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라 (Andorra)"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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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역 현황 및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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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라>의 초역이 실린 <現代世界戱曲選集>(1970)의 <해설: 現代戲曲의 世界>에서 막스 프리쉬는 다음과 같이 소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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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수록된 두 사람의 극작가 막스 프리시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는 어느 모로 보나 독일계 연극을 대표할 수 있는 극작가이지만 그들의 국적은 독일이나 오스트리아가 아니라 스위스이다. 스위스계의 뛰어난 두 사람의 작가가 있다는 사실 및 그들이 오늘의 독일 연극을 대표하는 극작가라는 사실은 매우 아이러니하나 나찌스가 독일 및 오스트리아를 강점(强占)한 저 무심한 정신적 공백기를 생각해 본다면 충분히 수긍할 만한 것이다. 망명 작가가 아니면 독일어를 쓰는 사람으로서 30년대의 거의 전부와 2차 대전의 기간 동안 정신적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곳은 독일어를 사용하는 스위스 지역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극작가는 모두 전후파이다. 프리시가 44년에, 뒤렌마트가 47년에 처녀 극작을 내놓았고 그들의 극이 본지서 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은 모두 50년 이후에 속한다.(여석기 1970, 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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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황폐해진 독일어권 연극은 스위스의 두 작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와 막스 프리쉬에 의해 견인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독일 문학사에서 늘 짝을 이뤄 나란히 언급되는 이 두 작가는 한국에서 수용되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우선 위 해설이 실린 선집이 서구권의 중요한 희곡들을 선별한 작품집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전후 독일 문학, 무엇보다 희곡의 국내 수용에 있어 프리쉬와 뒤렌마트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아울러 나치와 전쟁의 피해를 비껴갈 수 있었던 ‘스위스’ 출신 독일 문학계 연극을 대표하는 ‘극작가’라는 이들의 공통분모를 강조함으로써 이들이 ‘함께’ 소개되고 있다는 점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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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극계의 막스 프리쉬 수용>이라는 논문에서 김기선도 프리쉬와 뒤렌마트를 비교해 가면서 프리쉬 수용 양상의 청사진을 제시한다. 이 논문에서 그는 1960년대 후반부터 이 두 작가가 적극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한 데는 두 작가가 지니는 고유한 중요성과는 별개로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었음을 언급하며, 그 배후로 브레히트를 지목한다. 1970-80년대 정치적 앙가주망과 그 미학적 구현을 모색했던 한국의 연극계는 다양한 연극 언어들에 갈증을 느끼고 있었고, 이를 해갈해 줄 모범으로서 브레히트에 주목했다. 그러나 당시 금지 작가 중 한 사람이었던 브레히트를 직접 수용할 수는 없었기에 브레히트의 후예들이라 할 수 있는 프리쉬와 뒤렌마트라는 우회로를 택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 두 사람이 계속해서 비슷한 부류의 작가로 간주된 것은 아니다. 뒤렌마트가 극작가로서 꾸준히 수용되었다면, 프리쉬는 초창기에는 극작가로 주목받다가, 1980년대 후반부터는 소설가로서 더 큰 관심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 변곡점이 브레히트의 해금 시기와 겹친다는 점 또한 흥미롭다. 즉 1987년 브레히트가 해금됨으로써 브레히트를 직접적으로 학습하고 수용하는데 관심과 에너지가 쏠리게 된 것과 무관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김기선 1999, 141-143). 다시 정리해 보면 프리쉬는 뒤렌마트와 함께 황폐화된 전후 독일 연극계를 견인한 스위스 출신의 중요한 극작가로서 국내에서 알려지기 시작했고, 이들에 대한 관심이 브레히트에 대한 관심의 우회적 표현이었다는 점에서 무대 수용이 실질적인 번역 행위보다 우선한다. 특히 강두식, 지명렬, 김창활과 같은 독문학자 또는 전공자를 통해 현지와 큰 시간차를 두지 않고 적극적으로 수용된 것도 당시 국내 연극계의 갈증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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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5번의 개작을 거쳐 1961년 오늘날의 형태로 출간된 <안도라>(Frisch 1975, 2)가 국내에 수용되는 과정도 유사한 도정을 겪는다. 이 작품이 국내에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1963년 3월 <思想界>에 강두식이 <서사적 무대의 전형, 막스 프리쉬의 신작 안돌라>라는 글을 발표한 것까지 연원한다. 1965년에는 허규가 연출한 <안도라>가 국립극장 무대에서 국내 초연을 선보였으며, 초역은 그보다 5년 뒤인 1970년 상기한 <現代世界戱曲選集>의 마지막 부분에 독일희곡 대표격으로 뒤렌마트의 <물리학자들>(송동준 역)과 함께 실렸다. 이 초역의 번역자는 강두식이다. 이후 1977년에는 김창활의 번역이, 1984년에는 손재준의 번역이 나왔으며 가장 최근의 번역은 2012년 출간된 김정용의 번역이다. 현재 시중 서점에서 유통 중인 번역본은 김창활의 1996년 개정판과 김정용의 번역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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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별 번역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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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라. 12개의 상으로 구성된 작품>이라는 원제를 지닌 <안도라>는 비교적 평이한 언어와 단순한 통사구조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어 독문학을 전공한 꼼꼼한 번역자라면 큰 무리 없이 번역할 수 있을 법한 작품이다. 1990년대 후반 김기선의 조사에 따르면 국내 유수의 대학에서 독일희곡 관련 수업 교재로 사용하는 작품 중 괴테의 <파우스트>와 뒤렌마트의 <노부인의 방문>의 뒤를 이어 커리큘럼으로 가장 빈번히 거론되는 작품이 <안도라>였다고 한다. 이는 이 작품이 지닌 장점, 즉 문학성과 시의성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언어적으로도 난해하지 않은 텍스트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김기선 1999, 145-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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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이 작품에 대한 상이한 번역 종 간의 정·오역을 검토하거나 문체를 비교해 보았지만, 유의미한 논의를 전개하기가 쉽지 않았다. 따라서 이번 번역 비평에서는 두 가지 관점, 즉 선행 번역 비평에서의 논의를 계승, 점검하고 극작품으로서의 <안도라>의 구조와 ‘부텍스트 Nebentext’의 번역 문제에 집중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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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안도라>의 가장 최근 번역자이기도 한 김정용은 자신의 번역본을 내놓기 약 10년 전인 2002년 <희곡 번역의 이론과 오류 분석 - 막스 프리쉬의 『안도라』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이 논문에서 그는 일반적인 문학 번역 이론과 희곡 장르 번역의 특수성에 대해 약술한 뒤 기존 <안도라> 번역에서의 문제점과 개선 가능성을 논의한다. 이 글은 연구 논문의 형태로 발간된 것이지만, 글의 후반부는 번역 비평적 양상을 띤다는 점에서 이번역 비평적 양상을 띤다는 점에서 이번 번역 비평의 레퍼런스로 기능할 수 있다. 특히, 이 논문의 저자가 이후 직접 <안도라>를 번역했다는 점에서 이 글은 번역자의 소위 ‘번역 프로젝트’나 ‘번역 지평’(베르만)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전거로 활용될 수 있다. 둘째, <안도라>에서는 다양한 연극적 장치가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프리쉬는 브레히트의 서사극을 계승하고, 학습극의 고유한 취지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하여 현대적으로 구현하는 작가이다. 프리쉬의 이러한 의도는 장면의 개성 있는 구성이나 독특한 용어의 사용, ‘부(副)텍스트 Nebentext’의 활용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는데, 문제는 부차적으로 보이는 이 요소들이 ‘발화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번역 과정에서(아울러 독서 과정에서도) 종종 간과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결코 부차적이지 않은 부텍스트와 같은 비언어적 요소들을 담아낸 드라마 텍스트의 번역 또한 이번 번역 비평에서 주목하는 지점이 된다. 물론 이것은 상당 부분 <안도라> 텍스트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특징, 즉 이 작품에서의 부텍스트가 기존에 다뤄왔던 드라마 텍스트에서의 부텍스트보다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는 다시금 작가의 집필 의도와 관련된다 볼 수 있을 것이다)과도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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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첫 번째 관점은 이 번역 비평에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김정용이 논문에서 현재도 유통 중인 김창활의 번역과 절판된 손재준의 번역만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선집에 실린 강두식의 번역은 알지 못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아울러 그는 김창활의 번역에 관해서는 김기선의 상기한 논문을 인용하며 문제점이 많다고 진단한 뒤, 주로 손재준의 번역을 중심으로 ‘언어적 오류’, ‘화용적 오류’, ‘문화적 오류’, ‘형식적 오류’를 번역 사례 중심으로 분석, 고찰, 진단한다. 따라서 다음의 번역 종별 개별 번역 비평에서는 번역 오류나 개선 가능성에 대한 그의 주장들을 대부분 수용하면서도, 김정용 자신의 번역을 포함, 그가 의도적 또는 비의도적으로 누락한 번역도 점검해보도록 한다. 이와 관련하여 본고에서 가장 주목하는 지점은 6번째 장면에서 ‘베드로의 부인(否認)’과의 ‘상호텍스트성’을 번역에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에 대한 김정용의 통찰이다. 해당 부분은 개별 번역 비평에서 계속해서 논의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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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관점은 드라마 형식 용어의 번역 또는 편집 문제와 ‘부텍스트’의 번역 문제로, 이 논의는 개별 번역 비평에 일일이 언급하기 애매한 부분이 있어 여기서 다루고자 한다. 작품 구조와 밀접한 연관을 맺는 드라마 형식 용어의 번역 또는 그 편집 문제를 먼저 살펴보자. 이와 관련해서는 ‘Bild’의 번역어에 대해 재고할 필요가 있다. 프리쉬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막’을 대신하는 ‘Bild’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단어를 강두식은 ‘막’으로, 손재준은 ‘경’으로, 김창활과 김정용은 ‘장’으로 번역하고 있다. 손재준은 ‘Bild’의 의미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경’을 번역어로 선택한 듯하고, 김창활과 김정용은 ‘막’을 대체할 수 있는 이질감 없는 보편적인 번역어로서 ‘장’을 선택한 듯하다. 다만 강두식이 번역어로 삼고 있는 ‘막’은 필연적인 무대의 전환 과정을 관객의 시야로부터 차단하려는 전통적인 환상극의 의도를 연상시키는 번역어라는 점에서 비-환상극을 지향하는 프리쉬의 작품에서는 지양되어야 할 번역어가 아닐까 한다. ‘경’이나 ‘장’의 번역은 일단은 무리 없는 무난한 번역으로 생각되는데, 이 번역어들을 이 작품의 본문에 등장하는, 작품의 핵심 주제어라고도 할 수 있는 ‘Bildnis’라는 단어와 연결시켜 보려고 할 경우에는 문제가 생긴다. <안도라>의 7번째 ‘장면 Bild’과 8번째 장면 사이에 삽입된 ‘증언대 Zeugenschranke’ 장면에서 신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Du sollst dir kein Bildnis machen von Gott, […]”(Frisch 1975, 67). ‘Bildnis’의 번역에 관해서는 다시 개별 비평에서 논의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이 단어와 ‘Bild’의 관련성에만 집중해 보자. 즉 이 작품에서 개별 장면이 ‘타자 der Andere’ ‘안드리 Andri’의 그릇된 정체성과 자아상을 구축해 가는 일련의 잘못된 상 Bild, 즉 편견의 축적 과정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장’이나 ‘경’과 같은 연극의 장면 단위를 칭하는 용어가 아닌 ‘Bildnis’의 번역어를 연상시킬 수 있는 ‘Bild’에 대한 제3의 대안을 모색해 볼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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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맥락에서 이 작품의 고유한 구조적 특징이면서 서사극적 장치로 기능하는 ‘Vordergrund’의 번역과 배치도 문제적이다. 작품은 총 12개의 ‘장면 Bild’과 2, 3, 4, 7, 8, 9, 10, 11, 12 장면 앞에 위치한 9개의 ‘Vordergrund’로 구성되어 있다. 연극 무대에서의 ‘Vordergrund’란 관객에게 가까운 무대 전면을 의미한다. 강두식, 김창활, 김정용은 이 장면을 ‘무대 전면’이라고 번역한 반면, 손재준은 ‘전경’이라는 번역어를 채택하고 있다. 아마도 그는 Bild를 ‘경’이라고 번역하면서, 이 장면들도 같은 층위의 ‘단위’로 인식시키려고 의도한 것 같다. 이것이 다른 번역자들은 시도하지 않은 세심한 배려임은 분명하다. 다만 ‘전경’이라는 단어는 한자를 병기하지 않는 이상 연극 무대와 관련해서는 무대미술이나 무대의 시각적 효과(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에서의 스펙타클)를 칭하는 용어와 혼동될 수 있다는 점은 문제적이다. 물론 이는 애초에 손재준이 ‘Bild’의 번역어를 ‘경’(아마도 ‘景’)으로 채택했기에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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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무대 전면’으로 번역한 나머지 번역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또 다른 문제가 확인된다. 원작의 텍스트 배치와 달리 모든 번역서에서 독립된 이 짧은 장면들을 앞 장면의 마지막 부분에 붙여 편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편집 방식으로 인해 원문과의 대조 없이 번역서만 읽을 경우, ‘무대 전면’은 마치 지문처럼, 그리고 그 이후의 증언대 진술은 마치 한 장면을 마무리하는 대사처럼 읽힐 여지가 다분해진다. 더 큰 문제는 이로 인해 더 이상 이 장면의 독립성을 담보하기가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관객을 향해 자신은 어쩔 수 없었고, 이렇게 될지 몰랐다 등 한결같이 변명을 늘어놓는 등장인물들의 진술은 장면과 장면의 유기적 연관성을 의도적으로 파기해 버림으로써 관객을 환상에 붙들어두지 않는 서사극적 연극 장치인 동시에, 결코 전쟁의 결과와 무관할 수 없는 관객 자신의 거울 역할을 하기도 한다. 따라서 길지 않은 이 장면의 중요성은 텍스트 편집, 또는 텍스트 도상적 차원에서도 보장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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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드라마 텍스트를 구성하는 주요한 구성 요건으로서의 부텍스트 텍스트 층위에서 드라마를 구성하는 세 요소는 해설, 지문, 대사이다. 여기서 플롯을 견인하고, 배우에 의해서 ‘발화’되는 대사는 ‘주텍스트 Haupttext’, 주텍스트를 제외한 나머지 요소들은 부텍스트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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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번역 방식이나 편집 방식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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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Der Wirt, jetzt ohne die Wirteschürze, tritt an die Zeugenschranke.(Frisch 24. 밑줄은 필자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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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치마를 걸치지 않은 주인이 증언대에 나온다.(강두식 1980, 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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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이 증언대에 나선다. 이젠 앞치마를 두르지 않고 있다.(손재준 1984, 269, 밑줄은 필자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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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트라이트가 비치면, 무대 전면이 증언대가 된다. 주점 주인이 앞치마를 벗으며 증언대로 나온다.(김창활 1996,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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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집 주인이 앞치마를 벗으며 증언대로 나온다.(김정용 20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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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Der Geselle, jetzt in einer Motorradfahrerjacke, tritt an die Zeugenschranke.(Frisch 36. 밑줄은 필자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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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죽 점퍼를 입은 견습생이 증언대로 나온다.(강두식 1980, 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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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구사가 증언대로 나선다.(손재준 1984,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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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대 전면의 증언대로 목수가 나온다.(김창활 1996,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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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토바이용 재킷을 입은 수습생이 증언대에 나온다.(김정용 2012,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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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Der Soldat, jetzt in Zivil, tritt an die Zeugenschranke.(Frsich 58. 밑줄은 필자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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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인이 사복을 입고 증언대에 나온다.(강두식 1980, 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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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복을 입은 군인이 증언대에 나선다.(손재준 1984, 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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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인 파이더가 사복을 입고 증언대로 나온다.(김창활 1996,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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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복을 입은 군인이 증언대에 나선다.(김정용 2012,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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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9번에 걸친 증언대 장면 중 위 세 장면의 부텍스트에서 ‘jetzt’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 중 이 단어가 문자 그대로 번역된 경우는 ①-ⓑ문장, 즉 손재준의 번역이 유일하다. 사실 ‘지금, 현재, 이제’와 같은 뜻을 지닌 시간 부사 ‘jetzt’가 사용 빈도가 상당히 높은 평이한 단어라는 점을 고려하면, 거의 모든 번역자가 이 단어의 번역을 누락하거나, 또는 이 단어의 의미를 에둘러 표현하는(①-ⓒ; ①-ⓓ, 이전에는 입고 있었는데 더 이상 입고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것은 상당히 주목할 만한 현상이 된다. 게다가 ① 문장에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jetzt’의 의미가 반영되고 있는 반면, ②, ③ 문장에서는 이 단어의 뜻이 아예 탈락되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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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텍스트들이 이렇게 번역된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가설을 제시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번역자들은 ‘이제’를 삽입하는 것이 불필요하다고(배우의 현존이 눈앞에 있다고 가정할 때, 그들이 이미 앞치마를 벗었고, 가죽 재킷을 입고 있고, 사복을 입고 있다는 측면에서)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무엇보다 이 문장들에 ‘이제, 지금’과 같은 단어를 삽입할 경우 한국어에서는 상당히 어색하게 들릴 수 있는데(지금 사복을 입은, 이제 사복을 입은), 이는 번역자에게 이 단어의 생략이 더 나은 선택이라는 판단을 유도하는 근거로 작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둘째, 이 텍스트들이 발화되지 않는 ‘부텍스트’라는 점도 이러한 번역 양상에 기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어떤 번역은 최소한의 정보만을 남긴 채 축약적으로 번역되었거나(‘가구사가 증언대로 나온다’), 또 어떤 번역은 원문에는 있지도 않은 말을 첨언하여(‘스포트라이트가 비치면, 무대 전면이 증언대가 된다.’, ‘무대 전면의’) 설명적으로 번역되어 있다. 문체나 상징, 문학성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문학 번역의 태도와는 상충하는 이러한 번역 방식은 ‘정보’의 전달을 최우선 순위에 두는 번역 태도에 가깝다. 아마도 문학성에 중점을 두는 주텍스트와는 달리 부텍스트는 주로 배우의 몸짓, 표정, 무대 지시 등 설명적이고 실용적인 기능을 지닌 텍스트로 인식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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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작가가 왜 총 9개의 증언대 장면 중 삼 분의 일에 해당하는 이 세 개의 장면에서 대사를 행하는 등장인물이 옷을 기존과 다르게 입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왜 굳이 ‘jetzt’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는지 반문해 보자. 그러면 등장인물이 여기서 ‘지금’ 그 전과는 다른 옷을 입고 있는 것이 생각보다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띨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실제 이 작품에서는 ‘jetzt’가 총 94번 나온다. 주어캄프에서 출판된 독일어 원서 기준 거의 한 페이지에 한 번씩 ‘jetzt’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이다. ‘지금’이라는 부사가 시간적 제한을 둠으로써 임의적인 가변성을 강조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Jetzt’는 단순히 특정한 ‘한 때’를 의미한다기보다는 불가변한 진실이 아닌 그때그때 달라지는 유동적인 상황이나 인간의 불완전한 정체성을 구현하는 데 일조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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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고유명사가 아닌 ‘(주점) 주인’이나 ‘견습생’, ‘군인’ 등 직업으로 명명된 등장인물들은 ‘환복’을 통해 유니폼을 벗는 순간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이 인물들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캐릭터를 지닌 인물이 아닌 브레히트적 의미에서 게스투스적 인물에 가깝다. 따라서 ‘환복’ 행위 또한 캐릭터의 불연속성 또는 파기와 연관성을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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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러한 유동적 정체성은 연극 형식적 차원에서는 등장인물에게 특별한 캐릭터를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이 작품을 실제 유럽에 존재하는 소국 안도라가 아닌 하나의 ‘모델’로 기능할 수 있도록 공조한다. 그러면서도 작품 주제적 차원에서는 프리쉬의 모든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뚜렷한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채 공명하고 휩쓸리는 현대인의 자아상을 구현할 수도 있다. 실제 작품에는 ‘Jemand’, 즉 ‘어떤 사람’ 손재준을 제외한 모든 번역자가 이 인물을 ‘낯선 사람/낯선 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 또한 프리쉬의 연극관을 간과한 번역 결과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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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등장하는데, 이런 맥락에서 이름이 부여된 안드리와 바블린을 제외하면 작품의 모든 인물이 ‘Jemand’로 치환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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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무대 위의 시간적인 측면에서도 ‘jetzt’의 의미는 상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장면 Bild’과 ‘무대 전면 Vordergrund’은 연극적으로는 다른 공간이며, 이들 사이에는 시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12개의 장면은 사람들이 안드리에 대해 갖는 ‘상’을 제시하고, 그로 인해 길들여진 안드리가 스스로의 ‘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형상화한다. 즉 12개의 장면은 일련의 상을 구축하여 안드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선형적인 시간 흐름을 따른다. 반면 무대 전면에서의 시간은 이 모든 사건이 종결된 이후의 진술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일련의 12개의 장면의 관점에서 무대 전면은 미래가 됨으로써, 사건의 진행을 예고한다(이는 관객의 감정이입을 방해하고, 비밀을 미리 누설하여 극적 긴장감을 저해하는 행위가 된다). 반면 9개의 무대 전면 장면의 관점에서는 12개의 장면은 이미 일어난 사건으로 과거가 되며, 그 과거에 대한 성찰, 반성 또는 변명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부텍스트에서의 ‘jetzt’가 ‘아까와 달리 배우가 다른 옷을 입고 나와서 과거에 대한 소회를 지금 발화’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의 역할을 하고 있기에, 이 단어는 어느 정도의 어색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적극적으로 번역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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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시 개별 번역 비평을 통해 첫 번째 관점, 즉 김정용 논문의 논의를 계승, 점검 및 확장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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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5월 6일 (화) 07:03 판

막스 프리쉬(Max Frisch, 1911-1991)의 희곡

안도라 (Andorra)
작가막스 프리쉬(Max Frisch)
초판 발행1961
장르희곡


작품소개

1961년 출간 및 초연된(취리히 샤우슈필하우스) 막스 프리쉬의 대표적인 희곡으로 원제는 <안도라. 12개의 장면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안드리라는 유대인 입양아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극이 전개됨에 따라 이 아이가 사실은 양아버지로 알고 있던 교사의 혼외자임이 밝혀진다. 교사는 자신의 과오를 모두가 꺼리는 유대인 아이를 입양해서 키운다는 그럴싸한 명분과 맞바꿨는데, 이 작은 거짓말은 극에서 발생하는 모든 비극의 원천이 된다. 유대인 안드리는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유대인은 도제로 삼지 않는다는 거절 때문에 꿈을 포기해야 하며, 무엇보다 사랑해선 안 되는 이복 여동생을 사랑하게 된다. 또 이 거짓말은 안드리의 어머니이자 교사의 전 애인인, 저 너머 검은 마을에서 와서 살해당한 여인의 살인범으로 유대인 안드리를 의심하게 하는가 하면, 종국에는 검은 군대의 피가 섞인 안드리가 유대인이라는 핑계로, 안도라를 점령한 검은 군대에 의해 처형되는 비극적 아이러니를 초래한다. 극 초반의 안드리는 자신을 향한 편견에 대해 의문을 품고, 저항하며 이를 극복해보려 애쓰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자기에게 주어진 자신의 상(像)을 받아들이고 체념한다. 작품은 비극으로 귀결되는 거짓과 위선 그리고 편견의 가공할만한 힘을 역설하면서, 2차 세계 대전 중 자행된 대대적인 유대인 학살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라는 질문을 간접적으로 던진다. 브레히트의 영향을 받은 프리쉬는 <안도라>의 몇몇 장면(Bild) 마지막 부분에 등장인물 중 한 사람을 증언대에 세워 안드리에 대한 편견과 폭력의 책임 여부를 묻는 서사극적 기법을 도입한다. ‘그땐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 일관하는 이들은 고유한 이름이 아닌 술집 주인, 목수, 수습생, 군인, 신부, 의사 등 직업으로만 규정된 등장인물로, 말하자면 평범한 시민들이다. 결국, 안드리의 죽음은 편견에 사로잡힌 대중이 만들어 낸 합작품임을 폭로함으로써, 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시민 사회 전체의 각성을 요청한다. 국내에서는 김창활에 의해 1977년 처음 번역되었다(서문당).

초판 정보

Frisch, Max(1961): Andorra. Stück in zwölf Bildern. Frankfurt a. M.: Suhrkamp.


번역서지 목록

번호 개별작품제목 번역서명 총서명 원저자명 번역자명 발행연도 출판사 작품수록 페이지 저본 번역유형 작품 번역유형 비고
1 안도라 現大世界戱曲選集 (컬러版)世界의 文學大全集 33 프리시 강두식 1970 同和出版公社 419-500 편역 완역 70년 초판 인쇄, 1975년 중판 발행
2 안도라 現大世界戱曲選集 (컬러판)世界의 文學大全集 33 막스 프리쉬 강두식 1971 同和出版社 419-483 편역 완역
3 안도라 안도라 瑞文文庫 258 막스 프리시 김창활 1977 瑞文堂 13-188 완역 완역
4 안도라 외더란트 伯爵 이데아총서 8 M. 프리쉬 손재준 1984 民音社 251-373 편역 완역
5 안도라 안도라 서문문고 258 막스 프리시 김창활 1996 서문당 11-134 완역 완역 초판:1974년. 개정판: 1996년 발행이라 기재되어 있으나 확인된 초판은 1977년 발행됨
6 안도라 안도라 SNUP동서양의 고전 17 막스 프리쉬 김정용 2012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3-132 완역 완역



1. 번역 현황 및 개관

<안도라>의 초역이 실린 <現代世界戱曲選集>(1970)의 <해설: 現代戲曲의 世界>에서 막스 프리쉬는 다음과 같이 소개된다.

여기 수록된 두 사람의 극작가 막스 프리시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는 어느 모로 보나 독일계 연극을 대표할 수 있는 극작가이지만 그들의 국적은 독일이나 오스트리아가 아니라 스위스이다. 스위스계의 뛰어난 두 사람의 작가가 있다는 사실 및 그들이 오늘의 독일 연극을 대표하는 극작가라는 사실은 매우 아이러니하나 나찌스가 독일 및 오스트리아를 강점(强占)한 저 무심한 정신적 공백기를 생각해 본다면 충분히 수긍할 만한 것이다. 망명 작가가 아니면 독일어를 쓰는 사람으로서 30년대의 거의 전부와 2차 대전의 기간 동안 정신적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곳은 독일어를 사용하는 스위스 지역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극작가는 모두 전후파이다. 프리시가 44년에, 뒤렌마트가 47년에 처녀 극작을 내놓았고 그들의 극이 본지서 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은 모두 50년 이후에 속한다.(여석기 1970, 547) 

전후 황폐해진 독일어권 연극은 스위스의 두 작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와 막스 프리쉬에 의해 견인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독일 문학사에서 늘 짝을 이뤄 나란히 언급되는 이 두 작가는 한국에서 수용되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우선 위 해설이 실린 선집이 서구권의 중요한 희곡들을 선별한 작품집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전후 독일 문학, 무엇보다 희곡의 국내 수용에 있어 프리쉬와 뒤렌마트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아울러 나치와 전쟁의 피해를 비껴갈 수 있었던 ‘스위스’ 출신 독일 문학계 연극을 대표하는 ‘극작가’라는 이들의 공통분모를 강조함으로써 이들이 ‘함께’ 소개되고 있다는 점도 그렇다. <한국 연극계의 막스 프리쉬 수용>이라는 논문에서 김기선도 프리쉬와 뒤렌마트를 비교해 가면서 프리쉬 수용 양상의 청사진을 제시한다. 이 논문에서 그는 1960년대 후반부터 이 두 작가가 적극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한 데는 두 작가가 지니는 고유한 중요성과는 별개로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었음을 언급하며, 그 배후로 브레히트를 지목한다. 1970-80년대 정치적 앙가주망과 그 미학적 구현을 모색했던 한국의 연극계는 다양한 연극 언어들에 갈증을 느끼고 있었고, 이를 해갈해 줄 모범으로서 브레히트에 주목했다. 그러나 당시 금지 작가 중 한 사람이었던 브레히트를 직접 수용할 수는 없었기에 브레히트의 후예들이라 할 수 있는 프리쉬와 뒤렌마트라는 우회로를 택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 두 사람이 계속해서 비슷한 부류의 작가로 간주된 것은 아니다. 뒤렌마트가 극작가로서 꾸준히 수용되었다면, 프리쉬는 초창기에는 극작가로 주목받다가, 1980년대 후반부터는 소설가로서 더 큰 관심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 변곡점이 브레히트의 해금 시기와 겹친다는 점 또한 흥미롭다. 즉 1987년 브레히트가 해금됨으로써 브레히트를 직접적으로 학습하고 수용하는데 관심과 에너지가 쏠리게 된 것과 무관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김기선 1999, 141-143). 다시 정리해 보면 프리쉬는 뒤렌마트와 함께 황폐화된 전후 독일 연극계를 견인한 스위스 출신의 중요한 극작가로서 국내에서 알려지기 시작했고, 이들에 대한 관심이 브레히트에 대한 관심의 우회적 표현이었다는 점에서 무대 수용이 실질적인 번역 행위보다 우선한다. 특히 강두식, 지명렬, 김창활과 같은 독문학자 또는 전공자를 통해 현지와 큰 시간차를 두지 않고 적극적으로 수용된 것도 당시 국내 연극계의 갈증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총 5번의 개작을 거쳐 1961년 오늘날의 형태로 출간된 <안도라>(Frisch 1975, 2)가 국내에 수용되는 과정도 유사한 도정을 겪는다. 이 작품이 국내에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1963년 3월 <思想界>에 강두식이 <서사적 무대의 전형, 막스 프리쉬의 신작 안돌라>라는 글을 발표한 것까지 연원한다. 1965년에는 허규가 연출한 <안도라>가 국립극장 무대에서 국내 초연을 선보였으며, 초역은 그보다 5년 뒤인 1970년 상기한 <現代世界戱曲選集>의 마지막 부분에 독일희곡 대표격으로 뒤렌마트의 <물리학자들>(송동준 역)과 함께 실렸다. 이 초역의 번역자는 강두식이다. 이후 1977년에는 김창활의 번역이, 1984년에는 손재준의 번역이 나왔으며 가장 최근의 번역은 2012년 출간된 김정용의 번역이다. 현재 시중 서점에서 유통 중인 번역본은 김창활의 1996년 개정판과 김정용의 번역뿐이다.


2. 개별 번역 비평


<안도라. 12개의 상으로 구성된 작품>이라는 원제를 지닌 <안도라>는 비교적 평이한 언어와 단순한 통사구조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어 독문학을 전공한 꼼꼼한 번역자라면 큰 무리 없이 번역할 수 있을 법한 작품이다. 1990년대 후반 김기선의 조사에 따르면 국내 유수의 대학에서 독일희곡 관련 수업 교재로 사용하는 작품 중 괴테의 <파우스트>와 뒤렌마트의 <노부인의 방문>의 뒤를 이어 커리큘럼으로 가장 빈번히 거론되는 작품이 <안도라>였다고 한다. 이는 이 작품이 지닌 장점, 즉 문학성과 시의성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언어적으로도 난해하지 않은 텍스트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김기선 1999, 145-146).

실제 이 작품에 대한 상이한 번역 종 간의 정·오역을 검토하거나 문체를 비교해 보았지만, 유의미한 논의를 전개하기가 쉽지 않았다. 따라서 이번 번역 비평에서는 두 가지 관점, 즉 선행 번역 비평에서의 논의를 계승, 점검하고 극작품으로서의 <안도라>의 구조와 ‘부텍스트 Nebentext’의 번역 문제에 집중해 보기로 한다. 

우선, <안도라>의 가장 최근 번역자이기도 한 김정용은 자신의 번역본을 내놓기 약 10년 전인 2002년 <희곡 번역의 이론과 오류 분석 - 막스 프리쉬의 『안도라』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이 논문에서 그는 일반적인 문학 번역 이론과 희곡 장르 번역의 특수성에 대해 약술한 뒤 기존 <안도라> 번역에서의 문제점과 개선 가능성을 논의한다. 이 글은 연구 논문의 형태로 발간된 것이지만, 글의 후반부는 번역 비평적 양상을 띤다는 점에서 이번역 비평적 양상을 띤다는 점에서 이번 번역 비평의 레퍼런스로 기능할 수 있다. 특히, 이 논문의 저자가 이후 직접 <안도라>를 번역했다는 점에서 이 글은 번역자의 소위 ‘번역 프로젝트’나 ‘번역 지평’(베르만)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전거로 활용될 수 있다. 둘째, <안도라>에서는 다양한 연극적 장치가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프리쉬는 브레히트의 서사극을 계승하고, 학습극의 고유한 취지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하여 현대적으로 구현하는 작가이다. 프리쉬의 이러한 의도는 장면의 개성 있는 구성이나 독특한 용어의 사용, ‘부(副)텍스트 Nebentext’의 활용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는데, 문제는 부차적으로 보이는 이 요소들이 ‘발화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번역 과정에서(아울러 독서 과정에서도) 종종 간과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결코 부차적이지 않은 부텍스트와 같은 비언어적 요소들을 담아낸 드라마 텍스트의 번역 또한 이번 번역 비평에서 주목하는 지점이 된다. 물론 이것은 상당 부분 <안도라> 텍스트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특징, 즉 이 작품에서의 부텍스트가 기존에 다뤄왔던 드라마 텍스트에서의 부텍스트보다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는 다시금 작가의 집필 의도와 관련된다 볼 수 있을 것이다)과도 무관하지 않다.

먼저 첫 번째 관점은 이 번역 비평에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김정용이 논문에서 현재도 유통 중인 김창활의 번역과 절판된 손재준의 번역만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선집에 실린 강두식의 번역은 알지 못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아울러 그는 김창활의 번역에 관해서는 김기선의 상기한 논문을 인용하며 문제점이 많다고 진단한 뒤, 주로 손재준의 번역을 중심으로 ‘언어적 오류’, ‘화용적 오류’, ‘문화적 오류’, ‘형식적 오류’를 번역 사례 중심으로 분석, 고찰, 진단한다. 따라서 다음의 번역 종별 개별 번역 비평에서는 번역 오류나 개선 가능성에 대한 그의 주장들을 대부분 수용하면서도, 김정용 자신의 번역을 포함, 그가 의도적 또는 비의도적으로 누락한 번역도 점검해보도록 한다. 이와 관련하여 본고에서 가장 주목하는 지점은 6번째 장면에서 ‘베드로의 부인(否認)’과의 ‘상호텍스트성’을 번역에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에 대한 김정용의 통찰이다. 해당 부분은 개별 번역 비평에서 계속해서 논의하기로 한다. 두 번째 관점은 드라마 형식 용어의 번역 또는 편집 문제와 ‘부텍스트’의 번역 문제로, 이 논의는 개별 번역 비평에 일일이 언급하기 애매한 부분이 있어 여기서 다루고자 한다. 작품 구조와 밀접한 연관을 맺는 드라마 형식 용어의 번역 또는 그 편집 문제를 먼저 살펴보자. 이와 관련해서는 ‘Bild’의 번역어에 대해 재고할 필요가 있다. 프리쉬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막’을 대신하는 ‘Bild’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단어를 강두식은 ‘막’으로, 손재준은 ‘경’으로, 김창활과 김정용은 ‘장’으로 번역하고 있다. 손재준은 ‘Bild’의 의미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경’을 번역어로 선택한 듯하고, 김창활과 김정용은 ‘막’을 대체할 수 있는 이질감 없는 보편적인 번역어로서 ‘장’을 선택한 듯하다. 다만 강두식이 번역어로 삼고 있는 ‘막’은 필연적인 무대의 전환 과정을 관객의 시야로부터 차단하려는 전통적인 환상극의 의도를 연상시키는 번역어라는 점에서 비-환상극을 지향하는 프리쉬의 작품에서는 지양되어야 할 번역어가 아닐까 한다. ‘경’이나 ‘장’의 번역은 일단은 무리 없는 무난한 번역으로 생각되는데, 이 번역어들을 이 작품의 본문에 등장하는, 작품의 핵심 주제어라고도 할 수 있는 ‘Bildnis’라는 단어와 연결시켜 보려고 할 경우에는 문제가 생긴다. <안도라>의 7번째 ‘장면 Bild’과 8번째 장면 사이에 삽입된 ‘증언대 Zeugenschranke’ 장면에서 신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Du sollst dir kein Bildnis machen von Gott, […]”(Frisch 1975, 67). ‘Bildnis’의 번역에 관해서는 다시 개별 비평에서 논의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이 단어와 ‘Bild’의 관련성에만 집중해 보자. 즉 이 작품에서 개별 장면이 ‘타자 der Andere’ ‘안드리 Andri’의 그릇된 정체성과 자아상을 구축해 가는 일련의 잘못된 상 Bild, 즉 편견의 축적 과정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장’이나 ‘경’과 같은 연극의 장면 단위를 칭하는 용어가 아닌 ‘Bildnis’의 번역어를 연상시킬 수 있는 ‘Bild’에 대한 제3의 대안을 모색해 볼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비슷한 맥락에서 이 작품의 고유한 구조적 특징이면서 서사극적 장치로 기능하는 ‘Vordergrund’의 번역과 배치도 문제적이다. 작품은 총 12개의 ‘장면 Bild’과 2, 3, 4, 7, 8, 9, 10, 11, 12 장면 앞에 위치한 9개의 ‘Vordergrund’로 구성되어 있다. 연극 무대에서의 ‘Vordergrund’란 관객에게 가까운 무대 전면을 의미한다. 강두식, 김창활, 김정용은 이 장면을 ‘무대 전면’이라고 번역한 반면, 손재준은 ‘전경’이라는 번역어를 채택하고 있다. 아마도 그는 Bild를 ‘경’이라고 번역하면서, 이 장면들도 같은 층위의 ‘단위’로 인식시키려고 의도한 것 같다. 이것이 다른 번역자들은 시도하지 않은 세심한 배려임은 분명하다. 다만 ‘전경’이라는 단어는 한자를 병기하지 않는 이상 연극 무대와 관련해서는 무대미술이나 무대의 시각적 효과(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에서의 스펙타클)를 칭하는 용어와 혼동될 수 있다는 점은 문제적이다. 물론 이는 애초에 손재준이 ‘Bild’의 번역어를 ‘경’(아마도 ‘景’)으로 채택했기에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반면 ‘무대 전면’으로 번역한 나머지 번역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또 다른 문제가 확인된다. 원작의 텍스트 배치와 달리 모든 번역서에서 독립된 이 짧은 장면들을 앞 장면의 마지막 부분에 붙여 편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편집 방식으로 인해 원문과의 대조 없이 번역서만 읽을 경우, ‘무대 전면’은 마치 지문처럼, 그리고 그 이후의 증언대 진술은 마치 한 장면을 마무리하는 대사처럼 읽힐 여지가 다분해진다. 더 큰 문제는 이로 인해 더 이상 이 장면의 독립성을 담보하기가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관객을 향해 자신은 어쩔 수 없었고, 이렇게 될지 몰랐다 등 한결같이 변명을 늘어놓는 등장인물들의 진술은 장면과 장면의 유기적 연관성을 의도적으로 파기해 버림으로써 관객을 환상에 붙들어두지 않는 서사극적 연극 장치인 동시에, 결코 전쟁의 결과와 무관할 수 없는 관객 자신의 거울 역할을 하기도 한다. 따라서 길지 않은 이 장면의 중요성은 텍스트 편집, 또는 텍스트 도상적 차원에서도 보장될 필요가 있다. 이번에는 드라마 텍스트를 구성하는 주요한 구성 요건으로서의 부텍스트 텍스트 층위에서 드라마를 구성하는 세 요소는 해설, 지문, 대사이다. 여기서 플롯을 견인하고, 배우에 의해서 ‘발화’되는 대사는 ‘주텍스트 Haupttext’, 주텍스트를 제외한 나머지 요소들은 부텍스트라고 한다. 의 번역 방식이나 편집 방식을 살펴보자.

① Der Wirt, jetzt ohne die Wirteschürze, tritt an die Zeugenschranke.(Frisch 24. 밑줄은 필자 표기) ⓐ 앞치마를 걸치지 않은 주인이 증언대에 나온다.(강두식 1980, 428) ⓑ 주인이 증언대에 나선다. 이젠 앞치마를 두르지 않고 있다.(손재준 1984, 269, 밑줄은 필자 표기) ⓒ 스포트라이트가 비치면, 무대 전면이 증언대가 된다. 주점 주인이 앞치마를 벗으며 증언대로 나온다.(김창활 1996, 38) ⓓ 술집 주인이 앞치마를 벗으며 증언대로 나온다.(김정용 2012, 20)

② Der Geselle, jetzt in einer Motorradfahrerjacke, tritt an die Zeugenschranke.(Frisch 36. 밑줄은 필자 표기) ⓐ 가죽 점퍼를 입은 견습생이 증언대로 나온다.(강두식 1980, 434) ⓑ 가구사가 증언대로 나선다.(손재준 1984, 274) ⓒ 무대 전면의 증언대로 목수가 나온다.(김창활 1996, 46) ⓓ 오토바이용 재킷을 입은 수습생이 증언대에 나온다.(김정용 2012, 33)

③ Der Soldat, jetzt in Zivil, tritt an die Zeugenschranke.(Frsich 58. 밑줄은 필자 표기) ⓐ 군인이 사복을 입고 증언대에 나온다.(강두식 1980, 446) ⓑ 평복을 입은 군인이 증언대에 나선다.(손재준 1984, 303) ⓒ 군인 파이더가 사복을 입고 증언대로 나온다.(김창활 1996, 87) ⓓ 평복을 입은 군인이 증언대에 나선다.(김정용 2012, 57)

총 9번에 걸친 증언대 장면 중 위 세 장면의 부텍스트에서 ‘jetzt’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 중 이 단어가 문자 그대로 번역된 경우는 ①-ⓑ문장, 즉 손재준의 번역이 유일하다. 사실 ‘지금, 현재, 이제’와 같은 뜻을 지닌 시간 부사 ‘jetzt’가 사용 빈도가 상당히 높은 평이한 단어라는 점을 고려하면, 거의 모든 번역자가 이 단어의 번역을 누락하거나, 또는 이 단어의 의미를 에둘러 표현하는(①-ⓒ; ①-ⓓ, 이전에는 입고 있었는데 더 이상 입고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것은 상당히 주목할 만한 현상이 된다. 게다가 ① 문장에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jetzt’의 의미가 반영되고 있는 반면, ②, ③ 문장에서는 이 단어의 뜻이 아예 탈락되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이 부텍스트들이 이렇게 번역된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가설을 제시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번역자들은 ‘이제’를 삽입하는 것이 불필요하다고(배우의 현존이 눈앞에 있다고 가정할 때, 그들이 이미 앞치마를 벗었고, 가죽 재킷을 입고 있고, 사복을 입고 있다는 측면에서)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무엇보다 이 문장들에 ‘이제, 지금’과 같은 단어를 삽입할 경우 한국어에서는 상당히 어색하게 들릴 수 있는데(지금 사복을 입은, 이제 사복을 입은), 이는 번역자에게 이 단어의 생략이 더 나은 선택이라는 판단을 유도하는 근거로 작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둘째, 이 텍스트들이 발화되지 않는 ‘부텍스트’라는 점도 이러한 번역 양상에 기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어떤 번역은 최소한의 정보만을 남긴 채 축약적으로 번역되었거나(‘가구사가 증언대로 나온다’), 또 어떤 번역은 원문에는 있지도 않은 말을 첨언하여(‘스포트라이트가 비치면, 무대 전면이 증언대가 된다.’, ‘무대 전면의’) 설명적으로 번역되어 있다. 문체나 상징, 문학성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문학 번역의 태도와는 상충하는 이러한 번역 방식은 ‘정보’의 전달을 최우선 순위에 두는 번역 태도에 가깝다. 아마도 문학성에 중점을 두는 주텍스트와는 달리 부텍스트는 주로 배우의 몸짓, 표정, 무대 지시 등 설명적이고 실용적인 기능을 지닌 텍스트로 인식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작가가 왜 총 9개의 증언대 장면 중 삼 분의 일에 해당하는 이 세 개의 장면에서 대사를 행하는 등장인물이 옷을 기존과 다르게 입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왜 굳이 ‘jetzt’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는지 반문해 보자. 그러면 등장인물이 여기서 ‘지금’ 그 전과는 다른 옷을 입고 있는 것이 생각보다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띨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실제 이 작품에서는 ‘jetzt’가 총 94번 나온다. 주어캄프에서 출판된 독일어 원서 기준 거의 한 페이지에 한 번씩 ‘jetzt’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이다. ‘지금’이라는 부사가 시간적 제한을 둠으로써 임의적인 가변성을 강조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Jetzt’는 단순히 특정한 ‘한 때’를 의미한다기보다는 불가변한 진실이 아닌 그때그때 달라지는 유동적인 상황이나 인간의 불완전한 정체성을 구현하는 데 일조한다고 볼 수 있다.

우선 고유명사가 아닌 ‘(주점) 주인’이나 ‘견습생’, ‘군인’ 등 직업으로 명명된 등장인물들은 ‘환복’을 통해 유니폼을 벗는 순간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이 인물들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캐릭터를 지닌 인물이 아닌 브레히트적 의미에서 게스투스적 인물에 가깝다. 따라서 ‘환복’ 행위 또한 캐릭터의 불연속성 또는 파기와 연관성을 맺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유동적 정체성은 연극 형식적 차원에서는 등장인물에게 특별한 캐릭터를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이 작품을 실제 유럽에 존재하는 소국 안도라가 아닌 하나의 ‘모델’로 기능할 수 있도록 공조한다. 그러면서도 작품 주제적 차원에서는 프리쉬의 모든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뚜렷한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채 공명하고 휩쓸리는 현대인의 자아상을 구현할 수도 있다. 실제 작품에는 ‘Jemand’, 즉 ‘어떤 사람’ 손재준을 제외한 모든 번역자가 이 인물을 ‘낯선 사람/낯선 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 또한 프리쉬의 연극관을 간과한 번역 결과라 할 수 있다.

도 등장하는데, 이런 맥락에서 이름이 부여된 안드리와 바블린을 제외하면 작품의 모든 인물이 ‘Jemand’로 치환될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무대 위의 시간적인 측면에서도 ‘jetzt’의 의미는 상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장면 Bild’과 ‘무대 전면 Vordergrund’은 연극적으로는 다른 공간이며, 이들 사이에는 시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12개의 장면은 사람들이 안드리에 대해 갖는 ‘상’을 제시하고, 그로 인해 길들여진 안드리가 스스로의 ‘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형상화한다. 즉 12개의 장면은 일련의 상을 구축하여 안드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선형적인 시간 흐름을 따른다. 반면 무대 전면에서의 시간은 이 모든 사건이 종결된 이후의 진술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일련의 12개의 장면의 관점에서 무대 전면은 미래가 됨으로써, 사건의 진행을 예고한다(이는 관객의 감정이입을 방해하고, 비밀을 미리 누설하여 극적 긴장감을 저해하는 행위가 된다). 반면 9개의 무대 전면 장면의 관점에서는 12개의 장면은 이미 일어난 사건으로 과거가 되며, 그 과거에 대한 성찰, 반성 또는 변명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부텍스트에서의 ‘jetzt’가 ‘아까와 달리 배우가 다른 옷을 입고 나와서 과거에 대한 소회를 지금 발화’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의 역할을 하고 있기에, 이 단어는 어느 정도의 어색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적극적으로 번역될 필요가 있다. 이제 다시 개별 번역 비평을 통해 첫 번째 관점, 즉 김정용 논문의 논의를 계승, 점검 및 확장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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