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도 퇴를레스의 혼란 (Die Verwirrungen des Zöglings Törleß)
로베르트 무질(Robert Musil, 1880-1942)의 소설
| 작가 | 로베르트 무질(Robert Musil) |
|---|---|
| 초판 발행 | 1906 |
| 장르 | 소설 |
작품소개
오스트리아 출신 작가 로베르트 무질의 첫 소설로 1906년에 발표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권위주의적 사회구조에 속한 한 기숙학교에서 사춘기를 보내며 엄격한 스파르타식 훈육에 고통받는 생도 4명의 심리적 혼란을 묘사한 삼인칭 소설이다. 합리성과 감수성 또는 지성주의와 신비주의적 세계체험 사이의 긴장 관계에서 겪는 자아발견 과정을 주인공 퇴를레스를 중심으로 묘사하고 있다. 퇴를레스는 동급생 바이네베르크, 라이팅과 함께 그들보다 어린 바지니의 절도 행위를 감춰주는 대신 바지니를 심리적, 성적으로 학대하고 고문한다. 퇴를레스는 바지니를 성적 노리개로 폄하하고, 노예처럼 대하면서도 점점 바이네베르크와 라이팅의 가학적 억압행위가 싫어진다. 그러나 다른 한편 바지니의 굴욕에 묘한 자극을 받고, 그의 태도에서 인간의 “영혼” 이면으로 들어가는 관건을 찾으려고 한다. 성인이 된 퇴를레스는 기숙학교 생도 시절에 자신이 행한 가학행위에 대해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으며, 그것은 마치 성장하는 나무의 나이테와 같이 말 없는, 압도적인 감정에 의한 것으로서 용서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삼인칭 서술자의 결론으로 옹호되고 있다. 이 소설은 세기말의 격동기를 맞이한 빈의 사회적, 정신적 불안을 반영하고 있으며, 20세기 ‘현대소설’의 초기 대표작으로 간주되어 디 차이트 문고 100권과 디 차이트 학생문고에 포함되었다. 국내에서는 1990년 김명수에 의해 <소년 퇴를레스의 미혹>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번역됐다(금성출판사).
초판 정보
Musil, Robert(1906): Die Verwirrungen des Zöglings Törleß. Wien: Wiener Verlag.
번역서지 목록
| 번호 | 개별작품제목 | 번역서명 | 총서명 | 원저자명 | 번역자명 | 발행연도 | 출판사 | 작품수록 페이지 | 저본 번역유형 | 작품 번역유형 | 비고 |
|---|---|---|---|---|---|---|---|---|---|---|---|
| 1 | 허수(虛數) | 中斷된 學校時節 | 敎育新書 74 | 로버트 무질 | 車鳳禧; 鄭恩順 | 1979 | 培英社 | 180-205 | 편역 | 편역 | |
| 2 | 少年 퇴를레스의 迷惑 | 안드레아스; 塔; 少年 퇴를레스의 迷惑; 세 女人 外 | (金星版)世界文學大全集 79 | 무질 | 金明秀 | 1990 | 金星出版社 | 261-435 | 편역 | 완역 | |
| 3 |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 |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 | 로베르트 무질 | 박종대 | 2001 | 울력 | 7-259 | 완역 | 완역 | ||
| 4 |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 |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 | 지만지고전천줄 85 | 로베르트 무질 | 김래현 | 2008 | 지식을만드는지식 | 15-178 | 편역 | 편역 | |
| 5 | 허수(虛數) | 사랑에 폭 빠진 15 이야기 | 로버트 무질 | 차봉희 | 2009 | 문매미 | 167-191 | 편역 | 편역 | ||
| 6 |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 |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 | 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 로베르트 무질 | 김래현 | 2011 | 지식을만드는지식 | 1-272 | 완역 | 완역 | |
| 7 |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 |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 | 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큰글씨책 | 로베르트 무질 | 김래현 | 2014 | 지식을만드는지식 | 1-272 | 완역 | 완역 | |
| 8 |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 |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 | 로베르트 무질 | 박종대 | 2018 | 울력 | 5-286 | 완역 | 완역 | ||
| 9 | 소년 퇴를레스의 혼란 | 소년 퇴를레스의 혼란 | 창비세계문학 84 | 로베르트 무질 | 정현규 | 2021 | 창비 | 9-249 | 완역 | 완역 |
번역비평
1. 번역 현황 및 개관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은 로베르트 무질의 첫 장편소설로, 1906년에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1990년 김명수가 처음으로 <少年 퇴를레스의 迷惑>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하여 금성판 세계문학전집에 수록되었으며, 당시 호프만스탈의 작품 6편과 무질의 작품 2편을 묶어 <안드레아스·塔·少年 퇴를레스의 迷惑·세 女人>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후 2001년 박종대가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이라는 제목으로 울력에서, 2011년 김래현이 같은 제목으로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 그리고 2021년 정현규가 <소년 퇴를레스의 혼란>이라는 제목으로 창비에서 각각 출판하였다.
무질의 경우, 단편 <그리지아>가 1966년 강두식에 의해 처음 번역된 이후, 김명수가 이 작품과 함께 <세 여인>을 번역하였다. 김명수의 번역은 세계문학전집에 호프만스탈의 작품들과 함께 수록되었으며, 한자를 병기·다수 사용하고 어휘와 문장을 당대의 시대적 문체로 옮긴 것이 특징이다. 역자 소개에 따르면, 김명수는 경북 안동 출신으로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독문학을 수학했으며, <진정이라는 것의 비극>이라는 제목으로 긴 작품 해설을 덧붙였다.
흥미로운 점은, 난해한 무질의 이 작품이 첫 번역 이후 약 10년 간격을 두고 세 차례나 더 번역되었다는 사실이다. 비교적 최근에 이루어진 이들 번역은 모두 저본을 명시하고 있으며, 역자의 개성이 드러나는 비교적 긴 해설을 덧붙인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전문번역가 박종대는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이라는 새로운 제목으로 이 작품만을 단행본으로 출판했으며, 이후에도 꾸준히 단독 출판을 이어갔다. 그의 제목은 이후 거의 고정적으로 사용되었다. 국내에서 드물게 무질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김래현도 2011년 같은 제목으로 번역서를 출간했다. 작품의 제목 가운데 “Zögling”은 김명수 번역에서 ‘소년’으로 옮겨졌으나, 박종대와 김래현의 번역에서는 ‘생도’로 바뀌었고, 가장 최근인 2021년 정현규의 번역에서 다시 ‘소년’으로 환원되었다. 한편 “Verwirrung”은 김명수가 ‘미혹’으로 옮긴 것을 박종대가 ‘혼란’으로 바꾼 이후, 이 표현이 계속 유지되고 있다. 정현규는 ‘불확정성의 세계와 동거하는 법’이라는 제목의 27쪽 분량 해설에서 작가의 생애, 세계관과 문학관, 주제, 그리고 다양한 언어적 특징을 세심하게 분석하고 있다.
이 소설에 대해서는 이미 10여 편의 연구논문이 발표되었다. 연구 주제는 세기말 모더니즘과의 연관성, 서구 개인의 주체성, 성장소설로서의 성격뿐 아니라 섹슈얼리티 문제, 권력과 폭력에 대한 관점, 기호학적 접근까지 폭넓다. 또한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나 슐렌도르프의 영화화 등 다른 작품과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졌다.
2. 개별 번역 비평
이 작품은 현재까지 총 네 차례 완역되었다. 공통적으로 김명수의 번역 이후 역자들은 모두 긴 후기에서 작품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밝히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김명수는 세기 전환기와 모더니즘이라는 시대적 맥락 속에서 작가의 전반적 작품 세계를 개관하며 해설을 제시했다. 박종대는 ‘퇴를레스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혼란스러웠을까?’라는 간단하면서도 핵심적인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해설을 구성했다. 김래현은 이 소설을 자전적 체험담이나 단순한 청소년 소설로 읽는 데 제동을 걸면서, 주인공을 16세 학생 퇴를레스로 설정한 것은 성인 주인공보다 복잡하지 않게 하려는 작가의 의도적 서술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정현규는 당대 프로이트의 심리 이론과의 연관성을 살피는 한편, 장르적으로는 이 작품을 고백소설이자 학교소설로 보고 베데킨트의 작품과 비교했다. 특히 그는 작품 속 건축학적 요소에 주목하며, 관련 대목을 다수 인용하고 있다.
1) 김명수 역의 <少年 퇴를레스의 迷惑>(1990)
김명수의 번역은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초역이라는 데 의의가 있으며, 그는 10여 쪽에 달하는 해설을 통해 자신의 작품 이해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특히 <少年 퇴를레스의 迷惑>의 호평과 성공 요인을 “동성애라는 모티프나 미묘한 소년 심리의 변화에 대한 적확한 묘사”(556)라고 지적한다. 당대 기준으로 볼 때, 퇴를레스와 바시니의 관계를 다룬 이러한 대목들이 이 작품의 가장 독특한 부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김명수는 이 작품이 가장 이해하기 쉽고 기승전결이 뚜렷하며, 무질을 인용하여 훌륭하고 거의 비난의 여지가 없는 구조를 가진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김명수의 번역에서 우선 시각적으로 눈에 띄는 점은, 그가 단선(―)이 이어지는 구분선을 사용하여 단락을 나누고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소설에서 이러한 구분선은 거의 쓰이지 않지만, 무질은 단락 구분과는 별도로 급격한 반전이나 장면 전환을 위해 이를 활용하며, 그 외에도 다양한 문장 부호를 독특하게 사용한다. 흥미로운 점은 박종대, 김래현, 정현규의 번역 역시 모두 김명수와 같은 로볼트 출판사의 저본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부호를 그대로 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래 예시는 작품 초반에 처음 등장하는 구분선으로, 퇴를레스가 부모와 주고받는 편지에 많은 사연을 적는 장면이다. 부모는 아들의 급격한 감정 변화를 사춘기의 당연한 현상으로 받아들이지만, 퇴를레스는 자신이 그렇지 않다고 느끼며 감정의 차이를 드러낸다. 이 구분선은 바로 이러한 대조를 시각적으로 표시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 Törleß fühlte sich nun sehr unzufrieden und tastete da und dort vergeblich nach etwas Neuem, das ihm als Stütze hätte dienen können. ------------------------------------------------------------------------- ........................................................................................................................ (12)[1] 퇴를레스는 이제 자신을 매우 불만스럽게 느끼고, 기둥이 될 만한 새로운 것을 찾아 여기저기 탐색을 했지만 헛일이었다.(김명수, 267) ...................................................................................................................
이 부분을 처리하는 방식은 역자마다 다르다. 박종대는 해당 부분의 뒷문장을 한 줄 띄어 배치하고, 김래현은 단락 전후를 한 줄씩 띄운다. 정현규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별도의 구분을 두고 있다. 원작의 구분선을 그대로 살린 경우는 김명수가 유일하다. 다만 그는 원문의 구분선을 점선으로 바꾸어 사용했다.
전반적으로 김명수의 번역은 1990년에 출간되었음에도 어휘와 문장투가 상당히 구식이며, 드물게 쓰이는 한자어를 자주 사용하고 때로는 일본풍 어감을 주기도 한다. 예컨대 ‘궁중고문관’, ‘귀공자’, ‘공자’, ‘군무’, ‘관도(官途)’, ‘사념’, ‘도정’, ‘구두점의 의상’, ‘사문위원회’ 등의 표현이 그러하다. 또한 그는 원작의 장문을 그대로 한글의 장문으로 옮기는 한편, 독자를 위한 친절한 설명은 거의 붙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미래로부터의 희미한 견인(牽引)을 어느 새 그 피 속에 느끼고 있는 수태한 육체의 확신과도 같이, 그리고 확신과 권태가 퇴를레스의 마음 속에서 서로 섞였다”(435)와 같은 문장이 그러하다. 김명수의 번역은 완역이자 초역으로서 충실하면서도 거침없는 번역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독자가 읽어 나갈 때, 위의 예와 같이 각주나 해설과 같은 독자 배려가 부족하고, 한자어 사용을 통해 독일어 문장의 구조를 그대로 밀고 나가는 방식은 시간적·언어적 거리감을 불러일으킨다. 그 결과 독자는 새로운 번역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2) 박종대 역의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2001)
전문번역가 박종대는 2001년, 작품의 언어를 현대화하여 가독성을 높인 번역을 선보였으며, 제목 역시 오늘날 널리 통용되는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으로 새롭게 옮겼다. 김명수의 번역과 비교하면, ‘공자’를 ‘왕자’로, ‘사문위원회’를 ‘진상조사위원회’로 번역하는 등 이해하기 쉽게 다듬었다. 앞서 인용한 문장 역시 “마치 수태한 여성이 자신의 피 속에서 태어날 아이의 나직한 끌림을 느끼는 것과 비슷한 감촉이었다. 퇴를레스의 마음 속에는 확신과 피로감이 섞여 있었다”(박종대, 286)와 같이, 훨씬 독자 친화적으로 옮겨졌다. 비록 이 작품이 무질의 작품 중 비교적 덜 난해하고 줄거리와 내용이 분명한 초기작이라 하더라도, 주인공의 심리적·사상적 발전에서 드러나는 섬세하고 불안정한 변화 과정을 옮기는 일은 쉽지 않다. 박종대는 이러한 난점을 비교적 무리 없이 풀어낸 첫 현대적 번역을 일찌감치 내놓았다.
박종대는 역자 후기에서 이 소설이 네 개의 사건, 즉 “부모에 대한 그리움, 영주 아들과의 교제, 매춘부 보제나와의 만남 그리고 바지니의 절도 사건”(290)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설하며 각 사건의 특징을 해설하고 있고, 또한 주요 인물인 바이네베르크와 라이팅, 그리고 바지니의 인물성격화를 다룬다.
박종대는 독자를 고려해, 때로는 앞선 내용을 설명하는 문장을 덧붙이기도 하는데, 이는 원문에는 없는 부분이다. 예를 들어 작품 말미 학교 조사위원회에서 퇴를레스가 자기변호를 하자 수학 교사가 과거 그가 자신을 찾아왔던 일을 위원회에 상기시키는 장면이 있다. 이때 퇴를레스는 “무리수”에 대해서는 자신이 확신하지 못한다고 말하는데, 박종대는 여기에 과거의 ‘허수’ 에피소드를 덧붙여 “허수나 무리수 같은 비합리적인 수에 대해선 제가 잘못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279)라고 번역했다.
3) 김래현 역의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2011)
로베르트 무질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꾸준히 관련 논문을 발표해 온 김래현은, 역자 후기에서 강조하듯 이 소설의 주인공이 16세 소년인 것은 학교 소설·청소년 소설·성장 소설을 쓰기 위함이 아니라, 작가 무질이 추구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보다 단순화해 드러내기 위한 서사 장치라고 해석한다. 그는 깊이 있는 작품 이해를 바탕으로,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면서도 주제와 흐름에 집중한 번역을 선보여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김래현은 특히 작품 말미 학교 조사위원회에서의 퇴를레스의 답변에 주목하며, 주인공의 정신적 혼란이 보다 깊은 차원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해석한다. 그는 퇴를레스가 “이성과 개념으로 파악될 수 없는 현실”(김래현, 280)에 대한 보다 진지한 성찰을 위해 학교를 떠난다고 보고, 주인공의 혼란과 지속적인 탐구 속에서 작가 무질이 추구한 “정신적 전형”(279)을 재발견한다. 즉, 학교 조사위원회에서의 답변을 작품 전체에 대한 해석의 열쇠로 삼아, 전반적인 해설을 전개하고 있다.
Ich irrte aber nicht bei Basini, ich irrte nicht, als ich mein Ohr nicht von dem leisen Rieseln in der hohen Mauer, mein Auge nicht von dem schweigenden Leben des Staubes, das eine Lampe plötzlich erhellte, abwenden konnte. Nein, ich irrte mich nicht, wenn ich von einem zweiten, geheimen, unbeachteten Leben der Dinge sprach! Ich – ich meine es nicht wörtlich – nicht diese Dinge leben, nicht Basini hatte zwei Gesichter – aber in mir war ein zweites, das dies alles nicht mit den Augen des Verstandes ansah. So wie ich fühle, daß ein Gedanke in mir Leben bekommt, so fühle ich auch, daß etwas in mir beim Anblicke der Dinge lebt, wenn die Gedanken schweigen. Es ist etwas Dunkles in mir, unter allen Gedanken, das ich mit den Gedanken nicht ausmessen kann, ein Leben, das sich nicht in Worten ausdrückt und das doch mein Leben ist ... (137. 밑줄 강조 필자) 그런데 저는 바시니의 경우 잘못 생각하진 않았어요. 제가 높은 담벼락에서 나지막하게 흐르는 물소리를 외면하지 못했고, 그리고 갑자기 등불에 비치는 먼저의 말 없는 삶을 외면하지 못했습니다만, 그건 제가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니었어요. 아닙니다. 사물에는 은밀하고 주목받지 못하는 제2의 삶이 있다고 제가 말씀드렸습니다만 그것은 그릇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 말씀은, 그러니까 사물들이 살아 있다거나 바시니가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저의 내면에 제2의 무엇이 있어서 이 모든 것을 오성의 눈으로 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생각이 저에게서 살아난다고 느끼듯이, 어떤 사물들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사고들은 침묵하는데, 저의 내면에서 뭔가가 살아 있는 것을 느낍니다. 저의 내면에는, 그리고 모든 사고들 아래에는, 제가 사고로 헤아릴 수 없는 어두운 무엇이 있습니다. 낱말들로 표현되지 않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삶인, 하나의 삶이 말입니다···.(265. 이하 모든 밑줄 강조 필자)
이 장면은 며칠간 행방불명되었던 주인공이 학교 조사위원회에 소환되어 진술하는 대목이다. 교사들은 이미 사건에 대한 판단을 내려놓은 채 유도신문을 이어가지만, 퇴를레스는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면 무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거슬러 자신의 현재 상태를 마침내 언어로 표현하게 된다. 그는 이성과 오성을 넘어서는 감각적·직관적 세계의 존재를 깨닫고, 자신 안에 또 다른 시선이 존재함을 인식하며, 그것을 언어나 사상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둠’ 같은 존재라고 설명한다. 동시에 퇴를레스는 이러한 인식과 함께 스스로 이 “죽어 있는 사고”(280)의 세계, 즉 학교를 떠나겠다는 선언을 한다. 김래현은 이 부분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대조어를 일관되게 사용해 논리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또한 제목 속 주인공의 “혼란”과 연결되는 “잘못 생각하다(irren)”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퇴를레스가 학교를 떠날 때 자신이 잘못 생각하지 않았음을 밝히고, 이를 자신의 내면에 있는 “살아 있음, 삶(Leben)”과 관련짓는다. 특히 그는 사물들이 침묵할 때 그것들을 바라보면, 자신의 내면에서 무언가 살아 있음을 느낀다고 번역하며, 이 “어두운 무엇”이 사고로 헤아릴 수 없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한다.
김명수는 이 장면에서 퇴를레스의 자기변명 중 일부를 “높은 벽 속에서 울리는 희미한 소리”(431), 혹은 “이러한 모든 것을 오성의 눈으로는 바라보지 않는 제2의 생명”(431)으로 번역했다. 박종대는 이를 “높은 담장의 나직한 술렁거림”과 “먼지들의 침묵하는 삶”(280)으로 옮기고, “이 모든 것을 오성과는 다르게 보는 제2의 눈이 있다”(280)라고 번역했으며, “etwas Dunkles”를 “희미한 어떤 것”(280)으로 처리했다. 정현규는 “소리로부터 제 귀를 돌릴 수” 없었다거나 “먼지의 말없는 삶으로부터 제 눈을 돌릴 수”(242) 없었다는 등, 김래현이 생략한 부분들을 세밀하게 살려 번역했다. 다만 “오성의 눈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바라보는 제2의 눈이 있었다”(243)라고 옮겨, “이 모든 것을 오성의 눈으로 보지 않는 것”이라는 김래현의 번역과 비교할 때 부분과 전체, 긍정과 부정의 강조에서 차이를 보인다.
4) 정현규 역의 <소년 퇴를레스의 혼란>(2021)
정현규는 이 소설을 학교 소설 혹은 청소년 소설로 보고 있으며, 이 때문에 제목에서도 다시 ‘소년’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그의 번역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시각적 특징은 페이지를 넘기는 ‘장’ 개념을 도입했다는 점이다. 비록 장 번호나 소제목을 붙이지는 않았지만, 페이지를 바꾸어 마치 새로운 장이 시작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는 원작에서 구분선과 단락 시작 전 한 줄 비우기를 병행하는 방식을 반영한 것으로, 구분선은 단락 시작 전 한 줄 띄우기로 처리하고, 한 줄을 띈 단락은 쪽 바꾸기로 구현하고 있다.
정현규는 네 역자 가운데 가장 긴 해설을 덧붙이며, 다양한 관점에서 작품을 분석한다. 특히 이 소설에서 공간 묘사에 주목하며 번역하는 것이 두드러진다. 번역가들의 차이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부분 중 하나도 바로 이러한 공간 묘사인데, 예를 들어 작품 초반 주인공이 부모를 그리워하며 편지를 쓰는 장면에서 “향수(Heimweh)”라는 감정을 느끼고, 그 내용과 의미를 주인공 스스로 깊이 들여다보는 대목이 있다.
Er hielt es für Heimweh, für Verlangen nach seinen Eltern. In Wirklichkeit war es aber etwas viel Unbestimmteres und Zusammengesetzteres. Denn der »Gegenstand dieser Sehnsucht«, das Bild seiner Eltern, war darin eigentlich gar nicht mehr enthalten. Ich meine diese gewisse plastische, nicht bloß gedächtnismäßige, sondern körperliche Erinnerung an eine geliebte Person, die zu allen Sinnen spricht und in allen Sinnen bewahrt wird, so daß man nichts tun kann, ohne schweigend und unsichtbar den anderen zur Seite zu fühlen. Diese verklang bald wie eine Resonanz, die nur noch eine Weile fortgezittert hatte.(10) 그는 그것을 향수이며 양친을 그리는 심정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이상으로 훨씬 불안정했으며, 복잡한 요소가 뒤엉킨 감정이었다. 왜냐하면 ‘이 동경의 대상’인 양친의 모습은 거기에는 이미 아무리 보아도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니까. 내가 말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품는 이른바 가소적(可塑的)인, 단순히 추억에 바탕을 둘 뿐만 아니라 육체적이라고 해도 좋을 추억이다 그러한 추억은 전체 관능에 호소하고 전체 관능속에 유지되어 있으므로 무엇을 하건 말도 하지 않고 눈에도 보이지 않는 상댁 곁에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추억은 아주 잠시 동안만 진동하는 반향처럼 머지않아 소리가 끊어지고 말았다.(김명수, 265) 퇴를레스는 이것을 향수이자 양친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훨씬 더 복합적인 것이었다. ‘그리움의 대상’인 양친의 모습은 원래의 그 그리움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사랑하는 한 사람에 대한 육체적이고 구체적인 기억이다. 이러한 기억은 모든 감각에 말을 걸고, 모든 감각 속에 간직되어 있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아도 그리고 눈으로 보지 않아도 그 타인을 바로 곁에서 느낄 수 있는 그 어떤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러한 기억은 마치 진저리를 치면서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만 이내 잦아들고 마는 메이리처럼 사라져 갔다.(박종대, 10-11) 그는 그것을 향수라고, 부모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것은 훨씬 불분명하고 복합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사실 ‘향수의 대상’, 즉 자기 부모의 모습이 들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말하자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그런 생생한 회상이 들어 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한 회상이란 모든 감각과 소통하고 모든 감각 속에 간직되어 있는 것이어서, 말이 없고 보이지 않아도 그 사람이 자기 곁에 있다고 느끼지 못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하는 그런 것이다. 그런 회상이 그저 잠시 울렸던 공명처럼 사라진 것이다.(김래현, 6-7) 그는 이것이 향수라고, 부모를 그리는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그보다 훨씬 불분명하고 복잡한 감정이었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이 동경의 대상’인 부모의 모습이 전혀 들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모든 감각에 호소하고 모든 감각에 보존되어 있어서 말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상대방을 옆에 있는 듯 느끼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일종의 공간적인 기억,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몸이 느끼는 기억이다. 이런 기억은 마치 한순간만 진동하는 메아리처럼 금방 사라져 버린다.(정현규, 12)
이 단락에 대한 비교에서도 네 번역가의 문체상의 차이가 드러난다. 작품의 주제와도 직결되는 “etwas viel Unbestimmteres und Zusammengesetzteres”에 대해 김명수는 퇴를레스의 심리상태와 연결시켜 ‘훨씬 불안정하고 복잡한 요소가 뒤엉킨 것’이라고 과감하게 의역하고 있고, 박종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훨씬 복합적인 것”이라고 이해하기는 쉬우나 역자의 해석이 들어있는 의역으로 옮기며, 김래현은 “훨씬 불분명하고 복합적인 것”으로 원문에 가장 충실하게 간명하게 옮기고 있고, 정현규는 “훨씬 불분명하고 복잡한 감정”으로 “감정”이라는 단어를 덧붙이고 있다.
이어 나오는 ”diese gewisse plastische, nicht bloß gedächtnismäßige, sondern körperliche Erinnerung an eine geliebte Person”의 번역에서도 역자별 차이가 드러난다. 김명수는 이를 비교적 자연스럽고 구어체로 옮겼으나, “plastisch”를 “가소적(可塑的)”으로 번역하여, 오늘날 특정 전문 분야 외에는 잘 쓰이지 않는 어휘 탓에 즉각적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박종대는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육체적인 기억”으로 옮겨 “plastisch”를 육체와 관련된 ‘구체적’이라는 의미로 처리했다. 김래현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그런 생생한 회상이 들어 있지 않았다는 뜻이다”라고 번역하여, 육체와 관련된 정도나 강도를 나타내는 “생생한”을 사용했다. 그는 또한 네 역자 중 유일하게, 앞 문장이 부정문임을 고려해 이어지는 부분에서 부정어 “없었음”을 반복하여 독자에게 환기시킨다. 정현규는 뒤의 관계절 내용을 앞에 부가문으로 배치해 기억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풀어내면서, “plastisch”를 “공간적인” 기억으로 번역하는 가장 창의적인 해석을 제시한다. 이후에도 그는 특히 공간과 관련된 묘사에서 세심하게 공을 들여 옮기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자기변호 직전에 퇴를레스가 자신을 “ein ganzer Mensch”(135)로 느꼈다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러한 감각과 인식 속에서 퇴를레스는 비로소 자기변호를 할 수 있었으므로, 이 표현의 의미 또한 중요하다. 김명수는 이를 “그라는 전적인 인간이 그것을 느낀 것이다”(430)로 퇴를레스와 직접적으로 연결해 번역했다. 박종대 역시 “말 그대로 온몸으로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277)로, 김래현도 “온몸으로 느꼈다”(262)로 옮겼다. 반면 정현규는 “온전한 인간으로서”(240)로 원문을 살려 번역하고, 해설에서 이를 다시 언급하며 퇴를레스가 “더 이상 육체의 불안정한 도착적 증상으로 혼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양성성’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읽”(273)고 있다. 그는 이 상태에서 학교를 떠나는 것을, 이상적 상태에 도달해 학교를 떠나는 것으로 해석한다.
소설의 중간에는 현재의 시점에서 이 학교 시절을 되돌아보는 퇴를레스가 등장한다. 그는 당시의 일에 대해 묻는 사람에게 다음처럼 대답하는 것으로 나온다.
“Ich leugne ganz gewiß nicht, daß es sich hier um eine Erniedrigung handelte. Warum auch nicht?”(113) “그것이 굴욕을 의미했음을 나는 결코 부정하지 않네, 왜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인가?”(김명수, 398) “나는 그 일이 타락이라는 점은 부인하지 않아요. 그런데 그런 일은 왜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일까요?”(박종대, 226) “난 그것이 치욕스러운 것이었음을 부인하지 않아요. 굳이 부인해야 할 일도 아니잖습니까? ”(김래현, 213) “난 그 일이 굴욕스러운 일이었다는 사실을 절대 부인하지 않아요. 왜 굴욕스러운 일이 아니었겠어요?”(정현규, 196)
3. 평가와 전망
비록 최초의 무질 번역인 <그리지아>가 이미 1966년에 출간되었으나, 이후 긴 공백이 이어졌다. 이 침묵을 깬 김명수의 1990년 무질 단편 번역은 국내 독자들에게 작가의 대표 단편들을 소개하고, 이후 번역 작업을 촉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최근에는 대표작이자 대작인 <특성 없는 남자>의 완역본과 여러 단편 번역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명성에 비하면 국내 번역 출간은 전반적으로 여전히 저조한 편이다.
무질 연구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시작되어 1970년대, 80년대, 90년대에 각각 서너 편의 논문이 발표되었고, 2000년대 이후에는 보다 많은 연구가 이어졌다. 김명수 이후 이루어진 박종대, 김래현, 정현규의 번역은 각기 다른 시각에서 작품을 이해하고 옮겼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다른 작품들의 역자 후기와 달리, 첫 번역부터 길게 쓰인 후기들에서도 각 역자의 작품 해석 방향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김명수는 자신의 무질 이해를 바탕으로 이 작품을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와 장황하게 비교하고 있으며, 정현규는 교육환경에 대한 비판이라는 측면에서 베데킨트의 <눈뜨는 봄>과의 비교를 시도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지금까지의 번역본들도 각기 뚜렷한 개성을 지니고 있으나, 앞으로 연구가 더 진전됨에 따라 새로운 문체·언어·해석을 담은 번역본들이 계속 출간될 것으로 기대된다.
4. 개별 비평된 번역 목록
김명수(1990): 少年 퇴를레스의 迷惑. 금성출판사.
박종대(2001):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 울력.
김래현(2011):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 지식을만드는지식.
정현규(2021): 소년 퇴를레스의 혼란. 창비.
- 각주
- ↑ Robert Musil(1957): Die Verwirrungen des Zöglings Törleß. In: Sämtliche Erzählungen, Hamburg: Rowohlt, 12. 이하에서는 위에서처럼 본문에 쪽수를 표기함.