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성 없는 남자 (Der Mann ohne Eigenschaften)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로베르트 무질(Robert Musil, 1880-1942)의 소설

특성 없는 남자 (Der Mann ohne Eigenschaften)
작가로베르트 무질(Robert Musil)
초판 발행1930/1931
장르소설


작품소개

로베르트 무질의 장편소설이며 1930년에 1권이 출간되었고 1932년에 2권이 출간되었다. 1권은 1부 1-19장과 2부 20-123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2권은 3부로 1-38장이다. 각 부와 매 장마다 소제목이 있어서 일종의 안내자 역할을 한다. 무질은 1913년 8월부터 1914년 7월, 1차 세계대전 발발까지 일 년을 소설의 시간적 배경으로 구상했으며, 공간적 배경은 "카카니엔"으로 불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수도인 빈이다. 1942년 작가의 사망으로 소설은 미완성으로 남았고, 작가 생전에 출판된 판본에서 이야기되는 시간은 대략 1914년 초반 정도까지이다. 전체적으로 전지적 시점에서 서술되는데 철학적인 면모가 두드러지는 ‘에세이’적인 장에서는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변환되며, 많은 경우 서술자의 시점이 주인공 울리히의 시점과 같다. 소설이 상당 부분 울리히를 비롯해서 등장인물의 의식적인 생각에 집중하면서 그것을 드러내는 대화로 이루어진 사유 중심의 소설이기 때문이다.

1부에서는 주인공인 울리히의 가계와 성장 과정 및 그의 세계관이 이야기된다. 울리히는 군인, 공학자, 수학자로의 교육을 받았으나 직업을 포함하여 자신의 사회적 존재를 규정하는 좌표들을 갖지 않는 '특성 없는 남자'로 남기로 한다. 적극적으로 수동적인 그의 입장은 현실에 비판적인 '가능성 감각 Möglichkeitssinn'으로 집약된다. 자수성가한 법률가인 아버지는 합스부르크 왕가를 구심점으로 하는 사회질서에 편입하도록 채근하고 울리히는 "평행운동 Parallelaktion"에 명예사무총장으로 참여하게 된다. 2부는 평행운동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평행운동은 1918년에 있을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즉위 70주년을 거국적인 행사로 준비하는 애국 운동이다. 울리히의 사촌뻘인 디오티마의 살롱을 중심으로 회의와 회동을 반복하지만 모든 것을 포괄하는 최고의 이념을 찾지 못하고, 하나둘 모여든 엘리트들은 서로 다른 입장만을 확인한다. 라인스도르프 백작, 디오티마, 아른하임이 평행운동의 구심점을 이루는데, 특히 아른하임은 대부호이자 대저술가이며 심지어 미적 감각마저 갖춘 인물로 세계관과 가치관에서 울리히와 대척점을 이룬다. 아른하임은 '영혼과 돈이 합쳐지고 이상과 권력이 하나로 뭉치는 것'을 당연시하며 현실의 권력 관계와 기존 질서에 찬동한다. 이 외에 울리히와 교류하는 레오 피셸의 가족, 학창시절 친구인 발터와 클라리세 부부, 군인 시절 상사였던 슈툼 폰 보르트베어 장군 등이 2부에서 뻗어 나가는 이야기들에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울리히의 활동 반경 밖에 인물로는 매춘녀 살해범 모스부르거가 있다. 안과 밖, 현실과 상상, 망상과 인식의 경계가 무너진 인물로 그의 책임능력 여부에 대한 사법적 판단, 정신의학적 진단, 언론과 대중의 관심이 또 하나의 이야기를 이룬다.

3부에서 울리히는 아버지의 장례식을 계기로 유년기 이후 떨어져 살던 누이 아가테와 재회한다. 오누이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샴쌍둥이처럼 닮았다고 느끼고, 울리히는 아가테한테서 자신과 완벽히 어울리는 존재를 알아본다. 아가테는 염오하는 남편인 하가우어를 떠나서 울리히의 집으로 들어오고 둘은 도덕의 인습을 뛰어넘어 합일에 이르는 "다른 상태 Der andere Zustand"를 지향한다. (작가가 남긴 유고에 의하면 그들은 근친상간적인 뉘앙스를 띠는 '분열이 극복되고 합일의 상태 속으로 지양된 유토피아'적인 관계를 '한순간' 맺는다). 3부에서는 울리히와 아가테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는데, 울리히는 새로운 의미의 사랑을 의식하면서 그 전까지 가졌던 아이러니한 태도에서 멀어져 좀 더 진지한 태도로 옮겨간다. 평행운동은 그 사이 참여자들이 늘었는데 그만큼 더 관념들만 즐비할 뿐 어떤 결과에 다다르지 못한다. <특성 없는 남자>는 미완임에도 불구하고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함께 20세기 유럽의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발전과 진보에 대한 작가의 날카로운 문제의식, 현대사회와 현대인의 분열적 상태에 대한 예지력 있는 분석이 에세이즘적인 서술 방식과 어우러진 기념비적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에서는 부분적으로 번역되어 출판되다가 2022년에 신지영의 번역으로 처음 완역 출간되었다(나남).


초판 정보

Musil, Robert(1930): Der Mann ohne Eigenschaften. Erstes Buch. Berlin: Rowohlt Verlag.

Musil, Robert(1932): Der Mann ohne Eigenschaften. Zweites Buch. Berlin: Rowohlt Verlag.



번역서지 목록

번호 개별작품제목 번역서명 총서명 원저자명 번역자명 발행연도 출판사 작품수록 페이지 저본 번역유형 작품 번역유형 비고


번역비평

1. 번역 현황 및 개관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나란히 유럽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현대의 고전으로 평가된다. 무질은 1930년에 1부와 2부로 이루어진 1권을 출간했고, 1932년에 2권 3부를 미완결 상태로 출간했다. 무질은 이후에도 작품의 완성에 매달렸으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소설은 미완성의 상태로 남았다. 1942년 4월 망명지인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뇌출혈로 쓰러진 날 오전에도 책상에서 소설의 원고를 손보고 있었다고 한다. 무질은 엄청난 양의 유고를 남겼고, 작가의 사후 1943년에 아내인 마르타 무질이 유고를 정리하여 출간한 바 있다. 국내에서는 현재까지 작가가 생전에 발표한 1권과 2권을 기준으로 완역의 여부를 말한다.

미완성이지만 이 소설은 출판 당시에 이미 1,600페이지를 넘는 분량이었다. 독일어권에서도 이 소설을 통독한 독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분량도 방대하지만, ‘아이러니’와 ‘에세이즘’으로 집약되는 무질의 독특한 사유와 난해한 문체가 소설을 읽는 즐거움을 쉽게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더하여 특이한 조어, 낯선 비유, 복합문 등이 만드는 언어의 미로는 번역으로 살리기가 몹시 어려워서 한국어로 이 소설을 읽을 독자를 위한 번역은 오랫동안 이루어지지 못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율리시스>가 20세기가 끝나기 전에 완역된 데 비해 훨씬 늦은 2010년에 비로소 <특성 없는 남자>의 초역이 출간되었다. 고원의 <특성 없는 남자 1>로 원작 1권의 74장까지 번역한 중도역(中途譯)이다.[1] 2013년에는 안병률이 원작의 1권에서 83장까지 번역하여서 <특성 없는 남자 1>과 <특성 없는 남자 2>로 각각 출간하였다. 그 후 안병률은 원작 1권을 끝까지 번역하여 2021년에 <특성 없는 남자 3>으로 출간했으며, 이에 병행하여 세 권을 합본하여 출간하면서 전작들을 소소히 수정하였다. 2022년에는 신지영이 완역한 <특성 없는 남자 1-5>가 출간되었다. 이 번역이 완역으로서는 초역이며,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의 일환으로 출간되었다. 2023년에는 박종대가 원작을 완역하였고, <특성 없는 남자 1-3>으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5권으로 출간되었다. 2024년에는 안병률이 원작의 2권을 번역하여 <특성 없는 남자 4>로 출간했는데, 이로써 안병률의 번역 또한 완역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이들 세 번역자는 십여 년이 넘는 시간을 <특성 없는 남자>의 번역에 바쳤다고 한다. 작가 로베르트 무질은 문자 그대로 죽는 날까지 필생의 역작을 썼고, 번역자들 또한 오랜 시간 열정을 품은 용기와 성실한 노고로 필생의 번역을 세상에 나오게 한 것이다. 이들은 모두 아돌프 프리제 Adolf Frisé가 편집한 로베르트 무질 전집(Gesammelte Werke in 9 Bänden) 중 1권 <Der Mann ohne Eigenschaften>을 저본으로 했으며, 안병률과 박종대는 소피 윌킨스 Sophie Wilkins의 영어 번역본도 참조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로써 <특성 없는 남자>는 아주 오랜 시간 번역을 기다린 후에 마침내 3종의 완역본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특별한 번역사를 갖게 되었다. 이는 독일어 문학의 국내 수용의 역사에서도 큰 성과라 할 것이다. 독일어 문학을 한국어로 옮기는 번역의 토양이 무르익고 풍부해진 방증이기도 하며, 국내 독일어 문학의 수용과 연구에서 오래된 숙제가 드디어 해결된 의의도 크고, 전문가들의 담론장에서만 회자되어온 로베르트 무질의 작품세계가 한국의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지는 토대가 마련된 의미도 있다.


2. 개별 번역 비평

밀란 쿤데라는 <특성 없는 남자>를 다시 읽고 싶을 때면 그저 손이 가는 대로 아무 페이지나 열어서 읽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각 장이 그 자체로 놀라움이며 발견”이기 때문이다.[2] 한국어 번역자들도 입을 모아 <특성 없는 남자>가 ‘사유 소설’이며 줄거리보다 한 장 한 장에 담긴 사유가 돋보인다고 말한다. 고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책을 독파하려는 독자는 결국 완독에 실패할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선택적인 독서”를 추천한다(고원, 514). 실제로 이 소설책을 통독한 사람이라면 끝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에 놀라는 한편, 모든 것이 이해되기를 요구하는 것에 현기증을 느낄 것이다. 무질은 이야기가 하나의 “줄기 Faden”(650)를 따라가는 전통적인 서사를 버리고, 무한히 연결되면서 생겨나는 “면 Fläche”들, 들뢰즈식으로 말하면 리좀처럼 퍼져나가는 서사를 실험한다. 하나의 어휘도 접합과 접목, 접속하기에 따라서 의미의 가능성에 열려있다.

[...] so wie das eine Wort Hart, je nachdem, ob die Härte mit Liebe, Roheit, Eifer oder Strenge zusammenhängt, vier ganz verschiedene Wesenheiten bezeichne, [...](250 f.)[3] (이하 모든 밑줄 강조는 필자)

여기서 서술자는 어휘 “Hart”의 사전적인 뜻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강함”이 “사랑, 조야함, 열성, 엄격함” 중 무엇과 연결되느냐에 따라서 네 개의 완전히 다른 본질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번역자들도 hart에 상응하는 적절한 역어의 선택과 결정에 있어서, “견고함”(고원, 378), “지독한”(안병률 2권, 124), “단단하다”(신지영 2권, 119), “지독하다”(박종대 1권, 388) 등으로 차이를 보인다. 이 어휘들은 모두 사랑, 조야함, 열성, 엄격과 결합될 수 있고 그때마다 말의 몸을 바꾼다. 요컨대 어떤 것도 오역이 아니면서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다르다. 때로는 어휘를 도착어로 어떻게 변환하는가에 따라서 4종의 다른 문장이 되기도 한다.

일이 우리를 수중에 넣었다. 우리는 이 안에서 밤낮으로 움직이고 이 안에서 다른 일도 다 한다.(신지영 1권, 57)
우리는 속도에 얽매여 산다. 밤낮으로 빠르게 달리고, 다른 모든 일도 빠르게 처리한다.(박종대 1권, 46)
일이 우리를 안내하고 있는 것이다. 낮이고 밤이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 여행하며 그 안에서 다른 모든 것을 또 한다.(고원, 40)
우리는 일상의 손에 달려있다. 우리는 밤낮없이 일상으로 달려가며, 그 어떤 것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안병률 1권, 53)

밑줄 친 문장들은 “Die Sache hat uns in der Hand. Man fährt Tag und Nacht in ihr und tut auch noch alles andre darin”(32)를 번역한 것이다. 신지영의 번역은 die Sache를 “일”로 번역했고, 현대의 사람들에게 ‘일’이 생활의 기준이 되었다는 문장이 이어진다. 박종대의 번역에서는 같은 어휘가 “속도”로 옮겨졌고, 현대의 생활이 ‘빠르게’ 돌아간다는 문장이 뒤따른다. “일”, “속도”, 게다가 안병률 번역의 “일상”이라는 어휘는 거의 공통점이 없다. 원문에서도 die Sache는 이 맥락에서 저 맥락으로 바꿔가면서 사전적인 뜻으로 환원되지 않은 채, 상황이나 사실 혹은 사물로 유동하는 의미 가능성에 열려있다. 원작이 의미를 고정하지 않고 가능성의 영역을 탐색하기 때문에, 역자는 작가의 의도를 캐물어야 하고 행간을 읽는 해석 작업을 어렵게 해야 한다. 또 그렇게 하더라도 의미의 복수(複數)적인 가능성을 단수의 번역어로 재단해야 하기에 네 편의 번역서에서 그저 손이 가는 대로 한 장을 열어서 정독하다 보면 해당 번역자의 개성과 번역의 특징이 얼추 드러난다. 여기서는 번역자의 번역 의도가 실제 번역에 반영되는 것을 중심으로 개별 번역을 훑어보려고 한다. 4종의 번역을 비교하는 구체적인 사례는 주로 소설 전체의 축소판과도 같은 1장, 그 유명한 “카카니엔”이 나오는 8장, 울리히가 경찰서에 임의동행하는 40장, 에세이즘에 대한 사유가 나오는 62장 정도로 한정한다.


1) 고원 역의 <특성 없는 남자 1>(2010)

고원은 로베르트 무질의 초기 단편인 <조용한 베로니카의 유혹 Die Versuchung der stillen Veronika>로 학위논문을 쓴 독문학자로 전위적인 구체시를 쓴 시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고원은 원래 총 3권으로 완역을 구상하였으며, 책의 제목에 첫 번째 권임을 표시했는데 후속 번역이 따르지는 않았다.

<특성 없는 남자>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인 1장은 새로운 서사의 가능성을 시도하는 작가의 문제의식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내용은 1913년 8월의 어떤 날 빈(Wien)의 번화한 대로를 걷는 상류층의 남녀 한 쌍이 교통사고가 난 현장을 목격하는 것이다. 소설의 시간과 장소가 제시되며, 인물이 등장하고,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일견 소설이 이야기하기를 시작하는 관습을 따르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 작가는 서사의 전통과 결별하는 서술적 실험을 한다. 서술자가 서술하는 한편 그 내용을 상대화하고 심지어는 ‘아무것도 아니야’는 식으로 회수하는 것이다. 시공간은 특수하지 않고 인물은 특정되지 않으며 사건은 특별나지 않다. 숙녀와 신사의 존재는 밝혀지지 않고, 교통사고는 지침에 따라서 처리되고 잊힌다. 1장의 제목도 “Woraus bemerkenswerterweise nichts hevorgeht”로, 관계부사 woraus가 이끄는 종속문만 있을 뿐 주절이나 주어가 없다. 이 문장을 네 명의 번역자는 뉘앙스를 달리하면서 옮긴다.

주목할 만한 방식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안병률 1권, 11) 
여기서는 어떤 일도 주목할 만한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는다.(박종대 1권, 11)
주목할 만하게도, 여기서는 아무 일도 더 일어나지 않는다.(신지영 1권, 23)

안병률과 박종대의 번역은 부분 부정으로 읽힌다. 일의 성격이나 일어나는 방식 때문에 주목할 필요가 없거나, 혹은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태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안병률과 박종대가 “주목할 만한 방식으로는”, “주목할 만한 방식으로” 등 명사구를 만든 데 비해서 신지영의 번역은 “주목할 만하게도”를 부사구로 만들어 쉼표 뒤의 문장 전체를 수식한다. 그래서 이 번역은 전체 부정으로 읽힌다.[4] 고원의 번역은 위 세 번역과 결을 달리한다.

어떤 주목할만한 방식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가.(고원, 5)

이 제목은 의문부호를 일부러 생략한 의문문인지 혹은 의문형 종결어미 “~않는가”를 수사적으로 사용한 평서문인지 애매하다. “어떤”이라는 관형사를 부가했고 “주목할만한”을 형용사로 써서 명사 “방식”을 두 번 수식하기 때문에 약간 혼란스러운 느낌이 들기도 한다.

1장의 첫 문단은 기상 분석으로 시작하는데, 학술적 보고서나 일기도처럼 기압, 기온, 습도를 관측하고 관찰된 데이터를 천문학 연감과 비교한다.

대서양 위에서는 바로미터의 최저치가 자리잡고 있었다. [...] 저기압 [...] 고기압 [...] 등온선과 등서선 [...] 온도는 연중기온 [...] 불규칙한 온도변화 [...] 해뜨는 시각과 해지는 시각, 달뜨는 시각과 달지는 시각, 달과 금성 그리고 토성의 빛의 양의 변화 [...] 천문학의 달력 [...] 수증기는 최고치의 표면장력 [...] 습도는 낮았다. 약간 구식 같기도 하지만, 사실을 제대로 잘 나타내는 단어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때는 1913년의 아름다운 8월의 어느 날이었다.(고원, 5) 

고원의 번역은 기상학과 천문학에 쓰이는 전문적인 용어와 개념으로 이루어진 원문을 무난하게 잘 전달한다. 마지막에 서술자가 소설의 관습적인 도입부를 인용하듯이 시간을 알려주는 문장 “Es war ein schöner Augusttag des Jahres 1913”도 “때는”을 넣어서 매끄럽게 옮긴다. 그런데 첫 줄의 “바로미터의 최저치”는 “ein barometrisches Minimum”을 부분적으로 음차 번역을 한 것으로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독자에게는 난해하다. 바로미터는 ‘기압계’라는 등가어가 있고 번역자들은 “저기압”(안병률, 신지영), 혹은 “기압계상 최저기압”(박종대)으로 옮겼다. 이와 달리 ‘바로미터’로 옮긴 점은 역자의 어떤 주관적인 태도로 다가온다. 이런 경우는 “카카니엔”의 번역에서 다시금 나타난다.

멸망한 이 카카니엔에 대해 희한한 말들이 또 얼마나 많은가! 예를 들면 그 나라는 황제-왕국k.k의 나라 그리고 황제적이고 왕국적k.u.k.이었다. 그 약자 카카k.k. 또는 카운트카k.u.k의 하나를 그곳에서는 일이 있을 때마다 누구나 달고 다녔다.(고원, 42)[5]


여기서 역자는 “kaiserlich-königlich”를 “황제-왕국k.k”으로, “kaiserlich und königlich”를 “황제적이고 왕국적k.u.k.”으로 옮겨서 원문에 없는 k.k.와 k.u.k를 임의적으로 삽입한다. 아마도 이어지는 문장에 있는 약자인 “k.k. oder k.u.k.”를 “카카k.k. 또는 카운트카k.u.k”로 용이하게 음차 번역을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번역하면 알파벳 약자의 내용이 드러나지 않는다. 독일어를 모르는 독자라면 왜 “카카k.k”이고 “카운트카k.u.k”인지 모를 것이고, 알파벳을 King 혹은 Kingdom의 약자로 생각하거나 Kaiser(Emperor)를 떠올릴 것이다. 독일어를 배운 독자라면 “카”가 독일어 알파벳의 음가임을 알겠지만 역사적 배경을 모르면 ‘카카’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1867-1918)을 아이러니하게 지칭하는 약자임을 모를 것이다. 이처럼 역자가 언어적, 역사적 사실을 주석으로 설명하거나 보충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층을 독일어와 오스트리아의 역사를 알고 있는 이들로 국한하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역자가 독자의 이해를 그다지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원문의 독특한 문학적 표현을 살리는 효과가 발생하는 측면도 있다. 문장 “Städte lassen sich an ihrem Gang erkennen wie Menschen”(9)은 대도시 빈에서 발생하는 움직임을 사람의 걸음걸이로 비유하고 있는 문장인데, 역자는 “도시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특유의 걸음걸이가 있는 법이다”(고원, 6)라고 원문의 함축성이 잘 드러나도록 번역했다. 다만, 이런 사례로부터 고원의 번역이 등가성을 번역의 전략으로 삼아서 원문의 직역을 지향한다고 섣불리 유추하기는 곤란하다.

도시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특유의 걸음걸이가 있는 법이다. 두 눈을 뜨면서 그는 거리의 동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 방식에 따라 어떤 뚜렷한 세목을 통해 그것을 알게 되는 것보다 훨씬 빨리 똑같은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것을 하기 위해 다만 상상하기만 하면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것에도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이다.(고원, 6)

이 대목에서는 함축적인 첫 문장에 원문을 필요 이상으로 풀고 길게 설명하는 문장이 이어진다. 원문을 직역한 신지영의 문장은 “그럴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뿐이라도 해로울 것은 없다”(신지영 1권, 24)는 식으로 간결하며, 설명을 덧붙여도 “그게 가능하다는 생각이 착각이라고 해도 상관없다”(박종대 1권, 12)는 정도이다. 이렇듯이 고원의 번역은 종종 문장을 장황하게 하거나 늘어지게 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오스트리아라는 명칭이 국가적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폐기되었으나, 일상생활에서는 국명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유를 ‘감정이 국법만큼 중요하며 규정이 현실 생활의 진지함을 표현하지 않는다’라고 표현한 원문의 경우[6], 고원의 번역은 “그것은 국가의 법과 규정이 인생의 실제적 진지함을 의미하지 않는 것처럼, 감정 또한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고원, 42)로 원문의 내용을 전달하고는 있으나, 번역자가 상당히 주관적으로 원작의 문장을 읽고 번역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원의 <특성 없는 남자 1>은 이 작품의 초역으로 제목으로만 유명했던 소설의 실체를 한국의 독자들에게 처음으로 보여준 의의가 있다. 그가 번역한 제목인 “특성 없는 남자”는 그 후 국내 독문학자와 번역자에 의해서 표준제목으로 수용되었다. 그런데 고원의 번역에서는 원문의 다양한 의미 가능성의 탓으로 돌릴 수 없는 모호함과 애매함이 종종 나타나곤 한다. 1장의 교통사고 대목에서 만나게 되는 문장 “마치 죽은 듯 누워있는 한 남자가 보도의 턱으로 옮겨 놓인 상태의 빈자리로 조심스럽게 깊이 내려가고 있었다”(고원, 7)처럼 비문에 가까운 번역도 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에서 엄청났던 “민족들 간 투쟁 nationale(n) Kämpfe”를 “국가 간의 싸움”(고원, 42)으로 사실관계에 틀리게 번역하는 등 역자의 임의적이고 주관적인 판단이 앞서는 경향이 나타나서 초역의 한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2) 안병률 역의 <특성 없는 남자 1-4>(2013, 2021, 2024)

안병률은 출판인으로 그가 번역한 <특성 없는 남자 1-4>를 출간한 출판사 북인더갭의 대표이다. 번역자로서는 이 소설 외에도 몇 편의 번역서를 낸 바 있으나, 2013년, 2021년, 2024년에 순차적으로 출간한 <특성 없는 남자>가 가장 중요한 번역서일 것이다. 안병률은 매번 역자의 말에서 “좀 더 많은 대중들에게 다가가고 싶어서” 번역서를 펴내는 출판인의 면모를 보인다. 2013년에는 “가급적 각권의 분량을 가볍게 하여 누구라도 쉽게 독파하는 책”으로 만들고 싶어서 <특성 없는 남자 1>과 <특성 없는 남자 2>로 분권해서 편집했다고 밝히며, 2021년에 <특성 없는 남자 3>을 출간했을 때는 번역의 공을 독자의 관심과 후원으로 돌린다. 그리고 2024년에 원작의 2권을 완역한 <특성 없는 남자 4>에서도 독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요컨대 안병률은 가능한 한 많은 독자가 이 책을 ‘독파’하기를 바라면서 번역을 기획한 것이다.

독자를 염두에 두고 책을 만들었다는 독자 친화적인 방향성은 번역의 전략을 결정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고원이 “도시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특유의 걸음걸이가 있는 법이다”라고 번역한 문장을 안병률은 “도시란,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걷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안병률 1권, 12)라고 설명하는 식으로 옮겼다. 이 문장은 고원의 번역에 비해서 훨씬 읽기가 수월하다. 그런데 ‘도시의 걸음걸이’라는 은유적 표현이 갖는 말의 맛이 없어지는 아쉬움이 생긴다. 물론 원작의 어떤 부분들은 고도로 농축된 어휘, 특이한 어휘조합, 복합적인 문장 등이 있어서 힘들여 번역해도 이해하기 어렵고, 이런 까닭에 독자를 위해서 가독성을 높이는 번역이 불가피해 보이기도 한다. 일례로 차량과 보행자들로 붐비는 도로의 역동적 상태를 묘사하는 부분을 보자.

Autos schossen aus schmalen, tiefen Straßen in die Seichtigkeit heller Plätze. Fußgängerdunkelheit bildete wolkige Schnüre. Wo kräftigere Striche der Geschwindigkeit quer durch ihre lockere Eile fuhren, verdickten sie sich, rieselten nachher rascher und hatten nach wenigen Schwingungen wieder ihren gleichmäßigen Puls.(9)

Fußgängerdunkelheit, wolkige Schnüre. kräftigere Striche der Geschwindigkeit, lockere Eile. 이런 표현에 부딪히는 역자의 난감함을 상상해보라. 여기서 서술자는 광장의 도로에서 차량과 보행자들이 뒤섞였다가 흩어지는 모습을 속도의 차이와 밀도의 변화를 써서 추상적인 이미지로 만든다. 원문에 가깝게 번역한 신지영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자동차들은 좁고 깊은 거리에서 얕고 밝은 광장으로 튀어 나갔다. 어두운 색의 보행자 무리가 구름 같은 띠들을 형성했다. 완만한 속도의 이 띠들은 속도가 더 붙은 굵은 획들이 가로질러 달리는 곳에서는 잠시 두꺼워졌다가 그 후 더 빨리 흘러갔고, 몇 번 진동을 겪은 다음 다시 규칙적인 맥박을 되찾았다.(신지영 1권, 23) 

이 번역은 유일하게 보행자 무리가 주어인 원문을 제대로 살리고 있다. 보행자들이 빨리 내달리는 자동차들 때문에 걸음을 멈추면서 밀집도가 높아지고, 차들이 지나간 후 발걸음의 속도를 높여 흩어지고, 점차 보행의 속도가 규칙적으로 된다. 다만, 리듬과 박동의 이미지는 단박에 그려지지 않고 몇 번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내용이 전해진다. 이 장면을 안병률은 이렇게 옮긴다.

차들이 좁고 깊숙한 거리에서 밝은 광장의 평지로 달려나왔다. 보행자들의 검은 무리가 구름 같은 선을 이루었다. 속도가 만드는 힘찬 선이 차들의 부주의한 조급함을 가로지르는 곳에서 차들은 뒤엉켰고, 이내 빠르게 흐르다가, 잠시 동요하더니 다시 그들의 일반적인 흐름을 되찾았다.(안병률 1권, 11-12)

안병률의 번역은 문장의 내용을 독자가 알기 쉽도록 가공하여 전달한다. 신지영의 번역과 비교하면 원문에 없는 “차들의 부주의한 조급함”이 삽입되었고, ‘완만한 속도’는 누락되었고, “두꺼워졌다”는 “뒤엉키다”로 대체되었고, 보행자 무리는 번역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이런 단순화를 거쳐서 원문이 그려낸 이미지의 추상성이 약화된다.

독자에게 친화적인 번역의 경향은 한 쌍의 남녀가 등장하는 대목에서도 나타난다. 이들은 “세련된 옷차림과 행동, 대화방식”(안병률 1권, 13)으로 보아 한 눈에도 상류층에 속하는 게 드러난다. 그런데 원작의 서술자는 두 인물의 개별적이며 고유한 정체를 밝히지 않고 수수께끼로 남긴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아직 수수께끼인 것이다. 사람들은 아주 특이한 방식으로 이 수수께끼를 풀기도 하는데, 그 방식이란 만약 그들이 50걸음을 걸은 후에도 어디에서 서로를 만났는지 생각나지 않으면 서로 잊어버리는 방식이다.(안병률 1권, 13)

원문인 “so steht man vor dem Rätsel, wer sie seien”이라는 표현은 ‘수수께끼 앞에 선다’는 뜻인데 안병률의 번역에서는 “그들이 [...] 수수께끼인 것이다”라는 평범한 문장으로 바뀐다. 여기서는 원작의 내용을 알기 쉽게 옮기려는 번역의 의도가 원작의 문학적인 요소를 옮기는 데 방해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원작에서 이 문장에 뒤따르는 문장 “Lebhafte Menschen empfinden solche Rätsel sehr oft in den Straßen”이 번역에서 누락되었다. 번역과 교정 과정에서 일어난 단순 실수이겠으나, 작가도, 역자도, 독자도 관심을 기울이는 소설의 도입부라는 점에서 역자가 문장의 복잡성을 줄이고자 생략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영 억지는 아닐 것이다.

안병률의 번역은 전체적으로 볼 때 한국어로 이 소설을 읽을 독자에게 한 발짝이라도 가깝게 무질의 책을 가져가려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분명 역자가 무질의 소설에서 느끼는 “문학적 순간의 황홀함”(안병률 4권, 622)을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원문을 변환하는 것이 번역에 있어서 중요한 전략인 점은 틀림없다. 하지만 내용을 전하기 위해서 원문의 낯선 표현을 지우거나 문장을 두루뭉술하게 깎아내는 점은 되돌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번역의 전략이 무질의 문장을 쉽게 만들기에 있으면, 무질 특유의 복합적인 문장을 이루는 요소들과 아이러니한 울림을 만드는 요소들이 축소되거나 생략되어 원작의 문학성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부작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단, 이 짤막한 비평은 2013년과 2021년에 출간된 1권, 2권, 3권에 국한해서 리뷰한 것으로, 2024년에 출간된 <특성 없는 남자 4>에 확대 적용될 수 없다.


3) 신지영 역의 <특성 없는 남자 1-5>(2022)

신지영이 2022년에 출간한 <특성 없는 남자 1-5>는 무질이 생전에 출간한 판본을 처음으로 완역한 것이다. 신지영은 이 작품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으며 관련 논문도 다수 발표한 연구자로 2015년에 <로베르트 무질 - 생전 유고/ 어리석음에 대하여>(워크룸 프레스)을 번역하여 출간하는 등 명실공히 로베르트 무질과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번역서에 첨부된 “옮긴이의 해제”만 하더라도 그 양과 깊이가 논문에 육박한다. “방대한 분량과 어려운 내용”, “상업적인 성공을 기대할 수 없어 전문 번역가가 선뜻 나서기 어려운 번역 작업은 결국 무질 연구자의 몫”(신지영 1권, 8)이 되었다는 역자의 소회에서는 연구자의 소명감과 책임감이 직접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연구자의 아비투스는 15년이라는 긴 번역의 시간을 통과한 원동력이었을 뿐 아니라, 아래에서 살펴볼 번역의 기획과 전략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판단된다.

신지영의 번역에서는 무엇보다도 원작과 원문에 대한 깊은 이해가 돋보인다. 그 한 예가 1장의 제목인 “woraus bemerkenswerterweise nichts hervorgeht”를 “주목할 만하게도, 여기서는 아무 일도 더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옮긴 것이다. 이 번역 문장은 부사인 “bemerkenswerterweise”를 부사구로 변환함으로써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사태 자체를 주목할 대상으로 가리킨다. 역자로서 신지영은 사실 원문을 충실히, 원문에 충실하게 옮기는 경향을 견지하기 때문에, 저렇듯이 원문에 개입하여 문장의 흐름을 일부러 끊는 것은 예외적이다. 그런데 1장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뿐’ 아니라 소설 전체에서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사실을 고려하면, 역자는 1장의 제목에서 작가의 의도, 요컨대 그 제목이 소설 전체를 농축하고 있음을 꿰뚫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첨언을 하자면, 실제로 원작의 1권에서 거의 유일한 사건인 평행운동은 위대한 이념을 실현하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표방하지만 아무 일도 생겨나지 않는다. 그리고 2권에서 울리히가 누이동생 아가테를 만나는 사건은 유토피아적인 ‘다른 상태 der andere Zustand’를 향하지만 멈춤의 상태로 중단된다.

작품의 배경을 포함하여 작품 전반에 걸친 폭넓은 지식도 이 번역의 차별성을 이룬다. 한 번은 울리히가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는데, 이름, 나이, 직업, 거주지 등과 함께 “Nationales”(160)를 진술한다. Nation은 다민족으로 구성되고 다언어 사용 국가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에서는 한 개인의 ‘특성’을 가리키는 사회정치적인 용어였다. 신지영은 유일하게 이 어휘의 의미를 살려서 “민족적 출신”(신지영 1권, 256)으로 옮긴다. 황제의 즉위 70주년을 기념하는 해에 있을 “Kundgebung”도 유일하게 “외부를 향한 선언”(신지영 2권, 32)으로 정확히 번역한다. 이 두 예시는 오스트리아의 역사와 언어에 대한 지식에 기반하여 번역한 것으로 이렇게 정확한 용어 번역의 목록은 틀림없이 길게 이어질 것이다. 신지영의 번역은 당대의 사상적 흐름을 담고 있는 원문을 번역하는 경우에도 빛을 발한다. 일례로 ‘모던’의 시대를 특징짓는 문장 하나를 솎아볼 수 있다. “어쩌면 인간을 그토록 오랫동안 우주의 중심으로 여겼지만 이제 수백 년 전부터 차츰 사라지고 있는 인간 중심적 태도, 그것의 해체가 마침내 자아 자체에 도달했을 것이다”[7](신지영 1권, 240). 여기서 역자는 물리학자이자 철학자인 에른스트 마흐 Ernst Mach의 유명한 명제 ‘구제받지 못하는 자아 das unrettbare Ich’에서 비롯하여 20세기 초반에 빈 모더니즘의 담론장을 지배했던 개념인 ‘자아의 해체’를 정확히 부각하는 방식으로 옮기고 있다. 개인적인 차원으로 좁히면, 울리히는 자신에게서 “두 명의 울리히 Zwei Ulriche”(155)가 병존하는 걸 느낀다.

그가 맡은 하찮고 어리석은 일들을 하면서 이리저리 움직이고 말하고 기꺼이 너무 많이 말하고 텅 빈 강에 그물을 던지는 어부처럼 절망적 집요함으로 살아가는 동안, 어찌되었든 그라는 인물에 맞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의도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동안, 그는 기다렸다. 그라는 인물 뒤에서 기다렸다. 이 인물이라는 단어가 한 인간의, 세상과 이력이 빚어낸 부분이라는 의미라면. 그리고 그 뒤에 가두어진 그의 조용한 절망은 매일 그 수위가 높아졌다.[8](신지영 2권, 128)

인생에서 일 년의 휴가를 낸 울리히가 근 반년이 지난 후에 평행운동에서 자신에게 요청되고 맡겨졌던 역할에 대해서 반추하는 부분이다. 여기서 역자는 원문의 “er”와 “seine Person”이 울리히의 분열을 가리키는 것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그”가 울리히의 본질적인 자아를 가리키는 한편 “그라는 인물”은 세상에서 부여된 특성들로 구성되었음이 드러나도록 번역한다. 이처럼 역자는 번역에 앞서서 일차 독자로서 원작을 심도 깊이 파악하고 있으며, 그의 텍스트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번역에 녹아들어 있다.

원문에 대한 높은 이해도와 더불어 신지영 번역의 큰 특징은 원문을 충실히 옮기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먼저 어휘의 사례를 하나 보자. 1장에서 한 쌍의 남녀는 교통사고의 현장에 몰려든 인파들 너머로 죽은 듯 누워있는 피해자를 본다.

Die Dame fühlte etwas Unangenehmes in der Herz-Magengrube, das sie berechtigt war für Mitleid zu halten; [...](11)
부인은 명치에 불쾌감을 느꼈는데, 연민이라 여겨 마땅한 것이었다.(신지영 1권, 26)

교통사고의 피해자를 보고 느끼는 연민은 자연스러운 감정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안병률은 원문의 “berechtigt”를 번역하지 않고, 박종대는 “스스로 연민이라고 느끼는”(박종대 1권, 14)으로 옮겨서 연민이 자동발생적인 느낌임을 전달한다. 이에 비해 신지영은 “berechtigt”의 의미를 담아서 “마땅한”으로 옮긴다. 고원은 “그녀가 그것을 동정심이라고 느낀 것은 정당했다”(고원, 8)로 번역하여 신지영과 마찬가지로 작가의 서술 의도를 살리려고 한다. 서술자는 부인의 느낌을 연민이나 동정심으로 특정하는 대신에 거리를 두면서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위 문장에 이어지는 장면에서 피해자의 개별적인 운명은 자동차의 기술적인 문제로 치환되고, 사고 현장은 절차에 따라 수습되고 잊히며, 예측이 불가한 교통사고는 통계 숫자로 추상화되어 예상 가능한 영역으로 수렴된다. 그렇지만 부인은 연민의 뒷맛을 느끼는 양 이렇게 묻는다.

»Meinen Sie, daß er tot ist?« fragte seine Begleiterin und hatte noch immer das unberechtigte Gefühl, etwas Besonderes erlebt zu haben.(11)
“그가 죽었다는 말인가요?” 그의 동행인은[9] 여전히 특별한 것을 체험했다는 부당한 감정을 갖고 물었다.(신지영 1권, 26)

불과 잠시 전에는 ‘마땅했던’ 감정이 이제 “부당한” 감정으로 평가가 뒤바뀐다. 고원은 “정당하지 못한 느낌”(고원, 9)이라고 번역하여 신지영과 마찬가지로 berechtigt와 unberechtigt가 반대말이 되도록 대비시킨다. 이에 비해서 안병률은 “검증되지 않은 느낌”, 박종대는 “근거 없는 감정”이라고 하여 어휘를 맥락에 어우러지도록 설명조로 번역했다. 여기서는 감정이 저절로 발동하는 느낌이라는 점에서 ‘부당한 감정’과 ‘정당하지 못한 느낌’은 문장에 녹아들기보다는 직역의 껄끄러움을 드러낸다. 돌부리처럼 문장에서 튀어나와서 독서를 방해하는 점을 역자들이 잘 알았을 테지만 직역하는 정면돌파를 택한 까닭은 원작에 쓰인 대로 어휘를 번역함으로써 작가의 의도에 닿으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원문의 어휘 하나하나를 직역하기 때문에 독일어의 ‘낯섬’이 잘 살아나기도 하는데, 아가테의 비유를 들 수 있다. 아가테는 남편인 하가우어와 이혼하기를 원하고, 아버지의 유산을 넘겨주지 않으려고 하는데 낯설고 독특한 비유를 써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다.

그는 손가락 사이에서 털실 한 오라기가 타고 남은 만큼만 내게서 받아야 해.(신지영 4권, 305) 
그 사람한테는 실오라기 하나 태우고 남은 재만큼의 재산도 넘기고 싶지 않아요...!(박종대 3권, 201)

신지영은 “Er soll nicht so viel von mir in seinen Fingern behalten, als hätte man einen Wollfaden dazwischen abgebrannt...!”(793)의 원문을 부정형에서 긍정형으로 바꾸는 방식으로 옮겼다. 박종대는 “손가락 사이에서”를 번역하지 않고 “재산”이라는 설명을 부가하여 한국어 문화에 친숙한 표현으로 만든다. 그런데 한오라기 양털이 타버리는 이미지는 그 자체로 선명한 까닭에, 원문의 낯선 비유를 그대로 옮긴 신지영의 번역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게다가 아가테의 반말투는 주관이 강한 성격을 잘 드러내기도 한다.[10]

원문에서 뭔가를 빼거나 더하지 않고 원문의 상태 그대로 옮겨서 원문의 의미가 잘 살아나기도 한다. 카카니엔에 대한 이야기는 <특성 없는 남자>에서 무질의 아이러니를 유감없이 보여주는데, 신지영의 번역으로 한 대목을 읽어보자.

이 나라는 헌법상으로는 자유민주주의였지만 가톨릭 교회식으로 통치되었다. 가톨릭 교회식으로 통치되었지만 국민들은 자유로운 정신으로 살았다. 법 앞에서는 모든 시민이 동등했지만 모두가 시민은 아니었다. 의회가 있었지만 그 자유를 너무 격렬히 사용했으므로 보통 닫아 두었다. 하지만 긴급조치법이 있어 그 도움으로 의회 없이도 그럭저럭 해내갈 수 있었고, 모두가 절대주의에 기뻐하고 있으면 왕은 다시 의회민주주의적으로 통치되어야 한다고 지시했다.(신지영 1권, 60-61)[11]

무질이 그 “나라” 카카니엔에 대해서 썼을 때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은 이미 해체되고 없었다. 그곳에 대한 조롱과 풍자에는 애수가 서린 사랑이 담겨 있다.[12] 원문은 앞 문장의 어휘를 뒷 문장이 받는 어휘들의 연쇄법 (Anadiplosis, 連鎖法)과 대조법을 사용하고 쉼표를 써서 간결한 문장들을 연결한다. 신지영의 번역은 접속어미 “~였지만”과 “~었지만”으로 원문의 리듬을 잘 살리고 있다. 다만, “자유민주주의”, “의회민주주의”는 “liberal”과 “parlamentarisch”를 번역한 것으로 어휘 ‘민주주의’는 프란츠 요제프 1세 치하 군주 중심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국가체제에 적합해 보이지 않는다.

원문에 충실하게 구문을 직역한 또 다른 성공적인 예시는 40장에서 만취한 노동자가 길거리에서 시비를 벌이고 욕설을 퍼붓다가 경찰의 얼굴을 때리는 장면이다.

입에서 기묘한 물결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말들이 내면에서 솟아올랐지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전에 쏟아져 들어간 말처럼 아마 욕이었을 것이다. 정확히 구별할 수가 없었다. 외부와 내부가 서로 뒤섞여 무너졌다. 분노는 내면의 분노가 아니었고 미쳐 날뛰도록 자극받은 분노의 육체적 껍데기에 불과했다. 경찰관의 얼굴이 꽉 쥔 주먹에 아주 천천히 접근했고 결국 피를 흘렸다.(신지영 1권, 251)[13]


이 대목은 일인칭 관찰자의 시점에서 서술되다가 외부와 내부의 구분이 없어지면서 노동자의 시점과 섞이고 마지막 문장은 노동자의 시점으로 바뀐다. 신지영의 번역에서는 원문의 독특함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특히 주먹이 접근했다는 문장은 느린 속도로 상영되는 동영상을 연상시키는데 그 영화적 표현은 신지영의 직역에서 십분 살아난다.

그런데 문장의 요소들이 복잡하게 배치되는 복합문의 경우에는 독일어 문장의 구문을 원래 상태대로 한국어로 옮기다 보면 불완전 문장이 되기 쉽다. 간단한 예를 하나 보자.

»Wie angenehm könnte sie sein,« dachte er »wenn sie ungebildet, nachlässig und so gutmütig wäre, wie es ein großgestalteter warmer weiblicher Körper immer ist, wenn er sich keine besonderen Ideen einbildet!«(276)
‘그녀는 얼마나 편할까!’ 울리히는 생각했다. ‘교양이 없고 태만하고 착하다면. 큰 체격의 따뜻한 여자 몸이 특별한 이념을 꿈꾸지 않으면 늘 그렇듯이.’(신지영 2권, 159) 

원문은 주절(»Wie angenehm könnte sie sein,«)과 조건을 나타내는 종속절(»wenn sie [...] wäre,)이 있고, 비교를 나타내는 종속절(wie es ein [...] Körper immer ist,)이 뒤따르면서 그 안에서 다시 조건을 나타내는 종속절(wenn er [...] einbildet!«)로 구성된 복문이다. 역자는 주문장과 부문장의 사이에 놓인 “dachte er”의 위치를 번역문에서 그대로 지킨다. 그리고 비교를 나타내는 종속절을 주문장으로 만든다. 그리고 두 개의 주문장을 각각 연결어미 “~하다면”, “~이듯이”로 끝내서 불완전 문장으로 만든다. 이로써 문법적으로는 연결어미가 종결어미로 기능하면서, 동시에 내용적으로는 주문장에 조건과 비교를 나타내는 종속문이 된다. 이번에는 박종대의 번역을 보자.

그는 생각했다. ‘그녀가 배우지 못한, 너저분하고 선량한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편할까! 그것도 특별한 이상 같은 건 생각지도 않는, 크고 따뜻한 여성의 몸처럼 선량한 사람이라면 말이다.’(박종대 1권, 428)

역자인 박종대는 독일어 문장의 구문을 변형한다. “그는 생각했다”를 서두에 위치시키며 연결어미 “~이었다면”, “이라면”을 본래 기능으로 사용하고 “~말이다”를 첨언하여 종결어미로 끝나는 완전한 문장을 만든다. 문체상의 차이를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로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denn’으로 구성되는 문장도 있다.

Walter zündete Licht an, denn es schien ihm nicht nötig zu sein, daß Ulrich vor Clarisse den Vorteil des dunklen Mannes ausnütze.(216) 
발터는 불을 켰다. 울리히가 클라리세 앞에서 어두운 남자의 장점을 이용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보였으므로.(신지영 2권, 66) 
발터는 불을 켰다. 울리히가 클라리세에 비해 어두운 남자로서 누리는 장점을 더 이상 이용하게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안병률 2권, 64)
발터는 불을 켰다. 울리히가 어둠을 이용해 클라리세 앞에서 얼굴을 숨기는 것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박종대 1권, 335)

원문은 두 개의 주문장을 등위접속사 denn을 사용하여 연결한 한 문장이다. 신지영은 이유를 설명하는 문장을 “보였으므로”로 끝내어 불완전하게 만드는 데 비해서 안병률과 박종대는 불완전한 문장을 피하면서 “때문이었다” 혹은 “때문이다”로 옮긴다. 위와 같은 예시로부터 다음과 같이 유추할 수 있겠다. 신지영의 번역은 문장의 순서를 독일어 원문의 구문과 같이하는데 이러한 번역 전략의 부수적인 결과로 불완전한 문장이 자주 나타난다. 통사적으로는 독일어 구문에 따르면서 의미적으로는 종속절로 처리하다 보니 “~거라고.”, “~이라고”, “~지만”, “~듯이”, “~테니까”, “~으니까”, “~이니까” 등 연결어미가 종결어미의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역자가 수사(修辭)적인 효과를 노리고 의도적으로 불완전 문장으로 결정했을 수 있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목적에 다다랐는지는 의문스럽기도 하다. 술술 잘 읽히기도 하지만 거슬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접속법 2식을 “~리라”로 끝내는 습관도 눈에 띈다.

오랫동안 이 도시를 떠나 있던 사람도 이 소음을 들으면 무엇이 특별한지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눈을 감고도 여기가 제국의 수도이자 황궁이 있는 도시 빈(Wien)임을 알아차리리라. [...] 눈을 뜨면 그는 어떤 특별한 개별사항보다도 거리가 움직이는 모양새를 통해서 훨씬 더 빨리 이를 알게 되리라.(신지영 1권, 23-24)[14]

“~리라”라는 종결어미는 의미상 좀 더 강조와 의도를 확실히 드러내는 역할을 하면서 보통 문어체의 느낌을 풍긴다. 그래서 위 인용에서처럼 서술자가 자신이 의견을 에둘러서 나타내면서 ‘그럴 수 있다’로 추측하는 맥락에서는 “알아차릴 것이다”, “알아챌 수 있다”(박종대, 12)라는 일반적인 종결어미가 더 어울려 보인다. <특성 없는 남자>에는 접속법 2식이 상당히 많이 나타난다. 이는 직설적인 표현보다는 간접적인 방식을 선호하는 오스트리아의 언어문화에서 기인하기도 하며 ‘가능성 감각 Möglichkeitssinn’을 현실 감각만큼 중요시하고 자신의 삶도 ‘가정법으로 im Konjunktiv’ 살기로 한 울리히의 사유와 사념을 나타내는 중요한 서술 수단이기도 하다. 여러 의도와 다양한 맥락에서 접속법 2식 혹은 가정법이 쓰이므로 종결어미를 섬세하게 구별하기, 이를테면 한국어 문화에서 ‘~리라’의 화용적인 기능을 고려하여 적재적소에 쓰는 어미 활용 방법도 의미 있어 보인다.

전체적으로 보아 신지영의 번역은 장점이 많다. 작가와 시대에 대한 깊은 이해가 번역에 얼마나 중요한 기반을 이루는지 보여주는 모범이기도 하며 작가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여 번역의 정확도가 높은 점도 이 번역의 자랑이다. 그런데 문장을 공그르며 마무리 짓는 데 있어서 도착어의 특성에 대해 더 세심한 고려가 아쉬운 측면이 있다. 한국어는 교착어로 풍부한 어미를 사용하여 문장을 여러 각도로 변화시킬 수 있다. 독일어 문장의 구문을 지키는 번역과 한국어의 어미 기능을 살리는 번역을 문맥에 따라서 생산적으로 연결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4) 박종대 역의 <특성 없는 남자>(2023)

박종대는 수많은 독일어권 작품을 번역했고 현재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전문번역가이다. 경험이 풍부한 번역 전문가로서도 이 작품이 큰 도전이었음은 십 년이 걸렸다는 번역의 시간에서 짐작할 수 있는데, 그는 번역자로서 돌파했어야만 했던 문제를 직접적으로 공개한다. “사실 무질의 독특한 문체를 우리말로 옮기는 건 불가능하다. 문체를 살린답시고 원문의 표현에 매달리면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한국어 문장이 나온다.”(박종대 3권, 631) 이 문제 앞에서 번역자의 “결론은 명확했다. 어떻게든 읽을 수는 있게 만들자”이다. 그러니까 번역자 박종대의 번역 의도와 선택은 ‘읽고 이해하도록’이라고 할 것이다. 이는 안병률이 말하고 있는 ‘독파 가능한 소설’로 만들고 싶다는 번역 의도와 겹쳐지나 실제 번역의 전략에는 차이가 뚜렷하다. 안병률은 가독성을 위해서 우선적으로 원문의 내용을 전달하는 경향을 보이고 어휘를 생략하거나 문장을 단순화하는 시도를 무릅쓰기도 하는데, 박종대는 원문의 의미를 전달하고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서 문장을 구성하는 다소간의 요소들을 부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1장에 국한해서 보자면, 교통사고 현장에서 사람들이 “웅성웅성”(박종대 1권, 13) 모여있다거나, 벌집 주위를 “왱왱거리는”(박종대 1권, 14) 벌떼처럼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든다와 같이 의성어와 의태어를 더하거나, “구조대” 앞에 “전문적인 자격을 갖춘”과 같은 관형사구를 삽입하기도 한다. 남자와 여자가 사람들 어깨너머로 피해자를 보았다는 동사 betrachten은 “유심히”라는 부사를 첨가해서 그들의 보는 행위에 관찰의 뉘앙스를 살린다. 이런 시도는 문장을 생생하게 만들고, 교통사고 현장의 분위기를 실감나게 전달할 수 있다.

박종대의 번역에서는 번역투가 덜하도록 다듬어지는 경향이 강한데, 이는 번역어의 선택에서도 드러난다.

울리히의 본성에는 논리정연함과 분명한 의지, 특정 방향으로 일관되게 나아가는 야망에 대한 거부감 같은 것이 존재했다. 그것도 무계획적이고 무력화하고 무장해제하는 방식으로 말이다.(박종대 1권, 392) 

밑줄 친 부분의 원문은 “in einer zerstreuten, lähmenden, entwaffnenden Weise”로 직역 위주인 신지영의 번역으로는 “산만하고 마비시키고 무장해제하는 방식으로”(신지영 2권, 123)이다. 박종대는 출발어의 어휘 하나하나에 대응하는 역어를 찾기보다는 첫음절 “무”를 두운의 효과가 나도록 반복한다. 첫 문장에서 주요 정보인 울리히의 거부감이 제시되었기에, 이렇듯 출발어에서 멀어지는 걸 감수하면서 역자가 원문에 개입해서 문학적인 울림을 만들어내려고 시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울리히가 경찰서의 공권력과 맞닥트리는 부분에서는 경찰이 상대를 제압하고 무시하는 행동을 다음과 같이 옮겼는데 이미지가 문장의 리듬을 통해서 선명하게 떠오르는 점이 퍽 인상적이다.

파출소장은 부하가 울리히를 대동하고 들어오자 작성중이던 서류에서 한쪽 눈을 흘낏 들어올려 울리히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다시 아래로 내렸다. 이 관료는 말없이 서류 작업을 계속했다. 울리히는 이 일이 무한히 계속될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이제 파출소장은 작성하던 서류를 옆으로 밀쳐놓고 서가에서 책을 꺼내 뭔가를 기입하더니 그 위에 모래를 뿌리고 다시 꽂아넣었다. 그뒤에도 다른 책을 집어 똑같이 뭔가를 적고 모래를 뿌렸고, 서류 더미에서 꺼낸 서류철에도 같은 행동을 되풀이했다. 울리히는 또다른 무한함이 펼쳐지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속하지 않은 이 세계에서 천체만 계속 규칙적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무한함이었다.(박종대 1권, 245)

역자가 언어를 조탁하는 능력도 단연코 돋보인다. 발소리, 탄원하는 소리, 실랑이하는 소리, 끌려가는 소리 등이 난무하며 시끄럽던 경찰서 복도가 문득 조용해지는 순간을 원문은 이렇게 그린다. “[...] und in der Luft lag das Schweigen eines Punktes, der an der richtigen Stelle hinter einen Satz gesetzt worden ist”(159) 맥락상 이 문장은 경찰이 피의자를 경찰서의 어떤 공간에 구금하는 식으로 일을 처리했다는 의미이다.

허공에는 한 문장을 끝낸 뒤 올바른 지점에 찍은 마침표 같은 침묵이 감돌았다.(박종대 1권, 246)
실내의 공기 속에는 문장의 맨 끝에나 어울리는 침묵이 자리잡았다.(안병률 1권, 283-284) 
임박한 것은 문장 끝 제자리에 찍힌 마침표의 침묵이었다.(신지영 1권, 254)

안병률은 어휘 “마침표”를 옮기지 않고 문장을 깎아내는 번역을 하고, 신지영은 “마침표의 침묵”으로 직역한 데 비해, 박종대의 번역은 “허공에는 [...] 침묵이 감돌았다”의 문장 안에 ‘마침표를 찍다’는 문장을 넣었다. 이로써 원문의 의미인 ‘일을 마침’에 그치지 않고, 이를테면 두려움과 같은 모종의 심리적인 무엇인가를 느끼도록 의미를 한 층위 더 얹는다.

문학 작품을 문학으로 옮기려는 시도는 박종대의 번역 곳곳에서 나타난다. “마치 한 권의 책 속에 실수로 다른 책의 페이지가 들어가 있는 것처럼.”(박종대 2권, 513)과 같이 원작의 곳곳에서 빛나는 비유들을 다음과 같이 문학적인 멋이 나도록 옮긴다.

디오티마는 집이 파르르 떠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박종대 1권, 283) 
마치 범람한 물이 빠지면서 드러나는 바위처럼 농담이 대화의 강물에서 불거져나왔다.(박종대 2권, 132) 
마치 집들이 바람의 방향에 따라 옆으로 비켜서는 듯했다.(박종대 2권, 440)

박종대의 번역은 <특성 없는 남자>를 가장 ‘문학’답게, ‘소설’답게 옮긴다. 무질이 사유의 가지들이 무성히 내뻗는 텍스트의 숲에 무심한 듯 흩뿌리는 비유들의 독특한 아름다움은 그의 번역에서 다시 생명력을 얻는다. 여기에는 역자의 훌륭한 자원인 풍부한 어휘력이 큰 역할을 하지만 문장을 공그르는 노련함도 한몫을 한다. 평행운동에 대해서 황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간접화법으로 표현된 대목을 보자.

Aber Se. Majestät in Allerhöchst Ihrer weltbekannten Gewissenhaftigkeit und Zurückhaltung, erzählte er weiter, hätte sofort mit der energischen Bemerkung abgewehrt: »Ah, i mag mi net vordrängen lassen«; und nun wisse man nicht, ob es sich dabei um eine ausgesprochen entgegenstehende Allerhöchste Willensmeinung handle oder nicht.(195)

디오티마의 남편인 투치 국장은 정부의 고위관료인데 장관에게 전해 들은 말을 다시금 전하고 있다(“erzählte er weiter”). 두 개의 주문장이 연결된 복합구문으로 전반부는 접속법 2식의 간접화법(“Se. Majestät hätte abgewehrt”)과 황제의 말을 직접 인용하는 직접화법(»Ah, i mag mi net vordrängen lassen«)으로 구성된다. 인용된 문장이 사투리여서 호감을 담은 옅은 풍자도 들어있다. 후반부는 황제의 의견에 대한 장관의 해석으로 접속법 1식의 간접화법(“nun wisse man nicht [...] handle”)을 사용한다. 박종대의 번역은 이 복합구문을 다음과 같이 옮긴다.

하지만 양심과 겸양으로 유명하신 폐하께서는 즉시 다음의 말로 손사래를 치셨다고 한다. “과인은 세상의 이목 속으로 떠밀려 들어가기 싫네.” 물론 이 말이 폐하께서 그 제안을 명시적으로 반대하신다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고 했다.(박종대 1권, 302)

역자는 황제의 의견을 들은 장관의 의견을 듣고, 두 의견을 전달하는 화자의 존재를 번역에서 의도적으로 빼고, “다음의 말로”와 “~ 고 했다”로 간접화법임을 알린다. 문맥상 화자가 투치 국장임은 확연하므로 생략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abgewehrt”를 손사래치는 행동으로 풀어서 간접화법임에도 황제의 언사를 생동감 있게 전달한다. 그런데 때로는 상투적이고 진부한 표현이 갑자기 튀어나오기도 한다. 일례로 “jene unbestechliche gewollte Kaltblütigkeit”를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냉정함”(박종대 1권, 382)이라고 상투적인 관형구를 써서 번역한 것은 “그 매수할 수 없는 의도적 냉혹함”(신지영 2권, 113)이라는 직역과 비교할 때 손쉽게 자국화한 것으로 보인다. 독자에게는 박종대 번역의 표현이 익숙해서 읽기에 수월하나 독일어 원문이 공학자인 울리히에게 부여한 ‘정확성 Genauigkeit’의 기질 대신에 독하디독한 남자로 자국화된 울리히가 들어선 느낌이다. 비슷한 예로 “괜히 격 떨어지게 다른 문필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토를 달지 않는다”(박종대 2권, 152)는 문장도 있다. 소위 저명한 저술가인 아른하임 류의 인물을 묘사하는 문장 “Sie lassen sich nicht leicht dazu herab, andere Autoren zu besprechen; [...]”(431)을 의미적으로 옮기지만, “격 떨어지게”라는 표현이 직접적이어서 원문에 담긴 아이러니와 조롱이 반감되는 아쉬움이 있다.

박종대의 번역은 전체적으로 보아 전문번역가의 역량이 돋보인다. <특성 없는 남자>는 빈약한 줄거리의 더딘 진행 사이에 무시로 사유의 에세이즘이 길게 이어져 소설 읽기가 최고도의 정신노동으로 변모하곤 한다. 그럼에도 박종대의 번역은 소설을 읽고 싶은 독자를 끝까지 붙잡아 두는 힘이 있다. 노련한 솜씨로 작가 무질이 사유하는 방식이 소설임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여기 이 단편적인 비평에서는 번역의 의도와 번역의 경향 부분에 집중했으며, 오역과 같은 여타 비평에의 가능성을 배제했음을 덧붙인다.



3. 평가와 전망

방대하고 까다롭기 그지없는 작품을 끝끝내 완역한 열정과 노고의 진정성은 인상 비평에 불과한 얕은 비평이 감히 언급할 수 없는 무게를 지닌다. 이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비평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완역을 한 세 번역자의 번역서들에서 최소한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선 역자 간 상호참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 작품의 번역이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났고 참조할 선행 번역이 없었다는 게 가까운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특정한 의미로 확정되지 않으면서 이렇게 또 저렇게 해석이 가능한 원문의 특성이 본래적인 이유일 것이다. 번역자는 의미의 잠재성으로부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어휘 하나만 달라도 종종 문단의 의미가 달라지는 나비효과가 발생한다. 그래서 <특성 없는 남자>의 경우에는 동일 원문에서 번역되었는지 몇 번이나 원작의 해당 부분을 확인해야 할 정도로 번역과 번역에 차이가 있다. 그리고 출판인, 연구자, 전문번역가라는 정체성이 번역자의 지평을 형성하고 실제 번역에서도 차별성을 만들어내는 점이 드러났다. 원문의 어휘를 모두 살릴 것인가, 구문의 순서를 충실히 옮길 것인가 혹은 독자가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옮길 것인가 사이에서 선택할 때, 무질식 말로 비유하자면 ‘역자의 직업적 특성’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리고 세 번역자가 각각 자신의 것으로 삼은 번역의 의도와 방향성은 원작의 방대함과 번역 작업의 긴 시간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지켜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실제 번역에서는 역자가 원문에의 충실성과 독자를 위한 가독성 사이에서 무게 중심을 맥락에 따라 이동하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번역의 의도에 따른 번역 전략을 유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 명의 독자로서 권하고 싶은 독서는 번역들을 통섭하면서 읽기이다. 경험상 한 편의 번역서가 아니라 두 편의 번역서를 비교하고 대조하는 불편한 방식의 독서가 로베르트 무질의 미로를 살아서 통과하는 보다 더 빠른 지름길이었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고원(2010): 특성 없는 남자 1. 도서출판 이응과 리을.

안병률(2013, 2021, 2024): 특성 없는 남자 1-4. 북인더갭.

신지영(2022): 특성 없는 남자 1-5. 나남.

박종대(2023): 특성 없는 남자 1-3. 문학동네.


박희경


바깥 링크

  1. 지금까지 출간된 번역서들은 모두 한 권 이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병률의 번역은 1-4권, 신지영의 번역은 1-5권, 박종대의 번역은 1-3권이다. 이렇게 권수가 다른 것은 국내 출판사의 편집과 출판에 따른 것이며, 독일어 원작의 분권 기준과 무관하다.
  2. 밀란 쿤데라(2012): 커튼. 소설을 둘러싼 일곱 가지 이야기. 민음사, 101.
  3. 독일어 원문은 다음 판본을 이용한다. Musil, Robert(1996): Der Mann ohne Eigenschaften. Adolf Frisé (Ed.). Reinbek bei Hamburg: Rowohlt. 원문 인용 시 본문에 쪽수를 표기한다.
  4. 이하 이 번역비평의 3) 신지영 역의 <특성 없는 남자 1-5>(2022) 참조
  5. Überhaupt, wie vieles Merkwürdige ließe sich über dieses versunkene Kakanien sagen! Es war zum Beispiel kaiserlich-königlich und war kaiserlich und königlich; eines der beiden Zeichen k.k. oder k.u.k. trug dort jede Sache und Person.(33)
  6. [...] daß Gefühle ebenso wichtig sind wie Staatsrecht und Vorschriften nicht den wirklichen Lebensernst bedeuten.(33)
  7. Wahrscheinlich ist die Auflösung des anthropozentrischen Verhaltens, das den Menschen so lange Zeit für den Mittelpunkt des Weltalls gehalten hat, aber nun schon seit Jahrhunderten im Schwinden ist, endlich beim Ich selbst angelangt; (150)
  8. Während er sich in der kleinen und närrischen Tätigkeit, die er übernommen hatte, hin und her bewegen ließ, sprach, gerne zuviel sprach, mit der verzweifelten Beharrlichkeit eines Fischers lebte, der seine Netze in einen leeren Fluß senkt, indes er nichts tat, was der Person entsprach, die er immerhin bedeutete, und es mit Absicht nicht tat, wartete er. Er wartete hinter seiner Person, sofern dieses Wort den von Welt und Lebenslauf geformten Teil eines Menschen bezeichnet, und seine ruhige, dahinter abgedämmte Verzweiflung stieg mit jedem Tag höher.(256)
  9. 연민을 느끼는 부인을 가리킴.
  10. 4종의 번역에서 인물들이 쓰는 존대어와 반말의 어투 간에 차이가 확연하다. 이 번역 비평에서는 인물들 간 어투를 비교 분석하지 못해서 못내 아쉽다. 동일한 원작에 대해서 번역자마다 인물들의 어투를 달리 한 점은 특기할만한 현상이며 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기대하건대 새로운 내용의 번역 비평이 될 것이다.
  11. Es war nach seiner Verfassung liberal, aber es wurde klerikal regiert. Es wurde klerikal regiert, aber man lebte freisinnig. Vor dem Gesetz waren alle Bürger gleich, aber nicht alle waren eben Bürger. Man hatte ein Parlament, welches so gewaltigen Gebrauch von seiner Freiheit machte, daß man es gewöhnlich geschlossen hielt; aber man hatte auch einen Notstandsparagraphen, mit dessen Hilfe man ohne das Parlament auskam, und jedesmal, wenn alles sich schon über den Absolutismus freute, ordnete die Krone an, daß nun doch wieder parlamentarisch regiert werden müsse.(33)
  12. 울리히가 아가테한테 2권 3부의 11장에서 “Ich spotte nur, weil ich es liebe”(752)라고 말하는 데 이 말은 무질의 아이러니 개념을 한 문장으로 집약하고 있다.
  13. Ein wundersames Strömen aus dem Mund hatte begonnen; Worte kamen aus dem Inneren herauf, von denen nicht zu begreifen war, wie sie vorher hineingekommen waren, möglicherweise waren es Schimpfworte. Das ließ sich nicht so genau unterscheiden. Außen und Innen stürzten ineinander. Der Zorn war kein innerer Zorn, sondern bloß das bis zum Rasen erregte leibliche Gehäuse des Zorns, und das Gesicht eines Schutzmanns näherte sich ganz langsam einer geballten Faust, bis es blutete.(157)
  14. An diesem Geräusch, ohne daß sich seine Besonderheit beschreiben ließe, würde ein Mensch nach jahrelanger Abwesenheit mit geschlossenen Augen erkannt haben, daß er sich in der Reichshaupt- und Residenzstadt Wien befinde. [...] Die Augen öffnend, würde er das gleiche an der Art bemerken, wie die Bewegung in den Straßen schwingt, bei weitem früher als er es durch irgendeine bezeichnende Einzelheit herausfände.(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