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기타 (Brigit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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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달베르트 슈티프터 (Adalbert Stifter, 1805-1868)의 소설

브리기타 (Brigitta)
작가아달베르트 슈티프터 (Adalbert Stifter)
초판 발행1843
장르소설


작품소개

아달베르트 슈티프터의 소설로 일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서술된다. 화자는 이태리 여행에서 알게 된 헝가리 친구를 방문하는데, 친구는 헝가리 푸스타 땅의 지주이자 진보적 성향의 육군 소령 슈테판 무라이다. 화자는 그 지역을 둘러보다가 남장한 여인 브리기타를 만난다. 무라이와 브리기타의 숨겨진 과거사가 점차 드러나는데, 무라이는 황무지를 풍성한 농경지로 변화시킨 브리기타의 생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화자는 이 신실하고 추진력이 강하며 현실에 기반을 둔 여인과 무라이의 우정을 관찰한다. 이제 브리기타의 과거가 줄거리 속으로 끼어든다. 브리기타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추한 외모 때문에 부모에게조차 사랑받지 못하며 외롭게 자라났다. 그런데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서 아름다운 청년 무라이는 브리기타가 외모는 흉하지만 아름다운 영혼을 지녔음을 간파하고 사랑하여 결국 두 사람은 결혼에 이른다. 두 사람 사이에서 아들 구스타프가 태어난다. 그러나 무라이가 이웃 지주의 아름다운 딸 가브리엘과 사랑에 빠지면서 파국을 맞는다. 무라이는 농장을 떠나고 아들을 포기한다. 15년 후 무라이가 유럽 여행에서 귀향하여 이웃 농장에 정착한다. 그는 브리기타를 잊지 못하고 자기 잘못을 깊이 후회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육군소령”으로 부르게 하고 몰래 지내던 중, 브리기타가 중병에 걸렸을 때 다시 그녀와 접촉을 시도한다. 그는 브리기타가 치유될 때까지 그 옆에서 자리를 지킨다. 이후 두 사람은 깊은 우정으로 맺어지긴 하지만, 브리기타는 그의 잘못을 용서할 수 없으며 아들에게도 아버지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는다. 화자가 그곳에 머무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 화해와 사랑이 완성된다. 무라이가 아들 구스타프를 늑대의 무리에서 구해낸 것이다. 비로소 구스타프는 무라이가 자신의 본 아버지임을 알게 된다. 국내에서는 1971년 이유영이 초역하였다(일지사).


초판 정보

Stifter, Adalbert(1843): Brigitta. In: Gedenke Mein! Taschenbuch für 1844. 13. Wien/Leipzig: Pfautsch & Compagnie, 1-56.

<단행본 초판>

Stifter, Adalbert(1843): Brigitta. In: Studien 4. Pesth/Leipzig: Heckenast & Wigand, 291-401.


번역서지 목록

번호 개별작품제목 번역서명 총서명 원저자명 번역자명 발행연도 출판사 작품수록 페이지 저본 번역유형 작품 번역유형 비고
브리기타 獨逸短篇文學大系 1, 近代篇 獨逸短篇文學大系 1 아달베르트 슈티프터 李裕榮 1971 一志社 494-531 편역 완역
브리기타 숲속의 오솔길 瑞文文庫 184 A. 시티프터 朴鍾緖 1975 瑞文堂 11-217 편역 완역
3 브리기타 獨逸短遍選 2 三中堂文庫 360 아달베르트 슈티프터 李裕榮 1977 三中堂 69-130 편역 완역
브리기타 콘도르·브리기타 고려대학교청소년문학시리즈 25 아달베르트 슈티프터 권영경 2011 고려대학교출판부 51-170 편역 완역

번역비평

김연신

1. 번역 현황 및 개관

아달베르트 슈티프터는 19세기 오스트리아의 괴테로 불린다. 그는 중편 및 장편의 소설뿐 아니라 수많은 단편 작품들에서도 대가로서의 실력을 발휘했다. 그의 대표적인 노벨레에 속하는 <브리기타>는 1844년 <Gedenke Mein! Taschenbuch für 1844>에 처음 발표되었으며, 작가가 다시 손질을 가하여 1847년 작품집 <Studien> 제4권에 수록, 발간하였다. <브리기타>는 일인칭 관찰자 화자인 “나”의 시각을 통해 주인공 브리기타와 무라이의 인생사를 공감과 성찰의 대상으로 서술함으로써 인간 삶에 대한 보편적 인식을 시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야기의 화자인 “나”가 오래전에 겪었던 특이한 경험을 회상하며 소설은 시작된다. 화자는 이탈리아 여행 중 알게 된 헝가리 출신 소령의 오랜 초대를 받아들여 그의 고향을 방문한다. 그곳에 체류하는 동안 그는 소령과 그의 이웃인 여지주 브리기타의 숨겨진 과거사를 점차 알아가게 된다. 중년에 이른 이 두 남녀의 가슴 아픈 과거가 단계적으로 밝혀지는 가운데 서사는 과거의 결혼과 이혼을 거쳐 현재의 재결합이라는 원형적 구조를 형성한다. 이 단편은 헝가리 푸스타Pussta(헝가리어 puszta) 지역을 배경으로 결혼과 부부의 문제를 주제로 삼으면서 야생적인 황무지의 개간과 인간적 성숙의 과정을 병행시켜 서술한 성장 서사다.

한국에서 <브리기타>의 수용과 번역은 빈약한 양상을 보여준다.[1] 독일에서 <브리기타>는 오늘날 영화로까지 제작되어 여전히 독일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1982년 Wolfgang Glück가 TV용 영화로 <Brigitta>를 제작했고, 1994년에 Dagmar Knöpfel 감독의 극장용 영화 <Brigitta>가 출시되었다. 이충섭 서지에 따르면 1968년 이병애가 한국어로 초역한 단행본이 장문사에서 출간되었다고는 하지만 현재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이 글은 추적가능한 최초의 번역본인 이유영의 번역으로 시작한다. 이유영의 번역은 1971년 일지사에서 나온 <獨逸短篇文學大系 1, 近代篇>(494-531쪽)에 실렸다. 이 선집에는 슈티프터의 또 다른 단편인 <숲속의 오솔길>이 박종서의 번역으로 함께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1975년 박종서가 직접 번역한 <브리기타>와 <숲속의 오솔길>이 단행본으로(서문문고 총서 184번) 서문당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이어 1977년에는 다시 이유영이 번역한 <브리기타>가 “삼중당문고” 총서 360번에 해당하는 <獨逸短遍選 II>에 수록되어 출간되었다. 이 문고판은 18세기부터 20세기 독일 단편 총 13편을 이유영이 홀로 번역하여 수록한 단행본이다. 이렇게 1970년대에만 3차례 동일한 역자들이 번갈아 가며 <브리기타>를 번역, 소개하였으나 이후 이 작품은 주목받지 못하고 오랫동안 파묻혀 있었다. 이 작품은 2011년 권영경의 번역으로 고려대학교 출판부에서 단행본이 나오면서 다시 빛을 보게 된다. <콘도르·브리기타>라는 제목의 이 최신 번역본은 고려대학교 청소년문학 시리즈의 일환으로 출간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브리기타>는 현재까지 총 4차례에 걸쳐 한국어로 번역 및 출간된 것으로 집계된다. 이 중 이유영의 1971년도 일지사 번역본과 1977년도 삼중당 문고 번역본은 매우 미미한 수정사항을 빼면 내용이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되어 개정판으로 보기엔 무리가 따른다. 따라서 다음의 개별 번역본 비평에서는 1971년도 이유영의 번역본, 1975년 박종서의 번역본, 2011년 권영경의 번역본을 비평의 대상으로 삼아 그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2. 개별 번역 비평

<브리기타>에서 주인공들의 삶을 구성하는 결혼과 이혼 그리고 재결합이라는 반전은 노벨레의 특징인 “전례 없는 사건”에 해당한다.[2] 그런데 이 진귀한 사건을 구성하는 주인공들의 행동 모티브와 심리적 과정은 긴 설명 없이 대부분 암시적으로만 서술된다. 이 점에서 침묵과 은폐로 연출된 “전례 없는 서술기법”과 텍스트의 영향 미학 또한 이 작품의 특징으로서 높이 평가받기도 한다.[3] 즉, 시점의 변화, 상대의 논지를 미리 선취(Prolepsen)하거나, 과거의 사건을 떠올려 얘기하는 회상기법(Analepse), 감정이입과 공감의 계기들, 라이트모티프, 화자의 자기성찰적인 메타내레이션 같은 기법들이 서사 전개에 필요한 정보의 돌출 혹은 결핍을 보완하면서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반면 사물과 자연, 환경 등은 매우 상세하게 서술되어 이와 강한 대비를 이룬다. 비더마이어적 사실주의 작가이자 자연묘사의 대가로 알려진 슈티프터는 헝가리 동부에 있는 온대 초원지대 푸스타의 광활하고 빛과 생기에 넘치는 풍광을 정확한 관찰력과 감각적인 언어로 마치 한 편의 그림을 그리듯이 묘사해낸다. 객관적 세계에 대한 장황한 표현들은 극히 절제된 인간의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내면의 풍경묘사와 대조를 이루지만, 동시에 인간 삶과 그 환경을 하나의 전체로써 고찰하는 작품의 시각에서 보면 바깥세상 자체가 인간 내면의 상태를 적극 표현하는 언어가 된다. 이 글에선 이 같은 작품의 서술적, 미학적 특성들이 개별 번역본들에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몇 가지 예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이유영 역의 <브리기타>(1971)

1971년에 발표된 이유영의 <브리기타>는 괴테부터 슈티프터에 이르기까지 독일문학의 주요 단편소설들 - Novelle, Erzählung, kurze Geschichte, Prosa - 을 수록한, 총 540쪽의 선집 마지막 장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의 서문에는 독일단편문학의 발달사, 후기에는 독일문학사조에 관한 간단한 소개가 따른다. 이유영은 총 4장으로 구성된 원문에 충실하게 각 장을 “1. 초원의 편력, 2. 초원의 집, 3. 초원의 과거, 4. 초원의 현재”로 옮겼다. 본문 번역에 있어서도 이유영은 단편인 원문의 길이와 양적 범위를 넘어서지 않고 그 정도를 지키고자 한 점이 두드러진다. 또한 비교적 정확한 번역을 추구하고는 있으나, 초창기 번역들에서 으레 관찰되듯이, 차후 번역들보다는 오역이 훨씬 더 자주 눈에 띄는 편이다. 가령 남부 이탈리아에서 알게 된 소령의 초대로 그의 고향인 헝가리 동부로 여행하는 장면묘사에서 그 장소를 (부주의하게) 이탈리아로 옮긴 경우가 이에 속한다: “처음 그를 만난 곳은 지금 내가 여행하고 있는 정말 장엄한 남부 이탈리아의 황야였다”(이유영).

무엇보다도 이유영의 번역은 문자 중심 번역에 충실하다. 이는 원문에 대한 충실성을 지키려는 의도에는 부합하지만, 그로 인해 행간의 연계적 의미나 문장들이 연동하며 암시하는 유기적 의미관계는 충분히 드러나지 못하는 경우가 잦다. 다음에 인용한 예문에서 문자 중심 번역의 문제가 잘 드러난다.

Wir ritten von der großen sanften Dogge begleitet in den Besitzungen des Majors herum. Er zeigte mir alles und gab gelegentlich Befehle und Lobsprüche. Der Park, durch den wir zuerst ritten, war eine freundliche Wildniß, sehr gut gehegt, rein gehalten, und von Wegen durchschnitten.(이마 모든 밑줄은 필자에 의한 강조임)
우리는 크고 조용한 불독을 데리고 소령의 소유지를 말을 타고 돌았다. 그는 내게 모든 것을 보여주었고 때때로 어떤 지시를 내리기도 하고 칭찬도 하곤 하였다. 우리가 처음에 통과한 정원은 꼼꼼하게 담장이 둘러쳐진 기분 좋은 황무지였고 깨끗이 손질이 되어 이미 길이 나 있었다.(이유영)
우리는 몸집이 크고 점잖은 불독을 데리고 소령의 토지를 둘러봤다. 그는 나에게 여러 가지를 구경시켜 주면서, 이따금 개에게 어떤 명령을 내리기도 하고 그에 따라 칭찬을 해 주기도 했다. 우리가 제일 먼저 말을 타고 지나온 정원은 담이 튼튼하게 둘려쳐진 야생지였으나, 깨끗하고 도로도 뚫려 있었다.(박종서)
우리는 몸집이 크고 점잖은 불도그를 데리고 소령의 농장을 죽 둘러보았다. 그는 하나하나 빠짐없이 모두 내게 구경시켜주면서, 간혹 개들에게 뭔가 지시를 하기도 하고 칭찬을 해 주기도 했다. 제일 먼저 말을 타고 지나간 정원은 울타리로 둘러싸인 친근한 분위기의 야생지로, 길들이 잘 뚫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권영경)

(I)


세 문장으로 구성된 위의 인용 문단은 소령과 “내”가 소령의 광활한 소유지를 둘러보러 말을 타고 돌아다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유영의 첫 두 문장을 살펴보면, 비교를 위해 제시한 다른 두 역자의 번역과 전혀 다르다. 문장 그대로 보면 “Er zeigte mir alles und gab gelegentlich Befehle und Lobsprüche”에서 동사 “zeigte”의 3격 목적어로 오로지 “mir”만 제시되어 있기에, 이유영이 옮겼듯이 이 문장을 “그는 내게 모든 것을 보여주었고 때때로 어떤 지시를 내리기도 하고 칭찬도 하곤 하였다”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문장을 오늘날 보편화된 기계번역기에 넣어도 이 이상의 해법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니까 이유영의 번역은 문법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자신의 영지를 소개하는 주인이 손님에게 명령과 칭찬을 한다는 내용은 문맥상으로 또한 일반상식으로도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그래서 문법적 해독보다는 좀 더 숨겨진 행간 문맥에 주의하며 문장을 들여다볼 필요가 생긴다. 이때 앞 문장에서 “크고 온순한 불독”을 데려갔다는 화자의 진술은 단순한 상황 설정에 불과할까? 아니면 이어지는 문장과 연계하여 의미를 만들어내는가? 단편이라는 작품의 장르적 특성과 가능하면 간결한 상황 서술을 선호하는 작가의 문체에 비추어 볼 때, 작가가 첫 문장에서 굳이 불독을 언급한 것과 뒷 문장의 서술내용 사이엔 분명 논리적 연관성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즉 첫 문장과 둘째 문장을 함께 연계하여 읽으면서 독자는 사태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발설되지 않은 명령과 칭찬의 대상을 자연스럽게 불독과 연결시키게 된다. 명령과 칭찬은 주인과 개의 관계에 적합하지, 주인과 손님의 관계에는 속하지 않으므로, 두 문장을 하나의 연결된 과정으로 이해할 때 독자는 문법상 불완전하게 전달된 정보를 머릿속 이해 과정에서 스스로 보완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유영은 두 문장을 상호 연관시켜 의미론적으로 파악하는 대신, 오로지 문자상으로만 옮김으로써 두 문장이 실제로 서술하는 상황을 잘못 전달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박종서와 권영경은 이 내용을 각각 “그는 나에게 여러 가지를 구경시켜 주면서, 이따금 개에게 어떤 명령을 내리기도 하고 그에 따라 칭찬을 해 주기도 했다”와 “그는 하나하나 빠짐없이 모두 내게 구경시켜 주면서, 간혹 개들에게 뭔가 지시를 하기도 하고 칭찬을 해 주기도 했다”로 옮겨 의미상 논리적이며 문맥에 적합한 상황을 제시하고 있다. 다만 권영경의 번역에서 불독이 한 마리가 아니라 복수인 “개들에게”로 옮겨진 점은 또 다른 오류에 속한다.

나아가 세 번째 문장에서도 유사한 번역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 이 문장은 등장인물들이 말을 타고 둘러보는 공원의 특성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이를 이유영은 “우리가 처음에 통과한 정원은 꼼꼼하게 담장이 둘러쳐진 기분 좋은 황무지였고 깨끗이 손질이 되어 이미 길이 나 있었다”로 옮겼다. 원문이 제시한 공간은 광대한 푸스타 지역을 인간 삶의 영역으로 변화시킨 개간지이다. 그건 “야생지”의 특성을 띠고는 있으나, 잘 정돈되고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는 공간으로서 문명의 산물이다. 이 공간에 동격으로 사용된 두 어휘는 der Park와 eine freundliche Wildnis이다. 이를 이유영은 한편으론 “정원”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개간되지 않은 야생의 땅을 뜻하는 “황무지”로 옮겼는데, 이 두 어휘가 수평적으로 동치되면서 이미지의 어폐를 야기한다. 원문은 이 정원에 여전히 깃들어 있는 야생의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eine freundliche Wildnis”라고 하여 그 야생미를 강조한 데 반하여, 황무지란 낯설고 거친 야생의 상태 그대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sehr gut gehegt”라는 원문의 어구는 이 정원이 잘 관리되고 손질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반면, 이유영은 ‘애지중지 돌보다, 정성껏 가꾸다, 보호하다’라는 정서적 의미의 동사 hegen을 ‘(울타리 등으로) 둘러막다, 구획을 짓다’를 뜻하는 abhegen으로 재해석하여 “담장이 둘러쳐진”으로 옮겼다. hegen을 abhegen의 의미로 해석할 근거는 원문에서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사람이 말을 타고 둘러보는 이 공간은 열려있는 광활함을 암시한다. 결국 이유영의 번역은 원문이 제시한 공간 이미지를 서로 타협되지 않는 상충된 요소들로 –잘 관리되고 담이 쳐진 정원과 야생의 황무지- 뒤얽혀 제시함으로써 올바른 이미지 전달에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오역과 그 빗나간 이미지를 박종서와 권영경은 그대로 답습하여 각각 “정원은 담이 튼튼하게 둘려쳐진 야생지”와 “정원은 울타리로 둘러싸인 친근한 분위기의 야생지”로 옮겼다. 이 사실 역시 앞서 언급한 문자번역의 문제를 여실히 드러내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번역이란 단어들의 물리적 연결에 그치지 않고 그 유기적인 의미형성에 참여하는 행위이며, 단순히 문자번역에 그칠 수 없는 문화적 지식과 문학적 상상력을 요구한다.

이유영 번역의 또 다른 특징이자 문제점은 문장의 풍미를 자아내고 의미상의 뉘앙스를 풍부하게 하는 첨어들을 종종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음의 예에서 보듯 시간 부사에 해당하는 oft와 manchmal은 전형적인 상태를 상대화함으로써 노벨레의 진귀한 사례를 논하는 데 있어 적지 않은 역할을 담당한다.

Es gibt oft Dinge und Beziehungen in dem menschlichen Leben, die uns nicht sogleich klar sind, und deren Grund wir nicht in Schnelligkeit zu ziehen vermögen. Sie wirken dann meistens mit einem gewissen schönen und sanften Reize des Geheimnißvollen auf unsere Seele. In dem Angesichte eines Häßlichen ist für uns oft eine innere Schönheit, die wir nicht auf der Stelle von seinem Werthe herzuleiten vermögen, während uns oft die Züge eines andern kalt und leer sind, von denen alle sagen, daß sie die größte Schönheit besitzen. Eben so fühlen wir uns manchmal zu einem hingezogen, den wir eigentlich gar nicht kennen, es gefallen uns seine Bewegungen, es gefällt uns seine Art, wir trauern, wenn er uns verlassen hat, und haben eine gewisse Sehnsucht, ja eine Liebe zu ihm, wenn wir oft noch in späteren Jahren seiner gedenken: während wir mit einem Andern, dessen Werth in vielen Thaten vor uns liegt, nicht ins Reine kommen können, wenn wir auch Jahre lang mit ihm umgegangen sind. Daß zuletzt sittliche Gründe vorhanden sind, die das Herz heraus fühlt, ist kein Zweifel, allein wir können sie nicht immer mit der Wage des Bewußtseins und der Rechnung hervor heben, und anschauen.
인간 생활에는 흔히 분명하지 않고 쉽게 원인을 밝혀 낼 수 없는 사건들이나 인연 따위가 있다. 그것들은 대개 신비한 것들이 지니고 있는 아름답고 부드러운 매력을 가지고, 우리의 영혼에 영향을 끼친다. 추한 사람의 얼굴에도 곧 끄집어 낼 수 없는 내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그러나 한편 모든 사람들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한 사람의 모습이 냉담하고 공허하게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이에게도 생각이 미쳐서는, 그의 행동이 마음에 들고, 그의 성격에 호감이 가고, 그가 떠날 때 슬퍼한다. 그러고 여러 해 후에 우리는 어떤 그리움과 심지어는 사랑까지도 느끼며 그를 기억하게 되는 일이 자주 있다. 반면, 어떤 사람의 가치가 눈에 띄어 비록 수년동안 교제를 해 왔다 하더라도 마음 속 깊이 정이 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결국은 마음만이 감지할 수 있는 도덕적인 근본 원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일이다. 단지 그것들은 의식의 저울에 올려 놓고 계산하거나 논리적으로 규명하지 못하는 것이다.(이유영)
인간 생활에는 우리가 분명히 밝혀 낼 수 없고 또 쉽사리 그 원인을 찾아 낼 수 없는 일이나 인연들이 가끔 있다. 이러한 것들은 대체로 신비를 가득 담고 아름다우며 부드러운 매력으로 우리의 영혼에 스며든다. 말하자면 우리는 추한 사람의 얼굴에서도 쉽사리 끄집어 낼 수 없는 어떤 아름다움을 가끔 발견해 내는 수가 있다. 그런가 하면 여러 사람들로부터 매우 아름답다는 얘기를 듣는 어떤 사람의 용모가, 우리에게 차갑고 공허한 인상을 남기는 수도 흔히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가끔 우리 자신이 실은 구체적으로 알지도 못하는 어떤 사람에게 마음을 쏟는 수가 있다. 그럴 때면 그 사람의 모든 행동뿐만 아니라, 그의 성격도 우리의 마음에 들게 되고 그가 우리에게서 떠나갈 즈음엔 몹시 슬픈 기분마저 들게 된다. 그러다가 먼 훗날 가끔 그 사람 생각을 할 때마다 우리는 그를 그리워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그에 대해서 사랑의 감정까지 품게 된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수년 동안 서로 교제해 오면서 매사에 있어 우리에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인데도 그에 대해 서먹서먹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여기에는 결국 마음으로 느낄 수 밖에 없는 도덕적인 근본 원리가 존재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것들을 의식의 저울이나 계산대 위에 올려 놓고 논리적으로 규명해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박종서)
살다보면 우리가 분명히 밝혀낼 수 없고 그렇다고 쉽사리 그 원인을 찾아낼 수도 없는 일이나 인연들이 종종 생긴다. 이런 것들은 대부분 신비로움에 가득 차 아름답고 부드러운 매력으로 우리의 영혼에 스며든다. 다시 말해 추한 사람의 얼굴에서도, 금방 그 가치를 끌어낼 수는 없지만, 가끔 내면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반면 대중들로부터 매우 아름답다는 찬사를 듣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냉정함과 공허함을 느끼게 되는 경우도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종종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끌리는 경우가 있어, 그의 태도나 행동에 호감을 느낀다. 그가 우리를 떠나면 슬퍼하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그를 생각하면 어떤 그리움이나 사랑의 감정을 갖게 된다. 그런가 하면 여러 해 동안 서로 왕래를 하면서 모든 면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이지만, 왠지 서먹서먹한 경우도 있다. 따라서 이런 잣대를 기준으로 하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도덕적인 근본원리가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권영경)

(II)


작품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위 문단은 이성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인간 영혼의 신비로운 작용, 영혼의 비밀스러운 친화력과 그 예들을 제시하고 있다. 원문에는 이런 현상의 존재를 강조하려고 oft, manchmal과 같이 의미를 상대화하거나 강조하는 첨어가 문장마다 들어 있다. 이 부사들은 그런데 문장에서 적절한 위치에 놓여야 그 의미가 온전히 살아나며, 그건 번역문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이유영의 경우, 원문의 oft 및 manchmal이 갖는 강조의 기능과 의미의 상대화에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역자는 첫 문장 전체를 수식하는 oft를 “흔히 분명하지 않고”로 옮겨 마치 “분명하지 않고”를 꾸미는 부사로 오해할 여지를 남기거나, “따위가 있다” 혹은 “...할 수도 있다”로서 단순히 가능한 일로만 표현하거나, 아예 번역문에서 빼버려 이 첨어들이 자아내는 상대화의 뉘앙스를 살리지 못했다. 이를 다른 번역본과 비교해 보면, 가령 박종서는 진술의 뉘앙스나 의미를 부각시키는 첨사들에 매우 주목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가끔” 및 “...하는 수가 있다”라는 표현으로 이 ‘경우의 수’들을 적절하게 살려내고자 한 점이 눈에 띈다. 권영경 역시 이 뉘앙스를 모두 적극적으로 살려 표현하였다.

앞서 살펴본 이유영 번역의 특징이자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이 초역은 고지식할 정도로 문장 길이와 문자에 충실한 번역 자세를 견지하여 ‘단편 문학’으로서 노벨레의 특징을 살리고자 했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겠다. 나아가 한국어 초역본으로서 1970년대 한국 사회에 슈티프터의 문학을 소개하고, 차후 번역에 토대를 놓았다는 점도 높이 평가되어야 할 부분이다.


2) 박종서 역의 <브리기타>(1975)

1971년 이유영과 함께 슈티프터의 작품을 각각 한 편씩 번역, 출간했던 박종서는 1975년 <브리기타>를 직접 번역하여 서문당 출판사의 “서문문고” 총서 184번 <숲속의 오솔길>에 동명의 작품과 함께 출간하였다. “아달베르트 슈티프터”로 작가명이 소개된 이유영 번역본에서와 달리 박종서는 작가명을 “A. 시티프터”로 옮겼고, 본문에 앞서 작품과 작가에 관해 짧은 해설을 곁들였다. 본문 번역에서 박종서는 이 노벨레의 각 장을 번호 없이, “초원의 편력, 초원의 집, 초원의 과거, 초원의 현대”로 소제목으로만 표시하였다. 또한 박종서 번역본은 앞서 이유영 번역본의 특징이자 문제로 지적했던 세 가지 관점에서 매우 대조적인 번역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먼저, 소설 도입부에 사용된 메타내레이션의 예에서 보듯 박종서는 시간 부사 등 문장의 뉘앙스를 살리는 첨어와 연결어에 매우 주의하여 번역에 임하고 있다. 또한 박종서는 자칫 개별적인 것으로 분리되어 이해될 수 있는 문장들을 그 의미의 연관관계 속에서 파악하여 옮기는 번역전략을 전작에 걸쳐 실천하고 있다. (I) 예문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박종서의 번역엔 문장들 사이에 있는 행간의 의미 및 논리적 관계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표면에 잘 드러나 있다. 이를 위해 부가적으로 삽입된 첨사(添辭)들, “또, 대체로, 말하자면, 그런가 하면, 그와 마찬가지로, 그럴 때면, 그러다가, 여기에는” 등의 연결어들은 문장과 문장 간에 자연스러운 인과관계를 형성하며, 논리적이고 통일된 진술로 느끼게 한다. 다음의 예에서도 박종서가 얼마나 어휘들 사이와 문장들 사이의 유기적 관계를 파악하여 옮기고자 했는지 알 수 있다.

Murai ging dann auf eine seiner ferneren Besitzungen, und änderte dort alle Verhältnisse um, die er vorfand.

Brigitta's Herz aber war zu Ende. Es war ein Weltball von Scham in ihrem Busen empor gewachsen, wie sie so schwieg, und wie eine schattende Wolke in den Räumen des Hauses herum ging. Aber endlich nahm sie das aufgequollne schreiende Herz gleichsam in ihre Hand, und zerdrückte es.

Als er von seinen Umänderungen auf dem entfernten Landgute zurück kam, ging sie in sein Zimmer, und trug ihm mit sanften Worten die Scheidung an. Da er heftig erschrak, da er sie bath, da er ihr Vorstellungen machte, sie aber immer dieselben Worte sagte: »Ich habe es dir gesagt, daß es dich reuen wird, ich habe es dir gesagt, daß es dich reuen wird,« – sprang er auf, nahm sie bei der Hand, und sagte mit inniger Stimme: »Weib, ich hasse dich unaussprechlich, ich hasse dich unaussprechlich!« 

그때부터는 서로 만나지를 않았다. 한번은 이웃집에서 우연히 같이 만나게 되었는데, 둘 다 뺨이 붉어졌다. 무라이는 다른 영지로 떠나가서는 거기서 지금까지의 태도를 바꿨다.

브리기타는 마음이 찢기는 것 같았다. 말할 수 없는 수치감이 가슴 속에서 자라기 시작했고, 더욱 더 말이 없어졌다. 방구석에는 침침한 구름이 감도는 것 같아서, 그녀는 손을 모으고 터질 듯한 마음을 억제했다. 농지 개간을 마치고 다른 영지로부터 남편이 돌아오자, 그녀는 조용히 남편에게 가서 이혼하자고 했다. 그는 매우 놀라서, 달래기도 하고 애원도 하고 비난도 하였으나 그녀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후회하게 될 거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그는 벌떡 일어나 그녀의 손을 쥐고는 떨리는 듯이 말했다. <이 여편네야 말할 수 없이 너를 증오해. 말할 수 없이 너를 증오한단 말이야!>(이유영)

그 이후 두 사람은 서로 만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언젠가 한번은 이웃집의 연회장에서 마주친 적이 있는데, 이때 두 사람의 뺨에서는 동시에 짙은 홍조가 일었다. 그 후 무라이는 그곳으로부터 좀 떨어진 지점에 있는 그의 또 다른 영지로 가서 한동안 그곳의 농지를 개간했다.

그러나 그 무렵 브리기타의 마음 속에서는 이미 모종의 결단이 내려져 있었다. 말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 동안 그녀의 가슴 속은 치욕감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집안의 모든 방마다 온통 먹구름이 감도는 분위기에서 여러 날을 보내온 그녀였다. 분노로 끓어 오르는 가슴을 한없이 손으로 쥐어 뜯어보기도 했으나, 결국 그녀는 모든 것을 체념하기로 작정하고 만 것이었다.

그곳의 농지를 개간하고 남편이 돌아왔을 때, 그녀는 남편에게로 가서 이제 조용히 헤어지자고 부드러운 말로 제안했다. 이 말을 듣고 난 무라이는 깜짝 놀라며 그녀를 달래며 이의를 제기해 보기도 했으나 그녀는 다음과 같은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당신, 후회하게 될 거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하는 수 없었던지 그는 드디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그녀의 손을 움켜 쥐면서 진지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이 여편네야, 정말이지 난 네가 보기 싫어, 아주 지긋지긋하단 말이야!<(박종서)

(III)

위 인용 문단은 부부가 시골로 이주한 후 남편 무라이가 사냥길에서 알게 된 이웃 소녀 가브리엘에게 매료되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부부간의 갈등을 묘사한 내용으로, 이 작품의 가장 섬세한 심리묘사에 속하기도 한다. 여기서 작가는 등장인물들의 깊은 감정 상태와 긴장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대신 오히려 암시적이고 간략한 서술로 그 밀도와 강도를 높이고 있다. 비교를 위해 먼저 이유영의 번역을 살펴보면, 무라이와 가브리엘의 관계의 변화, 무라이의 욕망의 극복과정, 브리기타의 내적 고통과 고민은 시간적, 단계적 과정을 거친다는 느낌 없이 한 차원에서 평면적으로 서술되고 있다. 이로써 간결하게 사태를 서술한 각 문장들 사이로 암시된 시간적 경과와 그 속에서 골이 깊어진 인물의 감정 상태와 뉘앙스는 충분히 살려내지 못했다. 이유영에게서 브리기타의 고통과 이혼 결심은 단계적 과정을 거쳐서라기보다는 고통의 현재진행 상태에서 남편과 대화하고 발설되는 것처럼 표현된다.

이와 달리 그 과정의 단계적 차이를 입체적으로 살려주는 박종서의 번역에선 사태의 시간적 경과가 뚜렷하게 느껴진다. “그 이후”, “그러다가”, “그 후”, “한동안”, “그러나 그 무렵” 등의 연결어가 각 사태들 사이에 충분한 시간적 간격을 만들어 주고 있다. 무라이가 아내와 떨어진 먼 농지를 개간하면서 잠시 다른 여인에게 빠져들었던 심정의 격동을 극복하고 있는 사이, 아내는 쌓여가는 원망과 상처 입은 자존심의 고통 속에서 모종의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브리기타의 이 심리적 변화에 관한 원문의 세 문장은 박종서에게서 깊은 내면의 스토리로 재해석 되고 있다.

 그러나 그 무렵 브리기타의 마음 속에서는 이미 모종의 결단이 내려져 있었다. 말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 동안 그녀의 가슴 속은 치욕감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집안의 모든 방마다 온통 먹구름이 감도는 분위기에서 여러 날을 보내온 그녀였다. 분노로 끓어오르는 가슴을 한없이 손으로 쥐어 뜯어보기도 했으나, 결국 그녀는 모든 것을 체념하기로 작정하고 만 것이었다.

위의 첫 문장은 이미 이혼을 결심한 브리기타의 마음 상태를 드러낸다. 그에 이어지는 문장들은 그간의 고통과 수치심이 얼마나 강했고 결국 그녀가 어떻게 체념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 내면의 변화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이혼으로 이끄는 서사 전개에 필수적인 심리적 변화과정을 절절하게 살려내었기 때문에 남편이 돌아왔을 때 왜 그녀가 남편에게 이제 헤어지자고 “부드러운 말로 제안”했는지가 논리적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또 하나 박종서 번역의 특징으로 의태어와 의성어의 빈번한 사용을 관찰할 수 있다. 아래의 예에서 보듯이 역자는 “반짝반짝”, “가물가물”, “하나하나”와 같은 표현을 통해 독자에게 사태를 보다 감각적으로 효과 있게 전달하고자 한다. 이로써 번역문은 색채와 무늬로 풍부한 한편의 채색화로 제시된다.

[...] und wie die Sonnenstrahlen spielten, die Gräser glänzten, zogen verschiedene einsame Gedanken durch die Seele, alte Erinnerungen kamen wimmelnd über die Haide, und darunter war auch das Bild des Mannes, zu dem ich eben auf der Wanderung war – ich griff es gerne auf, und in der Oede hatte ich Zeit genug, alle Züge, die ich von ihm erfahren hatte, in meinem Gedächtnisse zusammen zu suchen, und ihnen neue Frische zu geben.
[...] 햇살이 빛날 때 초목들이 반짝거렸고 그럴 때면 사라져간 고독한 생각이 떠올랐다.

황야를 계속 달리면서 옛 추억이 조용히 되살아나고 지금 내가 찾아가고 있는 사람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그 사람이 갖고 있던 모든 특징을 내 생각 속에서 찾아 모으고, 또 그것을 새로이 선명하게 되새길 시간이 초원에서는 충분히 있었다.(이유영)

[...] 햇살을 받아 초목들이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 동안, 내 마음 속에는 고독한 상념들이 숱하게 쌓여갔다.

황야 위를 달릴 때에는 지나간 추억들이 가물가물 되살아났다. 그런 여러 가지 속에는 방금 내가 찾아가고 있는 그 사람의 모습도 들어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그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보는 일이 즐겁게 느껴졌다, 그 시람이 지니고 있던 면모를 내 기억 속에 하나하나 주워 모아서, 그것들을 새로이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이 초원에서는 충분히 있었다.(박종서)

(III)


이상에서 살펴본 박종서의 번역은 이유영 번역에 비하여 확실히 오류를 줄였고, 행간의 의미 파악에 더 주목하면서 서사 전개의 이해를 돕고자 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유영이 “햇살이 빛날 때 초목들이 반짝거렸고”라고 개별 사태를 나열하듯이 서술한다면, 박종서에게는 “햇살을 받아 초목들이 빛을 발하는” 것이며, 바깥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동안 ‘내 속에서는 고독한 생각들이 쌓여갔다’고 하여 외적, 내적 현상이 보다 더 연계적이고 입체적인 과정으로 겹쳐 묘사된다. 다만 박종서의 의미중심적인 ‘풀어쓰기’ 번역전략이 무조건 긍정적인 것은 아니며 나름의 문제를 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선 문장의 길이만 보아도 박종서의 번역은 원문과 이유영의 번역에 비해 훨씬 길고 단어 수도 많아졌음을 볼 수 있다. 게다가 “떠나갈 즈음엔”, “그것도 모자라서” 등 원문에 없는 주관적인 해석과 첨가어의 빈번한 사용은 지나치게 문장의 의미를 구체화하거나 고정시키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이로써 원문이 남겨둔 틈새를 채우고 이야기의 흐름을 보다 매끈하게 서술하는 효과는 있으나, 동시에 독자들의 상상력이 개입하고 독립적인 인식행위가 독서 과정에 접속될 수 있는 기회가 방해받을 가능성도 있다. 나아가 단편문학으로서 갖는 원문의 문체적 특성과 미학적 고유성이 이런 의미중심적 번역에서는 충분히 발휘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박종서의 번역이 단순한 문자번역에서 의미번역으로 확장하여 새로운 독법을 제시하고, 이로써 <브리기타>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도모한 점은 큰 성과가 아닐 수 없다.


3) 권영경 역의 <브리기타>(2011)

2011년 청소년문학 시리즈로 나온 권영경 역의 <콘도르·브리기타>는 슈티프터의 두 작품을 수록한 단행본이다. 이 책에는 작가와 작품 해설이 포함되어 있다. <브리기타> 본문의 1장 제목은 기존 번역본과 달리 “1. 초원의 산책”으로 옮겨졌다. 앞서 살펴본 첫 문단만 비교해 보아도 최근 번역으로서 권영경은 기존 번역본들을 충분히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박종서 번역본은 권영경의 번역본에서 어휘와 문장이 그대로 반복되는 지점들이 수다하여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느끼게 한다.

- 이러한 것들은 대체로 신비를 가득 담고 아름다우며 부드러운 매력으로 우리의 영혼에 스며든다.(박종서)/ 이런 것들은 대부분 신비로움에 가득 차 아름답고 부드러운 매력으로 우리의 영혼에 스며든다.(권영경)

- 서먹서먹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경우가 흔히 있다.(박종서)/ 왠지 서먹서먹한 경우도 있다.(권영경)

- 결국은 마음만이 감지할 수 있는 도덕적인 근본 원리가 존재한다는 것은(이유영)/ 결국 마음으로 느낄 수 밖에 없는 도덕적인 근본 원리가 존재하는 것임에 틀림없다.(박종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도덕적인 근본원리가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권영경)

(IV)


또 다음의 예에서도 박종서와 권영경 번역본의 전적인 유사성을 살펴볼 수 있다.

Ich fand, daß er an den Wirkungen, die sein Äußeres machen sollte, ziemlich unschuldig war. Aus seinem Innern brach oft so etwas Ursprüngliches und Anfangsmäßiges, gleichsam als hätte er sich, obwohl er schon gegen die fünfzig Jahre ging, seine Seele bis jetzt aufgehoben, weil sie das Rechte nicht hatte finden können. Dabei erkannte ich, als ich länger mit ihm umging, daß diese Seele das Glühendste und Dichterischste sei, was mir bis dahin vorgekommen ist, daher es auch kommen mochte, daß sie das Kindliche, Unbewußte, Einfache, Einsame, ja oft Einfältige an sich hatte. [Er war sich dieser Gaben nicht bewußt, und sagte in Natürlichkeit die schönsten Worte, die ich je aus einem Munde gehört habe, und nie in meinem Leben, selbst später nicht, als ich Gelegenheit hatte, mit Dichtern und Künstlern umzugehen, habe ich einen so empfindlichen Schönheitssinn angetroffen, der durch Ungestalt und Rohheit bis zur Ungeduld gereizt werden konnte, als an ihm.] Diese unbewußten Gaben mochten es auch sein, die ihm alle Herzen des andern Geschlechtes zufliegen machten, [weil dieses Spielen und Glänzen an Männern in vorgerückten Jahren gar so selten ist.]
나는 그의 외모에 나타난 인상이 아주 순진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가 하면 그의 내면으로부터는 그 어떤 때묻지 않은 태고의 순수성이 풍겨 나오는 듯했다. 벌써 50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그는 그때까지도 자신의 영혼을 정화시키기에 여념이 없는 사람같이 보였다. 말하자면 그의 영혼은 진리를 찾아 끝없이 전진하는 듯했다. [...] 나는 그의 정신이 찬란하게 불꽃을 피우고 있으며, 또한 그것이 너무나 시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가 어린아이같이 천진한 면과 단순한 면, 그리고 외로움과 때로는 우직함을 지니고 있는 것도 모두가 이런 데서 기인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 그 자신은 이러한 자기 천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가 내쏟는 말은 그 누구의 말보다도 아름답게 들렸다. [...] 그 자신도 모르게 그의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이러한 천분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그에게 매력을 갖게 되었다.(박종서)
나는 그의 외모에서 풍기는 인상이 아주 순진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때로는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때묻지 않은 태고의 순수함이 몸에서 배어 나오는 듯했다. 이미 쉰이 다 되어 가는 나이였지만, 아직까지도 끊임없이 진리를 추구하며 정진하는 사람처럼 자신의 영혼을 고양시키기에 여념이 없는 듯했다. [...] 나는 그의 정신이 찬란하게 불타오르며, 너무나 시적으로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의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함과 소박함, 때로는 고독하고 단순해 보이는 면도 바로 이런 숭고한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을 인식하지 못했고, 그래서 그런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들렸다. [... ]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우러나온 그의 천성은 모든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권영경)

(VI)


기존 번역본을 참조하는 것은 후속 번역의 올바른 태도이자 의무에 속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권영경의 번역에서 드러나듯이, 기존 번역본에 대한 이런 깊은 의존성은 여지없이 오역마저 그대로 답습하는 폐해를 낳기도 한다는 점에서 재고(再考)가 요망된다.

- Ich fand, daß er an den Wirkungen, die sein Äußeres machen sollte, ziemlich unschuldig war. Aus seinem Innern brach oft so etwas Ursprüngliches und Anfangsmäßiges, gleichsam als hätte er sich, obwohl er schon gegen die fünfzig Jahre ging, seine Seele bis jetzt aufgehoben, weil sie das Rechte nicht hatte finden können.
- [...] 마치 그가 이미 50세가 되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자신의 영혼을 간직해 온 것은 합당한 대상을 아직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인 듯했다.(필자) 
- [...] 아직까지도 끊임없이 진리를 추구하며 정진하는 사람처럼 자신의 영혼을 고양시키기에 여념이 없는 듯했다.(박종서)
- [...] 아직까지도 끊임없이 진리를 추구하며 정진하는 사람처럼 자신의 영혼을 고양시키기에 여념이 없는 듯했다.(권영경) 

위 인용문은 화자가 이탈리아에서 만나 체험한 소령의 인격적 특성에 관한 묘사이다. 그는 외모나 외적인 것에는 무심하고, 내면에서는 뭔가 원천적이고 태초의 것을 느끼게 하는 순수한 무엇인가를 분출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소령은 ‘자신에게 맞는 진정한 것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영혼을 여전히 내보이지 못하고 살아온 사람’으로 드러난다. 위에서 밑줄 친 “seine Seele bis jetzt aufgehoben”은 자신의 내면, 감정, 진정한 자아를 아직 세상에 내보이지 않았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즉, 소령은 자신의 ‘진짜 존재’ 혹은 ‘온전한 감정’을 지금까지 드러내지 않고 간직해두었는데, 그건 “weil sie das Rechte nicht hatte finden können 그의 영혼이 자기에게 걸맞는 ‘올바른 것’, 자신의 영혼을 온전히 몰입시킬 대상이나 삶의 방향, 혹은 자기실현의 계기를 아직 만나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 여기선 소령의 나이와 그의 내적 발전 상태에 대한 대조가 의미를 만들어낸다. 이 문장을 박종서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옮겼으며, 권영경은 이를 단어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수용하였다.

이같이 문장 해석이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을 경우 기존 오역을 답습하는 태도는 번역사에서 자주 발견되는 관습이자 악습에 속한다. 그러므로 해석이 명료하지 않은 문장의 경우 후속 번역에서는 여러 방면의 연구와 새로운 해석의 시도가 요구될 수밖에 없다. 권영경 번역이 이러한 한계를 안고 있는 한편, 이 번역본의 미덕은 어법의 정화와 현대화에 힘을 기울여 오늘날 독자들의 접근을 수월하게 만든 데서 찾을 수 있다. 가령 선행 번역들에서 화자가 손님으로 소령을 방문했을 때, 그를 맞는 집사와 화자의 대화에 나오는 어색함을 권영경은 자연스럽고 또 현대적인 어법으로 변화시켰다:

- “Der Herr hat Briefe von euch und erwartet euch schon lange,”/ “Ich habe ihm ja geschrieben, daß ich mir euer Land ansehen wolle,”
- “주인님께서는 당신의 편지를 받으시고 벌써부터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당신들의 나라를 구경하고 싶다고 써 보냈었지요”(이유영)
- “주인님께서는 댁의 편지를 받으시고 벌써부터 기다리고 계십니다”/ “댁의 나라를 구경하고 싶다고 편지를 드렸었죠.”(박종서)
- “주인님은 손님의 편지를 받고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헝가리 지방을 한번 구경하고 싶다고 편지를 드렸죠.”(권영경)

소령의 부재중에 그를 방문한 화자는 소령의 하인으로부터 위와 같은 답변을 듣는다. 여기서 역자들은 하인이 화자를 어떻게 부르는지, 다양한 호칭으로 변화시켜 옮겼다. 이유영의 “당신”은 말 그대로의 문법적 번역에 해당하며, 박종서의 “댁”은 하인과 그의 주인이 초청한 손님의 관계를 설명하기엔 부족함이 많이 느껴진다. 이에 반해 권영경의 “손님”은 정중하면서도 화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해법으로서 적절해 보인다.

또한 예문 (III)에서 보듯 이유영과 박종서는 남편이 브리기타를 부를 때 “여편네”로 옮김으로써 남성중심사회의 여성 폄하적인 느낌을 전달한다면, 권영경은 “당신 같은 여자는”(권영경 141)으로 옮겨 호칭과 어법을 현대화하고 성의 차이를 중립적으로 표현하였다. 전반적으로 권영경은 박종서 번역을 토대로 삼아 너무 길고 장황한 문장들을 다듬고 정련시켰으며, 호칭이나 어법을 현대화하여 현대 독자들에게 접근이 수월한 번역본을 제공하고 있다.


3. 평가와 전망

이 글에서 다룬 이유영의 초역은 원문의 길이나 어휘 수에 상응하는 문자 중심의 번역을 통해 슈티프터의 독특한 문체를 살려보고자 한 것 같다. 그러나 등장인물의 감정과 심리묘사에서 이 번역전략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건 문장 간의 유기적 관계나 행간의 의미를 충분히 전달하는데 오히려 장애가 되며, 문장들이 각각 따로 노는 듯한 효과를 자아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주어를 탈락시키거나 미완성으로 느껴지는 번역 문장들은 작품의 문학성을 저해하는 효과마저 불러일으킨다.

이와 반대로 박종서는 오히려 문장의 함의와 행간의 의미를 살려내는 전략을 사용하였다. 그는 보다 많은 연결어와 첨가어를 통해 이야기의 핵심을 포착하고 그 논리적 흐름을 이해시키는 데 집중한다. 게다가 의태어와 의성어를 곁들임으로써 사태의 묘사를 독자가 감각적으로 느끼게 했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장황하게 설명하는 서술문체는 이 단편의 길이를 확장시키고, 또 단편문학으로서 작품의 형식적 특성을 저해하기도 한다.

이를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이유영은 밑바탕이 되는 초본(원문)의 선과 면들을 있는 그대로 충실히 본떠서 그림을 그린다면, 박종서는 초본에 없는 보다 상세한 선들을 곁들여 치며 내용을 보완하고, 여기에 채색과 음영까지 덧붙여 한편의 다채로운 채색화로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권영경은 박종서의 그림을 다시 초본으로 삼았으며 그러다 보니 잘못된 가지까지 그대로 옮기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런 한편 권영경은 박종서의 번역본에 기초하여 현대적인 어법, 정화된 표현들로 보완함으로써 불필요한 가지를 치고 좀 더 완성도 높은 번역을 추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세 편의 번역은 초역부터 최근의 번역까지 점차적으로 문제점들을 보완하고 진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강한 영향사적 관계에 놓여 있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이유영(1971): 브리기타. 일지사.

박종서(1975): 브리기타. 서문당.

권영경(2011): 브리기타. 고려대학교출판부.


  • 각주
  1. 독일에서 <브리기타>는 오늘날 영화로까지 제작되어 여전히 독일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1982년 Wolfgang Glück가 TV용 영화로 <Brigitta>를 제작했고, 1994년에 Dagmar Knöpfel 감독의 극장용 영화 <Brigitta>가 출시되었다.
  2. Gutjahr, Ortrud(1995): Das sanfte Gesetz als psychohistorische Erzählstrategie in Adalbert Stifters Brigitta. In; Gutjahr, O/ Pietzcker, C. etc.(Hg.): Psychoanalyse und die Geschichtlichkeit von Texten. Würzburg. 285-295. 구트야에 따르면, 유복한 가정 출신에 훤칠한 미모의 소령이 그럴싸한 동기 없이 하필 누가 봐도 못생긴 젊은 여성 브리기타를 욕망하고 폐쇄적인 그녀의 마음을 빼앗아 결혼에 이르는 점, 그러다 남편이 잠시 다른 여인에 마음을 빼앗기고 이를 극복하려고 애쓰는 동안 브리기타가 무조건 이혼을 요구하는 점, 약 15년이 지난 후 귀향한 남편과 옛 아내가 좋은 이웃으로 살다가 아들의 부상을 계기로 다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결합에 이르는 점 등 3단계에 걸친 이들의 삶의 전환이 전례가 드문 일로 제시된다.
  3. Kreuzer, Stefanie(2007): Zur ‘unerhörten’ Erzähldramaturgie einer realistischen Novelle. Adalbert Stifters “Brigitta” (1847). In: Der Deutschunterricht, 59 (2007) 6, 2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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