 이를 모두 직접화법으로 처리했다. 소설에서 직접화법이 처음 등장하기 전까지는 간접화법을 살려 번역했으나, 여기 두 화법이 섞여 나오는 장면부터는 일관되게 직접화법으로 옮겼다. 이러한 방식은 가독성 측면에서 유리한 면이 있겠지만, 원문에서 간접화법이 만들어내는 건조하고 사실적인 톤은 상당 부분 희석된다.
구기성의 초역은 고풍스러운 어휘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내용 전달이 잘 되고, 원문의 문체도 잘 반영하여 초역의 한계를 넘어서는 아주 좋은 번역이라 하겠다.
김광진의 번역은 1976년에 범조사 “세계단편문학전집” 제29권에 수록되어 클라이스트의 다른 단편 세 편 및 테오도르 슈토름의 단편과 함께 발표되었다. “클라이스트의 작품과 생애”라는 짧은 소개와 약력이 실려 있으나, 번역자의 말이나 저본에 대한 언급은 없다. 원문 제목의 “지진”을 “대지진”으로 옮겼는데, 이는 해설적으로 개입하는 김광진 번역의 전반적인 경향을 보여주는 어휘 선택이기도 하다.
소설의 첫 문장에 대한 구기성의 번역과의 비교에서 드러났듯이 김광진의 번역은 클라이스트 특유의 문체와는 다른 문체를 보여준다. 길고 복잡한 하나의 문장을 잘게 끊어서 네 개의 문장으로 나누었고, 원문에 없는 표현을 넣는 의역을 감행하였다. 지진이 일어난 후 헤로니모가 호세파를 찾아다니는 장면을 살펴보자.
(...) wo nur irgend ein weibliches Gewand im Winde flatterte, da trug ihn sein zitternder Fuß hin: doch keines deckte die geliebte Tochter Asterons.(147-148)
바람결에 여자 옷 같은 것이 팔랑거리는 색만 보여도 떨리는 발길을 자연히 그쪽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정작 찾아가 보면 꿈에도 잊지 못하던 아스떼론의 딸 조세페를 감싸고 있는 옷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길이 없으니 어찌 된 일인가.(김광진, 346)
김광진의 번역은 원문에 비해 상당히 긴데, 이는 “수밖에 없었다”, “꿈에도 잊지 못하던”,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같은 원문에 없는 표현들이 여럿 첨가된 결과이다. 김광진은 절제된 원문의 서술 방식을 감정적이고 수식어가 많은 문장으로 바꾸어 독자의 공감을 유도하는 경향이 강한데, 마지막에 등장하는 “찾을 길이 없으니 어찌 된 일인가”와 같은 표현은 번역자의 해설적 개입이 두드러지다 못해 좀 과하다는 인상을 준다. 김광진은 “까닭은 무엇이었던가”, “원인이라면 원인이었다”와 같은 설명적 어구를 종종 삽입한다. 그리고 연인 관계인 헤로니모와 호세파를 원문과 달리 “남편”과 “아내”라는 말로 번역하기도 하며, “Don Fernando, dieser göttliche Held”(158)를 “아킬레스 같은 이날의 영웅 돈 페르난도”(김광진, 367)로 옮긴다. 이는 배중환이 “신과 같은 영웅인 돈 페르난도”(배중환, 46)로 번역한 것과 비교할 때, 다소 과한 의역을 추구하는 역자의 전략이 드러나는 또 다른 예라 하겠다.
직접화법과 간접화법이 혼재하는 부분에서도 김광진은 모두 직접화법으로 처리하며 행까지 바꾸는데, 이 역시 원문의 문장 구조를 충실히 살리려는 노력과는 거리가 있다. 전반적으로 김광진의 번역은 내용을 확대해석하여 독자의 흥미를 유도하고 가독성을 높이는 데 중점을 둔 방식이 특징이라 하겠다.
2003년 세종출판사에서 나온 배중환의 <칠레의 지진>은 이전 번역들과 몇 가지 뚜렷한 차이를 보여준다. 이전의 번역서들은 이 작품을 다른 작가들의 단편과 묶어 출간했지만, 클라이스트 전공자인 배중환은 클라이스트의 작품들만 모아 이 작품을 표제작으로 하는 단편 전집을 펴냈다. 또한 단편소설뿐 아니라 일화, 우화, 소품까지 수록해 작가의 문학세계를 폭넓게 조망할 수 있게 했다. “역자 후기”에서 번역의 저본으로 1984년에 나온 뮌헨본을 사용했음을 밝히고, 번역에 대한 소견을 자세히 언급한 것도 배중환이 처음이다. 그는 문학 연구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작업은 ‘작품을 꼼꼼히 읽는 일’”이며, 외국 문학 연구의 경우 “작품을 가장 꼼꼼히 읽는 작업이 곧 작품의 번역”이라고 전제하면서, “특히 간접화법을 많이 쓰는 클라이스트의 문장, 도치법, 비문법적인 문장, 불완전한 문맥, 접속사를 사용하여 길게 늘어진 복문의 문장, 그리고 고전어투 등을 우리말로 옮기는 데에 많은 어려움을 느꼈다”(배중환, 434)고 토로한다. 이 고백에서 그가 클라이스트 문체의 특징을 살리기 위해 고심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제 소설의 첫 문장에 대한 배중환의 번역을 살펴보자.
칠레 제국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1647년 큰 지진이 나서 수천의 사람들이 멸망으로 빠져든 순간에 범죄로 고소 당한 한 스페인 젊은이, 이름은 예로니모 루게라가 사람들이 그를 가둔 감옥의 기둥에 서서 막 스스로 목을 매달려고 하였다.(배중환, 29)
배중환은 원문의 긴 종속절 구조를 비교적 충실하게 따라가며 원문과 마찬가지로 한 문장으로 번역해냈다. 보고체적 객관화된 문체도 잘 살려 해석적 설명이나 과장 없이 옮겼다. 전공자로서 클라이스트 문체의 특징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던 만큼 번역에서도 이를 충실히 살린 결과로 이해된다.
헤로니모가 호세파를 찾아다니는 장면에 대한 번역 역시 “여자의 옷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는 흔들리는 다리를 끌고 갔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스테론의 딸은 발견하지 못했다.”(33)라고 간결하게 직역해, 클라이스트 특유의 건조한 문체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배중환은 간접화법을 많이 사용하는 클라이스트 문체의 특징도 짚어냈는데, 직접화법과 간접화법이 혼재하는 부분에서도 간접화법을 원문 그대로 살렸다.
어디에? 라고 불안에 찬 다른 사람이 물었다. (...) 여기에 라고 제삼자가 대답하고는 (...) “여러분들 미쳤어요?” 한 젊은이가 외쳤고, 요제페를 팔로 껴안았다. “나는 돈 페르난도 오르메츠이며, 여러분 모두가 알고 있는 이 도시 사령관의 아들입니다.” 돈 페르난도 오르메츠? 그 바로 앞에 선 구두 기술자가 외쳤는데, (...) (배중환, 43)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라고”라는 연결어 없이 번역하면 어땠을까 하는 점이다. “라고”가 두 번 사용되어 문장이 부드럽게 이어지긴 하지만, 그 결과 긴박하고 끊어치는 리듬은 상대적으로 약화된다. 마지막 “구두 기술자”의 발화에서는 물음표 뒤에 “라고”를 생략하고 문장을 곧바로 이어 현장감을 살린 점이 오히려 더 효과적으로 보인다. 또한 광분한 군중이 헤로니모와 호세파를 찾아 죽이려는 위태롭고 급박한 상황에서 페르난도가 “여러분 미쳤어요?”라고 말하는 표현과 “아들입니다” 같은 어투는 너무 부드럽게 들린다. 구기성은 이를 “당신들 미쳤소?”, “아들 동 훼르난도 오르메쓰요” 라고 번역해 보다 단호하고 긴장감 있는 어조를 유지했다.
클라이스트의 이 소설에서 결정적인 힘은 신의 섭리나 이성이 아니라 우발적 계기, 즉 우연이다. 우연은 지진처럼 기존 질서를 붕괴시키는 동시에 새로운 관계와 질서를 만들어내며, 독자가 일관된 해석의 틀을 갖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문학적 관습을 흔든다. 이 작품에는 Zufall, zufällig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러한 어휘와 그 함의가 번역에서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비평의 한 포인트가 될 것이다.
다음은 해당 어휘가 들어간 원문과 배중환의 번역이다.
1) Durch einen glücklichen Zufall(144) 다행스럽게도(29) 2) den Strick, den ihm der Zufall gelassen hatte(145) 우연히 자신의 눈에 띤 [4]끈으로(31) 3) durch eine zufällige Wölbung(146) 우연히 (...) 아치를 이루었기 때문에(31) 4) durch einen Besuch zufällig von allem, was geschehen war, benachrichtigt(159) 그때 일어난 사건 전체를 어느 손님에게서 우연히 전해들은(47)
2)~4)에서는 “우연”의 개념이 번역에 어느 정도 반영되었으나, 1)에서는 Zufall이 생략되고 glücklich만이 남아 “다행스럽게도”로 번역되면서 사건의 우발성이 희석되었다. 위의 원문을 직역한다면, 1)의 경우 “다행스러운 우연으로 인해”, 2)는 “우연이 그에게 남겨둔 끈”, 3)은 “우연히 형성된 아치 덕분에”, 4)는 “어떤 방문(손님)을 통해 일어난 모든 일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일 것이다. 배중환은 기본적으로 우연성을 의식하고 이를 번역에 반영하려 했으나, “다행스럽게도” “눈에 띈” “~했기 때문에” 같은 표현들은 클라이스트의 중립적인 우연성을 일정 부분 해설적, 가치평가적으로 바꾸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독자는 작품 속 우연의 불가해한 작용을 온전히 체감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볼 때 배중환은 클라이스트 전공자로서 원문의 문체와 화법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배중환의 클라이스트 단편 전집이 출간된 지 2년 뒤인 2005년, 또 한 명의 클라이스트 전공자에 의해 작가의 단편 8편이 모두 번역·출간되었다. 독일에서 클라이스트 단편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진일상은 <버려진 아이>를 표제작으로 삼아 책세상 출판사를 통해 번역서를 펴냈다. 이 책에는 작가 연보와 더불어 “이해받지 못한, 그러나 시대를 앞선 작가 클라이스트”라는 제목의 해설이 실려 있는데, 역자와 작가가 대화하는 인터뷰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자는 번역의 저본을 명시하고 있고, 배중환과 마찬가지로 클라이스트 문체의 특징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이를 번역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음을 토로한다. “직접화법보다는 간접화법이 많고, 여러 문장이나 부사구들이 한 문장 안에서 콤마로 연결되어 외국인들에게는 매우 읽기 힘듭니다. 그래서 저도 이를 제대로 옮기는 데 애를 먹었습니다. 한국어에 생소한 구조 때문에 인용 부호를 넣거나, 독립된 문장으로 만들어야 했던 부분도 있습니다.”(336-337) 진일상은 2024년 같은 출판사에서 “미하엘 콜하스 외”로 제목을 바꾸어 개정판을 냈는데, 사소한 수정만 발견되고 전반적으로 이전 번역이 유지되고 있다.
이제 소설의 첫 문장에 대한 진일상의 번역을 살펴보자.
1647년 칠레 왕국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일어난 대지진으로 수천 명의 사람들이 죽어가던 바로 그 순간, 죄인으로 기소당하여 옥에 갇힌 헤로니모 루게라라는 어느 스페인 청년이 감옥 안의 기둥에 목을 매려 하고 있었다.(진일상, 182)
진일상은 장문의 원문을 문장 분리 없이 하나의 문장으로 옮겼다. 원문의 단어를 누락하거나 해석적으로 덧붙이지 않고 원문을 충실히 따라가며 직역식 번역을 보여준다. 헤로니모가 감옥에서 목을 매어 죽으려던 바로 그 순간 지진이 일어나 목숨을 건지게 되는데, 이를 강조하는 “gerade in dem Augenblicke”라는 표현을 “바로 그 순간”으로 번역해 상황의 긴박감을 효과적으로 드러내 준다. 기존의 역자들은 이를 “순간에”(구기성, 배중환)나 “바로 이 무렵”(김광진)으로 옮겨 상대적으로 긴박성이 덜 부각되었다.
진일상은 클라이스트의 문장은 간접화법이 많고 구조가 복잡하여 인용부호를 추가하거나 문장을 나누는 방식으로 조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는데, 이는 그가 간접화법을 직접화법으로 바꾸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다른 목소리가 두려움에 가득 차서 “어디?”라고 묻자 제삼의 목소리가 “여기!”라고 대답하며 (...) “당신들 미쳤습니까?” 한 젊은이가 소리쳤다. 그러고는 호세페를 팔로 안으면서 “나는 돈 페르난도 오르메스, 너희들이 알고 있는 이 도시 지휘관의 아들이다.” 그의 바로 곁에 서 있던 어느 구두장이가 말했다. “돈 페르난도 오르메스라고?”(진일상, 199)
역시 간접화법을 모두 직접화법으로 바꾸어 번역했고, 또한 “다른 목소리”, “제삼의 목소리”, “구두장이”처럼 발화자의 신원을 먼저 밝힌 후 그가 한 말을 인용부호 안에 직접화법으로 옮겼다. 이는 독자가 발화 주체를 파악하기 쉽고, 문맥을 따라가는 데 무리가 없는 친절한 번역방식이다. 하지만 그 결과 위태롭고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발화들이 겹치고 쏟아지는 듯한 원문의 긴박한 리듬과 현장감은 상당 부분 희석되며, 긴장과 불안의 분위기 전달력은 다소 약화된다.
그럼 이제 Zufall, zufällig 번역을 살펴보자.
1) Durch einen glücklichen Zufall(144) 운 좋게도(182) 2) den Strick, den ihm der Zufall gelassen hatte(145) 우연히 얻은 노끈으로(184) 3) durch eine zufällige Wölbung(146) (해당 표현에 대한 번역 없음) 4) durch einen Besuch zufällig von allem, was geschehen war, benachrichtigt(159)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든 상황을 방문객으로부터 전해 들은(203)
2)의 번역에서만 “우연”이라는 단어가 나타나며, 나머지 예들에서는 이 핵심어가 아예 생략되었다. 2)의 경우 원문은 “우연이 그에게 남겨둔 끈”이라는 뜻으로, 의인화된 “우연”이 주체처럼 사건에 개입하는 독특한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번역은 이를 “우연히 얻은 노끈으로”라고 처리함으로써, 사건의 원인을 불가해한 외적 힘이 아니라 단순한 정황으로 환원시키고 있다. 클라이스트의 작품에서 핵심 개념이라 할 수 있는 “우연”이 누락되거나 약화됨으로써, 작품의 주제 의식이 충분히 전달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럼에도 진일상의 번역은 전반적으로 내용 전달이 명확하고 가독성이 뛰어나 일반 독자들이 클라이스트의 작품세계를 접하는 데 좋은 역서라고 할 수 있다.
진일상의 번역본이 출간된 지 약 7개월 뒤인 2005년 8월, <독일 대표단편선. 고전주의에서 전후문학까지>를 통해 이관우의 <칠레의 지진> 번역이 출간되었다. 이관우는 독일 문학의 대표 단편 10편을 문예사조와는 역순으로 배열했다고 밝히며, 그중 아홉 번째 작품으로 이 단편을 수록했다. 여러 작품을 함께 다룬 선집의 특성상 작가소개와 작품 개요는 간략하게 제시되며, 번역의 저본이나 번역방식에 대한 설명은 언급되지 않는다. 이 단편집은 2013년에 써네스트 출판사에서 문예사조 순서에 따라 재배열되어 다시 출간됐다.
그럼 클라이스트 문체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소설의 첫 문장에 대한 이관우의 번역을 살펴보자.
칠레 왕국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1647년의 대지진이 일어난 바로 그 순간이었다. 범죄로 고발된 예로니모 루게라라는 한 젊은 스페인 사람이 감옥의 기둥 옆에 서서 목을 매 죽으려 하고 있었다.(이관우, 309)
이관우는 원문의 긴 복합문장을 둘로 나누어 번역함으로써, 클라이스트 특유의 장문 구조와 서술 리듬보다는 가독성과 이해도를 우선시했다. “gerade in dem Augenblicke”를 진일상과 마찬가지로 “바로 그 순간”으로 옮겨 긴박한 상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으며, 문장을 “대지진이 일어난 바로 그 순간이었다.”와 “목을 매 죽으려 하고 있었다.”로 나누어 종결함으로써 독자의 관심과 긴장감을 유도한다. 이로써 헤로니모가 자살을 시도하던 절박한 순간에 지진이 발생하는 극적 전환이 분명히 부각되며, 문체의 밀도는 조금 희석되었지만 서사적 효과는 오히려 강화된 느낌이다. 원문의 마지막 표현인 “wollte sich erhenken”을 진일상은 “목을 매려 하고 있었다”로 직역한 데 비해, 이관우는 “목을 매 죽으려 하고 있었다”로 약간의 해석을 가미했으나 전체적으로는 해설이나 과장 없이 충실히 옮기고 있다.
이제 직접화법과 간접화법이 혼재하는 장면이 이관우의 번역에서는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또 하나의 목소리가 물었다. / “어디?” / “여기!” / 또 다른 남자가 대답하고는 (...) / 돈 페르난도가 외쳤다. / “당신들 미쳤소?” / 돈 페르난도는 요제페를 팔로 감싸 안고 계속하여 말했다. / “나는 여러분 모두가 알고 있는 이 도시 사령관의 아들 돈 페르난도 오르메츠요!” / 그러자 그의 앞에 가까이 서 있던 구두수선공이 외쳤다. / “돈 페르난도 오르메츠라고?”(이관우, 325)
이관우는 원문의 간접화법을 모두 직접화법으로 전환하고, 인용부호가 시작되고 끝날 때마다 줄바꿈을 하여 발화를 일일이 구분하였다. 이로써 혼란한 군중 속에서 말들이 튀어나오듯 쏟아지는 현장의 역동성과 드라마적 긴장이 부각된다. 또한 진일상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목소리”, “돈 페르난도”, “구두수선공”처럼 발화자를 먼저 제시한 후 발화를 따로 처리하여 독자의 이해를 돕고 가독성을 높였다. 그러나 이러한 가독성 위주의 번역방식은 클라이스트 특유의 문장 구조 ―직간접화법의 혼재, 발화자 불명의 긴장, 콤마로 길게 이어진 복합문― 가 지닌 문체적 복합성과 혼란의 리듬을 단순화함으로써 원문의 미학적 긴장감은 일정 부분 희석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Zufall, zufällig 번역을 살펴보자.
1) Durch einen glücklichen Zufall(144) 다행스럽게 우연히도(309) 2) den Strick, den ihm der Zufall gelassen hatte(145) 우연히 자신에게 남겨진 밧줄로(311) 3) durch eine zufällige Wölbung(146) 우연히 둥근 아치를 이룸으로써(311) 4) durch einen Besuch zufällig von allem, was geschehen war, benachrichtigt(159) 한 방문객을 통해 벌어진 모든 일에 대해 우연히 전해 듣게 된(330)
이관우는 클라이스트의 핵심 개념인 “우연”을 번역 과정에서 빠뜨리지 않고 충실히 반영했다. 또 전반적으로 해설 없이 직역을 지향했다. 2)에서는 “Zufall”을 주어 대신 부사 “우연히”로 옮겨 의인화된 우연의 작용은 다소 약화되긴 했다. 그럼에도 다른 역자들이 이 개념을 생략하거나 희석시킨 데 비해 그는 이 작품에서 “우연”이 지닌 이해 불가능하고 예측 불가능한 작용을 충실히 전달하고 있다.
이관우의 번역은 직역을 중심으로 하되 독자의 이해와 가독성을 우선시한 번역으로, 작품의 핵심 개념인 ‘우연’을 잘 살렸다는 점에서 다른 번역본들과 구별된다.
황종민 역의 <칠레의 지진>은 2013년 창비세계문학 14권에 수록되어 나왔다. 황종민은 미하엘 콜하스 (Michael Kohlhaas)를 표제작으로 삼아 클라이스트의 단편 여덟 편을 모두 번역해 엮었다. 책 뒷부분에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생애와 소설”이라는 제목의 제법 긴 해설이 있는데, 특히 ‘칸트 위기’와 같은 작가의 사유 배경을 다루며 독자가 클라이스트의 작품세계에 더욱 깊이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다. 번역의 저본으로는 브란덴부르크 판본에 기반한 한저 출판사의 전집 II권을 사용했다고 밝히고, 이 소설이 1807년 초판 당시에는 <헤로니모와 호세파. 1647년 칠레 지진의 한 장면>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가, 1810년 <소설집> 제1권에 수록되면서 제목과 조판이 바뀌었음을 지적한다. 그는 “초판에서는 서른한개였던 문단이 최종판에서는 세 문단으로 압축”되었고, 이 세 문단 구분은 “장소가 도시-골짜기-도시로 달라지고 시간이 낮-밤-낮으로 이어지며 지진-낙원-학살이 생겨나는 내용과도 부합한다”(388)고 설명한다. 황종민의 번역은 이 저본에 따라 소설 전체가 세 개의 문단으로 구성된 점이 다른 번역들과 차별된다.
풍부한 한국어 어휘력을 바탕으로 유려한 문장을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한 번역가 황종민의 <칠레의 지진>은 일상에서 접하기 힘든 “생목숨”, “해포”, “솔수펑이”, “숨탄것”, “느꺼웠다”와 같은 고유어 표현을 활용하여 문학작품을 읽는 재미를 더한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또한 배중환이나 진일상의 번역이 직역 중심이라면, 황종민의 번역은 역자의 해석이 개입된 유연한 의역 중심이라는 점이 또 다른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은 첫 문장에서부터 잘 드러난다.
칠레 왕국의 수도 싼띠아고에서 1647년 대지진이 일어나 수천 명의 생목숨을 앗아갔다. 천지가 진동하던 바로 그 순간, 한 에스빠냐 젊은이가 감옥 기둥에 밧줄을 감고 목을 매려 하고 있었다. 어떤 범죄로 기소되어 갇혀 있던 헤로니모 루게라라고 하는 젊은이였다.(183)
황종민은 원문의 복합문장을 세 문장으로 나누어 하나씩 설명해 나가는 방식으로 가독성을 높인다. “ihren Untergang fanden”을 “생목숨을 앗아갔다”로 번역했고, “천지가 진동하던”, “밧줄을 감고” 같은 표현을 추가하여 장면을 보다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이는 역자가 일정 부분 개입하면서 의역한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원문에 이탤릭체로 강조되어 있는 Jeronimo Rugera를 고딕체로 강조한 것은 황종민의 번역이 유일하다.
한편 황종민은 예의 직간접화법이 혼재하는 장면에서 간접화법을 살려서 번역했다.
다른 누군가 겁에 질려 어디에?라고 묻고, (...) 또다른 누군가 여기에!라고 대답하더니 (...) “여러분 미쳤소?” 돈 페르난도가 이렇게 외치며, 호세파를 팔로 안았다. “나는 돈 페르난도 오르메스요, 여러분 모두 잘 아는 도시 사령관의 아들이오.” 돈 페르난도 오르메스라고? 한 갖바치가 코앞에 바짝 다가서더니 소리쳤다.(198-199)
그런데 다음과 같은 장면에서는 간접화법을 직접화법으로 전환하는 다소 실험적인 번역방식을 시도한다.
Er sagte ihr, daß er, bei dieser Stimmung der Gemüter und dem Umsturz aller Verhältnisse, seinen Entschluß, sich nach Europa einzuschiffen, aufgebe; daß er vor dem Vizekönig, der sich seiner Sache immer günstig gezeigt, falls er noch am Leben sei, einen Fußfall wagen würde; und daß er Hoffnung habe (wobei er ihr einen Kuß aufdrückte), mit ihr in Chili zurückzubleiben.(153)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의 기분이 이토록 뒤바뀌고 세상이 완전히 뒤집어졌어. 유럽으로 배를 타고 가려는 생각을 버릴까 해. 총독은 내 일이라면 늘 선처해줬잖아. 총독이 살아 있다면 무릎을 꿇고 애원해보겠어. 나는 너와 함께 칠레에 남고 싶어. 그러면서 호세파에게 입을 맞췄다.(194)
역자는 원문의 “daß”로 연결된 종속 문장들을 직접 발화처럼 풀어내는데, 이는 드라마적 현장감을 부여하고 가독성 좋은 서사 전개를 추구하는 번역자의 독특한 전략이라 할 수 있다.
황종민의 가독성 중심의 해석식 번역방식은 “우연”의 번역에서도 드러난다.
1) Durch einen glücklichen Zufall(144) 요행히(184) 2) den Strick, den ihm der Zufall gelassen hatte(145) 우연히 손에 들어온 밧줄로(185) 3) durch eine zufällige Wölbung(146) 일종의 아치를 이룸으로써(185) 4) durch einen Besuch zufällig von allem, was geschehen war, benachrichtigt(159) 우연히 한 손님에게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속속들이 듣게 되자(202)
1)에서는 “뜻밖으로 운수가 좋게”라는 뜻의 고유어 “요행히”를 사용해 “운 좋게”라는 뉘앙스를 살렸지만 “우연”이라는 핵심어는 드러나지 않는다. 2)와 4)에서는 “우연히”라는 부사형 표현을 통해 사건의 우발성을 전달하였지만, 3)에서는 “우연”이라는 단어가 완전히 생략되고 “일종의 아치를 이룸으로써”라는 설명식, 해석식 표현으로 대체되었다.
전반적으로 황종민의 번역은 독자 친화적이고 자연스러운 한국어 표현을 우선시하는 해석식 번역 경향을 보인다. 그 결과 원문의 낯선 구조나 표현보다는 익숙한 우리말 문체로 문학적 몰입감을 높이며, 마치 순우리말 문학작품을 읽는 듯한 유려함과 재미를 제공한다. 다만 그만큼 원문의 문체적 특성 및 불가해한 세계관은 상대적으로 희석되기도 한다.
3. 평가와 전망
클라이스트의 <칠레의 지진>은 1960년 구기성의 초역 이래 지난 65년 동안 꾸준히 번역되어왔다. 클라이스트의 독특한 사유 방식과 문체가 주는 매력에 많은 번역자들이 반응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주요 번역본들을 살펴본 결과 클라이스트 특유의 긴 복합문장 구조와 직간접화법의 혼용은 한국어로 충실히 옮기기에 상당한 난이도를 수반하며, 번역자에게는 문체적 리듬과 상황의 복잡성을 고려한 섬세한 언어 선택이 요구된다. 특히 이 작품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주요 개념인 “우연”을 번역 과정에서 어떻게 반영하느냐는, 작가의 문학적 의도를 전달하는 데 있어 중요한 과제로 떠오른다. 이 글이 향후 클라이스트 작품 번역에 작게나마 보탬이 되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구기성(1960): 지리의 지진. 을유문화사.
김광진(1976): 칠레 대지진. 범조사.
배중환(2003): 칠레의 지진. 세종출판사.
진일상(2005): 칠레의 지진. 책세상.
이관우(2005): 칠레의 지진. 우물이 있는 집.
황종민(2013): 칠레의 지진. 창비.
- 각주
- ↑ 이 남녀 주인공은 모두 스페인계 인물로, 한 명은 스페인 출신이고 다른 한 명은 식민지 칠레 태생으로 설정되어 있다. 클라이스트는 독일어 텍스트에서 이들의 이름을 스페인어 원형(Jerónimo Rugera, Doña Josefa) 대신 독일어식 표기(Jeronimo Rugera, Donna Josephe)로 적었다. 이를 한국어로 옮길 때 스페인어 원음을 기준으로 하면 ‘헤로니모 루헤라’, ‘도냐 호세파’가 되고, 독일어 발음을 따르면 ‘예로니모 루게라’, ‘도나 요제페’가 된다. 실제 번역자들 사이에서도 두 기준이 병용되어 왔다. 여기서는 인물들의 국적과 언어적 맥락을 고려하여, 스페인어 원음에 충실한 표기인 ‘헤로니모 루헤라’와 ‘도냐 호세파’를 사용하기로 한다.
- ↑ 이 책에 수록된 아홉 명의 작가는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아델베르트 샤미소, 프란츠 그릴파르처, 아달베르트 슈티프터, 테오도르 슈토름, 고트프리트 켈러, 파울 하이제, 아르투어 슈니츨러, 파울 에른스트이다.
- ↑ Heinrich von Kleist(1987): Das Erdbeben in Chili. In: Helmut Sembdner(Hg.): Heinrich von Kleist. Sämtliche Werke und Briefe. Bd. 2. München: Deutscher Taschenbuch Verlag, 144-159. 이하에서는 위에서처럼 본문에 쪽수를 표기한다.
- ↑ 맞춤법상 “눈에 띈”이 맞는데, 원문에 있는 그대로 표기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