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라 (Andor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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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프리쉬(Max Frisch, 1911-1991)의 희곡

안도라 (Andorra)
작가막스 프리쉬(Max Frisch)
초판 발행1961
장르희곡


작품소개

1961년 출간 및 초연된(취리히 샤우슈필하우스) 막스 프리쉬의 대표적인 희곡으로 원제는 <안도라. 12개의 장면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안드리라는 유대인 입양아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극이 전개됨에 따라 이 아이가 사실은 양아버지로 알고 있던 교사의 혼외자임이 밝혀진다. 교사는 자신의 과오를 모두가 꺼리는 유대인 아이를 입양해서 키운다는 그럴싸한 명분과 맞바꿨는데, 이 작은 거짓말은 극에서 발생하는 모든 비극의 원천이 된다. 유대인 안드리는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유대인은 도제로 삼지 않는다는 거절 때문에 꿈을 포기해야 하며, 무엇보다 사랑해선 안 되는 이복 여동생을 사랑하게 된다. 또 이 거짓말은 안드리의 어머니이자 교사의 전 애인인, 저 너머 검은 마을에서 와서 살해당한 여인의 살인범으로 유대인 안드리를 의심하게 하는가 하면, 종국에는 검은 군대의 피가 섞인 안드리가 유대인이라는 핑계로, 안도라를 점령한 검은 군대에 의해 처형되는 비극적 아이러니를 초래한다. 극 초반의 안드리는 자신을 향한 편견에 대해 의문을 품고, 저항하며 이를 극복해보려 애쓰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자기에게 주어진 자신의 상(像)을 받아들이고 체념한다. 작품은 비극으로 귀결되는 거짓과 위선 그리고 편견의 가공할만한 힘을 역설하면서, 2차 세계 대전 중 자행된 대대적인 유대인 학살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라는 질문을 간접적으로 던진다. 브레히트의 영향을 받은 프리쉬는 <안도라>의 몇몇 장면(Bild) 마지막 부분에 등장인물 중 한 사람을 증언대에 세워 안드리에 대한 편견과 폭력의 책임 여부를 묻는 서사극적 기법을 도입한다. ‘그땐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 일관하는 이들은 고유한 이름이 아닌 술집 주인, 목수, 수습생, 군인, 신부, 의사 등 직업으로만 규정된 등장인물로, 말하자면 평범한 시민들이다. 결국, 안드리의 죽음은 편견에 사로잡힌 대중이 만들어 낸 합작품임을 폭로함으로써, 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시민 사회 전체의 각성을 요청한다. 국내에서는 김창활에 의해 1977년 처음 번역되었다(서문당).

초판 정보

Frisch, Max(1961): Andorra. Stück in zwölf Bildern. Frankfurt a. M.: Suhrkamp.


번역서지 목록

번호 개별작품제목 번역서명 총서명 원저자명 번역자명 발행연도 출판사 작품수록 페이지 저본 번역유형 작품 번역유형 비고
안도라 現大世界戱曲選集 (컬러版)世界의 文學大全集 33 프리시 강두식 1970 同和出版公社 419-500 편역 완역 70년 초판 인쇄, 1975년 중판 발행
2 안도라 現大世界戱曲選集 (컬러판)世界의 文學大全集 33 막스 프리쉬 강두식 1971 同和出版社 419-483 편역 완역
안도라 안도라 瑞文文庫 258 막스 프리시 김창활 1977 瑞文堂 13-188 완역 완역
안도라 외더란트 伯爵 이데아총서 8 M. 프리쉬 손재준 1984 民音社 251-373 편역 완역
5 안도라 안도라 서문문고 258 막스 프리시 김창활 1996 서문당 11-134 완역 완역 초판:1974년. 개정판: 1996년 발행이라 기재되어 있으나 확인된 초판은 1977년 발행됨
안도라 안도라 SNUP동서양의 고전 17 막스 프리쉬 김정용 2012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3-132 완역 완역


번역비평

1. 번역 현황 및 개관

<안도라>의 초역이 실린 <現代世界戱曲選集>(1970)의 <해설: 現代戲曲의 世界>에서 막스 프리쉬는 다음과 같이 소개된다.

여기 수록된 두 사람의 극작가 막스 프리시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는 어느 모로 보나 독일계 연극을 대표할 수 있는 극작가이지만 그들의 국적은 독일이나 오스트리아가 아니라 스위스이다. 스위스계의 뛰어난 두 사람의 작가가 있다는 사실 및 그들이 오늘의 독일 연극을 대표하는 극작가라는 사실은 매우 아이러니하나 나찌스가 독일 및 오스트리아를 강점(强占)한 저 무심한 정신적 공백기를 생각해 본다면 충분히 수긍할 만한 것이다. 망명 작가가 아니면 독일어를 쓰는 사람으로서 30년대의 거의 전부와 2차 대전의 기간 동안 정신적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곳은 독일어를 사용하는 스위스 지역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극작가는 모두 전후파이다. 프리시가 44년에, 뒤렌마트가 47년에 처녀 극작을 내놓았고 그들의 극이 본지서 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은 모두 50년 이후에 속한다.(여석기 1970, 547) 

전후 황폐해진 독일어권 연극은 스위스의 두 작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와 막스 프리쉬에 의해 견인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독일 문학사에서 늘 짝을 이뤄 나란히 언급되는 이 두 작가는 한국에서 수용되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우선 위 해설이 실린 선집이 서구권의 중요한 희곡들을 선별한 작품집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전후 독일 문학, 무엇보다 희곡의 국내 수용에 있어 프리쉬와 뒤렌마트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아울러 나치와 전쟁의 피해를 비껴갈 수 있었던 ‘스위스’ 출신 독일 문학계 연극을 대표하는 ‘극작가’라는 이들의 공통분모를 강조함으로써 이들이 ‘함께’ 소개되고 있다는 점도 그렇다.

<한국 연극계의 막스 프리쉬 수용>이라는 논문에서 김기선도 프리쉬와 뒤렌마트를 비교해 가면서 프리쉬 수용 양상의 청사진을 제시한다. 이 논문에서 그는 1960년대 후반부터 이 두 작가가 적극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한 데는 두 작가가 지니는 고유한 중요성과는 별개로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었음을 언급하며, 그 배후로 브레히트를 지목한다. 1970-80년대 정치적 앙가주망과 그 미학적 구현을 모색했던 한국의 연극계는 다양한 연극 언어들에 갈증을 느끼고 있었고, 이를 해갈해 줄 모범으로서 브레히트에 주목했다. 그러나 당시 금지 작가 중 한 사람이었던 브레히트를 직접 수용할 수는 없었기에 브레히트의 후예들이라 할 수 있는 프리쉬와 뒤렌마트라는 우회로를 택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 두 사람이 계속해서 비슷한 부류의 작가로 간주된 것은 아니다. 뒤렌마트가 극작가로서 꾸준히 수용되었다면, 프리쉬는 초창기에는 극작가로 주목받다가, 1980년대 후반부터는 소설가로서 더 큰 관심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 변곡점이 브레히트의 해금 시기와 겹친다는 점 또한 흥미롭다. 즉 1987년 브레히트가 해금됨으로써 브레히트를 직접적으로 학습하고 수용하는데 관심과 에너지가 쏠리게 된 것과 무관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김기선 1999, 141-143). 다시 정리해 보면 프리쉬는 뒤렌마트와 함께 황폐화된 전후 독일 연극계를 견인한 스위스 출신의 중요한 극작가로서 국내에서 알려지기 시작했고, 이들에 대한 관심이 브레히트에 대한 관심의 우회적 표현이었다는 점에서 무대 수용이 실질적인 번역 행위보다 우선한다. 특히 강두식, 지명렬, 김창활과 같은 독문학자 또는 전공자를 통해 현지와 큰 시간차를 두지 않고 적극적으로 수용된 것도 당시 국내 연극계의 갈증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총 5번의 개작을 거쳐 1961년 오늘날의 형태로 출간된 <안도라>(Frisch 1975, 2)가 국내에 수용되는 과정도 유사한 도정을 겪는다. 이 작품이 국내에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1963년 3월 <思想界>에 강두식이 <서사적 무대의 전형, 막스 프리쉬의 신작 안돌라>라는 글을 발표한 것까지 연원한다. 1965년에는 허규가 연출한 <안도라>가 국립극장 무대에서 국내 초연을 선보였으며, 초역은 그보다 5년 뒤인 1970년 상기한 <現代世界戱曲選集>의 마지막 부분에 독일희곡 대표격으로 뒤렌마트의 <물리학자들>(송동준 역)과 함께 실렸다. 이 초역의 번역자는 강두식이다. 이후 1977년에는 김창활의 번역이, 1984년에는 손재준의 번역이 나왔으며 가장 최근의 번역은 2012년 출간된 김정용의 번역이다. 현재 시중 서점에서 유통 중인 번역본은 김창활의 1996년 개정판과 김정용의 번역뿐이다.



2. 개별 번역 비평


<안도라. 12개의 상으로 구성된 작품>이라는 원제를 지닌 <안도라>는 비교적 평이한 언어와 단순한 통사구조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어 독문학을 전공한 꼼꼼한 번역자라면 큰 무리 없이 번역할 수 있을 법한 작품이다.[1] 실제 이 작품에 대한 상이한 번역 종 간의 정·오역을 검토하거나 문체를 비교해 보았지만, 유의미한 논의를 전개하기가 쉽지 않았다. 따라서 이번 번역 비평에서는 두 가지 관점, 즉 선행 번역 비평에서의 논의를 계승, 점검하고 극작품으로서의 <안도라>의 구조와 ‘부텍스트 Nebentext’의 번역 문제에 집중해 보기로 한다.

우선, <안도라>의 가장 최근 번역자이기도 한 김정용은 자신의 번역본을 내놓기 약 10년 전인 2002년 <희곡 번역의 이론과 오류 분석 - 막스 프리쉬의 『안도라』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이 논문에서 그는 일반적인 문학 번역 이론과 희곡 장르 번역의 특수성에 대해 약술한 뒤 기존 <안도라> 번역에서의 문제점과 개선 가능성을 논의한다. 이 글은 연구 논문의 형태로 발간된 것이지만, 글의 후반부는 번역 비평적 양상을 띤다는 점에서 이번역 비평적 양상을 띤다는 점에서 이번 번역 비평의 레퍼런스로 기능할 수 있다. 특히, 이 논문의 저자가 이후 직접 <안도라>를 번역했다는 점에서 이 글은 번역자의 소위 ‘번역 프로젝트’나 ‘번역 지평’(베르만)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전거로 활용될 수 있다. 둘째, <안도라>에서는 다양한 연극적 장치가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프리쉬는 브레히트의 서사극을 계승하고, 학습극의 고유한 취지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하여 현대적으로 구현하는 작가이다. 프리쉬의 이러한 의도는 장면의 개성 있는 구성이나 독특한 용어의 사용, ‘부(副)텍스트 Nebentext’의 활용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는데, 문제는 부차적으로 보이는 이 요소들이 ‘발화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번역 과정에서(아울러 독서 과정에서도) 종종 간과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결코 부차적이지 않은 부텍스트와 같은 비언어적 요소들을 담아낸 드라마 텍스트의 번역 또한 이번 번역 비평에서 주목하는 지점이 된다.[2]

먼저 첫 번째 관점은 이 번역 비평에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김정용이 논문에서 현재도 유통 중인 김창활의 번역과 절판된 손재준의 번역만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선집에 실린 강두식의 번역은 알지 못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아울러 그는 김창활의 번역에 관해서는 김기선의 상기한 논문을 인용하며 문제점이 많다고 진단한 뒤, 주로 손재준의 번역을 중심으로 ‘언어적 오류’, ‘화용적 오류’, ‘문화적 오류’, ‘형식적 오류’를 번역 사례 중심으로 분석, 고찰, 진단한다. 따라서 다음의 번역 종별 개별 번역 비평에서는 번역 오류나 개선 가능성에 대한 그의 주장들을 대부분 수용하면서도, 김정용 자신의 번역을 포함, 그가 의도적 또는 비의도적으로 누락한 번역도 점검해보도록 한다. 이와 관련하여 본고에서 가장 주목하는 지점은 6번째 장면에서 ‘베드로의 부인(否認)’과의 ‘상호텍스트성’을 번역에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에 대한 김정용의 통찰이다. 해당 부분은 개별 번역 비평에서 계속해서 논의하기로 한다.

두 번째 관점은 드라마 형식 용어의 번역 또는 편집 문제와 ‘부텍스트’의 번역 문제로, 이 논의는 개별 번역 비평에 일일이 언급하기 애매한 부분이 있어 여기서 다루고자 한다. 작품 구조와 밀접한 연관을 맺는 드라마 형식 용어의 번역 또는 그 편집 문제를 먼저 살펴보자. 이와 관련해서는 ‘Bild’의 번역어에 대해 재고할 필요가 있다. 프리쉬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막’을 대신하는 ‘Bild’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단어를 강두식은 ‘막’으로, 손재준은 ‘경’으로, 김창활과 김정용은 ‘장’으로 번역하고 있다. 손재준은 ‘Bild’의 의미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경’을 번역어로 선택한 듯하고, 김창활과 김정용은 ‘막’을 대체할 수 있는 이질감 없는 보편적인 번역어로서 ‘장’을 선택한 듯하다. 다만 강두식이 번역어로 삼고 있는 ‘막’은 필연적인 무대의 전환 과정을 관객의 시야로부터 차단하려는 전통적인 환상극의 의도를 연상시키는 번역어라는 점에서 비-환상극을 지향하는 프리쉬의 작품에서는 지양되어야 할 번역어가 아닐까 한다. ‘경’이나 ‘장’의 번역은 일단은 무리 없는 무난한 번역으로 생각되는데, 이 번역어들을 이 작품의 본문에 등장하는, 작품의 핵심 주제어라고도 할 수 있는 ‘Bildnis’라는 단어와 연결시켜 보려고 할 경우에는 문제가 생긴다. <안도라>의 7번째 ‘장면 Bild’과 8번째 장면 사이에 삽입된 ‘증언대 Zeugenschranke’ 장면에서 신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Du sollst dir kein Bildnis machen von Gott, […]”(Frisch 1975, 67). ‘Bildnis’의 번역에 관해서는 다시 개별 비평에서 논의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이 단어와 ‘Bild’의 관련성에만 집중해 보자. 즉 이 작품에서 개별 장면이 ‘타자 der Andere’ ‘안드리 Andri’의 그릇된 정체성과 자아상을 구축해 가는 일련의 잘못된 상 Bild, 즉 편견의 축적 과정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장’이나 ‘경’과 같은 연극의 장면 단위를 칭하는 용어가 아닌 ‘Bildnis’의 번역어를 연상시킬 수 있는 ‘Bild’에 대한 제3의 대안을 모색해 볼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비슷한 맥락에서 이 작품의 고유한 구조적 특징이면서 서사극적 장치로 기능하는 ‘Vordergrund’의 번역과 배치도 문제적이다. 작품은 총 12개의 ‘장면 Bild’과 2, 3, 4, 7, 8, 9, 10, 11, 12 장면 앞에 위치한 9개의 ‘Vordergrund’로 구성되어 있다. 연극 무대에서의 ‘Vordergrund’란 관객에게 가까운 무대 전면을 의미한다. 강두식, 김창활, 김정용은 이 장면을 ‘무대 전면’이라고 번역한 반면, 손재준은 ‘전경’이라는 번역어를 채택하고 있다. 아마도 그는 Bild를 ‘경’이라고 번역하면서, 이 장면들도 같은 층위의 ‘단위’로 인식시키려고 의도한 것 같다. 이것이 다른 번역자들은 시도하지 않은 세심한 배려임은 분명하다. 다만 ‘전경’이라는 단어는 한자를 병기하지 않는 이상 연극 무대와 관련해서는 무대미술이나 무대의 시각적 효과(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에서의 스펙타클)를 칭하는 용어와 혼동될 수 있다는 점은 문제적이다. 물론 이는 애초에 손재준이 ‘Bild’의 번역어를 ‘경’(아마도 ‘景’)으로 채택했기에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반면 ‘무대 전면’으로 번역한 나머지 번역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또 다른 문제가 확인된다. 원작의 텍스트 배치와 달리 모든 번역서에서 독립된 이 짧은 장면들을 앞 장면의 마지막 부분에 붙여 편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편집 방식으로 인해 원문과의 대조 없이 번역서만 읽을 경우, ‘무대 전면’은 마치 지문처럼, 그리고 그 이후의 증언대 진술은 마치 한 장면을 마무리하는 대사처럼 읽힐 여지가 다분해진다. 더 큰 문제는 이로 인해 더 이상 이 장면의 독립성을 담보하기가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관객을 향해 자신은 어쩔 수 없었고, 이렇게 될지 몰랐다 등 한결같이 변명을 늘어놓는 등장인물들의 진술은 장면과 장면의 유기적 연관성을 의도적으로 파기해 버림으로써 관객을 환상에 붙들어두지 않는 서사극적 연극 장치인 동시에, 결코 전쟁의 결과와 무관할 수 없는 관객 자신의 거울 역할을 하기도 한다. 따라서 길지 않은 이 장면의 중요성은 텍스트 편집, 또는 텍스트 도상적 차원에서도 보장될 필요가 있다.

이번에는 드라마 텍스트를 구성하는 주요한 구성 요건으로서의 부텍스트[3]의 번역 방식이나 편집 방식을 살펴보자.

① Der Wirt, jetzt ohne die Wirteschürze, tritt an die Zeugenschranke.(Frisch 24. 밑줄은 필자 표기)   

ⓐ 앞치마를 걸치지 않은 주인이 증언대에 나온다.(강두식 1980, 428)   
ⓑ 주인이 증언대에 나선다. 이젠 앞치마를 두르지 않고 있다.(손재준 1984, 269, 밑줄은 필자 표기)    
ⓒ 스포트라이트가 비치면, 무대 전면이 증언대가 된다. 주점 주인이 앞치마를 벗으며 증언대로 나온다.(김창활 1996, 38)    
ⓓ 술집 주인이 앞치마를 벗으며 증언대로 나온다.(김정용 2012, 20)      
② Der Geselle, jetzt in einer Motorradfahrerjacke, tritt an die Zeugenschranke.(Frisch 36. 밑줄은 필자 표기) 

ⓐ 가죽 점퍼를 입은 견습생이 증언대로 나온다.(강두식 1980, 434) 
ⓑ 가구사가 증언대로 나선다.(손재준 1984, 274)  
ⓒ 무대 전면의 증언대로 목수가 나온다.(김창활 1996, 46)  
ⓓ 오토바이용 재킷을 입은 수습생이 증언대에 나온다.(김정용 2012, 33)  
③ Der Soldat, jetzt in Zivil, tritt an die Zeugenschranke.(Frsich 58. 밑줄은 필자 표기) 

ⓐ 군인이 사복을 입고 증언대에 나온다.(강두식 1980, 446)  
ⓑ 평복을 입은 군인이 증언대에 나선다.(손재준 1984, 303) 
ⓒ 군인 파이더가 사복을 입고 증언대로 나온다.(김창활 1996, 87) 
ⓓ 평복을 입은 군인이 증언대에 나선다.(김정용 2012, 57)

총 9번에 걸친 증언대 장면 중 위 세 장면의 부텍스트에서 ‘jetzt’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 중 이 단어가 문자 그대로 번역된 경우는 ①-ⓑ문장, 즉 손재준의 번역이 유일하다. 사실 ‘지금, 현재, 이제’와 같은 뜻을 지닌 시간 부사 ‘jetzt’가 사용 빈도가 상당히 높은 평이한 단어라는 점을 고려하면, 거의 모든 번역자가 이 단어의 번역을 누락하거나, 또는 이 단어의 의미를 에둘러 표현하는(①-ⓒ; ①-ⓓ, 이전에는 입고 있었는데 더 이상 입고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것은 상당히 주목할 만한 현상이 된다. 게다가 ① 문장에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jetzt’의 의미가 반영되고 있는 반면, ②, ③ 문장에서는 이 단어의 뜻이 아예 탈락되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이 부텍스트들이 이렇게 번역된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가설을 제시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번역자들은 ‘이제’를 삽입하는 것이 불필요하다고(배우의 현존이 눈앞에 있다고 가정할 때, 그들이 이미 앞치마를 벗었고, 가죽 재킷을 입고 있고, 사복을 입고 있다는 측면에서)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무엇보다 이 문장들에 ‘이제, 지금’과 같은 단어를 삽입할 경우 한국어에서는 상당히 어색하게 들릴 수 있는데(지금 사복을 입은, 이제 사복을 입은), 이는 번역자에게 이 단어의 생략이 더 나은 선택이라는 판단을 유도하는 근거로 작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둘째, 이 텍스트들이 발화되지 않는 ‘부텍스트’라는 점도 이러한 번역 양상에 기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어떤 번역은 최소한의 정보만을 남긴 채 축약적으로 번역되었거나(‘가구사가 증언대로 나온다’), 또 어떤 번역은 원문에는 있지도 않은 말을 첨언하여(‘스포트라이트가 비치면, 무대 전면이 증언대가 된다.’, ‘무대 전면의’) 설명적으로 번역되어 있다. 문체나 상징, 문학성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문학 번역의 태도와는 상충하는 이러한 번역 방식은 ‘정보’의 전달을 최우선 순위에 두는 번역 태도에 가깝다. 아마도 문학성에 중점을 두는 주텍스트와는 달리 부텍스트는 주로 배우의 몸짓, 표정, 무대 지시 등 설명적이고 실용적인 기능을 지닌 텍스트로 인식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작가가 왜 총 9개의 증언대 장면 중 삼 분의 일에 해당하는 이 세 개의 장면에서 대사를 행하는 등장인물이 옷을 기존과 다르게 입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왜 굳이 ‘jetzt’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는지 반문해 보자. 그러면 등장인물이 여기서 ‘지금’ 그 전과는 다른 옷을 입고 있는 것이 생각보다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띨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4]우선 고유명사가 아닌 ‘(주점) 주인’이나 ‘견습생’, ‘군인’ 등 직업으로 명명된 등장인물들은 ‘환복’을 통해 유니폼을 벗는 순간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5] 그래서 이러한 유동적 정체성은 연극 형식적 차원에서는 등장인물에게 특별한 캐릭터를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이 작품을 실제 유럽에 존재하는 소국 안도라가 아닌 하나의 ‘모델’로 기능할 수 있도록 공조한다. 그러면서도 작품 주제적 차원에서는 프리쉬의 모든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뚜렷한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채 공명하고 휩쓸리는 현대인의 자아상을 구현할 수도 있다. 실제 작품에는 ‘Jemand’, 즉 ‘어떤 사람’[6]도 등장하는데, 이런 맥락에서 이름이 부여된 안드리와 바블린을 제외하면 작품의 모든 인물이 ‘Jemand’로 치환될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무대 위의 시간적인 측면에서도 ‘jetzt’의 의미는 상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장면 Bild’과 ‘무대 전면 Vordergrund’은 연극적으로는 다른 공간이며, 이들 사이에는 시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12개의 장면은 사람들이 안드리에 대해 갖는 ‘상’을 제시하고, 그로 인해 길들여진 안드리가 스스로의 ‘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형상화한다. 즉 12개의 장면은 일련의 상을 구축하여 안드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선형적인 시간 흐름을 따른다. 반면 무대 전면에서의 시간은 이 모든 사건이 종결된 이후의 진술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일련의 12개의 장면의 관점에서 무대 전면은 미래가 됨으로써, 사건의 진행을 예고한다(이는 관객의 감정이입을 방해하고, 비밀을 미리 누설하여 극적 긴장감을 저해하는 행위가 된다). 반면 9개의 무대 전면 장면의 관점에서는 12개의 장면은 이미 일어난 사건으로 과거가 되며, 그 과거에 대한 성찰, 반성 또는 변명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부텍스트에서의 ‘jetzt’가 ‘아까와 달리 배우가 다른 옷을 입고 나와서 과거에 대한 소회를 지금 발화’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의 역할을 하고 있기에, 이 단어는 어느 정도의 어색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적극적으로 번역될 필요가 있다.

이제 다시 개별 번역 비평을 통해 첫 번째 관점, 즉 김정용 논문의 논의를 계승, 점검 및 확장해 보고자 한다.


1) 강두식 역의 <안도라>(1970/1980)

1927년생으로 서울대 독문과 교수를 역임한 강두식의 초역이 실린 <현대세계희곡선집>[7]은 1970년 초판이 인쇄되었고, 1975년에는 중판이 발행된 것으로 확인된다. 해당 선집이 1970, 1971, 1975에 이어 1980년까지 꾸준히 인쇄된 것을 보면 선집의 수요가 어느 정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것은 프리쉬와 뒤렌마트의 수용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8]

강두식은 이미 1961년 6월 <思想界>에 <진리와 진실. 프리쉬의 돈판 혹은 기하학에 대한 사랑에 대하여>라는 글을 게재하는 등 프리쉬 수용에 있어 현지와의 시간차를 두지 않는 신속함과 적극성을 보임으로써 프리쉬 수용의 선봉장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 그의 초역은 약 반세기 전 번역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읽어도 큰 이질감을 주지 않는다. 드라마의 대사라는 점을 고려하여 쉬운 단어를 선택하고, 문장도 간결하게 처리하였으며 남매이자 연인이기도 한 안드리와 바블린의 대화는 낮춤말을 사용함으로써 현대적인 인상을 준다. 다만 김정용이 손재준의 번역에서 문제 삼고 있는 성경과의 ‘상호텍스트성’을 간과한 번역은 강두식도 피하지 못했다. 해당 부분을 살펴보자. 12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에서 6번째 장면은 극의 전환점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중요하다. 이 장면 첫 부분에서 바블린은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은 갖고야 만다는’ 군인에 의해 강간을 당하는데, 안드리는 이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 술 취한 아버지와 서로에게 상처만 되는 대화를 이어간다. 해당 장면에서는 세 번에 걸쳐 ‘닭이 울고 Hähne krähen’[9], ‘아버지는 마치 베드로처럼 운다’. 김정용은 이 장면이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Noch in dieser Nacht, ehe der Hahn kräht, wirst du mich dreimal verleugnen”, 즉 베드로의 부인을 암시하고 있다면서[10], 이 장면에서 사용된 ‘heulen’의 번역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김정용 2002, 317-318).

ANDRI ① Heul nicht.
LEHRER Andri -
ANDRI Geh pissen.
LEHRER Was sagst du?
ANDRI ② Heul nicht den Schnaps aus den Augen; wenn du ihn nicht halten kannst, sag ich, geh.
LEHRER Du hassest mich?
Andri schweigt.
Der Lehrer geht.
ANDRI Barblin, er ist gegangen. Ich hab ihn nicht kränken wollen. Aber es wird immer ärger. Hast du ihn gehört?   
Er weiß nicht mehr, was er redet, und dann sieht er aus wie einer, der weint... Schläfst du? Er horcht an der Türe.(Frisch 1975, 56. 밑줄 및 강조는 필자 표기)   
안드리: ① 떠들지 마세요. 
교사: 안드리!  
안드리: 오줌이나 누세요.[11]
교사: 뭐라구? 
안드리: ② 소릴 지르면 눈에서 먹은 술이 튀어 나옵니다. 술을 견디실 수 없으면 가시란 말이에요.  
교사: 날 미워하고 있니?  
안드리: (잠자코 있다. 교사 퇴장) 바르쁠린. 아버진 가셨어. 난 그분을 욕할 생각은 없었어. 그러나 그분은 점점 심해 가신다. 자기가 말한 걸 모르고 계시더군. 그리고 우시는 거 같아 보이더라. 자니?(강두식 1980, 446. 밑줄 및 강조는 필자 표기) 

김정용은 손재준이 밑줄 및 강조 표시된 부분을 “① 소리치지 마세요”(손재준 1984, 302)와 “② 그렇게 취한 눈으로 노려보지 마세요.”(손재준 1984, 302)라고 번역함으로써 ‘베드로의 부인’에 대한 상호텍스트적 맥락, 즉 아버지의 부인과 그로 인한 후회의 눈물이 완전히 간과됨을 비판하는데, 같은 실수는 강두식의 번역에서도 확인된다. 특히 두 사람 모두 ①의 heulen을 ‘울부짖다’가 아닌 ‘소리치다’로 번역함으로써, ②의 번역에서는 필연적으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②는 대략 ‘그렇게 울부짖다간 당신이 마신 술이 눈물로 나오겠다’라는 의미로 번역될 수 있을 터인데, 강두식의 번역에서는 ‘heulen’의 번역어를 ‘소리지르다’로 정함으로써 소리지르는 것과 눈에서 술이 나오는 것의 인과 관계를 살려낼 수가 없게 되었고, 손재준은 이 인과 관계를 찾을 수 없다 보니 아예 의역하는 쪽을 택한다.

안드리: ① 울부짖지 마세요. 
교사: 안드리- 
안드리: 가서 소변이나 보시지요. 
교사: 뭐야?  
안드리: ② 그렇게 취한 눈으로 울부짖지 마세요. 견딜 수 없으면 가시란 말이에요.   
교사: 날 증오하니? 
안드리: (침묵)  
        (교사는 가버린다.)  
바블린, 아버진 가셨어. 그렇게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진 않았는데, 점점 화가 나. 아버지가 말하는 소리 들었어? 자신이 뭘 말하는지도 몰라. 마치 우는 사람                  같았어……. 자고 있니?(김정용 2012, 56) 

다만 이 장면에서 성경과의 상호텍스트적 맥락을 찾아낸 김정용 또한 ② 문장은 손재준의 번역처럼 절충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는 ②를 직역함으로써 야기될 수 있는 어색함을 적당한 의역을 통해 상쇄하고 싶었던 것 같다.[12]


2) 김창활 역의 <안도라>(1977/1996)

해당 번역서의 마지막 페이지에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학과 졸업 후 강사, 극작가로 활동하였다고 소개된 김창활의 번역은 김정용의 번역과 함께 지금까지 서점에서 유통되고 있는 번역본이다. 김창활의 첫 번역은 1977년 ‘서문문고’에서 출판된 이래[13], 같은 출판사에서 1996년 개정판이 나왔다. 김정용은 논문에서 ‘손재준의 번역은 원작에 대한 이해, 한국어 표현, 오역의 정도 등의 측면에서 전공자가 번역한 훌륭한 번역’임에도 절판된 반면, 그보다 훨씬 많은 오류를 품고 있는 김창활의 번역만이 구입 가능한 상황을 개탄하면서, <안도라>의 중요성을 담보해주지 못하는 번역 현실을 통렬히 비판한다(김정용 2002, 310-311). 김정용은 특히 서문당에서 1977년 나온 첫 번역이 전혀 개선되지 않은 채 1996년 개정판으로 나온 것에 문제 제기하면서 김창활의 번역 태도에 대한 김기선의 비판을 인용하고 동조한다.[14]

김창활이 번역한 독일 문학 작품의 수는 소설을 포함하여 열 제목이 넘으나 희곡 작품의 경우는 예외 없이 공연이 선행한다. 공연에서 사용된 대본들은 대개 학생/대학원생들을 통해 번역되는데 김창활의 번역본은 이들 대본과 토씨, 연결어, 어투 등의 차이를 제외하고는 거의 일치하고 있다. 만리장성의 경우도 프라이에 뷔네에서 사용된 유진옥 번역의 대본을 사용하며 부분적으로는 토씨, 연결어만 수정되나 경우에 따라서는 상당 부분 한국어 구어체에 적합하게 문체가 수정되어 있다.(김기선 1999, 145)

이 인용문에서 김기선은 김창활이 이미 공연된 공연 대본을 일부 수정하여 번역서로 출간하는 행태를 비판하고 있다. 사실 당시의 대본이 어떻게 번역되었는지 일일이 확인할 길도 없고, 또 이 대본들을 김창활의 모든 번역본과 꼼꼼하게 비교, 검토 및 대조하지 않는 한 김기선의 비판을 전적으로 수용할 근거는 없다. 특히 김기선이 <만리장성>을 제외하곤 구체적으로 관련 공연 대본이나 번역본을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안도라>와 관련해서 김정용이 김기선의 비판을 검증 절차 없이 전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맥락은 확인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그런데 이번 번역 비평을 수행하면서 김창활이 강두식의 초역을 상당 부분 참조했을 수도 있겠다는 가설을 세우게 되었다. 바로 위에서 인용한 6번째 장면, 강두식의 오해가 분명해 보이는 지점에서 김창활도 거의 똑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창활은 ① 문장은 “떠들지 마세요”(김창활 1996, 86)로, ② 문장은 “소릴 지르시면 눈에서 마신 술이 튀어나옵니다”(김창활 1996, 86)로 번역함으로써, 강두식의 번역과 동일하게 번역하고 있다.

비슷한 상황은 다음 부텍스트의 번역에서도 재현된다.

Barblin will schreien, aber der Mund wird ihr zugehalten. Stille. Andri erwacht.(Frisch 1975, 51. 밑줄 및 강조는 필자 표기)

바르쁠린이 고함을 치려 한다. 그러나 입이 막혔기 때문에 소릴 지르지 못한다. 안드리가 깬다.(강두식 1980, 443. 밑줄 및 강조는 필자 표기) 

바르플린이 버둥거리며 고함을 치려 한다. 그러나 입이 막혔기 때문에 소리를 지르지 못한다. 안드리가 깬다.(김창활 1980, 79. 밑줄 및 강조는 필자 표기) 

밑줄 친 부분은 강두식의 의역에 해당한다.[15] 그런데 김창활도 거의 똑같이 번역했다. 두 번역자가 ‘Stille’, 즉 한 개의 명사를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한다’라고 거의 똑같이 의역할 확률이 그다지 높지 않다면, 이 번역 사례도 위의 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3) 손재준 역의 <안도라>(1984)

1984년 출간되었으나 이후 절판된 손재준의 번역은 <외더란트 백작>이라는 표제 하에 민음사 이데아 총서 중 하나로 출간되었다. 이 작품집에는 <만리장성>과 표제작인 <외데란트 백작> 그리고 <안도라>가 수록되어 있다. 상기한 것처럼 김정용은 김창활의 번역과 손재준의 번역을 비교하면서, “전공자가 번역한 훌륭한 번역”이라고 평가한다(김정용 2002, 311). 일례로 가장 최근의 번역자인 김정용을 제외하면 이 작품의 주제어라 할 수 있는 ‘Bildnis’를 정합하게 번역하고 있는 유일한 번역자도 손재준이다.

PATER Du sollst dir kein Bildnis machen von Gott, deinem Herrn, und nicht von den Menschen, die seine Geschöpfe sind. Auch ich bin schuldig geworden damals. Ich wollte ihm mit Liebe begegnen, als ich gesprochen habe mit ihm. Auch ich habe mir ein Bildnis gemacht von ihm, auch ich habe ihn gefesselt, auch ich habe ihn an den Pfahl gebracht.(Frisch 1975, 65. 밑줄 및 강조는 필자 표기)     
신부: 당신의 신 하느님에 대해서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될 것이다. 그분의 피조물인 인간에 대해서도 환상을 가져선 안될 것이다. 그 당시엔 나도 죄를 졌다. 나는 그와 이야기할 때 그를 사랑으로써 대하고자 했었다. 나 역시 그에 대한 환상을 가졌었다. 내가 그를 꽁꽁 묶었구나. 내가 그를 또한 교수대로 인도했구나.(강두식 1980, 450. 밑줄 및 강조는 필자 표기)   
신부: 너는 너의 주님이신, 신의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신이 만드신 인간의 우상이 되어서도 아니된다. 나도 그 당시 죄를 지었읍니다. 그와 만나서 이야기를 했을 때 나는 그를 사랑으로 대하려고 했었습니다. 나도 그의 우상이 되었었읍니다. 그를 함께 결박하였으며, 그를 기둥에 묶게 하였었읍니다.(손재준 1984, 310. 밑줄 및 강조는 필자 표기)   
신부: 당신의 하느님, 천주님에 대해서 잘못된 생각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 그분의 피조물인 인간에 대해서도 잘못된 생각을 가져선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엔 저도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그와 이야기할 때 그를 사랑으로써 대하고자 했었습니다. 그러자 저 역시 그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도 그를 꽁꽁 묶은 것이고, 저도 또한 그를 교수대로 끌어간 것이었습니다.(김창활 1996, 98. 밑줄 및 강조는 필자 표기)   
신부: 너의 주님이신 하나님의 우상을 만들지 마라. 그리고 그의 창조물인 인간의 우상을 만들지 마라. 저도 당시 죄를 지었습니다. 그와 이야기를 했을 때, 전 그를 사랑으로 대하려고 했습니다. 저 역시 그의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를 결박하였으며, 그를 기둥에 묶었습니다.(김정용 2012, 65. 밑줄 및 강조는 필자 표기)    

신부의 이 참회에는 <안도라>의 주제가 함축되어 있다. 그래서 여기서 ‘Bildnis’의 번역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면서도 번역자의 고민과는 별개로 이 단어에 대한 번역 선택지는 한정적이다. 왜냐하면 신부 대사의 첫 문장은 십계명이 수록된 출애굽기 20장 4절[16]의 일부를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과의 상호텍스트적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십계명에서 채택된 단어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포괄적 관점에서는 ‘환상’(강두식)이나 ‘잘못된 생각’(김창활)을 완전히 틀린 번역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단어들은 프리쉬가 의미하는 ‘Bildnis’의 다층적 의미를 담기는 역부족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번역어는 성경 문구의 인용과 변용을 전혀 드러내지 못한다. 반면 손재준은 ‘Bildnis’의 번역어 채택뿐만 아니라, 앞 문장과 뒷 문장의 어미를 반말체/경어체로 배치함으로써 성경 문구 인용을 부각한다. 김정용의 번역은 손재준의 번역을 대부분 존중하면서도,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첫 두 문장을 아예 십계명처럼 명령형으로 처리하여 성경 문구의 인용을 더 분명하게 드러내는 효과를 노린다.

이런 그의 번역에도 오류는 있다. 김정용은 논문에서 손재준(경우에 따라서는 김창활 번역 포함)의 번역에서 나타난 언어적 오류(주로 어휘), 문화적 오류(검은색 상징, 베드로의 부인에 관한 상호텍스트적 맥락), 형식적 오류(‘모델’에 관한 설명과 제목에 덧붙이는 극형식의 부연 설명 부분 누락)에 대해 순차적으로 짚어나가면서 <안도라> 번역의 개선 가능성을 타진한다. 여기서는 김정용이 지적한 문화적 오류 중 ‘색 상징’과 관련된 부분을 검토해 본다.

이 작품의 첫 장면에서 바블린은 마을을 하얗게 칠하고 있다. 이미 해당 장면에서 군인에 의한 강간, 검은 군대의 침략에 대한 언급, 안드리와 바블린의 불행 등이 예견되고 있다는 점에서 바블린이 마을을 하얗게 칠하는 행위는 반어적인 복선의 성격을 띤다. 극 말미에 자신은 강간당했고, 안드리는 처형당했으며, 아버지는 목을 매 자살해 제정신이 아닌 채 바블린이 다시금 마을을 하얗게 칠하는 장면이 아이러니하게 반복, 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극적 배치를 고려하면 흰색/검은색은 프리쉬가 이 작품에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색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에서는 총 36번 ‘schwarz’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 형용사 대부분이 검은 군대와 관련된 것이기에 ‘검은’이라는 뜻으로 번역하는데 큰 이견이 없다. 그런데 김정용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손재준은 다음 두 장면에서 ‘schwarz’를 ‘검은’으로 번역하지 않고, 다른 번역어를 선택하고 있다.

SENORA […] Ich muß. Ich bin eine von drüben, du hörst es, wie ich sie verdrieße. Eine Schwarze! So nennen sie uns hier, ich weiß...(Frisch 1975, 79. 밑줄 및 강조는 필자 표기) 
여인: […] 난 가야 돼. 난 건너 나라에서 온 여자거든. 나 때문에 분노하고 있는 저 소리 들리지 않아? 더러운 년! 이곳에선 우리를 어떻게 부르고 있지......?(손재준 1984, 325. 밑줄 및 강조는 필자 표기)

여인: […] 난 가야 한다. 난 저 너머에서 온 여자거든. 나 때문에 그들이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 넌 들리지도 않니? 검은 여자! 여기선 우리를 그렇게들 부르고 있지. 나도 알고 있단다.(김정용 2012, 82, 밑줄 및 강조는 필자 표기)

우선 이 번역에서 ‘검은’의 의미는 안드리의 엄마인 ‘여인’의 정체성과 관련된 중립적인 표현이라는 점에서, ‘더러운 년’은 오역이 된다(이어지는 문장도 정합하게 번역되진 못했다).

BARBLIN WO, Pater Benedikt, bist du gewesen, als sie unsern Bruder geholt haben wie Schlachtvieh, wie Schlachtvieh, wo? Schwarz bist du geworden, Pater Benedikt...(Frisch 1975, 127. 밑줄 및 강조는 필자 표기)
바브린: 신부님, 어디 계셨지요? 놈들이 오빠를 짐승처럼 끌어갈 때, 어디 계셨어요? 짐승처럼 끌어갈 때 말에요. 신부님도 놈들과 한 패가 되신 거지요. 베네딕트 신부님......(손재준 1984, 373. 밑줄 및 강조는 필자 표기)

바블린: 베네딕트 신부님, 그들이 오빠를 도살장 짐승처럼 끌고 갔을 때 당신은 어디에 계셨죠? 도살장 짐승처럼 말이에요. 어디에 계셨느냐고요? 당신도 검어졌군요, 베네딕트 신부님.......(김정용 2012, 108. 밑줄 및 강조는 필자 표기)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바블린이 신부님에 대한 인상을 ‘검다’고 표현한 것을, ‘그들과 한패’가 되었다고 설명적으로 번역한 것도 번역자의 과도한 해석이 투영된 것이다. 김정용은 이와 같은 번역이 “문학적인 맛을 살리지 못한 채 밋밋하다는 인상”을 준다고 지적하면서, 그 원인을 “번역자가 프리쉬의 색을 이용한 상징기법에 별 의미를 부과하지 않았던 것”에서 찾는다. 무엇보다 이러한 번역이 “작가의 상징의도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독자의 상상력까지 빼앗은 경우”라고 지적하며, “상징성을 살리는 함축적인 번역을 통해 독자의 적극적인 해석행위와 독서행위가 유도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손재준의 번역에 대한 아쉬움을 표한다(김정용 2002. 316-317).


4) 김정용 역의 <안도라>(2012)

서울대학교 독어교육학과 교수로 재직한 김정용의 번역은 2012년 ‘SNUP동서양의 고전’ 시리즈 중 하나로 서울대 출판부에서 출간되었다. 상기한 것처럼 그는 이 번역을 내놓기 전 <안도라>의 논문 연구를 통해 기존 번역이 지닌 문제점을 꼼꼼하게 검토하였고, 이를 번역 이론과 접목하여 논문 형식으로 발표한 바 있다. 따라서 <안도라>에 대한 그의 번역 의도는 “연극 공연과 강의 그리고 연구대상으로 지속적으로 회자되는 <안도라> 작품의 중요성에 비추어 보면, 작품 번역은 이에 미치지 못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는 진단에서 찾아진다(김정용 2002, 310). 다른 사람의 번역을 꼼꼼히 검토했을 그는 자신이 발견하고 분석한 문제점들을 상당 부분 번역서에 반영한 듯하다. 우선 그는 자신의 논문에서 타 번역본이 범하고 있는 ‘형식적 오류’, 즉 ‘부텍스트에 신경을 쓰지 않아 생략한 경우가 몇 군데’ 중에서도 ‘가장 치명적인 오류’인 ‘작가 자신이 이 작품의 모델극적인 성격을 밝힌 부분[17]을 등장인물 아래 다음과 같이 번역하여 삽입했고, 다른 세 번역본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은 번역 저본도 ‘일러두기’를 통해 정확히 명기한다.

Das Andorra dieses Stücks hat nichts zu tun mit dem wirklichen Kleinstaat dieses Namens, gemeint ist auch nicht ein andrer wirklicher Kleinstaat; Andorra ist der Name für ein Modell. M. F.
이 작품의 안도라는 실제 소국 안도라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또한 또 다른 실제 소국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안도라는 하나의 모델을 보여주는 이름이다.(김정용 2012, 2) 	

김정용의 번역본은 전반적으로 읽기에 무리가 없는 번역이다. 무엇보다 소리 내어 읽어보면 대사의 리듬이 살아 있어 바로 공연 텍스트로 사용한다고 해도 크게 손볼 일이 없을 것 같다. 그의 번역이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논문에서 요구한 것처럼 그 스스로가 ‘성실’하고 ‘원문 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깊은’ ‘해당 작품의 연구자’인 동시에, 그가 희곡 언어의 특징은 무엇인지, 희곡 번역에서 어떤 부분을 고려해야 하는지 정확히 의식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자신의 번역에서 실천하려고 정주했기 때문일 것이다(김정용 2002, 305-309).

다만 문제 제기, 고민, 분석, 성찰과 같은 기나긴 수행의 과정을 거친 그의 번역도 완전히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6번째 장면 아버지와 안드리의 대화 번역에서도 사소한 실수가 확인되었으며, 논문에서 반드시 제목 아래 표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12장면 극 Stück in zwölf Bildern”은 그의 번역서에도 누락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드라마의 부텍스트의 중요성에 대한 그의 예리한 통찰 또한 그의 번역서에 온전히 반영되진 못한 것 같다. 그 또한 부텍스트의 ‘Jetzt’ 번역은 상당 부분 누락하였고, ‘Stille’는 기계적으로 ‘고요’라고 번역하고 있다. ‘무대 전면 Vordergrund’의 텍스트 배치에 관해서는 다른 번역자들의 잘못된 관행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원작에서 줄바꿈 되어 있는 상당 부분의 지문은 줄바꿈 없이 소괄호 안에 넣어 긴 대사에 편입시켜, 지문의 ‘독립성’을 보장해 주지 못했다. 물론 이 중 일부는 번역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편집 과정에서 일어난 일일 수도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사소한 실수 또는 간과들은 독일어와 한국어 모두에 탁월한 식견이 있고, 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으며, 다른 사람의 선행 번역을 열심히 연구하였고, 번역학에 대한 이해와 드라마 장르에 대한 이해가 깊어도 완벽한 번역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보여주는 서글픈 증거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3. 평가와 전망

우선 이번 번역 비평을 통해 번역 비평 자체의 의의에 대해 재고해 볼 수 있다. 본 번역 비평의 레퍼런스로 삼고 있는 김정용의 논문은 두 가지 관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첫째, 그의 논문은 번역 비평과 유사한 기능을 행한다. 둘째, 그러면서도 논문의 저자가 이후 해당 작품을 직접 번역했다는 점에서 이 논문은 한 번역자의 번역 기획이나 번역 지평으로 읽힐 여지가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논의를 수렴해 볼 때, 그의 논문이 이 번역 비평에 던지는 시사점은 두 가지이다. 첫째, (우리가 하는) 번역 비평은 번역 역량을 제고할 수 있는 생산적인 작업이다. 둘째, 판권이 있는 책들의 경우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한 작품에 대한 다양한 번역종의 공존은 장기적으로는 번역 환경을 개선하고, 독일어와 한국어의 관계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더하며, 종국에는 (번역) 한국어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권장될 필요가 있다. 물론 후자는 실질적으로는 번역 비평과의 조우 속에서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점에서 두 시사점은 상보적이며 서로 완전히 독립될 수 없는 관계라 할 것이다.

아울러 이번 번역 비평에서는 드라마 번역에서 나타날 수 있는 특수한 문제들을 ‘부텍스트’의 관점에서 소환해 보았다. 프리쉬 자신도 공감하고 있는, 현대 작가들 전반에 나타나는 언어에 대한 회의를 그는 <안도라>에서 부텍스트의 적극적 활용을 통해 상쇄하고 있다. (극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서) 바블린이 무대를 하얗게 칠하는 상징적 행위나 자기에게 가해지는 끊임 없는 편견과 맞서던 안드리를 자포자기하게 하는 결정적 사건인 군인의 바블린 강간, 정체성을 상실한 안도라 사람들의 ‘환복’ 행위 등은 대사를 통해서보다는 부텍스트를 통해서 구현되고 있다. 이것은 드라마의 ‘부텍스트’가 결코 ‘부’차적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명백한 전거가 된다. 그러나 상기한 번역 사례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처럼, 심혈을 기울인 번역에서조차 부텍스트가 종종 명확히 번역되지 않거나, 생략되는 경우가 있었다. 따라서 미래에 도래할 <안도라> 번역에서는 이런 부분에 대한 고려가 더 세심히 이뤄져야 할 것을 기대해 본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강두식(1970): 안도라. 現代世界戱曲選集. 同和出版公社.

강두식(1980): 안도라. 現代世界戱曲選集. 同和出版公社.

김정용(2012): 선택된 인간.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김창활(1977): 안도라. 서문당.

김창활(1996): 안도라. 서문당.

손재준(1984): 안도라. 외덜란트 백작 외. 민음사.


5. 참고문헌

Frisch, Max(1975): Andorra. Frankfurt a. M..

김기선(1999): 한국 연극계의 막스 프리쉬 수용. 브레히트와 현대연극 7, 141-171.

김정용(2002): 희곡 번역의 이론과 오류 분석 -막스 프리쉬의 『안도라』를 중심으로-. 독어교육 23, 303-327.

여석기(1970): 해설: 現代戲曲의 世界. 現代世界戱曲選集. 同和出版公社.


양시내

바깥 링크

  1. 1990년대 후반 김기선의 조사에 따르면 국내 유수의 대학에서 독일희곡 관련 수업 교재로 사용하는 작품 중 괴테의 <파우스트>와 뒤렌마트의 <노부인의 방문>의 뒤를 이어 커리큘럼으로 가장 빈번히 거론되는 작품이 <안도라>였다고 한다. 이는 이 작품이 지닌 장점, 즉 문학성과 시의성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언어적으로도 난해하지 않은 텍스트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김기선 1999, 145-146).
  2. 물론 이것은 상당 부분 <안도라> 텍스트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특징, 즉 이 작품에서의 부텍스트가 기존에 다뤄왔던 드라마 텍스트에서의 부텍스트보다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는 다시금 작가의 집필 의도와 관련된다 볼 수 있을 것이다)과도 무관하지 않다.
  3. 텍스트 층위에서 드라마를 구성하는 세 요소는 해설, 지문, 대사이다. 여기서 플롯을 견인하고, 배우에 의해서 ‘발화’되는 대사는 ‘주텍스트 Haupttext’, 주텍스트를 제외한 나머지 요소들은 부텍스트라고 한다.
  4. 실제 이 작품에서는 ‘jetzt’가 총 94번 나온다. 주어캄프에서 출판된 독일어 원서 기준 거의 한 페이지에 한 번씩 ‘jetzt’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이다. ‘지금’이라는 부사가 시간적 제한을 둠으로써 임의적인 가변성을 강조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Jetzt’는 단순히 특정한 ‘한 때’를 의미한다기보다는 불가변한 진실이 아닌 그때그때 달라지는 유동적인 상황이나 인간의 불완전한 정체성을 구현하는 데 일조한다고 볼 수 있다.
  5. 이 인물들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캐릭터를 지닌 인물이 아닌 브레히트적 의미에서 게스투스적 인물에 가깝다. 따라서 ‘환복’ 행위 또한 캐릭터의 불연속성 또는 파기와 연관성을 맺고 있다.
  6. 손재준을 제외한 모든 번역자가 이 인물을 ‘낯선 사람/낯선 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 또한 프리쉬의 연극관을 간과한 번역 결과라 할 수 있다.
  7. 해당 작품집에 수록된 작품 목록은 다음과 같다: 올비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서로이안 <거기 누구 없소>, 핀터 <생일 잔치>, 볼트 <사계절의 사나이>, 베케트 <마지막 테이프>, 아누이 <도적들의 무도회>, 아라발 <기도>, 이오네스크 <수업>, 주네 <엄중한 감시>, 뒤라스 <라 뮤지카>, 프리시 <안도라>, 뒤렌마트 <물리학자들>.
  8. 1970년 초판과 1980년 재판은 대동소이하다.
  9. ANDRI Mich interessiert mein eignes Leben. Hähne krähen. Jetzt krähen schon die Hähne. […] LEHRER ich hab gelogen. Pause Du willst mich nicht verstehn... Hähne krähen.(Frisch 1975, 55)
  10.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것처럼, 교사도 세 번에 걸쳐, 즉 안도라 사람들 앞에서, 부인 앞에서 그리고 안드리 본인 앞에서 안드리의 존재를 부인한다.
  11. 이 문장은 모든 번역자가 직역하여 ‘가서 오줌을 누라’라는 의미로 번역하고 있는데, 속어적으로는 ‘꺼져라’라는 의미로 번역되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12. 원문의 해당 장면에서 안드리의 어조는 매우 공격적이고, 무례한데 반해(이는 분명 안드리가 자기의 고유한 정체성을 정립하기를 포기하고, 자신에게 강요된 상을 받아들이는 자포자기 상태에 이르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행동 반응일 것이다) 번역에서는 이러한 공격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도 이 부분의 번역이 지닌 문제점이다.
  13.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이나 리스 상에는 ‘1972년’ 발행되었다고 등록된 버전이 있으나, 해당 본을 소장한 도서관을 모두 검수한 결과 1977년 출판된 것의 오기였음이 확인되었다.
  14. “김창활의 번역본은 1974년 초판이 발행되었고, 1996년에는 개정판으로 서문당에서 발행되었다. 그러나 이 초판과 개정판을 비교해 보면 실제로 번역의 내용이 개정된 곳이 전혀 없는 실정이다. 아울러 김창활의 번역본은 오역투성이어서 번역오류를 분석한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을 정도이다.”(김정용 2002, 310-311)
  15. Stille’를 ‘고요가 깃든다’(손재준, 296)나 ‘고요’(김정용 2012, 51)로 번역한 다른 번역자와 달리 강두식은 이러한 단어들이 바블린의 상황을 담아내기에는 부족했다고 판단했던 듯하다. 참고로 이 부분은 부텍스트의 번역 문제와 관련해서도 주목해볼 만한 지점이다. <안도라>에는 총 14번 Stille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대부분 폭풍전야나 태풍의 눈과 같은 긴장감이 감도는 조용한 분위기와 관련된다. 특히 여기서의 ‘Stille’는 바블린이 성폭행을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연출되는 고요라는 측면에서 상당히 반어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런 맥락에서 부텍스트에서의 ‘Stille’도 상기한 ‘jetzt’처럼 ‘적극적으로’ 번역될 필요가 있다.
  16. “Du sollst dir kein Bildnis noch irgendein Gleichnis machen, weder von dem, was oben im Himmel, noch von dem, was unten auf Erden, noch von dem, was im Wasser unter der Erde ist: Bete sie nicht an und diene ihnen nicht!”(Luther Bibel. Mose 20:4)
  17. 모든 번역자가 이 부분의 번역을 누락했다는 김정용의 주장과 달리 김창활은 이 부분을 따로 표기하는 대신, 1974년 및 1996년 번역본 서두 번역자 해설에 편입시켰다. “극의 서문에서 프리시는, 사건이 일어난 곳 ‘안도라’는 그 이름을 가진 사실상의 어떤 국명(國名)과는 아무 관련이 없으며, 악의 상징인 ‘검은 나라’의 유니폼도 과거의 어느 특정적인 사실을 상기시켜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김창활 1996,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