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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는 <특성 없는 남자>를 다시 읽고 싶을 때면 그저 손이 가는 대로 아무 페이지나 열어서 읽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각 장이 그 자체로 놀라움이며 발견”이기 때문이다.<ref>밀란 쿤데라(2012): 커튼. 소설을 둘러싼 일곱 가지 이야기. 민음사, 101.</ref> 한국어 번역자들도 입을 모아 <특성 없는 남자>가 ‘사유 소설’이며 줄거리보다 한 장 한 장에 담긴 사유가 돋보인다고 말한다. 고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책을 독파하려는 독자는 결국 완독에 실패할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선택적인 독서”를 추천한다(고원, 514). 실제로 이 소설책을 통독한 사람이라면 끝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에 놀라는 한편, 모든 것이 이해되기를 요구하는 것에 현기증을 느낄 것이다. 무질은 이야기가 하나의 “줄기 Faden”(650)를 따라가는 전통적인 서사를 버리고, 무한히 연결되면서 생겨나는 “면 Fläche”들, 들뢰즈식으로 말하면 리좀처럼 퍼져나가는 서사를 실험한다. 하나의 어휘도 접합과 접목, 접속하기에 따라서 의미의 가능성에 열려있다.
 
밀란 쿤데라는 <특성 없는 남자>를 다시 읽고 싶을 때면 그저 손이 가는 대로 아무 페이지나 열어서 읽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각 장이 그 자체로 놀라움이며 발견”이기 때문이다.<ref>밀란 쿤데라(2012): 커튼. 소설을 둘러싼 일곱 가지 이야기. 민음사, 101.</ref> 한국어 번역자들도 입을 모아 <특성 없는 남자>가 ‘사유 소설’이며 줄거리보다 한 장 한 장에 담긴 사유가 돋보인다고 말한다. 고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책을 독파하려는 독자는 결국 완독에 실패할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선택적인 독서”를 추천한다(고원, 514). 실제로 이 소설책을 통독한 사람이라면 끝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에 놀라는 한편, 모든 것이 이해되기를 요구하는 것에 현기증을 느낄 것이다. 무질은 이야기가 하나의 “줄기 Faden”(650)를 따라가는 전통적인 서사를 버리고, 무한히 연결되면서 생겨나는 “면 Fläche”들, 들뢰즈식으로 말하면 리좀처럼 퍼져나가는 서사를 실험한다. 하나의 어휘도 접합과 접목, 접속하기에 따라서 의미의 가능성에 열려있다.
  
  [...] so wie das eine Wort Hart, je nachdem, ob die Härte mit Liebe, Roheit, Eifer oder Strenge zusammenhängt, vier ganz verschiedene Wesenheiten bezeich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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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o wie <u>das eine Wort Hart</u>, je nachdem, ob die Härte mit Liebe, Roheit, Eifer oder Strenge zusammenhängt, vier ganz verschiedene Wesenheiten bezeichne, [...](250 f.)<ref>독일어 원문은 다음 판본을 이용한다. Musil, Robert(1996): Der Mann ohne Eigenschaften. Adolf Frisé (Ed.). Reinbek bei Hamburg: Rowohlt. 원문 인용 시 본문에 쪽수를 표기한다.</ref> (이하 모든 밑줄 강조는 필자)
[...](250 f.)<ref>독일어 원문은 다음 판본을 이용한다. Musil, Robert(1996): Der Mann ohne Eigenschaften. Adolf Frisé (Ed.). Reinbek bei Hamburg: Rowohlt. 원문 인용 시 본문에 쪽수를 표기한다.</ref> (이하 모든 밑줄 강조는 필자)
 
  
 
여기서 서술자는 어휘 “Hart”의 사전적인 뜻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강함”이 “사랑, 조야함, 열성, 엄격함” 중 무엇과 연결되느냐에 따라서 네 개의 완전히 다른 본질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번역자들도 hart에 상응하는 적절한 역어의 선택과 결정에 있어서, “견고함”(고원, 378), “지독한”(안병률 2권, 124), “단단하다”(신지영 2권, 119), “지독하다”(박종대 1권, 388) 등으로 차이를 보인다. 이 어휘들은 모두 사랑, 조야함, 열성, 엄격과 결합될 수 있고 그때마다 말의 몸을 바꾼다. 요컨대 어떤 것도 오역이 아니면서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다르다. 때로는 어휘를 도착어로 어떻게 변환하는가에 따라서 4종의 다른 문장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 서술자는 어휘 “Hart”의 사전적인 뜻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강함”이 “사랑, 조야함, 열성, 엄격함” 중 무엇과 연결되느냐에 따라서 네 개의 완전히 다른 본질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번역자들도 hart에 상응하는 적절한 역어의 선택과 결정에 있어서, “견고함”(고원, 378), “지독한”(안병률 2권, 124), “단단하다”(신지영 2권, 119), “지독하다”(박종대 1권, 388) 등으로 차이를 보인다. 이 어휘들은 모두 사랑, 조야함, 열성, 엄격과 결합될 수 있고 그때마다 말의 몸을 바꾼다. 요컨대 어떤 것도 오역이 아니면서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다르다. 때로는 어휘를 도착어로 어떻게 변환하는가에 따라서 4종의 다른 문장이 되기도 한다.  
  
일이 우리를 수중에 넣었다. 우리는 이 안에서 밤낮으로 움직이고 이 안에서 다른 일도 다 한다.(신지영 1권,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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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일이 우리를 수중에 넣었다</u>. 우리는 이 안에서 밤낮으로 움직이고 이 안에서 다른 일도 다 한다.(신지영 1권, 57)
우리는 속도에 얽매여 산다. 밤낮으로 빠르게 달리고, 다른 모든 일도 빠르게 처리한다.(박종대 1권, 46)
 
일이 우리를 안내하고 있는 것이다. 낮이고 밤이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 여행하며 그 안에서 다른 모든 것을 또 한다.(고원, 40)
 
우리는 일상의 손에 달려있다. 우리는 밤낮없이 일상으로 달려가며, 그 어떤 것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안병률 1권, 53)
 
  
밑줄 친 문장들은 “Die Sache hat uns in der Hand. Man fährt Tag und Nacht in ihr und tut auch noch alles andre darin”(32)를 번역한 것이다. 신지영의 번역은 die Sache를 “일”로 번역했고, 현대의 사람들에게 ‘일’이 생활의 기준이 되었다는 문장이 이어진다. 박종대의 번역에서는 같은 어휘가 “속도”로 옮겨졌고, 현대의 생활이 ‘빠르게’ 돌아간다는 문장이 뒤따른다. “일”, “속도”, 게다가 안병률 번역의 “일상”이라는 어휘는 거의 공통점이 없다. 원문에서도 die Sache는 이 맥락에서 저 맥락으로 바꿔가면서 사전적인 뜻으로 환원되지 않은 채, 상황이나 사실 혹은 사물로 유동하는 의미 가능성에 열려있다. 원작이 의미를 고정하지 않고 가능성의 영역을 탐색하기 때문에, 역자는 작가의 의도를 캐물어야 하고 행간을 읽는 해석 작업을 어렵게 해야 한다. 또 그렇게 하더라도 의미의 복수(複數)적인 가능성을 단수의 번역어로 재단해야 하기에 네 편의 번역서에서 그저 손이 가는 대로 한 장을 열어서 정독하다 보면 해당 번역자의 개성과 번역의 특징이 얼추 드러난다. 여기서는 번역자의 번역 의도가 실제 번역에 반영되는 것을 중심으로 개별 번역을 훑어보려고 한다. 4종의 번역을 비교하는 구체적인 사례는 주로 소설 전체의 축소판과도 같은 1장, 그 유명한 “카카니엔”이 나오는 8장, 울리히가 경찰서에 임의동행하는 40장, 에세이즘에 대한 사유가 나오는 62장 정도로 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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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우리는 속도에 얽매여 산다</u>. 밤낮으로 빠르게 달리고, 다른 모든 일도 빠르게 처리한다.(박종대 1권,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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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일이 우리를 안내하고 있는 것이다</u>. 낮이고 밤이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 여행하며 그 안에서 다른 모든 것을 또 한다.(고원,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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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우리는 일상의 손에 달려있다</u>. 우리는 밤낮없이 일상으로 달려가며, 그 어떤 것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안병률 1권,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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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친 문장들은 “<u>Die Sache hat uns in der Hand</u>. Man fährt Tag und Nacht in ihr und tut auch noch alles andre darin”(32)를 번역한 것이다. 신지영의 번역은 die Sache를 “일”로 번역했고, 현대의 사람들에게 ‘일’이 생활의 기준이 되었다는 문장이 이어진다. 박종대의 번역에서는 같은 어휘가 “속도”로 옮겨졌고, 현대의 생활이 ‘빠르게’ 돌아간다는 문장이 뒤따른다. “일”, “속도”, 게다가 안병률 번역의 “일상”이라는 어휘는 거의 공통점이 없다. 원문에서도 die Sache는 이 맥락에서 저 맥락으로 바꿔가면서 사전적인 뜻으로 환원되지 않은 채, 상황이나 사실 혹은 사물로 유동하는 의미 가능성에 열려있다. 원작이 의미를 고정하지 않고 가능성의 영역을 탐색하기 때문에, 역자는 작가의 의도를 캐물어야 하고 행간을 읽는 해석 작업을 어렵게 해야 한다. 또 그렇게 하더라도 의미의 복수(複數)적인 가능성을 단수의 번역어로 재단해야 하기에 네 편의 번역서에서 그저 손이 가는 대로 한 장을 열어서 정독하다 보면 해당 번역자의 개성과 번역의 특징이 얼추 드러난다. 여기서는 번역자의 번역 의도가 실제 번역에 반영되는 것을 중심으로 개별 번역을 훑어보려고 한다. 4종의 번역을 비교하는 구체적인 사례는 주로 소설 전체의 축소판과도 같은 1장, 그 유명한 “카카니엔”이 나오는 8장, 울리히가 경찰서에 임의동행하는 40장, 에세이즘에 대한 사유가 나오는 62장 정도로 한정한다.

2025년 5월 7일 (수) 13:27 판

틀:AU000069의 소설

특성 없는 남자 (Der Mann ohne Eigenschaften)
작가로베르트 무질(Robert Musil)
초판 발행1957
장르소설


작품소개

로베르트 무질의 장편소설이며 1930년에 1권이 출간되었고 1932년에 2권이 출간되었다. 1권은 1부 1-19장과 2부 20-123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2권은 3부로 1-38장이다. 각 부와 매 장마다 소제목이 있어서 일종의 안내자 역할을 한다. 무질은 1913년 8월부터 1914년 7월, 1차 세계대전 발발까지 일 년을 소설의 시간적 배경으로 구상했으며, 공간적 배경은 "카카니엔"으로 불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수도인 빈이다. 1942년 작가의 사망으로 소설은 미완성으로 남았고, 작가 생전에 출판된 판본에서 이야기되는 시간은 대략 1914년 초반 정도까지이다. 전체적으로 전지적 시점에서 서술되는데 철학적인 면모가 두드러지는 ‘에세이’적인 장에서는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변환되며, 많은 경우 서술자의 시점이 주인공 울리히의 시점과 같다. 소설이 상당 부분 울리히를 비롯해서 등장인물의 의식적인 생각에 집중하면서 그것을 드러내는 대화로 이루어진 사유 중심의 소설이기 때문이다.

1부에서는 주인공인 울리히의 가계와 성장 과정 및 그의 세계관이 이야기된다. 울리히는 군인, 공학자, 수학자로의 교육을 받았으나 직업을 포함하여 자신의 사회적 존재를 규정하는 좌표들을 갖지 않는 '특성 없는 남자'로 남기로 한다. 적극적으로 수동적인 그의 입장은 현실에 비판적인 '가능성 감각 Möglichkeitssinn'으로 집약된다. 자수성가한 법률가인 아버지는 합스부르크 왕가를 구심점으로 하는 사회질서에 편입하도록 채근하고 울리히는 "평행운동 Parallelaktion"에 명예사무총장으로 참여하게 된다. 2부는 평행운동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평행운동은 1918년에 있을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즉위 70주년을 거국적인 행사로 준비하는 애국 운동이다. 울리히의 사촌뻘인 디오티마의 살롱을 중심으로 회의와 회동을 반복하지만 모든 것을 포괄하는 최고의 이념을 찾지 못하고, 하나둘 모여든 엘리트들은 서로 다른 입장만을 확인한다. 라인스도르프 백작, 디오티마, 아른하임이 평행운동의 구심점을 이루는데, 특히 아른하임은 대부호이자 대저술가이며 심지어 미적 감각마저 갖춘 인물로 세계관과 가치관에서 울리히와 대척점을 이룬다. 아른하임은 '영혼과 돈이 합쳐지고 이상과 권력이 하나로 뭉치는 것'을 당연시하며 현실의 권력 관계와 기존 질서에 찬동한다. 이 외에 울리히와 교류하는 레오 피셸의 가족, 학창시절 친구인 발터와 클라리세 부부, 군인 시절 상사였던 슈툼 폰 보르트베어 장군 등이 2부에서 뻗어 나가는 이야기들에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울리히의 활동 반경 밖에 인물로는 매춘녀 살해범 모스부르거가 있다. 안과 밖, 현실과 상상, 망상과 인식의 경계가 무너진 인물로 그의 책임능력 여부에 대한 사법적 판단, 정신의학적 진단, 언론과 대중의 관심이 또 하나의 이야기를 이룬다.

3부에서 울리히는 아버지의 장례식을 계기로 유년기 이후 떨어져 살던 누이 아가테와 재회한다. 오누이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샴쌍둥이처럼 닮았다고 느끼고, 울리히는 아가테한테서 자신과 완벽히 어울리는 존재를 알아본다. 아가테는 염오하는 남편인 하가우어를 떠나서 울리히의 집으로 들어오고 둘은 도덕의 인습을 뛰어넘어 합일에 이르는 "다른 상태 Der andere Zustand"를 지향한다. (작가가 남긴 유고에 의하면 그들은 근친상간적인 뉘앙스를 띠는 '분열이 극복되고 합일의 상태 속으로 지양된 유토피아'적인 관계를 '한순간' 맺는다). 3부에서는 울리히와 아가테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는데, 울리히는 새로운 의미의 사랑을 의식하면서 그 전까지 가졌던 아이러니한 태도에서 멀어져 좀 더 진지한 태도로 옮겨간다. 평행운동은 그 사이 참여자들이 늘었는데 그만큼 더 관념들만 즐비할 뿐 어떤 결과에 다다르지 못한다. <특성 없는 남자>는 미완임에도 불구하고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함께 20세기 유럽의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발전과 진보에 대한 작가의 날카로운 문제의식, 현대사회와 현대인의 분열적 상태에 대한 예지력 있는 분석이 에세이즘적인 서술 방식과 어우러진 기념비적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에서는 부분적으로 번역되어 출판되다가 2022년에 신지영의 번역으로 처음 완역 출간되었다(나남).


초판 정보

Musil, Robert(1930): Der Mann ohne Eigenschaften. Erstes Buch. Berlin: Rowohlt Verlag.


번역서지 목록

번호 개별작품제목 번역서명 총서명 원저자명 번역자명 발행연도 출판사 작품수록 페이지 저본 번역유형 작품 번역유형 비고


번역비평

1. 번역 현황 및 개관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나란히 유럽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현대의 고전으로 평가된다. 무질은 1930년에 1부와 2부로 이루어진 1권을 출간했고, 1932년에 2권 3부를 미완결 상태로 출간했다. 무질은 이후에도 작품의 완성에 매달렸으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소설은 미완성의 상태로 남았다. 1942년 4월 망명지인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뇌출혈로 쓰러진 날 오전에도 책상에서 소설의 원고를 손보고 있었다고 한다. 무질은 엄청난 양의 유고를 남겼고, 작가의 사후 1943년에 아내인 마르타 무질이 유고를 정리하여 출간한 바 있다. 국내에서는 현재까지 작가가 생전에 발표한 1권과 2권을 기준으로 완역의 여부를 말한다.

미완성이지만 이 소설은 출판 당시에 이미 1,600페이지를 넘는 분량이었다. 독일어권에서도 이 소설을 통독한 독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분량도 방대하지만, ‘아이러니’와 ‘에세이즘’으로 집약되는 무질의 독특한 사유와 난해한 문체가 소설을 읽는 즐거움을 쉽게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더하여 특이한 조어, 낯선 비유, 복합문 등이 만드는 언어의 미로는 번역으로 살리기가 몹시 어려워서 한국어로 이 소설을 읽을 독자를 위한 번역은 오랫동안 이루어지지 못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율리시스>가 20세기가 끝나기 전에 완역된 데 비해 훨씬 늦은 2010년에 비로소 <특성 없는 남자>의 초역이 출간되었다. 고원의 <특성 없는 남자 1>로 원작 1권의 74장까지 번역한 중도역(中途譯)이다.[1] 2013년에는 안병률이 원작의 1권에서 83장까지 번역하여서 <특성 없는 남자 1>과 <특성 없는 남자 2>로 각각 출간하였다. 그 후 안병률은 원작 1권을 끝까지 번역하여 2021년에 <특성 없는 남자 3>으로 출간했으며, 이에 병행하여 세 권을 합본하여 출간하면서 전작들을 소소히 수정하였다. 2022년에는 신지영이 완역한 <특성 없는 남자 1-5>가 출간되었다. 이 번역이 완역으로서는 초역이며,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의 일환으로 출간되었다. 2023년에는 박종대가 원작을 완역하였고, <특성 없는 남자 1-3>으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5권으로 출간되었다. 2024년에는 안병률이 원작의 2권을 번역하여 <특성 없는 남자 4>로 출간했는데, 이로써 안병률의 번역 또한 완역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이들 세 번역자는 십여 년이 넘는 시간을 <특성 없는 남자>의 번역에 바쳤다고 한다. 작가 로베르트 무질은 문자 그대로 죽는 날까지 필생의 역작을 썼고, 번역자들 또한 오랜 시간 열정을 품은 용기와 성실한 노고로 필생의 번역을 세상에 나오게 한 것이다. 이들은 모두 아돌프 프리제 Adolf Frisé가 편집한 로베르트 무질 전집(Gesammelte Werke in 9 Bänden) 중 1권 <Der Mann ohne Eigenschaften>을 저본으로 했으며, 안병률과 박종대는 소피 윌킨스 Sophie Wilkins의 영어 번역본도 참조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로써 <특성 없는 남자>는 아주 오랜 시간 번역을 기다린 후에 마침내 3종의 완역본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특별한 번역사를 갖게 되었다. 이는 독일어 문학의 국내 수용의 역사에서도 큰 성과라 할 것이다. 독일어 문학을 한국어로 옮기는 번역의 토양이 무르익고 풍부해진 방증이기도 하며, 국내 독일어 문학의 수용과 연구에서 오래된 숙제가 드디어 해결된 의의도 크고, 전문가들의 담론장에서만 회자되어온 로베르트 무질의 작품세계가 한국의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지는 토대가 마련된 의미도 있다.


2. 개별 번역 비평

밀란 쿤데라는 <특성 없는 남자>를 다시 읽고 싶을 때면 그저 손이 가는 대로 아무 페이지나 열어서 읽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각 장이 그 자체로 놀라움이며 발견”이기 때문이다.[2] 한국어 번역자들도 입을 모아 <특성 없는 남자>가 ‘사유 소설’이며 줄거리보다 한 장 한 장에 담긴 사유가 돋보인다고 말한다. 고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책을 독파하려는 독자는 결국 완독에 실패할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선택적인 독서”를 추천한다(고원, 514). 실제로 이 소설책을 통독한 사람이라면 끝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에 놀라는 한편, 모든 것이 이해되기를 요구하는 것에 현기증을 느낄 것이다. 무질은 이야기가 하나의 “줄기 Faden”(650)를 따라가는 전통적인 서사를 버리고, 무한히 연결되면서 생겨나는 “면 Fläche”들, 들뢰즈식으로 말하면 리좀처럼 퍼져나가는 서사를 실험한다. 하나의 어휘도 접합과 접목, 접속하기에 따라서 의미의 가능성에 열려있다.

[...] so wie das eine Wort Hart, je nachdem, ob die Härte mit Liebe, Roheit, Eifer oder Strenge zusammenhängt, vier ganz verschiedene Wesenheiten bezeichne, [...](250 f.)[3] (이하 모든 밑줄 강조는 필자)

여기서 서술자는 어휘 “Hart”의 사전적인 뜻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강함”이 “사랑, 조야함, 열성, 엄격함” 중 무엇과 연결되느냐에 따라서 네 개의 완전히 다른 본질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번역자들도 hart에 상응하는 적절한 역어의 선택과 결정에 있어서, “견고함”(고원, 378), “지독한”(안병률 2권, 124), “단단하다”(신지영 2권, 119), “지독하다”(박종대 1권, 388) 등으로 차이를 보인다. 이 어휘들은 모두 사랑, 조야함, 열성, 엄격과 결합될 수 있고 그때마다 말의 몸을 바꾼다. 요컨대 어떤 것도 오역이 아니면서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다르다. 때로는 어휘를 도착어로 어떻게 변환하는가에 따라서 4종의 다른 문장이 되기도 한다.

일이 우리를 수중에 넣었다. 우리는 이 안에서 밤낮으로 움직이고 이 안에서 다른 일도 다 한다.(신지영 1권, 57)

우리는 속도에 얽매여 산다. 밤낮으로 빠르게 달리고, 다른 모든 일도 빠르게 처리한다.(박종대 1권, 46)

일이 우리를 안내하고 있는 것이다. 낮이고 밤이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 여행하며 그 안에서 다른 모든 것을 또 한다.(고원, 40)

우리는 일상의 손에 달려있다. 우리는 밤낮없이 일상으로 달려가며, 그 어떤 것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안병률 1권, 53)

밑줄 친 문장들은 “Die Sache hat uns in der Hand. Man fährt Tag und Nacht in ihr und tut auch noch alles andre darin”(32)를 번역한 것이다. 신지영의 번역은 die Sache를 “일”로 번역했고, 현대의 사람들에게 ‘일’이 생활의 기준이 되었다는 문장이 이어진다. 박종대의 번역에서는 같은 어휘가 “속도”로 옮겨졌고, 현대의 생활이 ‘빠르게’ 돌아간다는 문장이 뒤따른다. “일”, “속도”, 게다가 안병률 번역의 “일상”이라는 어휘는 거의 공통점이 없다. 원문에서도 die Sache는 이 맥락에서 저 맥락으로 바꿔가면서 사전적인 뜻으로 환원되지 않은 채, 상황이나 사실 혹은 사물로 유동하는 의미 가능성에 열려있다. 원작이 의미를 고정하지 않고 가능성의 영역을 탐색하기 때문에, 역자는 작가의 의도를 캐물어야 하고 행간을 읽는 해석 작업을 어렵게 해야 한다. 또 그렇게 하더라도 의미의 복수(複數)적인 가능성을 단수의 번역어로 재단해야 하기에 네 편의 번역서에서 그저 손이 가는 대로 한 장을 열어서 정독하다 보면 해당 번역자의 개성과 번역의 특징이 얼추 드러난다. 여기서는 번역자의 번역 의도가 실제 번역에 반영되는 것을 중심으로 개별 번역을 훑어보려고 한다. 4종의 번역을 비교하는 구체적인 사례는 주로 소설 전체의 축소판과도 같은 1장, 그 유명한 “카카니엔”이 나오는 8장, 울리히가 경찰서에 임의동행하는 40장, 에세이즘에 대한 사유가 나오는 62장 정도로 한정한다.

  1. 지금까지 출간된 번역서들은 모두 한 권 이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병률의 번역은 1-4권, 신지영의 번역은 1-5권, 박종대의 번역은 1-3권이다. 이렇게 권수가 다른 것은 국내 출판사의 편집과 출판에 따른 것이며, 독일어 원작의 분권 기준과 무관하다.
  2. 밀란 쿤데라(2012): 커튼. 소설을 둘러싼 일곱 가지 이야기. 민음사, 101.
  3. 독일어 원문은 다음 판본을 이용한다. Musil, Robert(1996): Der Mann ohne Eigenschaften. Adolf Frisé (Ed.). Reinbek bei Hamburg: Rowohlt. 원문 인용 시 본문에 쪽수를 표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